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지 역 분 쟁/중 동

서설 편집

序說

1970년대까지 중동분쟁은 아랍세계·이스라엘·팔레스타인 3자의 갈등과 대립, 레바논 종교분쟁(기독교와 회교)으로 대표되었으나 1979년 1월 이란 회교혁명 이후 미국·이란의 충돌, 같은 회교권인 이란·이라크의 전쟁, 1979년 2월 캠프 데이비스 협상으로 노출된 아랍 세계의 강·온파의 분열, 아랍 형제국이면서도 석유자원에 따른 빈부격차에서 심화된 산유국(주로 친서방 계열)과 비산유국(주로 친동구권 계열) 사이의 갈등 등 그 양상이 다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석유자원의 원활한 확보를 노린 서방측과 소련(동구권 포함)의 각축 또한 이와 같은 난기류에 편승, 중동의 사정은 복잡미묘하기 이를 데 없다.

중동전쟁 편집

中東戰爭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독립에서 발단된 이스라엘 대 아랍제국 및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1948년 5월 아랍측의 선공으로 시작된 제1차(팔레스티나 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 1956년 10월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의 선공으로 발발한 제2차(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시작된 제3차(6일 전쟁), 1973년 10월 이집트·시리아의 선공으로 발발한 제4차(10월 전쟁) 중동전 등 4차례의 참화를 겪었음에도 전쟁재발의 가능성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양측의 인종적·종교적 편견, 역사적 갈등, 팔레스타인인의 생존권 문제, 수에즈 운하와 석유로 대표되는 중동의 지정학적·정치적 환경에 따른 강대국들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 세계적인 평화와 군비축소 무드에 의해 퇴조해 가는 '죽음의 상인(군수산업 자본가)'들의 음모 등이 주요 원인이다.

제1차 중동전쟁 편집

第一次中東戰爭

1917년 11월 발포어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영국이 팔레스티나에 유대국가 수립을 약속, 유대인의 집단이주가 시작되었고, 이 지역에 정착해 왔던 아랍계 팔레스타인인(人)들은 소수파로의 전락과 생존권 박탈에 항거, 반영반유대(反英反猶太) 투쟁을 전개하였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충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조에 달했고, 여기에 영국이 발포어 선언을 무시하고 전략적 요충인 이 지역을 계속 지배하려 했으므로 유대인들은 반영반아랍 무장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양측의 반영투쟁으로 지배기도를 포기한 영국은 팔레스티나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고, 1947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티나에 유대·아랍국가를 분리 수립하고 예루살렘은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안을 채택했으나, 아랍측은 이를 거부, 테러활동을 강화하였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고, 동시에 이집트·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으로 구성된 아랍측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정규군사조직과 우수한 장비를 갖춘 아랍측에 유리하였으나 아랍측의 내분과 방위군(IDF)을 주축으로 한 이스라엘의 전국민적 결사항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오히려 아랍측의 제의와 국제연합의 중재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 또는 '팔레스티나 전쟁'으로도 불리는 제1차 중동전은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승인의 확보와 함께 2천년 동안 이 지역에 정착해 왔던 팔레스타인인의 난민화를 야기시켰다.

제2차 중동전쟁 편집

第二次中東戰爭

제1차 중동전의 휴전 이후 양측은 군비를 계속 강화하였는데 이 기간 중 아랍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급진파인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파루크 왕정이 타도되고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범아랍주의(Pan-Arabism)를 제창,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비동맹 중립노선 표방과 소련·체코슬로바키아 등 동구와의 접근을 추진하였다. 아랍·아프리카·회교권 3세력 통합을 기도한 나세르는 당시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운동을 지원, 영국·프랑스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으며 미국 또한 그의 노선에 의혹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은 비밀리에 군사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의 이집트에 대한 도발을 사주하는 한편 침공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이라크의 실권자 누리 사이드를 포섭, 1955년 2월 바그다드 조약기구(Baghdad pact)를 창설함으로써 중동지역에 대한 영향력 강화와 아랍권의 분열을 기도했다.

1956년 7월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회사와 운하통행료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교섭과 군사행동 중 '폴리스 액션(police action)'으로서 후자를 택하였으나 미국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양국에 권고하였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고 11월 5일 영·프 연합 공수부대가 수에즈 운하의 관문인 포트 사이드에 투하되었다. 전세는 처음부터 완전한 시나리오하에 기습한 영·프·이스라엘에 의해 주도되어 11월 6일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는 공격측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의 철군요구와 세계 여론의 압력이 급증, 3국은 정치적 곤경에 놓이게 되었고, 11월 14일 국제연합 총회에서 국제연합 긴급군(UNEF)의 파견을 내용으로 하는 정전안이 채택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철수하였다(이스라엘은 1957년 3월까지 계속 강점하였다).

제3차 중동전쟁 편집

第三次中東戰爭

수에즈 전쟁 이후 중동분쟁은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어 아랍 국가들이 그 대표권을 승인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확대된다. PLO는 그 헌장에서 이스라엘 말살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이라는 '팔레스타인 대의(大義)'를 규정, 이집트·시리아 등 아랍 국가의 지원하에 1950년대부터 활동해 왔던 알파타(Al-Fatah)와 팔레스타인 해방군(PLA) 등의 무장조직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무차별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 1967년 6월 4일 이스라엘은 PLO의 테러에 대한 응징과 아랍 국가의 공격 기도에 대한 자위를 명분으로 항공기에 의한 공중기습공격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이 국내의 경제적 위기를 외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돌파구를 찾고자 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 전쟁은 시리아·요르단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예정된 계획대로 승승장구, 개전 4일만에 시나이 반도·요르단 강 서안지구(West Bank)·골란고원 등을 점령하였다. 6월 6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결의안을 양측이 수락함으로써 동월 9일 정전이 성립되었다. 이스라엘의 전격기습작전과 완전한 승리로 끝난 제3차 중동전은 '6일 전쟁(The Six Day War)'이라고도 불린다.

제4차중동전쟁 편집

第四次中東戰爭

제3차 중동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던 이집트에서는 나세르의 급서로 사다트가 집권, 1971년 이집트·시리아·리비아 3국이 아랍공화국 연방을 구성하여 아랍 통합 움직임을 구체화시켰다. PLO 또한 야세르 아라파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립적인 위상을 갖추는 한편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공격을 격화하였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서, 시리아는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동시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 무기화'를 선언, 세계 경제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일컬어지는 이 사태는 이스라엘을 지원해 온 국가들을 분열시키고, 석유의 해외의존도가 높은 EC와 일본 등의 서방측 공업국가들에 타격을 가해,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제동을 걸어 중동에서의 아랍측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감산(減産)과 가격인상을 양축으로 한 석유파동은 제4차 중동전을 석유전쟁으로 국제화시켰고, 세계경제는 쉽게 회복될 수 없을 만큼의 타격을 입었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이집트가 우세하였으나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가 패퇴, 전선은 교착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10월 22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미·소의 공동제안으로 정전과 242호 결의안(1967년 11월 채택) 이행을 골자로 한 평화안을 채택, 양측의 수락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으로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Gaza)지구에 팔레스타인 국가창설 결의(1976년 11월)을 거부, 이 지역을 계속 강점해 오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탄압으로 국제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1980년 이후의 정세 편집

一九八十年以後-情勢

1979년 3월 체결된 이집트 ― 이스라엘 평화조약으로 30년 동안에 4회씩이나 대격전을 벌였던 양국의 전쟁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집트 ― 이스라엘 평화조약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며,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승인하여 정상의 외교관계를 수립함을 골자로 한다. 조약 발효 후 이스라엘은 3년 예정으로 단계적으로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1980년 1월에 양국은 대사를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현안으로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人)의 자치에 관해서는 조약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자치권부여의 교섭을 시작하여 1년 이내에 종료시키되, 최종적인 지위를 정하는 교섭은 1985년 4월 이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동분쟁의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 아직도 모호하기 때문에 태반의 아랍 제국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심한 반발을 나타냈으며, 단독화평으로 나간 이집트의 배신을 비난하며 이른바 이집트 제재를 단행하였다. 게다가 1981년 10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피격사망, 동년 11월 미국 대통령 카터의 선거 패배,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그해 8월 PLO의장 아라파트의 베이루트 철수 등 격동하는 중동정세의 변화는 중동평화의 정착을 요원한 앞날로 밀어내고 있는 듯하더니 1993년 팔레스타인을 대표한 PLO와 이스라엘이 9월 상호승인을 교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타협안을 마련·서명하였다.

