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지 역 분 쟁/아메리카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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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說

아메리카 대륙은 통상 문화권을 기준으로 앵글로 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 나뉘는데, 미국·캐나다 2국으로 구성되어 잇는 앵글로는 전형적인 선진국형이지만 라틴문화권인 중남미는 정정불안, 모노컬처 경제 종속구조, 군사독재 등 후진국형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미국의 간섭·영향을 짙게 받고 있어서 민중의 저변에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게 깔려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전형적인 우익 군사정권들은 음양으로 미국의 묵인·지원을 받아왔음은 익히 알려진 일이며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의 원료공급지요 동시에 판매시장으로서 수탈당하고 있음도 주지의 현실이다.

1980년대에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는 미국이 직간접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그것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해 온 미국 스스로 국제법을 위반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였다.

포클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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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kland 戰爭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식 명칭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Malvinas)제도라고 부르는데, 마젤란 해협 동쪽에 주도 동·서 포클랜드 및 2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1592년 영국의 존 데이비스가 발견, 1770년 에스파냐가 점령했으나 1833년 영국이 에스파냐로부터 영유권을 이양받아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다.

문제는 아르헨티나가 1816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할 때 동 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승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후 양국간에 영토분쟁을 빚어왔다. 1940년 아르헨티나는 아바나 미주국가회의에서 이 문제를 상정, 지지를 획득했고 1948년에는 해군함정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958년 국제연합에 상정되기도 했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도 심리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양국간의 주요 현안이었다. 1971년 양국은 합의점을 도출, 분쟁이 종식되는 듯하였으나 1973년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1976년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이유는 근해 해저에 석유보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1979년 협상이 재개되었고 1980년 11월에는 국교도 재개되었는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홍콩처럼 조차(組借)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2년 초 아르헨티나가 외국의 석유업자를 끌어들여 포클랜드 주변 해역에서 석유탐사를 시작하자 양국간의 마찰은 본격화되었고 동년 3월 아르헨티나는 이 문제를 다시 국제연합에 상정하면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회복을 선언했다. 동월 19일 일단의 아르헨티나인들이 동 지역의 사우스 조지아 섬에 상륙,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영국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공작이었다.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항공모함 '5월 25일호'를 주축하는 해군함대와 해병대를 동원, 포클랜드 제도에 기습상륙, 영국군과 교전 끝에 동 제도를 점령하고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주로 편입시켰으며 총독을 파견,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아르헨티나의 이러한 행동은 150여 년간 끌어온 영유권분쟁을 무력으로라도 해결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그 저의는 따로 있었다. 즉 1976년 3월 이사벨 페론을 실각시키고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백색테러를 자행,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미증유의 인권탄압을 자행했으며 계속적인 실정을 거듭, 경제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1년 3월 비올라에 이어 집권한 갈티에리가 노조와 페론주의자들의 반군정 및 민정이양요구 시위와 경제파탄에 직면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고육지계로 포클랜드 무력점령을 획책한 것이다.

그러나 갈티에리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은 아르헨티나의 자산동결 등 단교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해군함대를 출동시켜 동 제도를 탈환할 것을 명령했다. 영국 기동함대의 발진 직후 양국은 포클랜드 주변 200해리 해역을 각각 '전쟁수역', '작전수역'으로 선포했고 아르헨티나의 예비군 동원령에 영국은 포클랜드 주변 200해리에 해상봉쇄령을 발동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GNP 규모가 약 7배 차이나는 영국을 상대로, 더욱이 EC·미국의 경제제재조치로 심각한 경제위기에 몰리는 가운데 거의 모든 국력을 총동원하는 모험을 하게 된 것이다. 다만 포클랜드 전쟁의 양상이 첨단무기와 전자기술의 시험장으로서 군사적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미·소는 군사정찰위성이 수집한 정보를 각각 영국·아르헨티나에 제공, 국제적으로 확전의 우려를 야기시켰다.

포클랜드 주변 해륙에서 75일간 벌어진 양국의 전투는 각개 전투원의 자질과 장비보급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영국의 승리로 끝나 동년 6월 15일 주둔 아르헨티나군은 항복하였다. 쌍방 모두 인적·물적 손실은 컸으나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회복불능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은 전투 그 자체보다도 그 양상이나 결과가 당사국에 끼친 영향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국민들의 관심을 호도할 목적으로 동 사태를 야기시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패전으로 오히려 국민의 저항을 가중시키게 되었고 결국 1982년 9월 민간의 정치활동을 허용했으며 민정이양을 수락, 198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라울 알폰신이 당선, 붕괴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은 1990년 2월 영국이 아르헨티나 함정의 입항을 금지해 왔던 보호해역을 해제하고 포클랜드 주변해역에서의 양국 함정의 행동을 상호통치한다는 데 합의하고, 전쟁돌입 8년만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1991년, 사전통고 일수 단축 등 규제완화를 내용으로 한 새 협정에 조인하였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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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Grenada 侵攻

