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사회주의 세계의 출현
사회주의 세계의 출현
편집社會主義世界-出現
2차대전 후의 국제정치상 제1의 특질은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제2차대전 직후 동부 유럽의 7개국(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알바니아)에 1948∼1949년에는 소련 점령지구의 북한과 동독에, 1949년엔 중국에, 그리고 1961년에는 쿠바에, 1975년에는 월남전역과 캄보디아, 라오스 및 앙골라에 사회주의 정권이 섰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 체제는 이제 소련 하나만이 아닌 범세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서구에서는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성립까지 시도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 출현의 국제정치적 의의
편집社會主義國家出現-國際政治的意義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소련 1개국 뿐이었던 사회주의국가가 제2차대전 후에는 어느 의미에서 사회주의 세계체제로 확대되어 국제정치에 중대한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소련은 2중(二重)의 성격을 가진 국가이다. 즉 한편으로는 로마노프왕조의 계승자로서, 또 슬라브 민족의 지도자로서 구러시아제국을 현대국가로 근대화시킨 건설자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근대화의 요인이 서구와는 달리 오히려 반자본주의 및 독재적인, 이른바 공산주의라는 2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련의 지배자들은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이라 하나 반서구(反西歐)적인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서구화한 현대적인 러시아의 지도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련의 권력정치는 여러 다른 국가에 조직적인 지지자를 가지는 국제적인 이데올로기의 사용이 가장 강력한 팽창의 무기로 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국가의 권력정치와 전혀 차이가 없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주의국가의 등장은 ① 근대 서구국가의 국가이익 위주의 권력정치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주의라는 국제적 이데올로기 중심의 새로운 팽창정책을 쓰고 있다. ② 사회주의국가의 이러한 팽창정책은 그들의 이론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노동자 세력이 강력한 선진 자본주의국가 보다는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후진적인 동구(東歐) 국가와 비서구(非西歐) 국가에서, 즉 아시아 등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③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국제적 요인은 계급성에 있었다기 보다 근대국가 체제의 확립을 위한 폭력 혁명성에 있고, 이는 식민지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던 서구국가들을 반대하는 반서구적 요인과 결합하였다. ④ 사회주의의 혁명적 요인과 반식민지적 요인은 특히 신생 독립국가들과 결합할 수 있는 국제성을 가짐으로써 서구 식민지국가들이 물러간 힘의 공백지대로 소련과 중국이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즉 러시아제국 이래 부동항(不凍港)을 추구하고 있는 소련에게 <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로서 중동 및 아프리카지역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제2차대전 전의 서구의 직접적인 군사·경제적 식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팽창정책 양식을 현대 국제정치에 야기시켰다.
동구 사회주의 제국의 성립
편집東歐社會主義諸國-成立
동구 제국에서는 제2차대전 말기와 종전 직후부터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러시아에 공산정권이 확립되었던 형태와는 달리, 독일군의 패망과 함께 소련군이 대신 점령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무력으로 수립한 타의적인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제외하고는 ① 대적협력자(對敵協力者) 이외의 구정당(舊政黨)은 해산시키지 않고, 외형적으로는 연립정권 형식으로 다수당제도를 인정하며, 의회정치를 계속 남겨두면서 이른바 '계급투쟁'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그 내용을 전환시킨다는 간접혁명 방식을 취했다. ② 산업의 국유화는 적국 기업 또는 대적협력자 기업에 한하였고, 경제계획은 전후 부흥을 위한 단기계획에 국한하였으며, 경제의 사회주의적 개조는 일시에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부 유럽의 5개국(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을 독일점령군으로부터 소위 해방시킨 것은 소련군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배후에서 직접 쿠데타 내지 혁명을 조종하고 진전시켰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위 인민권력의 