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현대의 국제정치/다극화

전후 양극화된 냉전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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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兩極化-冷戰構造

1970년대의 국제정치는 양극화된 동서진영의 냉전을 특징으로 하는 전후시대에서 다극화구조에서의 평화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전후시대로 변모하였다.

전후 국제정치 구조는 양극화된 '두 개의 세계'로 분립되고, 양진영은 법률주의적인 선(민주주의)과 악(공산주의)의 판단에 입각한 택일만을 강요함으로써 제3세력이나 중립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강력하지는 못하였다.

델레스가 "중립주의는 도덕적으로 악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참다운 평화는 사회주의 혁명의 확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중립주의나 제3세력의 확대가 어렵다고 한 스탈린의 생각을 둘 중에 하나만을 강요하는 양극화 세계질서의 정곡을 찔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양극화된 냉전구도하에서는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제로화 게임'이나 '일정화 게임'의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양진영간의 공통의 이익은 있을 수 없다는 사상하에 승패만을 생각하는 절대적 안전보장개념에 따라 부단한 대립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양극화된 냉전구조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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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極化-冷戰構造-變質

양극화된 냉전구조는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즉, 소련이 1949년에 원자폭탄을, 1953년에 수소폭탄을 개발하였지만 1950년대 전반까지는 아직도 동서간의 군사력 격차가 심하여 상호억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핵전력이 차츰 증대됨에 따라 핵무기의 사용은 국가이익 추구의 합리적 수단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결국 동서간에 군사력의 상호억제가 불가피하다고 절감하여 평화공존의 기미가 완연해지기 시작하였다.

1956년 1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는 제국주의(민주주의) 절멸의 필연성을 부르짖었던 스탈린의 노선을 탈피하고 '평화공존이냐 전쟁이냐'라는 문제를 획기적으로 제기하여 격렬한 중·소논쟁을 불러 일으키더니, 흐루시초프는 "평화공존이 소련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이며, 인류사회 발전을 지배하는 객관법칙이며, 사회진보를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갈파하였다. 그 후 동서간의 공존추세는 날로 더해 갔고 급기야 1964년 6월 케네디는 '평화전략연설'에서 '전면전쟁의 불필요성과 양진영간의 군비경쟁 중지와 폐기에 의한 평화공존'을 역설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동서 양진영은 핵독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또 선악판단의 법률주의는 시대착오임을 알게 되어 델레스나 스탈린의 망령은 점점 사라져 가는, 상호공존적인 '후기 전후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다극화된 세계의 현실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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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極化-世界-現實構造

후기 전후시대는 평화공존에 따른 냉정구조의 변질보다는 양극화의 이완과 다극화의 전개가 보다 더 특징적이다. 현대의 다극화 현상을 지역규모에 따라 살펴보면 첫째, 전세계적 판도에서 볼 때는 닉슨이 말한 바와 같이 미국·소련·중국·일본·EC의 공존적인 5극 구조를 이었으며 둘째,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판도에서 볼 때는 미국·소련·중국·일본의 상호견제·균형의 4극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셋째, 국제연합국의 판도에서 볼 때는 미국·소련·중국의 경쟁적 3극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다극화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책조작의 복잡화를 수반하는 '경쟁적 세력균형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다극화 현상을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군사적으로는 미국·소련의 2극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둘째, 정치적으로는 미국·소련 중국의 3극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셋째, 경제적으로는 미국·소련·일본·EC의 4극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극화된 세계질서라 하더라도 군사면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차 다극화 현상은 더욱더 진행되어 강대국들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고 있다.

다극화 추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비동맹·중립진영의 등장이다. 1955년 제10차 유엔총회에서 16개국 일괄가맹을 시발로 A·A회원국의 수는 점점 확대되어 비동맹·중립진영은 유엔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법률주의적 선악판단의 냉전논리를 거부하는 데 있다.

다극화된 세계의 구조·기능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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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極化-世界-構造-機能的特徵

평화공존적인 다극화 세계가 전개됨에 따라 강대국은 제3세계 문제에 대한 해결의 주도적 역할보다는 협상을 통한 조절이 바람직함을 절감하게 되어 세계 질서에 대한 새로운 창조적 개념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대결보다는 협상으로, 해결보다는 조정으로, 군사보다는 경제로, 개입보다는 자위를 중히 여기는, 상대적 안전보장개념이 내재화된 '닉슨 독트린'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양극화된 냉전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제로화 게임이나 일정화 게임의 관념은 다극화된 평화공존시대에서는 전적으로 부정되고 제로화 게임이나 비일정화 게임의 관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양극화된 냉전시대에는 '미니맥스(Minimax)원리'가 자명한 제로화 게임이나 일정화 게임 관념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외교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선악판단에 입각한 법률주의적 정책만을 채택한 데 반하여 다극화된 공존시대에는 미니맥스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게임의 복잡화로 승패만을 지향하는 외교의 경직성을 지양하고 상호실리를 위한 교환거래 및 타협하는 탄력적인 게임전략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때는 이익 앞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퇴화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국가이익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하였다.

전후의 세계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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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世界情勢

얄타체제로 지칭되는 냉전체제는 그리스 내전사태로 가시화되었지만 그 저변에는 역사적 필연성도 개재되어 있었다. 미·소간의 패권대립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이데올로기·체제수호 대립으로 규정할 수 있는 냉전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역사적 단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요인은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쇠퇴와 미국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거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내부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의 모순의 시정과 노동자계급의 요구에 직면하였고, 외부적으로는 두 차례의 전쟁과정에서 국토의 피폐와 경제력의 소모로 급속한 국력의 쇠퇴현상을 나타냈다. 더욱이 식민주의에 기초한 경제구조는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의 본격화로 서서히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미국은 두 차례의 참전과정에서 급속한 경제신장과 산업확대를 이루었으며, 막대한 자원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스스로 자본주의 지도국으로서 등장하였다.

두 번째 요인은 소련의 성장과 공산주의의 확산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전근대적인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물론 이는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연대적 견제에도 기인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에 가담했던 소련은 독일의 침공과 루스벨스의 제2전선전략에 의해 연합국측에 가담,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즉, 그 결과 미국의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경제·군사 원조가 투입되었고, 양측간의 타협과 양보(주로 미국에 의한)로 종전 후 소련은 그들의 야욕을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여기에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국가들은 대부분 구체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저항이 소련의 공산주의 이식기도와 맞물려 공산주의 정권수립이라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었다.

세 번째 요인은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과 독립이다. 식민지배 세력은 대부분 선진자본주의 국가였으며 그에 대한 민족해방투쟁은 당연히 반제·반식민·반서구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두드러진 식민지배 해체과정에서 소련은 세계 공산혁명전략의 일환으로써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였으며, 따라서 기득권 확보를 기도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고, 그것은 국가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대립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두 차례의 대전은 자본주의적 전쟁의 성격을 지니며, 그로 인한 구질서의 해체와 신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그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식민지배체제의 해체로 나타났고, 그 간극에서 공산주의가 급속히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본질적인 특징은 상술한 바와 같으나 그 구체적인 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 국가간에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또는 민족해방운동이 여러 갈래의 노선으로 갈라지고 좌절 내지는 분열되거나 또는 일치단합하여 하나의 진영(제3세계·비동맹회의)을 구성하지만 자유진영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진영 내부에서도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표면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바, 예를 들면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부 유럽국가들은 미국과 대립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태를 세계정치의 다극화(또는 유동화)라 할 수 있으며, 그 본질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라고 하는 양극체제 대립구조의 영속화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유동적·다원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아 전개되어 나가는 것 같다.

소련의 거대화와 공산블록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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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聯-巨大化-共産block-成立

제1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탄생한 소련은 자신과 대립되는 주위의 자본주의 국가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한편 공산주의 건설을 계속 추진해 갔으며 또한 제2차대전을 겪는 과정에서 전승국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제2차대전과 전후 격동기의 와중에서 동구·아시아 지역에 여러 공산주의 정권을 날조하여 위성국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전시 중에 조직된 광범한 반나치인민전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 소련의 세력권 내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들 동구위성국들은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철저한 사회주의적 개조작업을 수행하였다.

