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현대 국제정치의 특질

국제정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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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政治-起源

현대 국제정치의 특질을 밝히려고 한다면 먼저 현대에 선행하는 시대의 국제정치를 되돌아 보고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이 첩경이다. 그런데 현대에 선행하는 시대의 국제정치라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인가? 유럽의 역사에서 국가간에 계속적인 경제관계가 수립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적인 정치관계가 형성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국제정치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국제정치는 없었느냐고 반문할 것임에 틀림 없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여러 국가가 하나의 권위에 복종하게 됨으로써 국제정치의 성립에 불가결한 독립국가의 군립(群立)이라고 하는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때에는 독립국가의 군립 대신에 '인류의 통일'이라든가 '세계의 통일'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통일이나 세계의 통일을 외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적인 것으로 끝났으며, 현실적인 유럽사회는 이원적(二元的)인 원칙 위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사상에 의하면 세계는 2개의 부분, 즉 '정신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자는 로마교황, 후자는 신성(神聖) 로마황제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두 지배자는 다 같이 지상에 있어서의 신(神)의 대리자로서 세계인류의 통일과 복지의 실현을 이룩해야 될 사명과 권한을 가지는 것이었으므로 양자간에 세력다툼 같은 것이 일어나서는 안 될 터였으나 실제로는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세력투쟁에서 점차 우세하게 된 것은 황제가 아니고 교황이었다. 기독교세계는 원래 세속적·정치적·군사적 권위보다도 종교적·도덕적·지식적 권위에 기초를 둔 세계였으므로 기독교세계의 통일이란 욕구가 높아감에 따라 교황의 세력은 점차 황제의 세력을 압도했다. 황제의 세력이 미약해지자 여러 국가의 국왕 중에는 황제에게 반항하는 자도 나타났으나 그들 왕들로서도 교황에게 반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교회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국가의 왕이나 국민이 그 밑에서 전적인 복종을 강요당하는 상태하에서는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은 국제정치는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가 되자 이러한 상태는 점차 변해갔다. 이 무렵에는 기독교세계의 통일이 무너지고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립국들이 많이 나타나서 제각기 자기들의 사고(思考)에 따라 서로 교섭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교회의 보편적 지배'라든가, '신성 로마황제의 세계제국'이라는 등의 사고는 이제 통하지 않게 되었고, 여러 나라가 로마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주권(主權)을 갖게 되었다. 국제정치는 이렇게 하여 등장한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사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국제정치라 하지만 그 나타나는 형태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국제정치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두 시대 ― 절대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전성시대 ― 에 관하여 그 당시에 일어난 국제정치의 움직임을 다음 항목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절대주의시대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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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主義時代-國際政治

16세기에서 18세기 전반까지의 시기는 절대주의의 전성시대로서 그 무렵의 국가는 대부분 절대왕정 또는 이에 가까운 통치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가 오늘날과 다른 점은 국가와 지배자가 동일시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짐(朕)은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14세의 말은 이 시대의 사정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국토는 단지 왕의 사령(私領)에 불과했으며 왕의 이해가 곧 국가의 이해이며, 왕권의 신장(伸張)이 곧 국가의 신장을 의미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왕은 무제한의 권리를 가지며 국민은 무권리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가 경제정책의 목적은 국민복지의 실현이 아니고 왕권(王權)의 강화에 있었다. 상업은 장려되었으나 그것은 상업이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국고의 부(富)를 가져오고 또한 왕의 권력강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국가와 왕이 동일시되고 국가 안에는 국민의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국가에 의하여 구성된 국제관계도 또한 오늘날의 그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국제관계가 지배자들의 개인적 관계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국가의 국민과 다른 국가의 국민과의 관계가 아니었으며 왕가(王家)와 왕가, 궁정(宮廷)과 궁정의 관계를 의미했다. 따라서 국제정치라 하더라도 그것은 왕가와 왕가, 궁정과 궁정 사이의 사사로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궁정간의 혼인은 종종 국가간의 동맹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시대의 외교를 '규방외교(閨房外交)'라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는 국민의 손이 미치지 않는 데서 행하여졌으므로 국가간의 조약도 국민과 관계없이 체결되고 국민과 관계없이 파기되었다. 전쟁마저도 국민과 무관계하게 진행되었고, 전쟁은 군주(君主)들의 군대와 군대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전쟁터는 좁은 지역에 한정되었으므로 많은 국민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른 경우도 있었다. 전쟁이 국민과 무관계하게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강화(講和)도 국민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군주들은 국민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 영토를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과 함께 내어주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여기서 국토나 국민은 마치 군주들의 사유재산처럼 처분되었다. 요컨대 이 시대의 국제정치는 궁정간의 사사로운 일과 국가간의 공적(公的)인 업무 사이에 분명한 선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데 그 특질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전성시대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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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本主義全盛時代-國際政治