기초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그들 국가의 독립과 해방을 쟁취한 유고슬라비아는 다른 동부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보다도 정치와 경제의 사회주의화를 급속하게 진전시켰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11월에 완전히 공산당의 지도 아래 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1946년에는 농업과 소매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1947년부터는 전후 부흥만이 아닌 사회주의 건설을 포함한 5개년 경제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알바니아는 대독해방전쟁(對獨解放戰爭)이래 유고슬라비아의 원조와 지도를 받았고, 1946년 1월에는 소위 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이외의 동부 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은 그후 소련군 주둔하에서 공산화되어 계급투쟁 형식이 일어나고 사회주의화가 추진되었다. 소위 인민공화국 선언이 불가리아에서는 1946년 9월에, 루마니아에서는 1947년 12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48년 5월에, 헝가리에서는 1949년 2월에, 폴란드에서는 1952년 7월에 있었다. 그리하여 1949∼1951년에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장기경제계획(4개년∼6개년)도 실행에 옮겨졌다. 또한 소련 관리하의 독일지구는 서방층 관리지구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후 1949년 10월에 소위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중국의 성립
편집中國-成立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본격적으로 확대·정비된 것은 역시 1949년 10월 1일의 중국정권 성립 이후였다. 중국이 그토록 쉽게 공산화된 데는 대체로 ① 공산당이 그들의 전통적인 전술인 소위 인민전선전술을 국민당과의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全線)에 적용하여 항일전쟁중 세력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고, ② 부패·무능한 국민당 정부가 민중의 지지를 잃어 이를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③ 해방군의 무장투쟁과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의 기반이 확보된 데다, ④ 소련이 공산당을 적극 지원한 반면, 미국은 국·공합작을 기대한 나머지 국민당에 대한 원조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된 중국 정권은 사회주의적인 토지개혁, 민간기업의 국유화, 우익 정치세력의 무자비한 숙청, 대중노동력의 강제동원 등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다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쿠바 사회주의정권의 수립
편집Cuba 社會主義政權-樹立1959년 1월에 바티스타정부를 전복하고 성립한 카스트로의 혁명정권은 1961년 5월 반혁혁명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나서 쿠바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이 혁명은 미리 공작된 혁명도식(革命圖式)을 따라 실현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가운데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진전된 것이었다. 그리고 쿠바 사회주의정권의 성립은 ① 전쟁 직후의 혼란 상태에 의한 것이 아니고, ② 사회주의국가를 배후지역에 갖지도 않았고, ③ 미국의 바로 앞에서 실현되었다는 데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편집社會主義運動-分裂
사회주의는 본래 국가·민족을 부정하고 전세계 공산주의자의 단합된 행동에 의한 전세계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자기들을 분열시킬 수 있는 국가주의·민족주의를 경계하고, 국제사회주의운동 기구를 통한 강력한 단일전선을 추구한 결과 전후의 소련은 자신을 구심점(求心點)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반발하여 소련의 통제를 벗어났고,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각국 공산당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성장과정의 차이로 인한 견해차이가 심화되어 ①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의 수정주의노선, ② 중국·알바니아 등의 교조주의노선, ③ 위의 어느 쪽에도 가담치 않는 루마니아, 베트남 등의 자주노선, ④ 서구적인 전통 속에 적응하려는 서유럽 공산당의 노선 등 여러 갈래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소련의 통제력은 상당히 위축되고,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되었으며, 다른 약소국 공산당들 역시 각자의 내외사정에 따라 임의로 노선을 바꾸어 갈피를 못잡고 있어 국제공산주의운동 자체가 사실상 무정부상태에 빠질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즉 사회주의의 구심점은 크게 동요되고 오히려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화 경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다.