일찍이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가혹한 식민지지배에 시달리고 또한 파시즘의 공세를 가장 심각하게 받았던 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후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향하는 운동이 확대되어 갔다. 그 가운데 중국·북한·북베트남 등에서는 소련의 조종과 후원 아래 공산화가 이룩되었다. 소련과 이들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들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함과 동시에 일련의 통상조약·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사회주의적인 정치·경제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정치 무대에서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중국의 현저한 성장에 따른 중·소 이념분쟁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동구 위성국들의 소련으로부터의 이탈 움직임,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진영의 평화공존정책 등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처한 국제정치적 상황의 변동과 상반된 이해관계에서 오는 대립·갈등을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친소·친중·독자 노선등 분극화가 이루어져 소련의 지도국으로서의 위상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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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는 미·소를 정점으로 하는 두 개의 진영간의 대립·항쟁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미·소의 대립과 긴장 상태를 가리켜 냉전(cold war)이라고 하는데, 미·소간의 동맹관계가 적대관계로 바뀌면서 각각 자기 세력권의 팽창 또는 보전을 위해 대립해 온 간접전(間接戰) 상태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 냉전은 체제의 차이를 전제로 외교·군사·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침략적인 팽창정책으로 일관한 소련과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한 미국의 전후정책의 결과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냉전은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반서구적·반자본주의적인 소련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견제정책과 간섭전쟁 등으로 냉전의 씨를 뿌렸다고 할 수 있으며, 서구 지배층의 대소 적대의식은 일관해서 계속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는 동구(東歐)와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장기에 걸친 서구의 식민지지배 체제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소련 조종하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이 확대된 결과였다. 반면에 자본주의 체제는 정치·경제·문화·이데올로기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반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공동의 적이 없어지자 소련은 코민포름을 설립하여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강화하고, 전승국으로서의 유리한 입장과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약소국의 공산화를 획책하였다. 따라서 제2차대전 후 공산주의는 일국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복수적(複數的)인 체제로서 세력팽창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반공군사블록을 형성하여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의 세력팽창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대전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냉전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미국이 이와 같은 봉쇄정책을 전개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거대화와 더불어 동구 여러 나라가 공산화하는 상황에 직면한 미국으로서는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공산주의의 팽창은 항시 전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시달린 국민에게 새로이 전쟁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봉쇄정책을 전개했던 것이다.

(2) 미국의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요구가 있었다. 즉, 대전중에 연합국의 병기창(兵器廠)으로서 비대화된 미국의 군수산업 구조를 단기간 내에 전면적으로 체질개선을 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 경제인들은, 세계의 적화와 전쟁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미국 내의 경제체제의 점진적 전환을 위해서도, 트루먼 정부가 강경책을 취할 것을 희망했다. 그리하여 대전 후 자본주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스스로 자본주의의 수호자임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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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浮上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에 의하여 제2차대전이 종결되었으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패전국의 국토는 초토(焦土)로 변한 채 영토가 분할되거나 또는 연합국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고, 전승국도 피해가 막심하여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위기상황을 드러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 미국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받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전 중에 급속히 확대된 생산력을 바탕으로 전후 세계의 식량·공업제품의 수요를 짊어질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1776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여러 가지 역사적·자연적 혜택을 입음으로써 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19세기 말경에는 공업생산고에서 유럽 열강의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대에 유럽 열강보다 뒤늦게 세계 열강의 대열에 서게 된 미국은 유럽을 주전장(主戰場)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단번에 세계 제1의 자본주의 국가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또한 1920년대에는 경제력에서 영국을 크게 앞질렀고, 1930년대 격동기에도 정치적·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채무국(債務國)에서 채권국으로 그리고 세계 제1의 금융국가로 만들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세계 제1의 대국이라기보다는 유일한 초강대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미국의 발전은 미국경제상 자본집중의 현저한 강화를 토대로 해서 행하여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생산국(戰時生産國)을 비롯한 정부기관의 중추부에 빅 비즈니스(big business) 지도자들이 들어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국이 세계 제1급의 지도국가적 지위를 확립해 온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즉, 미국은 전쟁 특히 양차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는 점과 이와 같은 미국의 발전이 그 밖의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의 후퇴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1914년 이래의 미국으로의 공업·자본·군사력의 집중은, 전체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약체화의 과정상 일어날 수 있었던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국제공산주의·약소민족의 사상적 분열과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미국의 비중 증대가 전후 국제정치의 기본적 특징으로서, 제1차대전 후에는 먼로주의에 입각하여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지 않았던 미국이 제2차 대전후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지도국으로서 공산진영의 세력팽창을 막고 나섰다.

철의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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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帳幕

1946년 3월 영국 수상 처칠(1874∼1964)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 연설에서 "오늘날 발트해의 슈테틴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서테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횡단하여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내려져 있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말로, 소련의 폐쇄적·비밀주의적인 긴장정책과 동구의 경찰국가를 격렬히 비난한 것이다. 이것은 전후 연합국측에 의해 행해진 소련과 그 위성국가에 대한 깊은 불신감의 표현이었다.

처칠의 풀턴 연설에 이어, 1946년 9월 슈투트가르트 국제회의에서 미국무장관 번스는 독일 처리문제에 관해 소련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했는데, 여기서부터 미·소의 협조노선은 무너지게 되고 트루먼 정부는 반소·반공의 노선으로 전환한다.

봉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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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鎖政策

트루먼 독트린으로 시작되는 미국의 전후 최초의 국제전략은 봉쇄정책으로 일컬어진다. 이 정책에 입각한 사고방식은, 그 이론적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진 케난(G. F. Kennan)이 이른바 X라는 익명으로 쓴 『소련의 행동의 원천(源泉)』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즉, 케난은 이 논문에서 "소비에트제도는 역사적인 우발사건이며, 언제인가는 자본주의 질서로 회복될 것이다. 또한 소련의 사회주의 제도는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관된 비협력적 태도(봉쇄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붕괴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봉쇄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소련 주위의 전략적 지점에 군사거점망을 펼쳐두고, 동맹국에 대한 경제군사원조를 강화함으로써 소련을 영구히 포위하는 일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이리하여 트루먼 톡트린을 계기로 미국의 대소련 군사포위망의 형성이 급속도로 추진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세계에 펼쳐진 미국 군사거점은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재편성되어 갔다. 1949년의 NATO의 결성은 그 주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의 봉쇄정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고 따라서 케난의 이론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소련은 자괴작용(自壞作用)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1949년에는 원폭보유를 발표하였다.

소련의 원폭보유는 미국의 원폭독점이 봉쇄정책의 배경을 이루어 왔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게다가 1949년 10월의 중국정권의 성립도 새롭고 커다란 하나의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베를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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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問題

1945년 4월 독일과 베를린은 미·소·영·프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얄타·포츠담협정). 독일의 분할점령은 침략주의의 부활을 억제하고 신생독일의 민주화·비군사화를 달성하기 위한 시한적·잠정적 조치였으나 심화되어 가는 냉전체제하에서 급속히 현상고착 되었다. 소련에 대한 불신감이 심화된 서방 3국은 점령지구의 통합을 진행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은 점령지구에 대한 사회개조작업 추진과 동시에 수탈을 진행했다. 1947년 11월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의견의 대립으로 결렬되었고, 그 결과 독일분단은 고착되었다.

1948년 3월 서방 3국이 점령지구를 통합하여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소련 점령지구에 유입, 경제혼란을 일으키자 소련은 이를 빌미로 '베를린 4개국 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함과 동시에 이를 경제적인 위협으로 간주, 서베를린과 서방측 점령지역간의 모든 육로와 수로 통행을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강행하였다.

