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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환경외교의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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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源·環境外交-實態

생태학적 관점에서 자원·환경 문제는 인류가 환경과 관계하면서 직면하게 되는 위험이나 위협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인류가 이룩해 온 과학 기술의 진보는 소비되는 자원의 종류와 양을 크게 키워 놓았다. 그 결과 자원결핍 현상이 야기되는 한편, 공해 문제 등 인간·환경간의 긴장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원·환경 문제는 포괄적 의미의 환경 문제로 총칭될 수 있을 것이다. 천연자원의 안정적 공급문제와 환경문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정책 과제로 부각되었고, 리우 회담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가간의 관계에서 미묘한 입장 차이와 이해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은 지구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무역 규제가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환경보호 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개발 도상국들은 환경 파괴의 근본 원인이 빈곤이므로 무역 자유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우선 과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도국들은 지구환경 보존을 위해서는 무역조치의 사용보다는 환경 보존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환경 문제는 대기·수질·토질 오염 외에 이산화가스의 대기권 축적에 의한 지구 온난화 현상과 프레온 가스 사용에 의한 오존층 파괴, 광물자원 및 동식물 자원의 고갈, 전쟁 및 핵실험 등에 의한 대규모의 환경 파괴 등 실로 광범위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학계나 민간 단체에서 환경파괴 실태를 조사하는 등 비정부 차원에서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고, 정부 차원에서는 1990년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이 당면한 자원·환경 외교의 주요 현안들은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의 실천 계획(Agenda 21) 이행문제, 러시아의 핵폐기물 방류에 의한 동해의 핵 오염 문제, 중국의 대기 오염으로 인한 산성비와 중국의 하천 수질오염에 의한 서해의 오염과 그로 인한 어장 황폐화 문제 등이 있다.

자원·환경외교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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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源·環境外交-展開

자원·환경 문제가 외교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어 필요한 국내 부존자원의 결핍 현상이 야기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은 1970년대 고도 산업화 이전에는 자원·환경 외교가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부족한 식량 자원을 공급받기 위해 미국의 원조 획득에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던 정도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수출 위주의 성장 전략을 채택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과 비연료 광물 자원의 수입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1965년에 국내 에너지 소비량에서 석유가 7.6퍼센트를 차지하던 것이 1973년에는 55.0퍼센트를 차지하는 등 급신장세를 보였다. 석탄류 29.5%퍼센트를 포함하여 85퍼센트를 화석 에너지원에 의존하게 되었고, 기타 산업화에 필요한 광물의 해외 의존도가 신장됨에 따라 자원 외교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이 자원 무기화 정책을 취함에 따라 한국 정부는 매년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지역에 특별 사절단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1차 석유 파동이 있었던 1973년에는 23개 사절단이 110개국에 파견되기도 했다.

전세계가 제2차 석유파동을 겪게 되었을 때 한국은 에너지원의 63퍼센트를 석유가 차지하고 있었고, 전체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는 70퍼센트 정도가 되었었다. 석유는 전량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제2차 석유 파동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석유 파동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자원외교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즉, 국내에 진출해 있던 석유 메이저들이 철수하고, 한국이 독자적인 원유 도입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도입선 다변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80년대 후반에는 중동 의존도를 60퍼센트 정도로 낮출 수 있었다. 또한 해외의 에너지자원 개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85년부터 인도네시아의 마두라 광구에서 원유를 생산하는 등 80년대 후반에는 10여 개의 한국 회사가 해외 에너지개발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연료 광물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동남아·중남미 지역에 대한 외교를 중시하게 되었으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3세계로의 접근이 완료되었다고 보고 소련을 새로운 해외자원 개발사업 대상지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국의 자원 개발 노력은 남극에서도 전개되어 1978년부터 과학 탐사 활동을 해 오다가 1988년에는 킹조지 섬에 상주 기지인 세종 연구소를 설치하였고, 남극 해양생물자원 보존협약(1985)과 남극조약(1986)에 가입함으로써 1989년에는 남극 조약 협의 당사국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은 국가 발전과 국민의 생존에 긴요한 전략 자원의 수급에서 해외의존도가 이미 높고, 앞으로 더욱 증가될 전망이다. 1989년 곡물의 해외의존도는 약 57퍼센트, 에너지는 약 80퍼센트로 추정되던 것이 1992년에는 63퍼센트와 91퍼센트를 각각 기록하는 등 급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현재 2000년대의 자원 수급 목표를 석유 20퍼센트, 유연탄 30퍼센트, 우라늄 50퍼센트로 잡고 있다. 따라서 자원 개발 투자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취해야 될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지구환경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제 사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협약과 조약 체결, 각종 정치적 선언 등을 모색해 왔다. 그래서 선진정상회의(G7 summit)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 회의는 매년 지구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선언을 해 왔고, 개도국 그룹인 G77도 1991년 6월에 북경 선언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연대 형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각 지역별로 독자적인 실천 계획과 건의 사항을 채택하고 있다.

지구환경 문제에 대한 유엔기구의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즉 유엔환경계획(UNEP), 유엔개발계획(UNDP), 세계기상기구(WMO), 국제 해사 기구(IMO) 등 유엔 기구의 활동을 들 수 있다. 특히 1972년에 창설된 유엔환경계획은 오존층 보호를 위해 '빈 조약' 체결(1985년)과 '몬트리올 의정서' 합의(1987년)라는 성과를 얻었다. 한국도 1972년부터 이 기구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1986년부터 89년까지는 집행 이사국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1989년 유엔 총회 결의(44/228)에 따라 1992년 6월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 환경개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환경 보호 관련 선언과 결의가 채택되었고, 민간 단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리우 회의에는 178개국 정부 대표와 민간단체 등 약 2만 명이 참석하여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개발(ESSD)'을 촉구하는 '리우 선언'을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인 'Agenda 21', '기후변화협약', '생물 다양성 협약', '산림 원칙 선언' 등을 채택하였다.

리우 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지구환경 보존문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였으나, 구체적인 협약에 대해서도 개도국의 입장을 옹호하며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화석 연료의 사용을 규제하는 기후변화협약에 대해서는 한국이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조정할 때까지 특별 유예기간을 설정해 줄 것과 에너지의 효율적 소비와 관련된 기술 이전을 요구하며 개도국과 입장을 같이할 수 있었으나, 생물 다양성 보전협약에 대해서는 강대국과 개도국 어느쪽과도 입장을 같이할 수 없어서 이 두 협역에 대해 서명을 보류했었다. 그러나 서명국들이 늘어나자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서명함으로써 지구 환경문제에 대한 준비 부족과 외교적 미숙을 노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