팔레스타인 편집

Palestine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4만㎢지역. 팔레스타인 문제가 처음 발생한 것은 1919년 당시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 지역의 위임통치를 맡았던 영국이 1900년 전에 쫓겨난 유대인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부터였다.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人)들을 점차 밀쳐내는 바람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아 있던 아랍인들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밀려났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편집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전세계적으로 445만 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는 정치조직. 이들 팔레스타인인은 1948년 이스라엘이 수립되기 이전에 총독령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아랍인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PLO는 이전에 비밀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다양한 팔레스타인 조직의 지도부를 통일, 1964년 결성되었으나 그것이 외부로 부각된 것은 1967년 6월에 발발한 중동전쟁 직후였다. PLO는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PLO헌장은 이스라엘의 제거를 요구하였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패배한 후 PLO는 팔레스타인인의 대변자 겸 팔레스타인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로서 재조직되었다. PLO 내에서 활동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로는 파타(Fatah),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PDFLP)이 있다. 또한 PLO와 연관된 테러조직으로는 파타의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과 PFLP의 총사령부가 있다. 1969년에 팔레스타인 조직 가운데 가장 큰 집단인 파타의 지도자 야시르 아라파트가

PLO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후반 PLO는 요르단에 본거지를 두고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조직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 정부와 PLO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1971년 PLO는 요르단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요르단에서 추방되어 레바논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974년부터 아라파트는 PLO가 이스라엘과 관련없는 국제 테러리즘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아야 할 것과 국제사회가 PLO를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대표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74년 아라파트의 요청은 아랍국가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1976년 PLO는 아랍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88년 11월 PLO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천명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 점이다. PLO는 이스라엘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대신에 독립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993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PLO의장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1996년 1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위한 총선거에서 아라파트 의장이 88%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자치정부 초대 행정수반이 되었다.

레바논 내전 편집

Lebanon 內戰

20세기 종교분쟁의 대명사인 레바논 내전은 그 주체인 기독교와 회교도 스스로도 종식시킬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국제법상 실재하는 주권국가 레바논은 1958년 이후의 장기간의 내전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고 통치권력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져 있다.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에서 1946년 12월 독립한 레바논은 국민구성이 회교도(시아파·수니파 등) 6할에 기독교도(마론파·그리스 정교·아르메니아 교회파 등) 4할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국가권력 배분에서 제파(諸派)의 안배가 쟁점화되었는데, 헌법 제정과정에서 인구구성을 무시하고 프랑스의 비호를 받은 기독교도가 국가권력의 6할을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다수파인 회교도가 반발, 내란의 원인이 되었다.

1958년 기독교계 대통령이 친미노선으로 편향하여 회교측의 불만이 고조된 데다가 개헌으로 재선을 기도하자 반미 회교도와 친미 기독교도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기독교계 정부가 미국에 개입을 요청, 미해병대가 투입됨으로써 레바논 내전은 미·소간의 쟁점으로 확대되었으나 집권 기독교계 정부의 사퇴와 미군의 철수로 일단 진정되었다. 이후 레바논의 대통령은 마론파에서, 총리는 수니파에서, 국회 역시 각 종파별로 의석이 배분되었으나 회교측의 상대적 불리나 불만은 계속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PLO 산하 무장조직이 이곳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PLO 게릴라 소탕을 이유로 레바논 영내에 침입, 대규모 보복공격을 감행하였고, 레바논의 우익 기독교 정부는 PLO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탄압, 같은 종교권인 회교도와 아랍 국가들을 자극하였다. 1970년 극우계인 팔랑헤당(黨)은 정권을 인수한 후 PLO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레바논 정부군과 PLO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 사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제4차 중동전에서 레바논은 중립을 취했으나 이후 PLO는 레바논 내에서 레바논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국가 안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레바논 회교 제파는 기독교측에 권력의 재배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이 이를 거부, 회교측과 PLO의 연대가 진행되고 있던 중, 1975년 초부터 팔랑헤 민병대와 PLO 사이에 계속된 소규모의 충돌은 기독교 우파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탑승한 버스를 습격·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회교도와 PLO 대 기독교도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초기에는 회교도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1976년 6월 시리아가 개입, 기독교측을 지원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동년 11월 아랍 정상회담의 결의로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평화유지군(ADF)이 레바논에 진주, 일시적인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베이루트는 회교도와 기독교도 지역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시리아가 기독교 지원을 철회하고 회교·PLO 측으로 전향하고 PLO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공격을 강화하자 이스라엘이 레바논 영내로 진입, 기독교측을 지원하기 시작함으로써 레바논 내전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직접 충돌로 비화되었고, 국제연합 레바논 잠정군(UNIFIL)의 진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레바논에서는 회교도·PLO·시리아 대 기독교도·이스라엘 사이의 혼전이 계속되었으며, 1981년 시리아의 베카 계곡 미사일 배치 사건이나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공습 등 일련의 위기가 계속되었다.

1982년 4월 캠프 데이비스 평화협정에서의 합의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으나 아랍 강경파이며 PLO를 지원하고 있던 시리아에 대해서는 강경입장을 고수, 점령중인 골란 고원을 사실상 병합하였다. 그러나 시나이 반도의 반환은 후일 이스라엘이 레바논 침공을 위한 배후 위험의 제거라는 사전포석임이 밝혀졌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 PLO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했고, 이러한 긴장 속에 동년 6월 런던에서 주영(駐英) 이스라엘 대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은 이를 PLO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6월 6일 레바논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우익 기독교 민병대와 합류, PLO 거점인 서(西)베이루트를 포위하여 PLO의 철수를 요구하였는데, 시리아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베카 계곡에 대병력을 투입, 양국간에 제4차 중동전 이래 최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했다.

서베이루트에서의 이스라엘과 PLO의 충돌은 무차별적인 양상을 나타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켜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여론이 비등했으나, PLO 역시 아랍 제국과 소련의 소극적 자세로 이스라엘의 요구를 수락치 않을 수 없었다. 동년 8월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은 서베이루트 포위를 해제하고 미·프·이탈리아 3국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진주, 이들의 감시하에 PLO와 시리아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년 9월 이스라엘군과 우익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하여 난민을 대량학살하는 사태가 발생, 진정국면에 들어갔던 레바논 내전은 다시 가열되고,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베이루트 재배치가 이루어진 가운데 중재자였던 미국에 대한 PLO와 아랍 강경세력의 보복선언이 연속됨으로써 레바논 내전은 중동에 국한되지 않는 국제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레바논은 오랜 내전으로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정부군 대신에 UNIFIL·다국적 평화유지군·이스라엘군·시리아군이 분할·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회교 민병대와 기독교 민병대 사이의 전투가 계속되는 기묘한 양상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회교측에 대한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미국과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에 무기판매를 하고 있던 프랑스에 대해 레바논 내 친이란·친시라아계 회교도 강경단체들에 의한 테러가 시작됨으로써 또 한차례의 격동이 일어났다.