이는 공산주의 위성정권 수립을 기도한 음모로서 소련은 그들이 선언한 바처럼 서베를린에 대한 서방3국의 권리포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서방 3국은 공로에 의한 물자수송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양측은 군사적 대립을 격화시켜 베를린 봉쇄는 냉전체제의 심화를 상징하는 사태였다. 1949년 5월 소련은 서방 3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봉쇄조치를 해제했는데 그 이유는 동독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금수 등 경제적 보복조치가 발동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5월 서방 3국 점령지구에서 독일 연방공화국이, 동년 10월 소련 점령지구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이 각각 수립됨으로써 독일은 분단되었고 그 과정에서 베를린의 지위를 둘러싸고 양측간 분쟁이 발생하였다. 서독은 서베를린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동독은 서베를린을 독립된 정치단위로 규정하였는데, 서베를린으로 탈출자가 속출하자 1961년 8월 동베를린 경계선상에 장벽을 구축했다. 이후 동·서독은 각각 WTO·NATO의 최전위로서 첨예한 정치적·군사적 긴장을 유지했고, 베를린 장벽은 냉전체제의 표상으로 지칭되었다.

1969년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대소·대동구 관계개선)을 추진함으로써 해빙을 맞이한 베를린 문제는, 1970년 8월 서독·소련간의 불가침조약 체결로 고조되기 시작한 분위기에 편승, 1970년 3월 시작된 점령 4개국간의 베를린 지위에 관한 협상에서 1971년 9월 '베를린의 지위에 관한 4개국의 총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차적 기반을 확보했다(1972년 6월 발효). 동협정에서는 소련·동독측이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모든 통로의 통행자유를 보장하는 대신에 서독의 주장은 축소되어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유대유지와 협력만이 인정되었다(공식·헌정활동은 금지).

베를린은 전후의 분단과정에서 얄타체제로 지칭되는 동서냉전체제의 비극적 상징이었으며, 미·소·영·프 등 그 주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깔려 있던 역사적 무대였다.

롤백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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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 back 政策

아이젠하워(미국 34대 대통령, 1890∼1969)는 한국전쟁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군사비의 이상증대 현상이 발생한 상황에서 집권하였고, 국무장관 델레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그 세력전략은 강경정책(强硬政策:roll back)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롤백정책의 목적은 봉쇄정책과는 달리 제2차 대전 후에 성립한 공산주의 국가들을 방치(放置)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에 공세를 가하여 그들의 세력팽창을 단호히 분쇄하고, 모스크바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나라를 그 손아귀에서 풀려나게 하는 데 있었다. 델레스는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전면전쟁도 불사한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안정된 전면전쟁 능력의 준비에 의해서 소련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가 선택하는 장소와 방법에 의해서 보복한다는 방침 아래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취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대소련 공세라고 하는 적극적인 목표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사비의 증대를 축소하는 긴축재정의 필요성 사이에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군사정책인 뉴룩(new look)전략이 입안되었다. 이는 군사비 지출의 절약을 위해서 미국의 군비증강의 주요한 노력은 핵(核)·전략공군의 대량보복 능력의 우위유지를 지향하는 한편 동맹국 자체의 군대를 강화하여 국지적 지상전투에 대처하는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견제정책은 일단 활발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얄타협정의 포기를 암시하는 교서를 발표하고(1953년 3월 2일),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정책에 맞서서 이들의 세계 적화행동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 침략세력을 경계·억제하기 위한 군사동맹도 확대·정비되어 갔다. 파리협정에 의한 서독의 NATO 가맹 조치와 바그다드 조약(1955년 2월, 후에 중앙 조약기구로 변경) 및 동남아시아조약기구의 결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롤백정책은 소련의 직접침략행위를 견제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국지전쟁을 통한, 동남아분쟁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 분쟁과 중동분쟁에 대한 군사원조라는 간접적인 팽창주의 정책과 남하정책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하겠다.

네오 뉴룩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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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 new look 戰略

소련의 ICBM 실험성공과 스푸트니크(人工衛星) 발사 사태로 미국은 미사일 경쟁에 있어 소련의 도전을 절감하고 국내에서는 미사일 갭(missile gap) 논쟁이 발생했다. 따라서 미국은 ICBM의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 해외기지에 IRBM(중거리 탄도탄)을 배치하여 당면한 사태에 대비하면서, 그 보완책으로서 서구 및 일본 등의 전략화를 촉진하였다. 이것이 네오뉴룩 전략으로 특히 서구·일본의 역할을 중시하는 점에서 전방전략(前方戰略)이라고도 하는바, 이는 소련과의 미사일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IRBM 등의 사용에 의한 국지전쟁에의 대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의 정책이 뚜렷한 효과가 없자 신고립주의(新孤立主義) 세력은 점차 후퇴하고 힘의 외교의 실패가 비판대상이 되었다. 캠프 데이비스 회담(1955년 9월 아이젠하워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세에 응하여 워싱턴 근교의 캠프 데이비스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군축문제·베를린 문제 등에 관하여 1960년 5월에 동서 수뇌회담을 열기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은 바로 직전에 소련령에서 미국의 고공정찰용 U-2기가 격추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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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氷

1955년에서 1956년 전반에 걸쳐 국제 긴장완화의 기운이 나타나 현안의 평화적 해결이 권장되는 듯하였다. 1955년 7월 제네바에서 전후 처음으로 미·영·프·소 등 4대국 정상회담이 이루어져 ① 유럽의 안전보장문제, ② 군축문제, ③ 동서교류의 촉진 등이 논의되었고, 세계의 여론은 해빙의 무드가 조성되었다고 하여 미·소의 대화를 환영하고 그것이 계속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군사적·심리적 충격을 주게 된 것은 1957년 5월, 소련의 대륙간탄도탄(ICBM)의 실험성공과 그 해 10월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발사성공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충격은 미국으로 하여금 더욱 강경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려는 소련의 군사적인 행동은 소위 '쿠바위기'를 조성시킴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결전(決戰)을 각오케 하는 일촉즉발의 극한상황을 몰고 왔으나, 소련측이 군사행동을 중지함으로써 일단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후 중·소간의 이념분쟁과 국경분쟁 등 공산진영의 자체 분열에 따른 공산진영의 약화와 서방진영의 평화공존의 대두 등 국제정체의 변화에 따라서 미·소간의 해빙기운도 다시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중국의 핵보유는 소련의 발언권을 약화시키는 한편 중국의 존재를 국제 외교상으로 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① 닉슨 미대통령의 중국 및 소련 방문, ② 중국의 유엔가입 ③ 다나카(田中) 일본수상의 중국방문 등 일련의 세계정상 외교의 실천은 서방·공산 진영간의 해빙무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① 베트남 전쟁의 종식 노력에의 합의, ② SALT Ⅰ체결(1972년 11월 헬싱키), ③ SALT Ⅱ 협상개최 합의(1972년 11월 제네바), ④ 미·소 무기대여협정에 따른 변제합의(1972년 10월 19일 미·소 통상협정의 체결로서 2차대전 중 소련이 미국에 진 151억 달러의 무기대여 부채를 7억 2,000만 달러만을 변제하고 청산하기로 합의), ⑤ ESCS 개최합의 등 평화공존과 전쟁방지 노력의 커다란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케네디의 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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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dy-大戰略

1961년 집권한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 정책을 표방, 대내적으로는 복지국가의 건설과 고도의 경제성장을,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군비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의 실현을 추진했는데 그의 이러한 세계전략은 '대전략(Grand Strategy)'이라고 일컬어진다.

즉, (1) 미국의 군사적·정치적·경제적 힘의 재편강화를 위해 ① 군사적 강화책:한편으로는 공산진영의 핵전쟁 도발에 대비하여 방어·공격의 태세를 준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하여 핵전쟁·통상(通常)전쟁 및 게릴라전의 세 가지 전쟁에 대비하는 미국 사상 최대의 안보태세를 갖추었다. 예컨대 ㉠ 1961년 7월의 베를린 장벽구축에 대한 군사조치, ㉡ 1962년 북베트남군 공격에 대한 베트남 군사원조와 군사개입, ㉢ 1962년 5월의 타이와 라오스의 공산게릴라 소탕을 위한 군사원조, ㉣ 1962년 10월의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을 설치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한 해상봉쇄 등을 열거할 수 있다. ② 경제적 강화책:㉠ 군비확장과 대의원 조비의 증액, ㉡ 대기업을 위한 신규투자, ㉢ 소비시장 확대를 위한 정부 재정지출의 증대, ㉣ 달러방위를 위한 바이 아메리칸(미국물품 우선구입), 쉽 아메리칸(미국선박 우선사용)정책, ㉤ 수입제한의 강화와 동맹국들에 대한 민주화의 요청, ㉥ 케네디 라운드(관세일괄인하)와 해외원조에서 우방국 부담의 요청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전개하였다. ③ 정치적 강화책:㉠ 서방진영의 대동맹으로서의 대서양공동체의 결성, ㉡ 미국의 지도적 지위의 재건에 그 중심을 두었다.

