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국제정치와 국제법/분단국 문제
분단국가
편집分斷國家
1933년 체결된 '국가의 권리·의무에 관한 조약'은 국제법인격(國際法人格)으로서의 국가자격으로 국민·영토·정부·외교능력(對外主權)의 4가지를 규정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 국가를 분류하는 기준은 특히 네 번째 대외주권(外交能力)의 유무나 행사 정도에 중점을 둔다. 완전한 외교능력을 갖춘 국가를 주권국가라고 하며 주권국가는 일반적으로 단일국가이다. 그런데 국가는 마치 인간의 생(生)처럼 생성·성장·약화·소멸의 과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주권국인 단일국가들이 갖가지 형태로 결합(國家結合)하기도 하고, 단일국가가 이데올로기·종교·인종 등 여러 가지 사유로 합법적 절차나 내란과정을 거쳐 복수의 주권국가로 분리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前)까지 세계사에 나타난 국가의 유형과 변이과정은 이상과 같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후 미·소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의 패전국 처리 과정에서 발단되고, 양극 냉전체제하에서 굳어진 새로운 국가형태가 나타났다. 한반도·독일·베트남에서 나타난, '분단국가'라 칭해진 국가형태는 이후 국제긴장의 최전선으로 소위 '냉전시대의 비극'이라 일컬어졌고, 독일을 제외한 2국은 동족간의 이데올로기 전쟁(국제대리전 양상을 나타냈다)을 치루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변질된 분단국가 문제는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까지 개재됨으로써 그 정도가 심화되었는데, 사실상 3국의 분단 모델이 각기 다르고, 따라서 각국에 개재된 주변국의 이해관계도 각기 다른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국가대표권·국가통일로 요약되는 분단국가 문제의 난이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단국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본질적인 개념정립과 그 과정의 정확한 추소(追遡)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론상 분단국가의 개념은 여러 가지 설이 대립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단일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의 주체적인 의사없이 외부세력의 강제에 의해 영토와 국민이 나누어진 국가로, 중요한 것은 체제·종교·인종 등의 제요소가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분단국가의 국가권력은 각 분단체로 각각 나누어지는데, 각 분단체 어느 쪽도 이론상 부분적 통치권을 가지되 국가대표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어느 일방에게 국가대표권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이지만, 그것은 국제정치의 파워게임에서 도출된 모순이며, 국제정치 역학구도 변화에 의해 언제든지 변환될 수 있는 성질을 띠고(1971년 국제연합에서의 중국대표권 문제가 이를 증명한다), 더욱이 분단국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타방 분단체를 부정함으로써, 분단의 해결은 당사국 국민 스스로의 의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절대원칙에 위배된다. 분단체 모두에 국가대표권을 인정하는 것은 일면 타당해 보이나 분단체 모두를 주권국가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분단을 고착화·현상화하여 국가분단을 국가분열로 변질시키고, 일방의 주권포기를 통해서만 국가통일이 아닌 국가통합을 달성할 수 있다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과거 동·서독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만약 분단체 사이에 국민적 합의 도출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이상적이기는 하다. 국가대표권이란 국가를 지배하는 정치권력의 합법성·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국제연합의 승인, 국제법상의 승인) 그 국가에 대한 국제법상의 모든 권리·의무를 승계하는 자격과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국가대표권이란 그 정치권력의 정통성·합법성 보지와 국민의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의 획득은 분단체뿐만 아니라 내란상태의 교전 단체 등 국가지배 의사를 가진 모든 정치권력에게는 최고 제일의 지상과제가 되며, 국제연합과 국제사회에서의 승인을 획득키 위한 외교적 노력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중국의 경우는, 이상의 개념에서 파악할 때, 비록 외세의 개입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을 치루었고, 앙시앵레짐과 공산주의의 주체적 대립이었으므로 분단국가가 아닌 분열국가이며, 타이완 정부와 베이징 정부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주로 주권을 인정치 않고 본토회복과 완전통합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내전상태의 계속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1971년 11월 국제연합에서의 타이완 정부축출과 베이징 정부의 중국대표권 승계로 나타난 중국문제를 지켜볼 때, 분단국가든 분열국가든 사태의 종식은 당사자이며, 주권자인 분단체 국민의 주체적 의사에 의해야 함에도 국제정치 역학구도의 영향력이 우선했다는 점에서, 특히 분단국가의 숙원인 통일과제에 암운을 드리웠고 이어 실제 상황으로 나타났다.
분단국가의 문제
편집分斷國家-問題
독일·베트남·한반도에서 나타난 분단국가의 공통점은 구체제가 붕괴된 과도기에 외세에 의해 강제적이고 타율적으로, 그리고 분단체 쌍방간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형태의 신체제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분단의 주범인 미·소는 자국의 이해만을 위해 그들이 수립한 분단체의 정치·군사·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그들방식의 가치체계와 구조를 이식시키고, 괴뢰나 다름없는 분단체의 정치권력·기층세력 또한 그에 추종하여 자신들의 권익만을 유지시키려 함으로써 분단체 쌍방의 대립과 갈등의 연속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는 단일 국가·민족의 동질성 상실과 이질성 심화로 나타났는데, 바로 이것이 분단국가의 지상과제인 통일의 최대 난제요, 분단국가 문제의 핵심이다.