'회교 혁명' 후 대표적인 반미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이란은 '미·이란 인질사태'로 강경 시아파가 집권한 후 역사적인 종파갈등으로 이라크(수니파)와 전쟁에 돌입하였으며, 중동지역에 이란식 회교혁명의 확산을 기도하였다. '지하드(聖戰)'라 불리는 회교 시아파의 대서방·이스라엘 테러공격은 1983년 4월 베이루트 주재 미대사관 자살폭탄공격을 시작으로 다국적 평화유지군에게로 확대되고, 중동 전역에서의 서방인 납치·사살사건으로 연속되었다. 이에 회교 극좌파에 대한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보복공격으로 변질된 레바논 내전은 1983년 5월 레바논·이스라엘 정부간에 이스라엘군 철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팔랑헤 정부와 시리아 사이의 평화협상이 진행되었고, 1988년 3월 각 종파로 구성된 '민족화합회의'가 휴전에 합의하여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철수, 동년 6월 거국내각이 출범하였다.

철군협정에 따라 1985년 2월부터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가 시작되기는 했으나 레바논 정부군·회교 민병대·기독교 민병대·팔레스타인 무장조직 사이의 혼전이 계속되었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 폭탄테러나 '회교 지하드'에 의한 여객기 납치사건 등 무차별 테러가 연속되었다. 동년 12월 시리아의 중재로 각 종파 지도자간에 권력배분을 조정키로 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최종 순간에 기독교 보수파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레바논 내전은 레바논 정부군, 이스라엘과 기독교 민병대, 회교도와 시리아 3자 사이의 충돌에 회교측이 시리아파 아말 민병대와 수니파 '2·6 운동', 드루즈파·공산연합의 3자로 분열되어 무력충돌하고, 1985년 중반 이후 PLO가 레바논에 다시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시리아·아말 민병대가 PLO 및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하는 '캠프(난민촌)전쟁'이 발생하는 등 혼돈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바논 정부군과 시리아의 연대가 진행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친시리아계 회교 민병대에 대한 공습이 재개되었으며, 한국의 도재승 서기관 납치사건(1986년 1월) 등 외국인에 대한 납치·테러사건이 연속되어, 미국의 항공모함이 근해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1989년 11월 엘리아스 하라위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91년 내전 종식에 합의했다. 한편 1992년 8월 20년만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헤즈볼라당이 압승했다.

이란의 미국인 인질 사태 편집

Iran-美國人人質事態

과거 팔레비 독재왕정의 친미노선과 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오래 전부터 이란 국민 저변에 반미감정을 확산시키고 있었는데,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자 마침내 반미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란 과격파 학생시위대의 테헤란 미대사관 난입·점거 사태에서 발단된 이 사건의 원인은 이란인의 반미감정이지만, 여기에 '이슬람 원점으로의 회귀'라는 대의명분을 내건 혁명세력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미국에 대한 부정과 그에 대한 미국의 명예 고수 의지가 충돌함으로써 증폭되었다.

1979년 1월 팔레비 왕은 휴양을 이유로 출국(사실상은 망명이었다)하고, 2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 바크티아르 과도정부를 붕괴시키고 6월 신권적(神權的) 지배의 회교공화국을 수립한 이란은 팔레비 왕정의 전제공포정치에 항거한 민주주의 세력, 외세 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소위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조치에 반대하는 교조적(敎條的) 이슬람 세력 등 3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란 혁명의 성격상 호메이니를 정신적 지주로 한 이슬람 세력이 그 중에서도 급진강경파가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였고, 그들은 모든 서구식 제도·관습·양태를 부정함으로써 '이슬람 원점으로의 회귀'라는 본래의 명분과 아랍 세계의 지주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따라서 당시 서방세계의 대표적 존재이며 실제적으로도 구원(舊怨)이 있는 미국에 대한 도발은 어떤 형태로든 예상되고 있었다. 미국 또한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혁명 후 군수부품 공급 등을 통하여 관계정상화와 사전예방을 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카터 행정부는 이란 혁명정부의 경직된 입장을 오판하여 신병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왕의 입국을 허가, 이란측 급진강경파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그를 확인코자 의사단의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시위대가 시위 도중 미대사관에 난입·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 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함으로서 미·이란 인질 사태의 막이 올랐다.

이미 민주·민족주의 온건세력의 정지를 끝낸 이란 회교정부는 급진강경파가 주도, 미국과 일전불사의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미국의 이란산 원유수입 금지조치에 이란이 대미 석유금수조치, 이란의 재미 예금 전액인출 및 재이란 미국 투자의 국유화조치에 미국이 재미 이란 공적 자산(公的資産) 동결조치로 맞서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해·인도양에서 미국의 해군력에 의한 무력시위가 전개되었다.

11월 20일 중동의 대표적 친미노선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 카바 신전이 일단의 무장괴한들에게 점거되고 수백 명이 인질로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11월 21일이 이슬람력(曆)으로 1400년 원단(元旦)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권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고, 돌연 "이 습격사건의 배후에는 이슬라엘과 미국이 있다"는 미확인 소문이 발생, 이슬람권 각국에서 격렬하고 파괴적인 반미운동이 연이었다. 악성 루머가 계속되어 사태가 증폭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경비대로 하여금 진압을 명령, 엄청난 유혈참사 끝에 사태를 진정시켰는데, 카바신전을 점거했던 괴한들은 서구식 근대화를 부정하고 이란식 회교혁명을 추종하는 교조적 광신도들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미·이란 인질사태에 악재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권의 사우디아라비아 등 온건·친미·군주국들과 이란의 정치적 대립을 야기시켰다.

이란의 요구는 팔레비의 신병인도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이란에 대한 죄상(罪狀)조사와 그에 대한 미국의 사과까지로 확대되었고, 미국으로서는 국제법 질서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관(公館)과 외교관에 대한 테러와 이란의 요구는 미국의 명예에 직결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란측에서도 일시 온건파가 집권, 협상의 기미가 엿보였으나 호메이니의 강경선언으로 다시 경화되었고, 이에 미국도 보복을 선언, 미국과 서방측의 대이란 국교단절과 경제제재조치로 이어졌다.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한 중재노력도 무산되는 가운데 1980년 4월 미국은 특공대를 투입, 무력에 의한 인질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계획차질과 항공기 충돌사고로 일부 특공대원이 사망, 실패로 끝났다. 악화일로를 치닫던 인질사태는 1980년 9월 다소 유화된 호메이니의 요구조건 제시로 돌파구가 마련되었고, 동월 22일 이라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란으로 하여금 인질사태를 종식하지 않을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란측의 후퇴가 기대되는 가운데 미국의 협상제의가 거듭 되었고, 마침내 알제리의 중재로 양국간 간접협상이 진행되어 미국이 동결된 팔레비 왕정 당시의 재미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 1981년 1월 사건 발생 444일만에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인질 전원을 석방함으로써 미·이란 인질사태는 종식되었다.

이란의 미국인 인질사태는 일면 양국에 국한되는 국지분쟁적 외교전의 양상을 나타냈으나 그 파장은 의외로 큰 것이었다. 즉, 그 과정에서 미국의 인도양·아라비아해 지역의 군사력 증강을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미국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사태를 야기시켰다. 특히 이슬람권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시각 및 관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으며, 이슬람권 내부의 해묵은 종파적 갈등의 재개는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권의 분열로 표면화되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편집