코민포름과 세계공산당대회
편집Cominform-世界共産黨大會
전후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먼저 1947년 9월에 소련·프랑스·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폴란드·유고슬라비아 등 9개국 공산당·노동당이 코민포름 공산당 및 노동자당 정보국)을 결성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창립의 배경으로는 전후 새로운 여건하에서의 세계적화를 위한 국제조직의 필요와 또한 6월의 마셜 플랜의 발표 등,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일련의 반공협력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 등이다. 코민포름의 임무는 각국 공산당의 행동조정과 정보교환으로 되어 있었다. 1948년 6월 코민포름의 제2회 대회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우익적 국내정책 및 대소 적대정책(對蘇敵對政策)을 취한다고 비판하여 제명시켰다.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이면에는 소련공산당이 코민포름의 주도권을 장악, 지배자의식으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점과,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유고슬라비아가 반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생존시에는 그 외의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단결은 무너지지 않았다.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이탈하고, 동부 유럽 제국의 사회주의화는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는 먼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여 관계개선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는 비스탈린화, 즉 개인숭배를 비난하고, 전쟁불가피론의 부정, 사회주의에로의 평화적 전환의 가능성이란 새로운 주제와 함께, 사회주의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 직후 4월에 코민포름도 해산되었다. 그 후로는 각 공산당의 자주성이 높아가고 소련의 절대적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각국 공산당과 사회주의 제국에 큰 동요와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먼저 동구(東歐)에서는 비스탈린화의 필요성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가 반소(反蘇)·민족사회주의 노선을 모색하게 됨으로써 소련의 통제와 지도력에 강력하게 도전하였다. 1956년 6월 폴란드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10월에는 사회주의 세계체제에서도 중립을 선언하기에까지 이른 헝가리 의거를 진압하기 위하여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는 중국공산당도 동구문제 해결의 조정에 나섰으며 그리하여 1957년 11월에는 64개국 공산당 대표자 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것은 코민포름에 대체되는 세계공산당의 새로운 상호협의 방식이라고 평가되어, 각국 공산당 간에 의견차이가 조정되어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원래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의 주제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양당간의 의견대립은 그 후 소련이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방식(인민공사)이나 대(對)인도정책, 즉 내정과 외교를 비판하고,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인한 핵군사력의 제공 거부 등 대국주의적 압력을 중국에 가하는 한편, 대미 평화공존정책을 추진해감에 따라 더욱 명백하게 되었다. 1960년 4월부터는 중·소간에 공공연하게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물론 중·소논쟁은 처음에는 비스탈린화에 반대하는 알바니아공산당을 소련측이 비판하고,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 선언이 '수정주의(修正主義)는 중대한 위험'이라고 했기 때문에 다시 공산주의체제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하는 대리논쟁(代理論爭)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1962년의 쿠바 위기, 그리고 1963년의 부분핵금조약(部分核禁條約) 이후에는 중국이 소련을 노골적으로 공격했고, 중·소 양 공산당 간의 불화는 결국 국가간의 반목으로 발전되었다. 흐루시초프는 세계 공산당 대회를 계속 중국의 비판장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늘어남과 동시에 동구 공산국의 자주화 운동이 급증하고 서구 공산당들의 탈소(脫蘇) 정책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자 1976년 이후 소련도 각국 공산당은 각자 적합한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동구경제상호원조회
편집東歐經濟相互援助會(COMECON)서구 제국의 유럽부흥계획(마셜 플랜)에 대항하여 1949년 발족한 경제상호원조회의의 구성국은 소련과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동독 및 몽고와 쿠바·베트남 등 10개국이었다. 그 외에는 2개국간의 조약협정에 의하여 상호무역·차관공여·기술원조 등 경제적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코메콘은 서구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상태에 대응하여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주의공동체를 모색하는 것이다. 따라서 코메콘의 임무는 구성국가들 간의 경제적 협력과 결합을 위해서, ① 상호무역·차관공여 및 기술원조 등의 발전뿐만 아니라, ② 제국간에 생산의 전문화와 협업화(協業化), 즉 사회주의적 국제분업을 발전시키고, ③ 그리하여 전구성국을 망라한 종합적 장기계획 및 공동 건설사업을 실시하는 데 있었다.
코메콘이 1949년에 창설된 것은 그 무렵에 동구 국가들이 사회주의화의 기초를 확립했고, 경제계획도 전후 부흥단기계획에서 사회주의건설 장기계획으로의 전환이 각국에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열린 1956년 이후 코메콘 구성국가들의 경제계획은 소련경제의 계획기간에 맞추어 작성·조정되어 순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 결과 코메콘 구성국가들의 생산은 어느 정도 발전했고, 이것을 주축으로 하여 사회주의 체제세계의 물질적 역량이 증대·강화되었다.
그러나 1956년의 폴란드 및 헝가리의 의거, 그리고 루마니아의 불만과 1968년의 체코문제 등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확실히 코메콘이 제시한 급속한 사회주의적 국제분업화와 생산증대의 실현과정에서 생긴 많은 부작용, 즉 ① 급속한 중국업화, ② 농업·소비공업의 경시와 그런 환경에서 증산을 위한 조급한 사회주의화, ③ 각국의 전통 및 국민감정을 무시한 생산의 전문화, ④ 이를 강행시키는 소련 위주의 대국주의적 태도 등에 대한 코메콘 구성 국민들의 불만이었다.