(2) 공산진영의 세력팽창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그들 자체의 내부적 모순과 반목을 이용한 상호견제, 즉 공산진영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견제책의 일환으로서 ① 동구위성국과 소련간의 반목, ② 중국과 소련간의 이념분쟁을 중시하였다.

케네디는 이와 같이 전면전쟁의 위험성을 최대한도로 피하면서 서방진영의 번영과 세계평화의 유지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가이익을 침해하려는 공산측의 공세에 대해서는 핵무기에 의한 보복도 불사한다는 강력하고 양보 없는 대결자세로 임하였다. 그런 한편 국가적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대담한 교섭과 협정으로 문제해결에 노력했다.

쿠바 위기 이후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의 정책을 환영하며 미·소 협조를 내세워 워싱턴·모스크바간의 핫라인(hot line)을 설치하였고, 핵확산 저지를 목적으로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의 조인(1963년 8월) 등을 추진하였다.

(3) 식민지체제의 세계적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신생독립국가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하여 ① CENTO(중앙조약기구)·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NEATO(동북아시아조약기구)등의 군사동맹정책, ② 쿠바사태에 있어서와 같은 강경조치, ③ 베트남 문제에의 적극 개입, ④ 콩고·라오스 내전에의 개입, ⑤ 대규모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 등의 활동이었다.

이와 같은 대전략을 수행하면서 케네디는 평화, 자유, 진보, 인간의 존엄 등의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군사·외교적 수단과 함께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한 사상·문화교육을 중시하였다. 요컨대 케네디는 공산진영의 자체 불화를 이용하는 한편 미국의 자체 역량을 보강하는 양면정책을 전개했던 것이다.

평화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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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共存

평화공존이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상이한 사회·경제 체제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으며, 이념체제를 달리하는 국가간의 관계를 처리하는 경우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양체제의 평화공존 가능성은 일찍부터 동서 양진영의 지도자에 의해 가끔 강조되어 왔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때 그때의 자국의 이해관계와 국제적 정세변동에 대처하는 외교적인 발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조성된 때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1970년은 거시적 안목에서 볼 때 동서화해의 지향 또는 냉전체제의 지양을 꾀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해였다. 1962년 미·소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전기(轉機)로 화해를 지향하면서부터 큰 테두리가 잡혔고, 그 후 점차 주변으로 파급되었던 냉전체제 지양의 물결은 1970년대에는 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닉슨 대통령은 월남전쟁이 불러일으킨 미국 내의 정치·사회의 혼란과 의견대립 해소, 또 아시아 여러 국가는 물론 유럽 및 공산권과의 관계를 포함한 외교전반에 걸친 혼란을 수습하고자 내외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한 결과 1970년 2월 18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대결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라는 정책전환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의 등장은 공산진영의 지도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흐루시초프 스스로가 서방진영과의 '냉전 대립에서 평화공존으로'라는 소련 외교의 전환을 선언하게 하였으며, 이에 호응한 서방진영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외교공세로 마침내 동서간의 현안문제였던 '제2차 세계대전의 사실상의 종결'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물론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동서간의 평화공존공세는 피차간의 군사면의 자체 평가와 세계여론 때문에, 일단 전쟁방지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물적 증거를 남기고자 애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① 1970년 서독과 소련과의 조약, 서독과 폴란드 조약, ② 브란트·브레즈네프 회담(1971년 9월 17일)에서의 동·서독 동시 유엔가입 협의와 유엔안보회의 개최, ③ 닉슨의 중국방문, ④ 닉슨의 소련방문과 SALT I 가조인(1972년 5월), ⑤ 다나카 일본수상의 중국방문과 중국·일본간의 제2차대전 종결 합의 등은 동서 평화공존의 행동적인 표현인 동시에 전쟁방지를 위한 동서간의 노력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공산주의 세계의 분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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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主義世界-分極化

공산주의 세계는 체제 내부의 제국과 제민족을 정치적·경제적으로 단결시키고, 협력과 상호원조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국제관계의 기본원칙으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론적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즉, 공산주의 각국 간에는 자연적·역사적·사회적 제조건에 의한 특수성이나 일정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는 "사회·경제체제와 계급적 본질을 공통으로 한다는 점, 상호의 지지와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서 싸운다는 이해와 목표를 같이 한다는 점,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하는 각국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단일의 공동체로 결합되어 있다"(모스크바 선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며 실제 국제정치에서는 개개의 구체적인 문제점을 둘러싸고 공산주의 제국간의 견해와 행동이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견해 및 행동의 불일치가 때로는 적대적 모순으로 발전하여 국제연대와 상호원조를 구실로 하는 내정간섭의 중지, 자주성과 평등의 존중, 그리고 자유화의 요구 등으로 대두하자 소련은 이를 억압하기 위하여 무력 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헝가리 의거, 체코의 자유화 운동, 폴란드 자유노조 파업사태 등이 그 실례이다. 또한 이러한 모순의 발전은 공산진영간의 국경분쟁을 일으켜 무력충돌까지도 유발시켰는데 중·소국경분쟁이 그 예이다. 결국 이러한 공산주의 진영 내부의 분열과 적대는 공산주의 진영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국제관계의 기본 이념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스스로 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① 전후 격동기에 월등한 지위를 이용한 소련의 군소 사회주의 제국에 대한 부당한 위압, ② 공산주의 체제 내 각국의 특수성과 차이점에 의거한 실질상의 불평등, ③ 중·소 분쟁의 격화로 화해가 불가능해진 양대 세력권의 분열과 이에 개입된 서방진영간의 삼각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히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거대한 자본주의 세계에 의해서 포위되어 왔던 소련의 지배자들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고 낙후된 러시아 봉건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적으로는 중국업의 급속한 재건·확대와 그것을 위한 강력한 국가체제의 보장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스탈린(1879∼1953)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적 지배의 습관을 그대로 계승한 중앙집권적·권위적 통치방법이 강화되고, 이것이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강화와 결부되어 경직화된 관료적·독재적 지배를 조성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의 지도자에게는 동유럽 제국의 공산주의 건설과 강화도 긴급한 과제였다. 공산주의 세계의 성립 초기에 동유럽제국과 소련의 관계는 주로 소련으로부터의 일방적 원조 관계였으며, 또한 소련의 월등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동유럽제국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강력한 위압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정치적·경제적 원조의 과정에서 자국(自國) 중심의 경제체제를 다른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한편 소련의 국가적 이해가 곧 공산주의 체제의 이해라는 이른바 대국주의(大國主義) 또는 독선주의를 자행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은 미국을 위시한 서구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 대결한다는 명분하에 위성국가인 동구 여러 나라에 대한 경제원조를 이용하여 자국 중심의 국제분업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자본주의 제국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공산주의 국가들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계속 군대를 동구 공산주의 제국에 주둔시켰다.