蘇聯-Afghanistan 侵攻

1973년 쿠데타로 왕정(王政)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이래아프가니스탄은 쿠데타의 연속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가운데 친소좌파(親蘇左派)가 부상하고 있었다. 1978년 5월 쿠데타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1979년 초부터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 영향을 받은 저항세력을 중심으로(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가 국교이다) '무신(無神)의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정권타도를 위한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종족별로 정권에 대한 '지하드(聖戰)' 선포로 시작된 반정부투쟁은 모든 이슬람 종파가 가담하는 내전상태로 확대되었고,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좌익정권에서는 내부적 권력투쟁이 발생, 강경세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좌익정권은 권력유지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슬람 저항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대거 투입되었다. 1979년 12월 정권내부의 권력투쟁과정에서 친소강경파인 카르말이 소련군의 직접개입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全權)을 장악했다. 즉, 12월 27일 소련군은 공육(空陸) 양면으로 5개 사단을 동원,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하여 당시 아민 정부군과 교전 끝에 이를 패주시키고, 아민 정권의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였던 카르말로 하여금 신정부를 수립케 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이슬람권과 미국 등 서방세계의 강력한 비판에 대해 소련군의 군사행동은 침공이 아니라 소·아프간 우호선린협력조약에 근거하여 아프간 정부의 반정부 세력 진압을 위한 원조요청에 의한 군사개입 원조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아프간 아민 정권을 타도하고 아민을 체포·살해한 사실만으로도 그 허구성은 증명되고 남았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의 대소 곡물수출 금지 및 고도기술 수출정지, 인접국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경제원조 재개, 모스크바 하계(夏季) 올림픽 보이콧, 미·소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Ⅱ)의 미국의회 비준 연기 등 대소 보복조치가 연이었으며, 국제연합에서의 각종 대소·대아프간 결의안 채택이 계속되어 1960년대 냉전 이래 미국과 서방측 대 소련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내부적으로는 반정부투쟁을 주도하고 있던 이슬람 저항세력 6개파는 비록 통합되지 못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 부족한 점은 있었으나, 소련의 침공으로 인하여 일반 국민의 공감과 내심적 동조를 획득함으로써 그 명분을 강화하고 침략자와 괴로정권에 대한 항전을 확대하게 되었다.

역사적 아이러니는 미국은 중동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공통적으로 이슬람교도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사실이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분석하면 현실적으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지배를 용인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소련으로서는 이란에서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혁명이 성공할 경우 남부의 타지크·우즈베크 등 이슬람 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정하고 있는 구성공화국으로의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었다.

소련의 침공 이후 수도 카불에서는 상점철시·학생시위 형태로 국민적 항전이 거세지고, 이슬람 저항세력 6개파는 1980년 1월 '아프가니스탄 해방 이슬람 연맹'을 결성, 이슬람 형제국의 자금지원 아래(미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확인은 안됨) 전국에서 소련군과 친소정부군에 대한 조직적인 무장항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아민 정권 당시의 정부군 중 상당수가 이슬람 저항세력에 합세함으로써 '이슬람 연맹'의 전투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인접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탈출, 난민화하였고 이들 국가들은 피난민 처리에 고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소련은 침공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한 잘못으로 흡사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경우처럼 계속적인 병력증강과 엄청난 전쟁비용을 치르면서도 아프간 정복도 사태의 수습도 할 수 없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고 서방측의 보복조치와 국제적 비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양측의 공방전으로 초토화되었다.

1985년 소련의 권력구조 개편은 아프간 내전사태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기화된 아프간 사태에 이미 국내여론이 비등해진 가운데 서기장에 취임하고 고르바초프는 대대적인 대서방외교를 추진, 아프간에서의 부분적 철군의사를 언급하는 등 대서방협상을 제의했다. 카불정권 내부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 카르말이 실각하고 비밀경찰 총책 나지불라가 전권을 장악, 이슬람측을 포함한 범국민적 민족통일 정부 구성을 제의하는 동시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열되고 있는 무자히딘(이슬람 저항세력)의 공격을 약화시키려는 미봉책에 불과, 무자히딘은 이를 거부함과 동시에 소련군의 무조건적인 즉시 완전철수를 요구하였다.

1988년 2월 제네바에서 국제연합의 중재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사이의 간접평화회담이 개최되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 은 이 회담에서 양측이 합의에 이르면 소련군을 철수시킬 것을 약속, 4월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동년 5월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1989년 2월, 침공 9년 2개월만에 소련군은 아프간에서 완전철수했다. 이로서 아프가니스탄은 카불의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히딘 사이의 내전으로 환원되었으며 무자히딘 제파는 슈라(이슬람 평의회)를 구성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카불정권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자히딘 역시 시아파·수니파, 온건파·강경파 사이에 정통성·주도권 분쟁이 일어 투쟁과정에서는 물론 카불정권 타도 후에도 난항이 계속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편집

Iran·Iraq 戰爭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선공으로 시작되어 1988년 8월 20일 양측이 국제연합 결의안 제598호를 수락하여 정전에 들어가기까지 8년간 계속된 이 전쟁의 원인은 A.D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교의 개조 마호메트(570∼632)의 사후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 사이에 영토와 부(富)의 분배를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고 마침내 유혈사태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예언의 실천을 따르는 수니파(다수파)와 제4대 정통 칼리프였던 알리( ? ∼661)의 지지자들인 시아파(소수파)로 나뉘고, 이후 2종파의 갈등은 현대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란과 이라크는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이나 이란은 그 중 80% 이상이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2분되어 있으나 전통적으로 수니파가 상대적으로 다수인 시아파를 지배해 옴으로써 양국은 과거부터 종파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란의 이슬람혁명 성공으로 강경급진세력인 시아파가 집권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격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양국은 제각기 이슬람 정통의 계승과 페르시아 왕국의 상속자임을 자처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3개 도서(島嶼)와 샤트 알 아랍 수로(水路)의 영유권을 주장, 역사적인 분쟁을 겪어오고 있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시아파 정부는 이라크가 후제스탄 지역의 반정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라크 내 시아파를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설전을 전개하였고, 이에 이라크는 내정간섭 중지를 경고함과 동시에 이란이 이라크 내 반정부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맞받아치는 등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결국 양국 국경지대에서 이란의 혁명수비대와 이라크군 사이의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이란 혁명정부의 중동에 대한 이슬람혁명 파급기도와 팔레비 왕정의 붕괴로 중동제일의 군사강국의 지위를 점한 이라크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란이 미국과의 인질사태로 서방측의 경제봉쇄조치를 당해 위기에 놓여 있고, 이란 정규군 또한 혁명과정에서 전력이 약화된 것을 계기로 이라크는 1975년 체결된 양국간 국경조약을 불평등조약이라고 선언, 9월 17일 이의 폐기와 호르무즈 해협 3개 도서 및 샤트 알 아람 수로에 대한 주권(主權)을 선언하고, 9월 22일 이란에 대한 전면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이란은 미국과의 인질사태로 서방측으로부터 경제봉쇄조치를 당하고 있었고, 혁명과 원유수출 중단에 대외자산까지 동결되어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혁명정부 내부에서도 민주·민족·급진이슬람 3파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팔레비 당시 중동 제일의 전력을 자랑하던 이란 정규군은 혁명과정에서 약화되기 시작하여 호메이니가 혁명수비대(친위군)를 조직함으로써 그 위상까지 퇴조하였으며, 미·이란 인질사태 이후 군수품 공급중단으로 실질적인 전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군사전문가들이나 이라크 자신도 이 전쟁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리라고 예상했으며 초기에는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신권적 지도하에 광신적 이슬람 민족주의에 기초한 이란 국민의 영웅적 저항은 11월 이후 정규군·혁명수비대·민병대의 반격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의 변화로 나타났고, 1년 이내에 끝나리라던 예상과 달리 8년 동안에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천억 달러 이상의 전쟁비용이 투입되는 미증유의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이란·이라크전의 첫번째 파급효과는 미·이란 인질사태의 종식으로, 이란으로서는 전쟁수행에 있어서 전비충당과 미국의 위협 제거라는 목적에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라크는 예상외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기종식을 기도,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였으나 호메이니는 이라크 정권타도라는 초강경 자세를 고수하여 오히려 이란측이 이라크 영내로 진입하였고, 이 시점에 이르러 이라크 역시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래 또다시 아랍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특히 아랍 군주국들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파급이란 결국 자신들의 권익상실이라는 것에 반발하여 이라크에 대한 지원과 접근을 강화했고, 이란 역시 이들에 대한 단교와 경고조치로 대응했다. 또한 이란은 전비조달을 위해 OPEC의 공시가(公示價) 이하로 원유를 덤핑판매하여 산유국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측이 서로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이라크가 이란의 유전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이란이 전면공격을 가하는 형태로 가열되어 페르시아만 원유 오염사태가 발생하는 등 페르시아만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83년 프랑스가 이라크에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 엑조세 미사일 등 최신예 무기판매를 승인함으로써 사태는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서방국가 원유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고 발표, 이란·이라크 전쟁은 중대위기로 치달았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양측은 상대국 출입 유조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 페르시아만을 항해하는 유조선에 무차별 공격을 가해 주변국(특히 GCC)들과 석유공급의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서방측 석유소비국가들을 긴장시켰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 중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 전투기를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국제연합의 중재도 무산되었으며, 이라크가 이란 영공 전역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화학무기(독가스)를 사용하는 등 전쟁은 최악의 국면으로 심화되었다. 또한 중동 전역은 레바논 내전의 격화까지 겹쳐 폭탄테러·여객기 납치·외국인 납치사건 등이 발생, '테러의 해'로 지칭되리만큼 혼돈 속에 휩싸였다. 여기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석유수요의 감소와 OPEC의 내분으로 공급과잉과 유가하락사태가 발생, GCC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 경제가 침체일로를 걷자 이란·이라크 전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986년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는 미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비밀리에 미국인 인질석방을 위한 교섭을 벌이는 과정에서 1979년의 대 이란 무기금수법(禁輸法)을 위반하며 이란에 상당분의 공격용 무기를 공급하고 그 대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지원에 일부 전용한 '이란게이트 스캔들(이란·콘트라 사건)'이 발생, 집권 공화당은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고 대외적으로도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이란에 대한 인식변화나 접근이 아니고 레이건 행정부의 변명 그대로 인질구출과 이란 내 온건파를 회유, 급진 이슬람 세력에 대한 대립을 조장하기 위한 공작이었고,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1985년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소위 '페르시아만 위기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으로 구체화된다.