코메콘에서 노출된 생산성 증대와 현실적 요구와의 모순은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체제 세계의 전체적 역량 강화의 필요성과 각 사회주의 국가 국민들의 전체적 제요구 사이의 모순으로 일반화될 수도 있다. 즉,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은 공산주의체제 세계 전체의 물질적·군사적 및 정치적 역량의 급속한 증대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중앙통제적인 계획 아래 코메콘 회원국은 그 혁명과정이나 발전단계와 관계 없이 주어진 역할을 강요받았다. 현실적·역사적 제(諸)요건에 맞추어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던 회원국들의 불만은 컸으나 이미 정치·군사적으로도 종속된 1970∼1980년대 초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1980년대 말 동구권의 개혁은 코메콘 자체의 존립여부로까지 비화되었으나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경제기구로 개조한 다른 회원국간의 합의가 성립되었다.
제한주권론과 중·소의 대립
편집制限主權論-中·蘇-對立
1969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공산당대회에서 소련은 '현단계에 있어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과제와 공산당·노동자당 및 모든 반제국주의 세력의 행동통일'에 관하여 제한주권론을 주장했다. 즉 소련은 체코 침공 이후 사회주의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 또는 당의 주권이나 자주성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소련은 이 회의에서 사회주의운동의 공동행동을 거부하는 것은 그 당의 이데올로기적 독립과 정치적 독립, 정치적 권위를 손상하는 것이며, 사회주의국가의 기초가 내외의 적대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고 사회주의 공동체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 그것은 전체 사회주의국가들의 공동관심사라고 해서 체코 침공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소련측의 제한주권론과 체코 침공에 대해 서구 공산당 대표들은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고, 중국의 소련에 대한 비난은 중·소대립의 심각성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단결의 한계를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중국은 소련이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사회제국주의와 사회파시즘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결탁하여 각국의 혁명투쟁에 대해 탄압을 가속하고 있으며, 동구 제국과 몽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중국 자체에 대해서도 소련이 침략의 위협을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은 소련이 이러한 침략과 약탈을 변호하기 위해 제한주권론·국제독재론·사회주의 대가정론을 고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같은 중·소의 대립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고, 사회주의진영의 분열·대립으로 인한 원심화(遠心化) 경향은 전후의 양극화된 국제정치질서를 다극화(多極化)시키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출현
편집平和的手段-依-社會主義政權-出現
무력혁명을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첩경이라고 여겨오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념과는 대조적으로 1970년 칠레에서는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선거에 의하여 이룩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의사 출신인 아옌데(Allende, Salvador:1909∼1973)는 6개 좌파 연합의 단일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39.3%의 최고 득표를 얻어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국내적으로는 미국인 소유의 동광산(銅鑛山)을 비롯한 포드 자동차, 국제전신전화회사(ITT) 등의 국유화와 사업허가 취소를 실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남미의 공산국인 쿠바와 정식 수교하여 중남미 대륙에서의 사회주의 연대성을 굳혔다.
그러나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모순과 부작용도 있었고 특히 지주·자본가(다국적 기업)·군부 등은 자신들의 권익침해에 대하여 첨예한 반응을 나타냈다. 노동자·농민 등 무산계층에 기반을 둔 아옌데 인민연합정부는 공산권과 서구의 사회주의·좌파로부터 새롭고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로서 평가되고, 유럽의 사회주의·좌파계열 정당의 노선전환에 변혁을 일으키게 된 근본요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방측의 시각으로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또하나의 사회주의 정권의 출현이었으며, 그 성공은 남미의 사회주의 확산이었을 뿐으로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토착 지주·자본가가 군부와 결탁, 외세의 간접지원하에 1973년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칠레는 그후 1989년 민정복귀까지 17년간의 군사독재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에스파냐·이탈리아·프랑스의 3개국 공산당이 과거 무산계급의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타도를 부정하고, 대의민주주의 인정과 민주적·점진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채택함으로써(유로 코뮤니즘) 기존의 사회주의·좌파 계열과 연대, 그 세력확장이 두드러졌고,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스스로 표방하였다(일본의 사회당은 1989년 사회주의 건설에서 기본적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노선전환을 선언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서구·일본의 공산당은 소련의 개혁과 동구권의 공산정권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여 스스로 온건 사회주의 대중정당으로 노선전환을 시도하고 있으나 좌파·사회주의 계열 정당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 1981년 4월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선거에 의한 좌파(공산당 포함) 사회당 정부가 탄생하였다.