동구 공산주의 제국은 대소관계에서 이와 같은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종속하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대국 추수주의(大國追隨主義)에 빠져 결국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진 공산주의 제국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 지배권도 영구불변의 것일 수는 없었다. 종속 제국의 민족적 자각은 소련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며, 각국의 주체적 제조건에 맞는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먼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가 소련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나 독자노선을 채택하고, 루마니아도 이에 뒤따랐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헝가리 의거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도 이런 움직임의 일환이라 하겠다. 그리고 소련의 절대적 지배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마침내 양국간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까지 악화시켰으며, 이는 공산주의 진영 내부에서의 소련 지배권의 상대적 약화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소종속적 관계에 있던 국가들의 독자노선 추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중·소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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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論爭

1959년의 중·인 국경분쟁(中·印國境紛爭)을 계기로 중·소 양국간에 국제정치의 중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이 비로서 표면화되었고, 1963년에 이르러서는 이들 양국 사이의 공공연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진전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양국의 심각한 대립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오늘날에 명백히 드러난 바에 의하면 중·소 양국간의 대립은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논점의 하나는 스탈린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동 대회의 흐루시초프 비밀보고는, 스탈린 시대의 과오를 주로 스탈린의 개인적 자질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정치적으로 스탈린은 전면적으로 매장시킨 데 반하여 중국공산당은, 이미 1956년 봄에 공식 견해를 통해서 "스탈린의 과오는 그의 업적에 비하면 제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후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다는 경고를 하였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2개의 회의에서 중·소 양국은 스탈린 비판에 대한 논쟁 이후의 양국간의 이견조정을 위해 협의하였다. 그러한 '모스크바 선언'을 기초할 때도 양국간에 몇 가지의 원칙적인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첫번째 쟁점은 소련공산당이 제20차 대회의 방침을 그대로 선언의 주요 내용으로 삼으려는 데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반발이고, 두 번째 쟁점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의 문제이며, 세 번째의 쟁점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팽창에 대한 평가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쟁에서 중국은 소련의 비교적 온건한 평화공존·전쟁회피 노선에 대하여 그것은 현대판 수정주의이며, 국제공산주의 운동 및 공산주의 제국간의 단결의 근원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오히려 중국의 강경노선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소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이론투쟁으로 나타났으나 그 이면을 보면 역시 새로운 강국으로 성장한 중국과 소련간의 주도권 싸움 내지 국가 이익을 전제한 양대 세력의 대결이었다.

중·소 분쟁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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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紛爭-影響

중·소간 분쟁은 공산권과 서방세계, 그리고 양자간의 관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소련의 지도국가론에 지배되어 왔던 공산주의 세계는 중국이라는 '새로운 중심'의 부상으로 탈소친중노선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구권의 독자노선 국가들은 새로운 구심력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비동맹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여 미·소를 패권주의 국가로 동일시하였고, 그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 세력의 후원자임을 자처하였다. 그 결과 공산권은 친소·친중·독자노선(등거리 외교)으로 분화되었으나 중국은 내부적인 권력·노선투쟁을 겪게 된다. 즉, 중국공산당의 성립이 소련의 지도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스탈린 비판에 대한 반발은 당연하나, 소련의 지도권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위상을 구축하는 데에는 내부적 저항이 있었다. 그 저항세력은 2파로 나눠지는데, 그 하나는 친소파이고 다른 하나는 교조주의적 회귀에 반발한 실권파(개혁세력)였다. 두 세력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결합, 마오쩌둥에게 도전했으며, 그 결과 '문화대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권력투쟁이 일어나 친소파와 실권파는 축출·거세되었다. 문혁을 승리로 이끈 마오쩌둥은 그의 노선을 일층 강화, 마오쩌둥주의(Maoism)를 완성시켰고, 이 마오이즘은 중국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중소분쟁은 두 나라의 서방세계와의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중·소는 공산세계에서의 위상확립과 동시에 서방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는데, 이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자국의 이해자를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가 1970년대의 동서해빙·데탕트로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을 걸고 미·일·유럽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며, 소련 또는 대서방 평화공세를 가시화시켰다. 그 부분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중·소의 군사적 긴장이었는데, 국경분쟁으로 국경전면의 군사력을 강화한 중·소는 그로 인해 배후의 공백이 발생하자 서방측과의 긴장상태를 완화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방측으로서도 양국의 불화를 이용해 중국을 정식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었고, 군사적 긴장완화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등거리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서방측의 대공산권 연대에도 틈이 나기 시작했고, 개별적인 국가이익 경향도 나타났다.

중·소는 첨예한 대립을 견지하면서 각각 자국의 세력권을 통한 대리전을 지속했는데, 인도차이나 3국 공산화 이후 발생한 베트남·중국전쟁,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사태 등도 그 범주에 속한다.

모스크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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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kva 宣言

스탈린 체제에 대한 누적된 불만으로 말미암아 폭발한 헝가리 의거에 대한 소련의 무력개입이 있은 직후 소련은 공식성명을 통해서 과거 공산주의 제국간의 내부적 모순 해결에서 소련이 대국주의적 편향(偏向)에 빠져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동구제국의 대표단과 일련의 협의를 거쳐서 1957년 11월 공산주의 12개국의 공산당·노동자당 지도자회의와 64개국의 공산당·노동자당 회의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이 2개의 회의에서 채택된 '모스크바 선언'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건설의 공통의 원칙을 정식화하고, 각국의 당이 이를 각국의 구체적인 여러 조건에 응해서 자주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소련군의 진주와 이를 합리화 하기 위한 브레주네프 독트린에 의해서 공문화(空文化)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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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zechoslovakia-自由化運動

1968년 8월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 가맹국 5개국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침입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기치로 한 자유화 운동은 저지당했다.

노보트니(1904∼1975, 1953∼1968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는 스탈린 시대부터 흐루시초프 시대에 걸친 소련의 대국주의·독선주의 노선에 기계적으로 추종했다. 그 결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여러 분야에 수많은 난제가 누적되었으며 마침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를 심화시켰다. 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노보트니가 실각하고 개혁파 지도자인 두브체크가 집권하여 자유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재생운동은 전체적으로는 과거의 관료주의로부터 자유주의·분산주의로 가려는, 즉 주체적이고 우익적인 경향을 지닌 대소투쟁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맹목적인 대소추종노선을 재검토하고, 자주독립의 입장에서 자국의 역사적 제조건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하려는 적극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군사개입은, 그들이 말하듯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분산주의와의 투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소련에 대하여 자주적인 방향을 탐구하기 시작한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소련에 추종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무력으로라도 지배하겠다는 저의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제국간의 수정주의·대국주의·사대주의가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노선과 행동이 커다란 모순을 축적해 가고 있으며, 동구제국에 자주독립의 노선을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새로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동구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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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歐-分裂

소련의 지도력 동요와 함께 대두되기 시작한 동구제국의 자위적 내지는 독자적인 행동 가능성은 1956년 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의 수정주의(修正主義) 노선의 불가피성을 언급한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이루었다고 하겠다. 즉, 이를 계기로 소련은 객관적으로나마 사회주의의 대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경제·정치·군사면에 걸쳐서 위성국화의 과정을 밟아온 동구제국으로 하여금 일원주의적인 지배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 각자 독자적인 노선을 선택하는 다원화 경향을 촉진시켰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두드러졌던 공산권 내의 다극화(多極化)추세를 감안해 볼 때 동구제국의 다양한 움직임은 독자적인 국가이익 추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소련 중심의 경제관계에서 탈피하고, 신경제제도하에 관리·계획화의 개선을 서두르고 있는 데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1966년 4월 23일 티토와 차우셰스쿠 사이의 공동 코뮈니케는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의 연대를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소·중국의 지도권을 거부하고, 독자성을 선언한 것으로 공산권 내부에서의 국내주의(Domesticism) 우선의 경향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자노선 아래 경제자유화를 꾀해 온 유고는 1965년에 신경제자유화계획을 채택했다. 유고의 이러한 경제정책은 동구제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루마니아는 1964년 소련 중심의 코메콘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1965년 미·영 등 서방제국으로부터 공업시설의 도입 등을 포함하는 신공업화(新工業化)의 5개년계획을 추진하였다. 1964년을 전후하여 동독·체코·헝가리·폴란드·불가리아 등도 신경제제도를 채택하고 관리와 계획화의 개선을 강구하고 있는바, 이들은 주로 품질의 향상, 재고조정 및 공급구조와 수요구조의 불일치의 조정에 노력하고 있다. 한편 이들 제국은 제한된 코메콘 안에서의 불균등한 경제협력관계를 비판하면서 각국마다 각종 전문화 계획의 이점을 평가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의 연구와 협력추진을 위한 제도적·정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동구제국들은 서방협력이라는 경제적 욕구와 WTO·COMECON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교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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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條主義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은 스탈린 격하의 필요조건으로서 수립된 우경화현상이었다. 이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1894∼1971)의 수정주의·대국주의 노선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을 통해서 자신의 전제적 지배의 확립을 꾀하는 탈권투쟁과 스탈린식 개인숭배를 결합한 마오이즘을 완성시켰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의 대외노선으로서 반미·반소 통일전선이 제창되어 중국 공산당 종래의 주장이었던 반제국주의 제통일전선 및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단결 강화의 노선이 방기(放棄)되었다. 중국은 노선전환의 근거로서 소련을 위시한 일부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했으며, 미·소 신성동맹이 결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근거에서 좌파(左派)당 결성의 필연성이 제기되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좌파당의 혁명이론으로서 그들 나름의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한 인민전쟁 만능론, 폭력혁명유일론이 제창되고, 이것은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이라고 절대화하였다. 또한 인민전쟁이 세계공산주의 혁명의 전망에 관한 그릇된 도식(圖式)으로 확대되어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세계의 농촌으로 규정하고, 이 지역의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세계 혁명의 무력으로 간주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중국 내부의 반마오쩌둥 세력을 제거하여 마오쩌둥의 전제적 지배를 일층 강화시키는 한편 공산진영에서의 중국의 지도력을 강화하고, 공산진영의 지배와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소련을 적대시한 나머지 소련이 자본주의로 변질해 버렸다고 하는 주장이나 미·소 신성동맹론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논리이며, 그것은 다극화해 가는 국제사회에서 중·소의 화해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중·소논쟁은 세계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공산주의 각국의 국가이익 우선 때문에 야기된 공산주의 세계내부의 모순관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의상의 논쟁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중국의 승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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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承認問題