1987년 이란의 바스라 대공세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위기로 몰아넣었다. 광신적인 이란군의 종교적 열정은 최신예 무기를 갖춘 이라크 정규군을 궤멸시켰으며, 이에 당황한 후세인은 이란에 평화협상을 제의했으나 이란의 의도는 이라크 시아파 정권의 수립이었으므로 당연히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서방국가는 물론 페르시아만 군주국가들에게 위기감을 고조시켰으며, 미국으로서는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외교공세나 이란식 이슬람 혁명의 파급은 페르시아만 친미 군주국가들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자국의 이익수호와 석유자원의 원할한 확보를 위해서, 또한 이란을 응징함으로써 '이란 게이트'로 실추된 미국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군사적으로 개입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언론과 야합한 미국정부는 이란의 광신적인 종교적 열정을 이용, 국제여론을 호도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통행 확보를 위한 무력사용과 페르시아만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보호수단 제공을 제의하는 등 그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었다.

1987년 5월 페르시아만에서 미 해군 프리깃함 스타크호(號)가 이라크 공군기가 발사한(오인사격)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 미 해군 4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개입구실을 찾고 있던 미국은 이 지역 미국함정에 대해 선제발포 명령을 내리는 한편 미국 국기를 게양한 유조선에 대한 미해군 함정의 호송을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은 이란을 겨냥하고 있었고, 이란 역시 충돌 가능성을 경고, 이란·이라크 전쟁은 미국과 이란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1987년 7월 21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598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 양국에 권고하였으나 이란은 침략자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가 없음을 이유로 거부했다. 미 해군함정의 유조선 호송작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이란은 일촉즉발의 긴장사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메카 대참사'로 실제화되었다.

1987년 7월 31일은 이슬람교의 안식일인 금요일로, 메카는 하지(Haji:성지순례)를 위해 전세계에서 모인 이슬람교도로 성황이었다. 정오예배 후 의식에 따라 카바 신전으로 순례자들이 이동하고 있던 중 돌연 이란에서 온 순례자들이 호메이니 초상화를 선두로 "미국과 소련·이스라엘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 사우디 아라비아 보안군과 충돌하였는데, 과열화를 이유로 보안군이 초강경으로 진압·발포함으로써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상자의 대부분이 이란인으로 밝혀져 이란 전역에서 반사우디·쿠웨이트 폭동이 발생하였으나 아랍 국가 대다수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지, 이란에 대한 비난을 격화하는 가운데 이란은 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고 주장, 3국에 대한 보복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유혈참사의 원인 역시 복잡했다. 무엇보다도 주요 원인은 양국간의 종파적 감정과 이란의 이슬람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경직된 대 이란 사고에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로,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부터 이어져 온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복수심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고, 더하여 미국의 군사보호 아래 오일달러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대하여 이슬람 종주국을 자처하는 시아파 이란의 피해의식과 감정의 골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그러한 종파적 감정에다가 이란의 이슬람혁명의 본질이 시아파에 의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정(王政)의 타도이므로 당연히 반이란적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걸프협력회의(GCC) 역시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이며,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도 군주국가들은 공공연하게 이라크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란도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고자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아랍 국가들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등 다각적인 모색을 꾀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 비밀리에 인질협상과 전쟁수행에 불가결한 무기거래를 추진하며 내부적으로는 온건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나, 권력투쟁과정에서 열세에 밀린 강경파가 그 사실을 누설하는 사태가 벌어짐으로써 온건파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미 오랜 전쟁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수행을 위한 유일한 무기인 국민의 종교적 열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단호한 대미 자세와 아랍 국가에 대한 어떤 과시가 필요했다. 따라서 '메카 대참사'는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란은 그들이 선언한 대로 실질적인 보복조치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도 행하지 못함으로써 그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 이란은 페르시아만에서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미국 해군함정에 대해 소형쾌속정에 의한 자살공격을 경고했으며 페르시아만 곳곳에 기뢰를 부설했다. 이 때문에 페르시아만을 항행하던 유조선들이 부유기뢰에 충돌·파손되고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속출하자,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래 최대규모의 해군력을 집결시켰고, 영국 해군과 합동으로 소해작전(掃海作戰)을 전개하는 한편 이란의 함정과 석유시추 시설에 대한 보복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이란은 중국제 실크웜 미사일로 쿠웨이트에 대한 보복공격을 감행, 오히려 미 해군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유조선 전쟁'으로 불린 페르시아만 위기는 정전시까지 계속되었고, 이란·이라크 양측은 항공기와 지대지 미사일·장거리포를 사용하여 소위 '도시(都市) 파괴전'을 전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이란의 광신적인 종교 열정에 기초한 헤로이즘은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국토파괴, 희미해지는 승리감 속에서 점차 식어가고, 오히려 염증을 느낀 국민 사이에 전쟁기피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으며, 그 불만의 강도는 혁명정부에 대한 거부로까지 심화되었다. 이에 더하여 국제적으로도 서방·동구·아랍 국가 거의 대다수가 이라크를 일방 두둔, 외교적 고립화는 날로 심화되었다. 페르시아만에서 미국과의 충돌로 전력이 분산되었고, 1988년에 접어들면서 전세는 날로 악화되어 이라크에 밀리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정규군과 혁명수비대 사이의 갈등까지 발생하는 등 모든 면에서 더 이상의 전쟁수행은 불가능했다. 1988년 7월 3일 승객·승무원 등 290명을 태운 이란 항공사 소속 A-300 여객기가 반다르 아바스 공항을 이륙,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향하던 중 부근해상에서 작전 중이던 미해군 순양함 빈세스호가 발사한 2발의 함대공 미사일에 피격되어 추락, 전원이 몰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미국은 당시 상황이 교전 중이었고, 그것은 오인사격이었다고 주장했으나 과민반응에 의한 명백한 테러행위로 밝혀졌다. 당연히 국제여론의 비난과 이란측의 보복선언이 뒤따랐으나 이미 전쟁수행 의사를 상실한 이란은 아무런 구체적 행동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침체되어 있던 사기마저도 완전히 꺾였다. 이 사건 발생 보름 뒤인 7월 18일 이란은 그 동안 거부하여 왔던 국제연합결의안 598호를 수락, 8월 20일 24개국 비무장병력으로 구성된 국제연합 휴전감시단(UNIIMOG)이 국경지역에 배치되어 감시업무에 들어감으로써 정전이 발효되었다. 8년에 걸친 장기소모전 속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마각은 소위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는 군수산업자본가와 무기상인들이었다. 세계의 분쟁지역 어디에서나 '죽음의 상술'로 불리는 그들의 모략에 의해 분쟁은 확대되고 파괴적인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 역시 그들의 농간으로 더욱 악화된 사례가 많으며, 만일 그들의 그러한 작태를 배제할 수만 있었더라도 전쟁은 더 일찍 종료될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양측 모두 전쟁피해복구와 거대해진 군사조직 해체라는 난제에 직면했고, 산업시설 파괴와 재정파탄이라는 벌거숭이 상태가 되었다. 전세계적 분쟁의 위험을 내포하였던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페르시아만 사태, 1991년 걸프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리비아의 분쟁 편집