1770년대에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1880년대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 당시까지는 국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던 국제정치의 세계에도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유럽의 전제 군주들이 그 때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색적인 국가가 출현하고 신분적 예속하에 있던 무권리의 국민이 군주에 대항하여 군주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군주의 권리를 제한하는가 하면 군주의 지위를 폐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군주를 처형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짐(朕)은 국가다'라는 사고(思考)는 이미 통용되지 않게 되었고 '국민이야 말로 국가다'라는 사고가 이에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혁명은 국민의 지배권을 확립시킨 것이었으며, 전통적인 중세적 국제요소(군주의 혈연관계, 귀족의 국제적 계급성 등)를 완전히 제거하였고, 군주의 사권화(私權化)를 철저히 억제하면서 정치결정권이 국민 전체에 확대되어야 한다는 민주사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국내외 정치에 역사적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다시 말해 이는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완성을 위한 민주주의 승리와 민족주의의 출현을 가져다 주었으며, 특히 국제정치면에서는 배타적 국민국가(또는 민족국가)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에 입각한 서구제국주의 시대를 본격화시켰다.

따라서 국민이 국가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서 국제정치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절대주의시대에는 국제정치를 움직인 주요한 원동력은 군주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개인적인 야심 및 감정에 기인되었으나 이번에는 그것이 국민의 집단적인 이익이나 집단적인 야심 또는 집단적인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지난날에는 조약을 체결하는 경우나 체결된 조약을 개정 내지 폐기하는 경우, 또한 전쟁을 개시하고 강화(講和)를 맺는 경우에 있어서 모두 국민과 무관계하게 진행되었으나 국민이 정치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뒤로는 국민의 동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난날 국민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국제정치는 이제 국민의 손이 미치는 데에서 실시되게 되었다.

근대 국제정치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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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國際政治-特質