중국의 대표권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국제법상 국가는 국가승인과 정부승인에 의해 대외주권(外交主權)을 인정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국민당이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중국은 본토를 차지한 베이징 정부(공산당)와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내전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중국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5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갖는 데 있었으며, 중국의 국가대표권을 누구에게 부여해야 하는가가 국제적 쟁점이었다.

미국 등 서방국가는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자 국민당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동시에 베이징 정부에 대한 봉쇄정책을 추진했다. 냉전상황하에서 중국대표권 문제는 서방측과 공산측간의 최대쟁점이었으나 베이징 정부는 국내의 사회주의 개조작업의 수행으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사실상 냉전체제의 산물로서 상황이 바뀌었더라면 물론 반대의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중·소 분쟁 이후 베이징 정부는 죽의 장막을 걷고 국제정치 무대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후진성을 극복하지는 못했으나 무한한 잠재력과 다섯 번째 핵보유국가로서 그 위상은 상당하였다. 이 때부터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서방·공산측간 중국대표권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표결사태로 이어졌으나 국제연합의 세력분포상 압도적인 서방측의 승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방측 내부에서도 국제정세 흐름에 맞추어 베이징 정부 승인의 당위성이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했는데, 문제의 핵심은 베이징 정부의 중국대표권 승계란 타이완 정부의 정부승인 취소를 의미함에 있었다.

1964년 1월 제3노선(弟三路線)을 표방한 드골의 프랑스가 베이징 정부를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1969년에는 이탈리아·캐나다·벨기에 등도 뒤따랐다. 그리고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문화혁명(文化革命)을 계기로 1966년 3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서 베이징 정부에 대한 고립정책의 중지가 제기되었으며, 그 후 행정부에서 고립화 없는 봉쇄를 제창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닉슨은 베이징 정부의 고립이 미국에 별로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베이징 정부와의 관계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립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라는 외교노선(外交路線)을 주장하고,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라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닉슨은 1971년 3월 미국인의 대중국 여행제한을 철폐하고, 4월에는 중국과의 통상제한을 완화하기 위한 5개항의 대중국 개선조치를 발표했다. 또한 7월에는 중국방문계획을 발표하였다. 마침내 미국은 제27차 유엔총회에서 국민당 정부의 유엔축출에는 반대하나, 베이징 정부가 유엔에 가입하는 문제와 안보 상임이사국이 되는 문제에는 찬성한다는 태도를 밝힘으로써 종래의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일대수정을 가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도 대미·대유엔 정책에서 큰 전환을 나타냈다. 1971년 12월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 정부의 중국대표권 승인과 국민당 정부의 축출을 골자로 하는 알바니아안이 76:35(기권17)로 통과됨으로써 중국대표권 문제가 종결되었다. 그 후 미국은 대중국 관계의 정상화를 계속 추진하여, 1972년 2월에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과 회담하고, 이어 일본·서독 등 많은 나라들도 잇달아 중국을 승인하게 되었다. 특히 1972년 9월 26일 일본은 다나카 수상의 중국방문을 통해 미국보다 앞질러 일본·중국간의 국교정상화에 합의했다.

서구 공산당의 탈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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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歐共産黨-脫蘇宣言

국제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모스크바가 코민포름의 해체 및 중국과의 불화 등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자 서구 공산당들은 1970년대 이후 자주노선을 부르짖으며 탈소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 체제의 다극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 탈소선언은, 고도의 산업자본주의 속에서 자유 민권 사상의 전통을 누려온 서구 선진국의 국민들에게는 기존의 혁명이념이 아닌 보다 새로운 혁명론이 필요하다는 데서 나오게 되었다. 무력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에서 의회와 선거를 통한 집권, 시민적 자유와 종교까지 보장하는 통치 등으로 변모한 서구 공산당의 혁명 노선은 크레믈린과 정면대결했으나, 결국 1976년 6월 동베를린에서 열린 서구 29개국 공산당회의를 계기로 소련의 헤게모니를 부정하고 각국 공산당의 자주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도 태도를 바꿔 각국 공산당이 지닌 견해 차이는 발전단계의 상이점이 낳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서 서구의 탈소노선을 은연 중 인정하게 되었다.

서유럽 공산당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 3국의 공산당이 채택하고 있는 자주노선, 즉 유로코뮤니즘은 역사적 타협에 가까운 자구책으로서 소련, 동구 친소국가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비록 소련형·동유럽형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을 테제로 사회주의 우파계열과의 다각적인 접근과 협력을 도모하였으나 사회주의 퇴조라는 역사적 조류에 밀려 서서히 그 지지를 잃어갔다.

체제를 초월한 평화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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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制-超越-平和共存

서방 세계나 동방 세계 모두는 내부 모순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동·서 양진영의 사회체제상 양자의 고민의 원인이나 성격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 위에 동·서 세계는 각각의 내부에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단결을 촉구하고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서방측의 경우에는 개개 국가의 이해가 아무리 격심하게 대립되더라도 자본주의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는 적에 대해서는 싫든 좋든 힘을 합쳐서 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가 세계적 체제의 하나가 되고 식민지지배 체제가 붕괴된 역사적 조건하에서는, 서방세계가 힘을 합쳐서 그에 대항해 나가는 길 이외에는, 자본주의의 생존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이 동방측도, 그 내부에 어떠한 모순이 있더라도 공산주의 그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적에 대해서는 힘을 합쳐서 대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서 세계는 다같이 이를 의식하고 있으므로, 한편으로는 내부적(상극)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히 단결을 위해 노력하고 통일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양 진영의 내부 분화가 심화되자 각 국은 자기진영의 내부에서 탈피, 동·서세계를 초월한 평화공존을 이룩하려는 현상을 보였다. 소련과 미국의 협조가 가시화되고, 드골이 독자노선을 취하는 가운데에서 프랑스의 중국공산당 정부의 승인이 이루어졌으며, 루마니아 등의 동구제국이 소련의 지배에서 자립하려고 서방측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낸 것 등이 그 예이며, 국제정세의 급변에 따른 중국공산당의 국가대표권 획득(1971년 10월 26일)과 닉슨의 중국방문(1972년 2월)·소련방문(1972년)은 평화공존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실증하는 사례였다.