美國-Libya-紛爭

이란의 이슬람혁명 후인 1979년 12월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일단의 리비아인 시위대가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 방화한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미·리비아 분쟁사태는 당시의 미·이란 인질사태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페르시아만 위기와 맞물려 국제긴장 악화의 '태풍의 눈'으로 대두하였다. 1986년 4월 15일 미국 전폭기들의 리비아 기습공격(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테러행위이다)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양국 사이에는 첨예한 신경전과 무력시위·충돌 및 테러공격이 벌어졌는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의 급진·강경 아랍 민족주의 노선과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자의적인 힘의 과시에 있었다.

1951년 군주국으로 독립한 리비아는 1969년 9월 카다피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왕정(王政)이 타도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9월혁명). 전권(全權)을 장악한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 아랍 민족주의, 아랍 통합주의, 반(反)제국주의, 반왕정주의를 기조로 아랍권 급진·강경노선의 선봉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반미·반서구적인 리비아의 정책은 아랍권의 통합추진과 동시에 민족주의를 지원한다는 명분하에 국제테러조직에 대한 무기·기지·훈련 지원과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각종 분쟁·내전 사태에 깊숙이 개입, 국제사회에 많은 파란을 일으켰으며, 미국 등 서방측에서 볼 때 카다피는 쿠바의 카스트로와 함께 '국제사회의 문제아'였다. 즉, 리비아는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권 석유무기화의 선봉이었고, 이슬라엘에 대한 강경입장을 고수, 이집트 등 협상파와 적대관계를 유지했으나 소련과는 긴밀한 유대를 지속하였다. 카다피 역시 집권 이후 아랍권 친서방·군주 국가들의 반카다피 움직임이나 그에 연관된 수차의 암살·타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수단 쿠데타·차드 내전·앙골라 내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PLO와 국제테러조직에 기지·자금을 제공하는 등 계속되고 있는 리비아의 급진·강경 노선은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응징해야 할 국제테러 조직 양성소였다. 여기에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고 양국의 접근이 가속화되자, 미국과 서방측, 아랍권 친서방·군주국들의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한 가운데 1980년대 초 중동의 정세마저 혼돈으로 치닫고 있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미국과 리비아의 충돌이 예상되고 있었다.

트리폴리 미국 대사관 피습사건은 이란의 미국인 인질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1개월만에 일어난 것으로, 당시 이란에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던 미국의 감정은 지극히 불만스러웠으므로 양국관계는 초긴장 사태로 치닫게 되었다. 1980년 2월 리비아 주재 미대사관의 폐쇄와 1981년 5월 미국 주재 리비아 대사관의 폐쇄로 이어진 양국의 신경전은 동년 8월의 첫번째 무력충돌로 격화된다. 1973년 카다피는 200해리 영해를 선포, 시드라만 서안의 미스라트와 동안의 벵가지를 잇는 북위 32°30′ 직선기선 이남을 영해로 선포하고 직선기선을 '죽음의 선'으로 명명, 리비아의 절대주권을 선언하였다.

리비아에 대한 무력시위를 예정하고 있던 미국은 이를 무효로 선언, 1981년 8월 지중해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해군 F-14 톰캣 전폭기 2대가 '죽음의 선'을 넘어 시드라만에 진입했고, 비상발진한 리비아의 수호이(SU-22) 전폭기와의 공중전이 전개되어 리비아기 2대가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즉시 리비아의 미국에 대한 보복조치가 선언되었고, 미국은 미국인에 대한 리비아 여행제한조치(1981년 12월), 리비아산 원유 수입금지조치(1982년 3월)를 발하는 동시에 인접 이집트에 조기경보통제기 배치(1983년 2월), 시드라만 해역에 항공모함 니미츠호 배치 등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는 리비아에 대한 침공구실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리비아가 국제테러조직의 본거지이며, 세계 각처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의 배후조종자이고, 아랍·아프리카의 온건국가(친서방 국가를 의미한다) 지도자들을 타도하기 위한 테러리스트 훈련소를 설치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서방측 언론을 동원, 대대적인 국제여론을 조장하는 동시에 서방측 국가에 대한 공동대처를 요구했다(영국의 대처 정부만이 이에 동조했다).

1984년 4월 영국 주재 리비아 대사관에 반리비아 시위대가 쇄도하자 당황한 대사관원들이 공포를 발사한 사건이 발생, 영국의 리비아에 대한 단교조치가 취해지고 유럽공동체(EC) 회원국가를 중심으로 한 대 리비아제재 조치가 뒤따랐다. 1985년 10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소속 무장조직에 의한 이탈리아 호화여객선 아킬레라우스호 납치사건, 1985년 12월에 발생한 빈·로마 공항 테러사건에 대해 미국정부는 리비아가 배후세력이라고 지목·주장하며 군사적 보복조치를 공언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1986년 1월 리비아와의 모든 경제관계를 단절하고 리비아 거주 미국인들에 대한 전원철수를 명령하는 동시에 지중해에 미군전력을 증강시켜 그 의도를 명백히 했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당연히 리비아는 초강경 입장을 선언했으며, 1986년 3월 리비아군은 그들이 주장하는 영해지역(시드라만)에서 훈련중이던 미군 전투기들에 대해 미사일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미국이 의도하고 있던 바로서 미국은 리비아가 주장하는 영해지역에서 기동훈련을 실시, 리비아측의 도발을 유도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시드라만 일대의 리비아 함정·미사일 기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카다피는 미국과 미국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함과 동시에 보복테러를 선언하였다. 1986년 4월 5일 서베를린에서 미군전용 디스코텍에 괴한이 장치한 폭탄이 폭발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미국은 이 사건에 리비아가 개입된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제시되지는 않았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보복조치 감행을 시사했다.