근대 국제정치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근대 국제정치는 자유주의적 민족국가의 확립과 이러한 민족국가의 대립·항쟁 또는 협력관계라 할 수 있다. ② 이러한 국민국가의 확립을 위한 수단은 국내정치면에서는 의회정치제도의 확립으로 이루어졌으나 대외적인 면에서는 철저한 비민주적 식민지정책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 즉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의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근대국가의 차별적인 비민주적 식민정책을 발판으로 하여 그 위에서 개화(開花)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대국가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국제정치적 요소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근대국가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의 최대의 모순이었다. 근대국가의 이러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은 1·2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또한 이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하여 식민정책을 청산함으로써 현대국가로 탈바꿈하는 중요한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근대국가는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통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지구 총면적의 5분의 3 이상을 식민지화하였다. ③ 경제체제에 있어서 동질적 국가간의 대립이 있었다. 20세기 초기까지는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러시아·독일·미국·일본 및 이탈리아 등의 열강이 병존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경제체제는 한결같이 자본주의체제였다. 그 중에는 영국·프랑스와 같이 고도의 선진적인 단계로 발전한 국가와 러시아·일본 등과 같이 후진적인 국가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발전단계가 대체로 불균등하였지만 그 기본적인 성격은 질적으로는 동일했다. 그러므로 전세계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단일시장(單一市場)이 형성되었고 그만큼 국제정치는 단순하고 적나라한 권력정치 바로 그것이었다. ④ 근대 국제정치의 중심은 유럽에 있었으며 세계적 문제는 유럽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럽 이외의 대륙은 원칙적으로 국제정치상의 객체적 존재에 불과하였다. 예외적으로 미국과 일본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지배적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으며 세계적 문제를 처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미국은 그 전통적인 고립정책을 고집하여 정치적인 문제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근대국제정치는 유럽대륙내 열강사이의 대립·항쟁 또는 협력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며 그 기본성격은 서구적인 것이었다. ⑤ 국제정치에 있어서 열강의 정치적 행동원리는 고전적 의미의 세력균형주의(principle of balance of power)였다. 거의 동등한 세력을 가진 셋 이상의 국가가 병존하고 있는 국제사회가 있다고 가정할 때 거기에서는 한 국가의 세력이 증대되어 다른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 것을 서로 방지하며 그럼으로써 각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동맹·협상정책과 보상주의정책 및 고립주의정책 등으로 구체화된다. 예컨대 제1차대전 직전의 3국동맹(Triple Alliance: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대 3국협상(Triple Entente:영국·프랑스·러시아)의 경우는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⑥ 국가간의 분쟁이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무력적방법을 사용했다.

외교에 의해 국가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군사적 방법으로 국가의사를 관철할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K. Clausewitz;1780∼1831)의 말과 같이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생각되었고 그것은 아무런 도덕적 거리낌도 없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즉 근대 국제정치에서는 국가간의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때 전쟁이란 수단에 호소할 수 있었고 전쟁의 결과 승리를 얻었을 때에는 그 국가가 소망하는 국가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국가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그 존재가치를 원칙적으로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 근대 국제정치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현대의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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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國際政治

근대 단일민족 국가는 역설적이긴 하나 2차에 걸친 자기확대(自己擴大)의 세계적 식민지쟁탈전을 통해서 현대국가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니까 미국의 독립,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러시아혁명 등의 민족주의·민주주의 및 사회주의운동이 양차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세계적으로 그 실현단계에 들어가면서 근대국가는 현대국가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우선 전쟁규모면에서도 1·2차 세계대전은 근대 단일민족국가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인류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역사상 최초로 초국가적(超國家的)인 국제평화기구를 탄생시켰다. 특히 국제연맹(League of Nation)과 국제연합(United Nation)은 국제평화기구로서 적지않은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 및 국제협력의 촉진이란 두 가지 사명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의 능동적 요인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현대 국제정치적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국가가 독립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파시즘국가에 대한 민주국가의 승리에 의한 것이든 또는 민족독립운동에 의한 것이든간에 근대민족국가의 하부구조를 이룩했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국가가 거기서 이탈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근대국가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국가의 출현이야말로 근대 국가체제의 정치적 변질을 촉진시키는 최대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제계급관념에 입각한 공산당의 국제적 활동은 근대국가의 정치권력의 기반인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 및 세계적화를 기도함으로써 근대국가의 정치·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2차 대전 후에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국제문제에 대하여 국민적 관심을 적지않게 가지고 있다는 것도 현대 국제정치 요인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근대 국제정치가 배타적인 주권국가만을 주체로 하는 좁은 의미의 국제정치였다는데 반하여 현대 국제정치는 주권국가의 성질마저 변모되고 있을 뿐 아니라 초국가적 요소인 이른바 다민족(多民族)국가의 대두라든가 또는 국제기구 및 국제집단 등이 주체로서 등장하여 넓은 의미의 국제정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과 더불어 오늘날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될 점은 현대 국제정치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주개발이 진행되어 국제정치의 무대가 지구를 벗어나 우주(宇宙)에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