포르투갈에서도 1975년 소아레스의 사회당 정부가 출범하여 1976년 좌파 사회주의를 지향한 신헌법을 제정한 이래 1985∼87년 사이에 중도우파가 일시 집권한 기간을 제외하면 사회당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 몰타(노동당), 에스파냐(노동자사회당:PSOE)에서의 좌파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일본(사회당)·이탈리아(공산당)의 계속적인 세력 신장이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변질
편집社會主義革命-變質
사회주의란 본래 자유방임적·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제모순으로부터 사회주의적 소유와 관리(수단)를 통해 자유·평등·사회정의(목적)를 실현하는 사상·운동을 의미하는데(공산주의는 그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일부 국가에서는 오해와 편견으로 또는 독재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식민지의 독립과 좌경화
편집植民地-獨立-左傾化
소위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일치시켜 신생 독립국을 사회주의화하는 움직임은 이미 제2차 대전 후 크게 성행한 유형의 혁명 수법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식민지 상태로 존속하는 후진 지역은 이와 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사회주의 혁명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포르투갈의 영향하에 있던 아프리카의 앙골라는 그간 좌우파들이 각각 독립투쟁을 전개해 왔는데, 1975년 11월 독립하자마자 좌우파간의 내란으로 번져 소련과 미국의 개입까지 몰고 왔다.
이러한 경향은 식민지배국들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착취와 수탈의 과정에서 그에 협력한 토착세력과 그에 항거한 민족주의 세력간의 주권회복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념적·물리적 대치상황에 사회주의의 확산을 기도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구지배국이 개입함으로써 비극이 확대되었다.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의 정권교체 문제
편집共産主義體制內-政權交替問題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국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제2차 대전 이후에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들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혁명의 주도자가 곧 정권 담당자로 되어 버려서 예외없이 노인층 실권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혁명 1세대가 지난 1970년대에 와서는 공산권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던 집권층의 뒤를 이을 정권교체 세력의 형성 문제가 크게 대두했다. 특히 중국의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동독의 울브리히트 등, 지도자가 세계 정치사상 최고령권에 속하는 이들 나라들에서는 권력의 승계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었다. 동독은 1971년 정계일선에서 후퇴한 울브리히트 이후 호네커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이루어졌고, 1976년 모·주 사후의 중국 역시 화궈펑을 주축으로 한 권력분산체제를 이룩했다. 이처럼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을 창시한 지도자의 사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약간의 혼란 과정을 거친 뒤 권력분산화를 위한 집단지도체제 형식의 통치체제가 성립되고 있다.
유로 코뮤니즘 출현의 역사적 배경
편집EuroCommunism 出現-歷史的背景
유로 코뮤니즘(EuroCommunism:서구 공산주의)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원심화 경향과 일괴암적 단결(一壞岩的 團結)이 깨어진 데서 생겨난 공산주의의 한 변종이라 할 수 있다. 백색 공산주의(白色共産主義)라고도 불리워지는 이유로 코뮤니즘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부터이고 그것은 서구의 비공산당계 일간지를 통해서였다. 유로 코뮤니즘이란 말이 유행되었으나 소련은 물론 서구의 공산주의자조차도 "유로 코뮤니즘이란 말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분열의 쐐기를 박으려는 국제부르주아계급의 책략이다"라고 하면서 이를 일축했다.
그러다가 1977년 2월 13일 프랑스 공산당의 서기장 조르주 마르셰가 "이 말을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나에게 아무런 지장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내어 이 용어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977년 3월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의 마르세,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린구에르,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가리오 서기장의 3거두가 회담을 열고, 유로 코뮤니즘을 교의(敎義)나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정신으로서 확립했으며, 행동 통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로 코뮤니즘이란 서구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고도선진자본주의국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운동으로서 일본 공산당의 경우도 포함된다"고 하나 이는 유로 코뮤니즘이란 호칭으로 보아서도 지역적으로 서구의 공산주의 운동에 한정된다고 하겠다.