1986년 4월 15일 새벽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영국과 지중해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국의 전투기·전폭기 대편대가 리비아 트리폴리·벵가지 주변의 군사기지·공항·주요 시설물에 대한 전격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측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테러 관련 군사목표물 공격이란 미국의 해명과는 큰 차이가 있는 상당히 확대된 공격이었고, 리비아 측의 피해 또한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리비아가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발사건의 배후이며 외국에 있는 미국인 및 시설물에 대해 추가 테러공격을 계획하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취해진 사전예방적 조치"라고 발표했으나, 이를 지지한 것은 미국 국내여론과 영국·캐나다·이스라엘·차드 등 극소수였고, 소련·아랍권은 물론 서방국가들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와 국제여론은 미국을 규탄·비난했다. '테러 계획에 대한 사전예방 조치'라는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에 대한 살해기도가 명백했던 이 기습은, 세계의 경찰·재판관을 자처하는 미국이 명백한 증거나 확증조차 없이 리비아를 테러집단으로 단정하여 자행한, 강대국의 힘의 과시에 지나지 않는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테러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보복조치는 또다른 테러행위를 유발시킬 뿐이며 후에 증명된 것처럼 미국은 리비아의 테러행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구실을 찾기 위해 역공작을 행하였다. 설령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현대의 국제질서는, 국제법과 국제연합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것을 제시하고 정당한 절차와 모든 국가들의 판단에 기초해 제재해야 했음에도, 선두에서 그를 주장해 온 미국 스스로가 국제법 질서를 깨뜨렸다는 데 이 사건의 심각성이 있다. 한마디로 그레나다·파나마 침공사건과 함께 이 사태가 세계에 끼친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까지 경고하는 등 국제정세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슬람권의 대미 석유금수·경제제재·보이콧 움직임이 격화되고 세계 도처에서 반미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오히려 미국 국내여론은 레이건 행정부에 지지를 보냈으며, 유럽공동체(EC)는 이면에서 미국의 조치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다르게 카다피는 보복행동을 취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의사 없이 미국과의 대화용의를 밝히며 EC 국가들에 중재를 요청하고 나왔다. 동시에 탈리오(Talio)의 법칙 그대로 세계 도처에서 미국과 영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급증하여 양국은 그 방지대책에 고심하였으나 이를 리비아의 소행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으며, 소련은 리비아에 대한 지원을 다짐하는 한편 예정되었던 미·소 정상회담을 연기시켰다.

미국·리비아 분쟁의 진실은 미국 언론의 추적과 당시 국무부 대변인 버나드 캘브의 양심선언으로 밝혀지고 끝을 맺었다. 1986년 8월 미국 언론들은 "카다피가 새로운 테러공격 계획을 세웠고 이에 레이건 행정부는 4월 공습보다 더 큰 규모의 새로운 리비아 공습계획을 입안 중"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카다피의 움직임은 조용했고 그가 새로운 테러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4월 공습 후 미국 정부가 정보기관의 보고에 기초해 유포시켰던 리비아 내에서의 정변이나 쿠데타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의혹을 가진 일부 언론이 사실규명을 위한 추적을 시작하였고, 동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지』는 카다피의 새로운 테러공격 계획은 사실무근이며, 미국의 공습재개 의사를 카다피에게 확신시킴으로써 카다피의 선제도발이나 어떤 행동을 유발시키기 위한 미국정부의 역공작 음모였다고 폭로했다. 결국 레이건 행정부의 이러한 흑색정보공작은 당시 국무부 대변이었던 캘브가 "묵종을 하면서 국무부에 남아 있느냐, 항의의 표시로 국무부를 떠나느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라는 일종의 양심선언 같은 변(辨)을 발표하고 사임함으로써 다시금 증명되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에서 그들이 제일의 과녁으로 삼는 전체·독재정권들이나 사용하는 진부하고 치졸한 역정보공작을 미국 행정부가 사용했음은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도덕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부언하면 미국 언론이 신문인·편집협회를 필두로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비난공세를 전개하고, 백악관에 항의서한까지 발송하는 사태로까지 확대되었으나, 미국 국민들은 대체로 레이건 행정부를 지지하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사태로 서방국가와 온건 아랍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성이나 이미지는 재고되었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이 제기되었다.

인도·파키스탄 분쟁 편집

印度-紛爭

영국 식민통치 당시부터 불화를 빚고 있었던 힌두교도와 회교도가 1947년 영국의 식민통치 종식과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부터 분쟁의 불씨가 비롯되고 있었다. 두 나라의 분리는 처음부터 자산(資産)이나 전략적 자원의 분할, 그리고 카슈미르의 귀속문제 등 복잡하고 폭발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47년 8월 펀자브에서 일어난 양교도간의 유혈극이 보여 주었듯이 이 두나라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신(不信)과 증오로 일관되어 왔던 것이다.

더구나 두 나라 사이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인구와 영토의 크기, 경제적 잠재력, 그리고 국제정치상의 역할에서 훨씬 열세에 놓여 있는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한 예로 1962년 중·인국경 분쟁이 격화되자 파키스탄은 서방국가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맺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예민한 양국간의 대립관계는 파키스탄의 복잡 미묘한 국내사정으로 말미암아 더욱 예민해졌던 것이며 1971년의 동서 파키스탄 분쟁에 인도가 무력으로 개입함으로써 결국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새로운 독립국으로 등장한 사실은 주목을 끈다. 양국은 군사적 긴장 해소를 위해 다각적인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알력은 계속적인 충돌사태를 빚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 편집

Kashmir 紛爭

이것은 양국간에 걸려 있는 가장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일부 회교도 부족의 카슈미르 침입으로 발달된 인·파간의 전쟁(제1차)이 있은 뒤로부터 이 지역은 양국간 긴장의 초점이 되어 왔다. 카슈미르는 정확히 말해서 잠무·카슈미르국(The Jammu and Kashmir State)으로 거의 전역이 산악과 고원으로 뒤덮여 있는 인도북부의 토후국이다. 1947년 8월 인도의 550여 개 토후국은 대부분 인도와 파키스탄 중 어느 한 나라에 병합되었으나 하이드라바드와 카슈미르만이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적 지위에 미련을 갖고 있었다. 특히 카슈미르는 주민의 약 80%가 회교도인데 반해서 지배자였던 토후는 힌두교도였기 때문에 퍽 예민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카슈미르의 당시 토후였던 싱(The Mahara jh Hari Singh)은 회교도 부족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서 카슈미르의 지도자 압둘라(Sheikh Mohammad Abdullah)와 손을 맞잡고 인도에의 병합을 결정함과 동시에 파병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인도 정부는 총독 마운트배튼경의 권고에 따라 카슈미르 토후의 요청을 받아들여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파키스탄과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1948년 1월 인도는 이 문제를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했고 결국 국제연합 인·파 군사감시국(UNMOGIP)의 개입에 의해 1949년 1월 양국간의 정전이 발효되었다.

이때부터 파키스탄이 장악한 부분(Azad Kashmir)과 인도가 장악한 부분(Indian Kashmir) 사이에는 국제적 경계선이 그어졌고 몇 차례에 걸쳐 전쟁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예민한 긴장사태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인도나 파키스탄의 약속이나 UN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카슈미르의 운명을 주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짓는 주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

1965년 8월 양국간의 긴장은 또한번 무력충돌을 촉발했다. 제2차 인·파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두 달에 걸쳐 계속되다가 9월 22일 UN 안보이사회의 정전조건을 양측이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966년 1월 소련의 중재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타슈켄트 회담이 개최되어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이 회담에는 소련의 코시긴 서기장, 인도의 샤스트리 총리, 파키스탄의 아유브·칸 대통령이 참석했고 그 결과로서 타슈켄트 선언이 나왔다. 선언의 내용은 카슈미르 지역의 1965년 8월 이전에로의 원상복귀와 유엔헌장에 입각한 평화적 분쟁해결, 내정불간섭의 원칙 등 골자였으나 분쟁의 완전한 해결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카슈미르 분리독립운동 편집

-分離獨立運動

카슈미르 지방은 1966년 1월의 타슈겐트 선언으로 인도·파키스탄간의 분쟁 차원에서는 일단락되었으나 대신에 카슈미르 해방전선(KLF) 등 지하단체들의 분리독립투쟁이 가속화되었다. 인·파간의 3차례에 걸친 전면전이 그러하듯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된 이 사태는 시크교도들의 분리독립투쟁과 함께 인도의 최대 현안이다. 잠무 카슈미르는 상기한 바와 같이 인도내의 유일한 회교도 거주지역인데 1990년 1월 인도정부가 반회교주의자로서 해임된 경력이 있는 자를 주지사로 재임명함으로써 주정부 각료가 총사퇴하고 주도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출동한 진압경찰이 발포, 유혈참사가 빚어졌으며 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인도 정부의 무력적인 시위진압을 비난하고 나섰고 강경파 회교도들의 대인도 성전선포를 주장함으로써 양국간·양종교간 역사적인 구원이 또다시 표면화되었다. 카슈미르 분리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회교도 지하단체들은 인도·파키스탄 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제3차 인·파전쟁과 방글라데시의 독립 편집