다른 한편 전후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된 동·서 양진영의 격렬한 대립이 근래에 와서는 더욱 복잡하게 되어, 세 갈래 네 갈래의 대립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미·소 협조와 미·중 접근은 제각기 속셈을 달리하는 표면적·부분적인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서방진영과 공산진영간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적 모순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역사과정을 규정하는 문제를 근거에 두고서 국제정치의 여러 현상을 분석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다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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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本主義世界-多元化

자본주의 국가도 자체 분화하기 시작했다. 즉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주축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미국이 상대적으로 후퇴하였고, 대신에 EC(유럽공동체)·일본이 그 공백을 메움과 동시에 독자적인 권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경제적 범주에 그치며,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배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미국은 두 차례의 대전으로 국가 산업구조가 정비되고 비약적인 생산력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거기에 더하여 천혜의 국토조건과 풍부한 국내시장 수요를 바탕으로 세계 제1의 경제력을 보유한 공업생산국가로 부상했으나, 과거 세계의 중심을 자처했던 유럽은 전쟁으로 인한 피폐와 식민지배체제(이것이 유럽경제의 기초였다)의 붕괴로 급속히 쇠퇴했고, 서독과 일본은 전쟁도발국이자 패전국으로 국가재건이 요원했다. 전후 소련이 세계 공산혁명전략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이들 국가의 재건은 오랜 기간 정체되었을 것이다. 즉, 소련이 공산주의 확대 기도를 가시화하자 미국은 스스로 자본주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자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결속과 연대를 추진하는 동시에 그들 국가의 전후 복구사업지원을 위해 대대적이고 막대한 경제원조·투자를 실시하였다(마셜 플랜·OEEC). 서독과 일본도 그 수혜대상에 포함되었으며, 양국은 이를 기초로 국민적 노력과 특수에 힘입어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급속한 경제부흥을 달성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들 국가들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마침내 독자적인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이러한 흐름은 서독의 성장과 영국의 쇠퇴,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미국 편향 거부와 유럽통합 움직임으로 집약할 수 있다. 여기에 일본의 경제력 성장은 규모와 속도에 있어서 가히 기록적이었으나 정치·군사적인 측면을 배제한 일본의 경제일변도 정책은 비난의 소지가 많았다. 반면에 미국은 정치·군사적인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경제적으로는 과다한 군사비·대외원조비 부담에 생산성저하, 산업구조정체, 임금·물가상승 등의 국내적 악재와 국제경쟁력 약화, 국내시장 잠식 등의 대외적 악재까지 겹쳐 서서히 침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로 미국은 정치적 타격은 물론 도덕적인 논쟁에까지 휩쓸리게 되었고, 가시화된 경제침체로 스스로 그 위상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자본주의 세계는, 경제적으로는 미국·EC·일본·신흥공업국(NICS 등)으로 다원화되고,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서독이 독자적인 위상을 굳히는 현상을 보였다.

이에 미국은 과거와 같은 1인 부담을 지양하고 동맹국들에 대해 분담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닉슨 독트린'이 그 최초의 형태이며, 뒤이은 '닉슨 라운드'가 경제부문에 대한 구체적 조치로서 EC의 블록화 방지와 일본의 수입제한장벽 제거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다원성을 더욱 가속화시켜 정치·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동서 진영간의 경제교류를 촉진하는 결과를 야기시킨 가운데 1973·1979년 2차례의 에너지 파동은 자본주의 경제권에 일대타격을 가하였다.

197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지속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서독과 일본은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나타냈다. 특기할 사항은 EC에서의 영국의 퇴조와 위상저하 현상이었다. 서유럽 국가중에서 과거 그 중심적 위상을 구축했던 영국은,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유럽의 독자노선과 통합추진 움직임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나타내면서도 친미적 편향성을 탈피하지 못했고, 국가경제구조 또한 과거 식민지배체제를 기초로 한데다가 사회보장적 측면이 강한 정부주도형이어서 1970년대말 북해유전의 상업생산이 본격화될 때까지는 침체일로를 걸었다.

'무역전쟁'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자본주의 세계의 갈등은 주로 선진공업국 대 개발도상국, 미국·EC 대 일본·NICS, 궁극적으로는 선발자본주의에 대한 후발자본주의의 권리회복 및 갈등이라는 대립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세계는 군사분야에서는 대미의존적일 수밖에 없으나,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다원화되어 그 역할을 미국·EC·일본이 분담하고 있다.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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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

과거 식민지배체제를 경제적 기초로 하여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던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국력의 소진과 국토의 피폐를 당하였고, 식민지배체제의 붕괴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더욱이 전후 동부 유럽이 공산화되고 소련의 위성국화됨으로써 분열과 이데올로기적 대치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서유럽 국가들은 전쟁피해복구와 정치·군사적 대치라는 내외의 시련 앞에서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적 보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마셜 플랜을 기초로 한 OEEC(OECD)·EPU(EMA)를 NATO가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미국 주도의 서유럽정책은 서유럽의 전쟁피해복구와 경제부흥, 소련의 군사적 위협저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얄타체제의 심화나 자본주의의 불균형발전 등 부정적인 영향도 많았다. 특히 미국의 독선적 태도는 서유럽국가 내부의 반발과 갈등을 심화시켰는데, 1950년대 초 서유럽의 복구와 재건이 진전되자 자체적인 협력과 대미편향 탈피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51년 7월의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1957년 3월의 유럽경제공동체조약(EEC 조약), 1958년 1월의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에 입각한 일련의 움직임은 사실상 미국의 지배에 대한 유럽의 자주성 회복이고, 서유럽국가들의 복구와 재건이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서유럽은 내부적인 변화와 갈등을 겪게 된다. 유럽은 정치역학구도상 영·프·독 3대권과 중립권으로 나눠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영국이 친미노선을 기조로 유럽의 중심적인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드골이 '프랑스의 영광과 유럽인의 유럽'을 기치로 대미편향탈피 독자노선과 서유럽 통합을 주장·추진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영국(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앙숙이었다)을 견제하는 대신에 서독에 접근했으며, 서방측의 최전위로서 경제재건과 재무장을 이룩한 서독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국가통일이라는 지상과제 달성과 전후 신질서에서의 위상확보를 위해 프랑스의 제의에 응하면서 독자적인 권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ECSC·EEC·EURATOM은 바로 프랑스와 서독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이에 대해 영국은 영연방 제국과의 관계를 과신하여 그에 대해 초기에는 냉담하고 무관한 입장을 취하였었다.

그러나 3공동체가 계속적으로 확대 발전하면서 서유럽에서의 영국의 지지기반이 침식되어가자 3공동체 비가맹국가를 주축으로 '유럽 자유무역연합(EFTA)'을 결성, EEC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EFTA는 북유럽에서 지중해까지 산재해 있는 국가들의 결합체인 데다가 주축인 영국이 영연방제국과의 유대에 신경써야 했고, 결합 자체가 공고하지도 않아 침체되기 시작한 반면에 프랑스·서독을 주축으로 한 EEC·EURATOM·EURATOM·ECSC는 지속적인 확대 발전을 거듭, 1967년 7월 유럽공동체(EC)로 통합되었다. EC는 경제적 지역주의에 기초한 유럽 지역협력체로서 제도적 통합에 의한 역내경제 블록화와 공동시장형성을 제1의 목표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내 자본자유이동, 공통관세, 공동의 경제정책추진을 거쳐 단일통화제도를 달성하고, 그 결과로 도출된 경제·통화동맹을 발판으로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는 데 최종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에 고립화의 위기를 느낀 영국은 자신이 주도한 EFTA를 탈퇴하여 EC가입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의 견제로 1973년 1월에야 성공하였고, 뒤이어 덴마크도 EFTA를 탈퇴, EC에 가입하였다(포르투갈도 1986년 1월 EFTA에서 탈퇴, EC에 가입하였다).

이후 EC는 유럽의 독자적 경제·정치 공동체로서 숱한 내부적 분열과 난항을 겪으면서도 그 위상을 확대, 1990년 1월 현재 서유럽 12개 국가가 가입되어 있으며 EFTA는 형식적인 존재로서 EC로의 통합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 1979년 3월 유럽통화제도(EMS)를 발족시켜 경제통합에의 진일보를 이룩했으며, 동년 7월에는 유럽의회(EP) 직접선거를 실시, 정치통합을 위한 역사적 진보를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도 영국은 서독·프랑스와 의견 차이를 나타내 위상격하 현상을 보였고, EC는 미국과 통상·무역정책에 있어서 대립하기 시작했다.