모스크바와는 별도의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분명히 밝힌 이 유로 코뮤니즘을 소련이 반대함은 물론 같은 유럽의 공산당들, 즉 포르투갈·룩셈부르크·서독·덴마크·오스트리아·그리스·키프로스·핀란드의 공산당들은 유로 코뮤니즘을 거부하고 있으며, 아일랜드·네덜란드의 경우에는 동일화(同一化)와 가입을 거부하고 유로 코뮤니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공산당은 이미 1951년에 '사회주의에로의 영국의 길'이란 강령속에 헌법을 존중하고 내란에 호소하지 않고 권력에 이른다고 주장한 일이 있어 유로 코뮤니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나 이탈리아·프랑스·에스파냐 3당과는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있다.
유로 코뮤니즘의 특징은 첫째 지역적으로 서구라는 사실과, 둘째 당면하고 있는 과제에 공통성이 있다는 점, 즉 정권참가의 경험이 있거나 그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것, 그리고 각 나라의 경제·사회에 정체 내지 발전의 파행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공통성이 있다는 사실인즉 복수정당주의의 주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를 선언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소련 모델을 부정하고 또 사회주의 건설에서 독자노선을 주장하며 정권장악 내지 참가에 있어서는 의회민주주의의 원리를 준수한다는 3개 기준이라 하겠다.
유로 코뮤니즘의 당면과제
편집Euro Communism-當面課題
유로 코뮤니즘을 주장하고 있는 이 3개당이 속하는 나라는 서구중에서도 지중해(地中海)에 면한 국가들이며,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가 심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이 국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 선진공업국이라고 하기 보다는 급속한 공업화를 서두르고 있으며 거기에 따르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의 과제가 누적되어 있는 나라들이다.
이탈리아의 경우를 보면,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2년 3월 서기장에 취임한 베를린구에르(Enrico Berlinguer)의 지도하에 크게 당세를 확장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지방정치 레벨에서는 기독교민주당을 압도했으며, 중앙정계에서는 정국의 동향을 좌우하는 일대세력으로 등장했다. 공산당은 야당이기는 하나 여당적 행동이 요구되고 있으며, 종종 소극적인 지지를 정부에 부여함으로써 정국의 혼란을 회피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장의 단독집권이나 급격한 사회주의화가 아니라 기민당·사회당 등과 '역사적 타협'을 통해 거국체제하에서의 '효과적 경제계획'과 행정효율화를 기한다는 온건하고도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 세력균형을 위해 NATO에도 그대로 머문다는 입장을 천명, 유럽공산당의 집권이나 입각으로 인해 NATO의 남쪽고리가 떨어져나가는 사태를 염려하고 있던 미국과 서방국가들 및 이탈리아의 군부와 가톨릭 등 우파세력의 불안을 덜어주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로 코뮤니즘 중에서도 탈소비에트 경향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이미 1956년 제8차 당대회에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서기장 지도하에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포기하고 복수정당제를 주장하며 동시에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옹호하고 나아가 국제공산주의 운동으로서의 다중심주의(多中心主義:Polycentrism)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 노선은 루이지 론고(Luigi Longo) 서기장을 거쳐 베를린구에르까지 변함이 없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8년 3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동강령(共同綱領)' 개정교섭 결렬 등으로 사회당과의 이견(異見)조정에 실패하여 좌파연정(左派聯政) 수립이 좌절되었으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보다는 더 좌파적이고 교조적인데, 산업 국유화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당의 온건론을 '상류계급과의 야합'이라고 비난했다. 핵군비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미사일은 드골 도식(圖式)대로 전방위체제(全方位體制), 즉 소련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서독·미국등 서방 세계에 향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의 NATO 잔류, EC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건설에 동의하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크레믈린의 장녀(長女)'라는 말이 있을 만큼 모스크바 일변도였으나, 68년의 체코사태를 계기로 자주적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고, 1975년 12월, 소련 강제노동 수용소에 대한 BBC방송필름이 프랑스 TV에서 방영된 것이 반모스크바 노선을 결정적인 것으로 했다.
에스파냐 공산당은 카릴로(Santiago Carillo)의 지도하에 가장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모든 민주세력·가톨릭 세력과의 협조를 주장하며, 소련에 대해선 비합법 시대부터 일관해서 비판적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민이 요구한다면 왕정(王政)의 존속에도 찬성하겠다"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 포기·독자노선 추구·의회민주주의 지지라는 점에서 일본 공산당도 유로 코뮤니즘과 교의(敎義)상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