第三次-戰爭-獨立

1971년 12월 인도의 서파키스탄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의 원인은 파키스탄의 내정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부 파키스탄과 동부 파키스탄간의 예민한 내분이 1970년 3월의 총선거에서 동부 파키스탄의 자치를 주장하는 무지부르 라만 영도하의 아와미 연맹의 승리를 계기로 집권당과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71년 3월 당시의 아햐칸 대통령은 의회소집의 무기연기를 결정하고 라만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것이 실패함으로써 정부군을 동파키스탄에 파견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하고 무지부르 라만을 체포했다. 파키스탄 정부군의 동파키스탄 독립운동에 대한 철저한 무력탄압을 피해 난민(難民)이 인도로 줄지어 피난했다. 이렇게 되자 인도정부는 29일 유엔에 동파키스탄사태에의 개입을 촉구하고, 또한 인도정부는 파키스탄이 미·중국에 기대는 경향을 보이자 소련에 접근, 8월 9일에는 군사동맹 형태의 인·소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동파키스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인·소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1971년 4월 17일 아와미 연맹을 주축으로 한 동부파키스탄 정치세력은 방글라데시 독립을 선언했고, 인도와의 협력에 의하여 서파키스탄에 대항하려고 한 데서 인·파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동년 12월에 인·파간에는 전면전이 일어났고 12월 중순 인도군의 다카시 점령과 동파키스탄군의 항복으로서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인도에 뒤이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파키스탄은 동부 파키스탄을 상실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새로운 정부수반 부토와 인도의 간디 사이에 이 문제를 둘러싼 협상이 있기는 했으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다수 국가들의 승인에 의해서 기정사실화 했다.

3국 관계 편집

三國關係

1976년 5월 인도와 파키스탄은 국교를 재개했고 1984년 11월 지아 울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이 암살당한 간디의 장례식에 참석, 라지브 간디 신임총리를 초청하는 등 화해 분위기가 엿보였다. 1985년 4월에는 양국 외무차관간에 관계정상화를 위한 실무접촉에 합의했으나 이는 모두 외형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상호 무력증강에 몰두, 1987년 1월 양국 국경지역에서 또다시 전투가 벌어졌는데, 동년 2월 지하 울 하크의 인도 방문으로 수습되었다. 양국은 인도내의 시크교도 분리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설전을 벌였으며 관계개선을 위한 수뇌급 접촉이 계속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지정학상 인도와의 관계 협력에 중점을 두고는 있으나 건국초기와 같은 일변도는 아니며 파키스탄과는 1975년 8월, 중국과는 1976년 1월에 관계정상화를 이룩했다. 1979년 11월에는 국경지역인 '차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인도와 전면전 직전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스리랑카 인종분쟁 편집

Sri Lanka 人種紛爭

국민 중 다수파인 싱할리족과 소수파인 타밀족간의 역사적이고 감정적인 종족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스리랑카의 인종분쟁 사태는 밑도끝도 없이 확대되는 가운데 인도가 개입, 혼란의 극을 더하고 있다.

1983년 7월 항구도시 자프나에서 싱할리족 출신의 정부군이 타밀족 처녀 3명을 강간하자 흥분한 타밀족 주민이 순찰중이던 정부군 13명을 보복살해함으로써 발단된 동 사태의 원인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싱할리족은 아리안계로 불교도이며 기원 전 6세기경에 인도 북부에서, 타밀족은 드라비안계로 힌두교도이며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 남부에서 각각 스리랑카의 콜롬보와 자프나·동부해안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스리랑카의 주도권을 놓고 두 종족간의 분쟁이 있었으나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게 되어 표면화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영국은 스리랑카에 차·고무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면서 그들 특유의 식민지 통치방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두 종족간에 돌이킬 수 없는 미움의 싹을 잉태시킨 것이다. 즉 영국은 타밀족 우대정책을 펴면서 타밀족을 지배계급화하여 자신의 주구로 만들었고 다수인 싱할리족은 교육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자 싱할리족이 다수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타밀족은 정책적인 차별을 받게 되었고, 1956년 반다라이케 수상이 집권하면서 공용어를 싱할리어로 정하여 타밀족은 아예 2등국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욱이 1970년대에는 대학입학규정까지 개정해 타밀족 수험생들은 싱할리족 수험생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합격이 가능해지자 타밀족은 자구책을 강구, 타밀 통일해방전선(TULF)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거주지역(북동부)에 대한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타밀족은 협상파와 무력투쟁파로 분리되었고 협상파인 TULF는 1977년 총선에서 18석을 획득, 제1야당으로 부상했는데 양종족간에는 이미 1958·1977년에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

살해된 싱할리족 출신 정부군 13인의 시체가 콜롬보에 도착하자 격분한 싱할리족이 타밀족을 공격, 1주일 동안 무려 1천여 명을 살해했고 싱할리족이 장악하고 있는 스리랑카 정부는 TULF 소속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한편 타밀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1970년대 초반 해외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저항단체들은 7∼8개 정도로 '타밀 고향의 해방 호랑이들(LTTE)'과 자매단체인 EROS가 주축을 이루어 해외동포들의 지원하에 스리랑카 정부를 상대로 분리 독립투쟁을 벌여왔다.

1987년에 들어서자 강경입장을 고수해 왔던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과정에서 재정이 악화되고 경제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결국 인도의 중재 제의를 수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87년 7월 콜롬보에서 타밀족이 배제된 채 인도·스리랑카 정부간에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에게 대대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인도정부가 타밀족을 무장해제시키고 평화준수 이행을 감시한다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타밀족 온건파는 협상의 내용이 자신들의 요구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즉각적인 환영을 표시했으나 LTTE 등 저항단체들은 협상과정에 타밀족이 배제되었다고 강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독립국가 수립을 포기 않겠노라고 공언하였으나 인도의 설득과 위협에 굴복, 수용자세를 보였다. 싱할리족 내부에서도 국수주의 세력은 평화협정이 지나친 양보이고 인도군의 주둔은 주권침해라고 주장하며 집권당 인사들에 대한 테러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싱할리·타밀족들은 동협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스리랑카의 평화는 우연치 않는 사고로 깨지고 말았다. 1987년 10월 5일 불법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 수감중이던 LTTE 조직원 17명 중 13명이 감옥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러지않아도 평화협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LTTE가 활동을 재개, 싱할리족에 대한 보복공격을 시작했고 이에 협정감시 임무를 띤 인도 평화유지군이 즉각 반격에 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도군과 타밀족 사이의 전투로 확대되었다. 인도군은 해상을 봉쇄하고 저항세력의 거점인 자프나에 대공세를 전개, LTTE 본부까지 함락시켰으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LTTE는 세가 불리해지자 지하로 잠적했다. 1988년 5월 31일 인도·스리랑카 정부간 인도군의 단계적 철수가 합의되어 동년 6월 인도군의 부분철수가 시작되었고 집권 통일국민당(UNP) 정부는 동·북부 2개 주의 통합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LTTE는 통합된 의회선거에 참가할 것을 선언했는데, 동·북부주의 통합에 불만을 가진 소수민족들과 싱할리 보수파들의 반 UNP 시위·파업·투표 거부가 연이었다. 스리랑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이는 무력에 의한 억지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언젠가 또다시 재연될 위험을 안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종식 편집

-內戰終熄

보스니아 내전 당사자들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1995년 12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미국 정부가 중재한 가운데, 3년 반을 끌어온 내전을 종식시키기로 하는 평화협정에 조인하였다.

체첸사태 편집

-事態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러시아 내의 소수 민족인 체첸인들이 1991년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자 러시아 정부측이 무력으로 탄압함으로써 발생한 유혈사태이다. 1996년 체첸평화안 서명으로 매듭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