1973년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의 제창으로 1975년부터 시작된 서방 선진7개국 정상회담(SUMMIT)에서도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일본·이탈리아·서독·EC 등 실세에 포위된 듯한 양상을 나타냈으며, 1972년 11월부터 시작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미·소의 각축장이었으나 소련이 유럽국가로서의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동구권의 공산주의 붕괴와 독일 국가통합이 달성되자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지배 상징인 NATO를 CSCE로 대체시키려는 노력을 구체화시켰다. 그 결과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친미적인 성향을 나타냈던 영국도 노선을 전환하여 유럽주의의 시대적 조류 앞에 순응해야 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은 유럽주의로 회귀, 독자적인 통합을 일층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의 상대적 관계일 뿐,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정책에서는 양자가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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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再武裝

1990년 11월 가이후 수상이 자위대의 페르시아만 파견을 골자로 한 '국제연합 평화협력법안'을 국회에 제안했을 때, 여론의 반발과 한국·중국 등 과거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경험을 갖고 있는 주변국가들의 비난이 속출했다. 또한 그 강도만큼이나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에 대한 우려와 충격의 파장도 엄청났다. 즉, 세계 1위의 경제력과 과학기술 수준을 보유한 일본이 헌법상의 전수방어(자위권)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가시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세계는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지도적 역할을 거부하고 미국·일본·EC, EC는 다시 영국·프랑스·서독으로 다변화되었으며,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일본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할 때 국제정치역학은 경제력에 의해 조율되며 군사력 역시 이에 기초한다. 그런데도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일본의 위상은 미미하며 일본자위대의 외형적인 군사력은 세계 10위권 밖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그 외견적 양태 그대로 '경제동물'이라고까지 지칭될 만큼 '경제대국'으로서만 인식되어 왔지만 얼마든지 군사대국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태평양 전쟁의 도발자인 일본은 '진주만을 잊지 말자'는 미국의 보복으로 폐허화되었다. 실제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수행에서 일본의 원시시대화를 상정했을 만큼 초토화 공격을 감행하였다. 종전 후 2가지의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일본의 현재는 없었을 것이다. 그 첫번째 사건은 중국대륙의 공산화였다. 즉, 전후 미국은 대아시아 전략의 파트너로써 중국(국민당정부)을 상정하였는데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자 그 상대를 일본으로 변경, 벌거숭이 상태였던 일본은 재기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무장에 기여한 것은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즉, 일본은 전쟁특수에 힘입어 경제재건의 기틀을 구축했으며, 1950년 8월 주일 미군의 한국 파병으로 생긴 치안공백 복구를 목적으로 맥아더(점령군 사령관)가 '국가경찰 예비대' 창설을 명령(GHQ 지령 또는 맥아더 메모)함으로써 자위대의 모태가 탄생하였다.

한국전쟁이 진행되면서 동서냉전체제가 심화되자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결정,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비공산국가(49개국)와 일본의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켰으며, 동시에 '미·일 상호안보조약(MSA)'을 체결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파트너임을 명백히했다. 국가경찰 예비대는 1952년 보안청으로 승격되었다가, 1954년 방위청설치법, 자위대법이 제정·공포되자 동년 7월 1일 육상·해상·항공 자위대로 정식발족하였다(그러나 일본은 국가경찰 예비대 창설을 자위대 창설기점으로 하고 있다). 1947년 5월 공포된 신헌법(平和憲法) 제9조에 의하면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으며 오직 자위권만이 인정되고 있다. 이는 군국주의 침략주의의 부활을 경계한 노력의 결과인데, 1953년 11월 당시 수상이 자위대의 본질에 대한 중의원 질의에 대해 자위대는 '전력 없는 군대'라고 답변하였다. 지금도 일본은 방위청을 'Japan Defence Agency', 자위대는 'Japan Defence Force'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일본의 방위전략은 1970년대 '소요 방위력구상(적의 위협에 상응하는 방위력)'에서 1980년대에는 '기반적 방위력구상(소규모 침략은 독자적으로 배제)'으로 발전했으며, 1990년도에는 방위예산규모가 4조 2천억 엔에 이르고 있다(이는 미국에 이어 서방세계 2위이며 한국의 국가예산 규모이다).

모병제이며 총원 27만 3천여 명(1990년 12월 현재) 수준인 자위대는 1958년 이래 3년 또는 5년 단위로 4차례의 방위력정비계획을 추진해 왔는데, 이는 사실상의 군비확대이다. 1976년 10월부터는 방위계획대강을 수립·추진했고 1985년 9월부터는 중기방위력정비계획을 수립·추진하고 있으며 (이 기간 중 1987년에 일본의 방위예산은 GNP 대비 1%를 초과하였다), 1991년 이후의 차기 방위력 정비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외형상 일본의 기본 방위정책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위대는 병원(兵員)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고 있는 방위력정비계획은 과연 무엇을 배경으로, 어디에 소요되었는가?

한국·중국 등 주변 국가들이 주시하고 있는 이 사태에는 미국의 대일 방위비분담 요구와 일본 내 극우파의 대두가 개재되어 있다. 베트남전쟁 패전 이후 미국은 2차례의 에너지 파동사태까지 겹쳐 경제침체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아시아·태평양 방위전략 축소와 주변국가들의 방위력·비용분담을 요구하였고 (그 주된 대상은 한국과 일본), 이와 관련해 1970년대 중반부터 소련이 극동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방위역할론이 표면화되어 자위대 전략강화작업이 실체화·가시화된 것이다.

자위대의 가상 제1적국은 소련이다. 이는 군국일본 당시부터의 악연인데, 가상 제2적국은 어디인가? 1965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소속 의원이 비밀문서한 건을 폭로하였다. 암호명 '미즈야(三矢)연구'로 명명된 이 문건에는 "한국 군부 내의 반란으로 야기된 한반도에서의 가상전쟁 시나리오"가 실려 있었고, 그에 대한 자위대의 대응조치·작전계획이 상세히 수립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군국일본의 복귀로 우려될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자위대 통수권은 내각총리에게 귀속되며 통합안보각료회의(1987년 7월 국방회의에서 개칭, 의장은 총리) 아래 방위청, 그 아래 통합막료회의가 조직되어 있고 문민통제의 원칙에 지배되고 있다. 일본의 자위대를 외형상으로만 파악하면 우려할 것이 없으나 그 조직과 무기체제, 잠재력을 추소해 보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자위대의 하사관 이상 간부요원 대 사병의 구성비율을 보면 간부요원의 비율이 75%를 유지하고 있으며, 방위대학교(사관학교)에서 사관급이 매년 배출되고 있고, 예비자위관은 전원 간부요원이다. 전쟁수행 과정에서 사병의 수급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지휘관의 수급은 시간과 교육을 요한다는 점에서, 지휘관만 있으면 징병제 발동으로 전투단위 부대조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방위예산 중 인건·후생비 항목이 제1순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위대의 위력은 첨단무기체제와 그를 뒷받침하는 과학기술수준 및 세계 제1위의 경제력에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서서히 극우계와 군국일본의 망령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일례인 "NO 라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그들은 "미국의 군사력은 일본의 첨단기술의 지원이 없다면 속 빈 강정"이라고까지 호언했는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일본은 총·포·탄약·탱크·함정은 물론 미사일·항공기까지 자체 개발·생산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수산업은 일본에서 첨단 소재·부품을 공급받고 있다(1990년도 신무기조달과 관련된 비용이 1조 7천억 22엔). 또한 방송위성·통신위성까지 발사한 일본의 첨단산업기술은 언제든 군사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고, 만약 그러했을 경우에 세계 제1의 군수산업국 진입은 시간문제일 뿐이며, 군사전문가들은 1990년대 자위대의 화력(무기체제) 규모가 미국에 이어 서방 제2위 수준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일본·타이완간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조어도(魚釣島)에서 타이완 민간어선단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일본 해상자위대의 무력시위는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