그레나다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도서국가로 1974년 2월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 한국과는 1974년 8월 수교했다. 초기에는 친영·친미경향이었으나 1979년 3월 쿠데타로 집권한 비숍정부 때부터 좌경화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83년 10월 20일 군사령관인 허드슨 오스틴이 쿠데타를 일으켜 비숍 수상 등 정부고위층 6인을 사살하고 군사평의회를 구성, 정권을 장악하면서 좌경화노선을 재확인했다.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해군기동부대와 공정대를 동원, 그레나다를 무력 침공해 오스틴 사령관을 체포하고 11월 임시정부를 수립해 1985년 6월에서야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미국은 침공 이유를 그레나다의 민주주의 회복과 미국 시민·재산의 보호라고 강변했으나 중미지역의 좌파 세력이 쿠바·니카라과 등의 지원으로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레나다의 친소좌경화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사실상 미국은 너무 미화되어 왔다. 일국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체제·의사를 선택함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하며 그것은 국가가 향유해야 할 권리, 즉 주권의 행사인 것이다. 따라서 1국가 내부의 정변이나 개혁에 외세에 개입을 의뢰하거나 스스로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주권의 포기요, 침해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군부의 쿠데타나 독재정권의 만행에 항거한다 하더라도 자금·물자의 지원·수락은 가능하나 의사결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더욱이 무력을 행사하여 그 의사를 관철한다는 것은 명백한 침략행위인 것이다. 국제법상 무력의 사용은 자위권의 한계로 제한하고 있는 바 그레나다 좌익 군사정부가 쿠데타 과정에서 미국인의 생명을 위협했다든지 재산을 몰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국가간의 쟁송 내지는 외교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지 군사행동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국제연합을 조직·장악하고 있고 스스로 세계의 정의를 자처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표리부동하고 이율배반적인 본심을 드러낸 셈이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사태에 대한 국제여론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서방국가들은 미국의 군사행동에 대해 비난을 가했지만 실상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결과이므로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쿠바는 대미보복을 경고하였으나 공언에 불과했으며 소련 등 동구권은 맹비난을 가했으나 예상외로 자제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이는 당시의 국제상황에 기인한다. 즉, 중동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 레바논 내전이 확대되면서 소위 자살폭탄 테러가 연잇고 있었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묶여 있었으며 동유럽은 폴란드 자유노조 사태가 가속화되는 등 위기상황이 연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카리브해의 소국 그레나다의 운명은 자연 제2차적 문제였고 힘의 우위를 선언한 레이건 행정부는 그 틈을 노려 미국의 의지를 과시한 셈이었다. 당시 그레나다에는 비행장 건설을 위해 쿠바의 민간요원이 상주하고 있었고 상당수의 쿠바 전투원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그레나다 자체의 군사력은 치안확보의 수준에 불과해 미국의 침공에 대항한 것은 쿠바 전투원으로서 격렬히 저항했으나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레나다를 장악한 미군은 쿠바인들을 송환하고 치안을 확보한 뒤 9인 잠정위원회를 설치,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간정부 수립을 약속하였으며 긴급 원조계획을 추진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좌파 군사정부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민간정부가 출범케 한 미국의 행동은 일면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레나다 국민과 사회는 그 대가를 치렀으며, 강대국의 자의적인 의지로 약소국가의 운명이 좌우된 또 하나의 사례로 남았다.

나카라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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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aragua 內戰

1936년 소모사가 독립운동가 산디노를 암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니카라과는 소모사가(家)가 3대에 걸쳐 족벌 귀족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해 왔다. 소모사가는 반정부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면서 국가경제력의 40% 이상을 독점, 국민의 대다수는 절대빈곤 상태에 놓이고 사회·경제적 모순은 극에 달하는 일대 아수라를 연출했다. 소모사가의 이와 같은 만행이 미국의 지원·묵인하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족벌 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식은 날로 고조되어 1962년 소모사에 암살당한 산디노의 이름을 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결성, 대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소모사 타도투쟁은 계속 확대되어 1970년대 중반 이후 니카라과는 내전상태에 돌입했는데, 인접국가들의 개입으로 내전이 확대되고 소모사를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국제여론이 비등해지자 미국은 지원을 철회하고 소모사에 대한 사임압력을 가중, 마침내 1979년 7월 소모사는 미국으로 망명하고 FSLN이 정권을 인수했다.

FSLN에 의한 니카라과 혁명은 국민적인 지지를 획득했고 서방지식층에서도 '영웅없는 혁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문제는 과거 소모사를 지원한 미국에 대한 니카라과 국민의 뿌리깊은 반미감정과 FSLN의 좌파성향에 대한 미국의 거부였다. 주지하고 있는 바처럼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좌익정권에 대해서는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 파괴공작을 감행해 왔다. 1981년 1월 반공보수주의를 표방하며 출범한 레이건 정부는 니카라과가 중남미의 좌익혁명기지가 되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대 니카라과 원조와 수입을 전면 금지하였다. 동년 8월 미국은 소모사 추종세력, 미스키토 인디언, 반 산디니스타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시작, CIA가 훈련, 무기·자금 지원, 작전지휘 등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콘트라 반군지원은 미언론의 폭로로 일대 정치쟁점화 되었는데 아무튼 니카라과는 다시금 내전의 혼미로 치닫게 된다.

1984년 4월 미국은 엉뚱한 명목을 내세워 니카라과 일부 해역에 기뢰를 부설하여 해상봉쇄를 감행하였는데, 니카라과는 미국의 콘트라 반군지원과 해상봉쇄 조치를 국제법 위반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승소했다. 1986년 6월 니카라과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이행을 촉구하기 위하여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이를 상정하였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오히려 미국의 콘트라 반군지원은 공개성을 띠어 보수단체들은 인도적인 명분을 내세워 자금 및 물자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국제여론과 의회의 견제 때문에 중지되었던 미정부의 대 콘트라 군사원조안이 1986년 6월 보수주의의 부상에 편승, 미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내전이 확대되는 가운데 1987년 8월에는 이해당사자인 중남미 5개국간 평화협정이 조인되고 FSLN 정부가 미국에 화해협상을 제의하는 등 협상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미국의 대 FSLN 협상 거부, FSLN의 대 콘트라 직접 협상 거부 등이 맞물려 답보상태에 놓여 있다.

1988년 11월 FSLN의 오르테가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 소련이 콘트라 반군을 격퇴하는 데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발표, 새로운 확전위기를 야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