강제된 대립적 이데올로기에 민족적 양심을 저버린 각 분단체의 매판·파쇼 세력의 파행은 국제정치의 흐름이 냉전 → 평화공존 → 데탕트 → 미·중 화해 속의 신질서 → 탈이데올로기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물론 국제 정치·경제·군사 체제하에서 각 분단체는 미국 또는 소련에 대한 편향성을 탈피할 수도 없었고, 독일을 제외한 2국은 제반조건으로 볼 때 그러한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베트남과 한반도는 분단화 과정의 특이성으로 그러한 비극의 도(度)가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분단의 고착화·현상화'로 지칭되는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반에 세대(世代)가 교체되면서 심화되는 듯한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갈등과 대립, 일방에 흡수되는 통일방식의 구사고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고체제가 움트기 시작했다.
'국가통일', '민족적 동질성 회복'으로 집약되는 분단국가의 지상과제는 그 과정상 갈등과 대립의 해소, 자유왕래, 문화·경제·정치·학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전향적인 교류, 국제사회에서의 공동보조, 국가대표권 조정 등 숱한 난제를 지니고 있다. 이 중에는 3국 모두에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도 있다. 난제가 되는 것은 특히 후자이며, 통일 모델의 상정에 있어서도 주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의 통일과 독일의 통일은 지극히 대조적이고 희비가 엇갈리는 지구상 최후의 분단국가인 한반도 통일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분단의 양상
편집分斷-樣相
1975년 7월 3일 남북베트남 통일정부 수립,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국가통합으로 분단국가는 한반도에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분단의 발생과 그 양상에 관한 논의를 한반도에 국한시키는 것이 시대적 조류에 부합될지는 모르나 그 역사적 사실을 살펴봄으로써 왜곡되었던 진상을 규명하고, 이러한 비극의 재현을 방지하며, 인과론적인 견지에서 독일과 베트남의 통일과정을 추론하여 최후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통일 모델을 상정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개별적인 특수성을 논하기에 앞서 3국을 독일과 한반도·베트남으로 2분한 비교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은 분단을 전후한 상황분석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차이가 분단 이후의 과정과 통일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인식에서 제기되었다. 독일은 정치적·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거친 자주·독립국가로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의사 형성에 대한 국민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즉, 독일은 제1차·제2차 세계대전 도발의 주체로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에 의해 침략주의 재발 방지의 목적 아래 분할되었으므로 민족적 긍지나 동질성은 손상되지 않았으며, 역사왜곡도 발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냉전체제하에서 본·베를린이 대립적 태도를 견지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한반도·베트남에서 나타난 민족적 갈등·이질성은 발생하지 않았고, 경제·문화·사회 등 비정치적 분야에서는 양측간 전향적인 교류를 확대, 국민적 합의에 의한 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이에 비해 베트남과 한반도는 앙시앵레짐이 붕괴되고, 각각 프랑스·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 정치적·경제적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의사형성에 대한 경험은 전무했고, 분단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그러했다. 문제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분단과 신체제가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민족적 동질성을 파괴하고 분단체간 갈등·대립으로 연속되었다는 데 있다. 그 양상은 각각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20세기 국제정치 역학 구도하에서 분단국가 국민 자신들의 무지(無知)와 정치세력의 집권야욕에 의한 결과라는 점은 같다.
한반도
편집韓半島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무력강점된 후 한반도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측에 항복함으로써 해방되었다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되었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와 전후처리라는 얄타회담에서의 합의에 의해 진행되었던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정책(1945년 9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 발표)은,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공산주의 정권수립 기도와 미·소간 대립상황 아래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에 대한민국이, 1948년 9월 6일 북한지역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됨으로써 결국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0년 일본의 한반도 무력강점과 대한제국의 붕괴 이면에는 미·영·러시아가 개재되어 있었다. 제국주의 사조하에서 서구 열강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후진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와 그 경영에 광분하였다. 따라서 영·프 등 선발 자본주의 국가와 독·이탈리아 등 후발자본주의 국가간의 선취권쟁탈전은 치열했고 결국 제1·2차 세계대전의 근본원인으로 작용했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시위로 개항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근대화를 달성함으로써 아시아 최강의 군국주의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영의 하수인에 불과했고, 그들은 일본을 이용하여 공동의 주적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 경영에 몰두하여 '가쓰라·태프트 협정'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승인했고, 영국도 '영일동맹'을 개정하여 그를 승인했는데, 그 이유가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 중에는 일방의 위급시에는 지원과 거중조정(居中調停:제3자적 입장에서 분쟁당사국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것)을 행할 것을 규정한 내용도 있었다. 동년 영국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국제법상 주권국가에 대한 무력침략 행위는 범죄행위이며 그를 지원하거나 용인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1910년 일본의 무력에 의한 대한제국의 붕괴는 적대국도 아닌 우호조약체결 국가들의 국가이익 절대우선이라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본질을 드러낸 극명한 사례였다.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은 얄타비밀협상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4개국 분할점령은 그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으나 한반도에 대한 미·소간 비밀협정은 주권국가와 그 국민에 대한 명백한 권리침해이며, 강대국의 패권주의적·자의적 독선이었을 뿐이었다. 한반도에서 대한제국이 붕괴된 이후 일시적인 정치권력 공백상태가 계속되기는 했다. 구국광복항쟁이 날로 치열히 확대되었으나 통합된 세력을 형성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19년 4월 17일 상하이에서 조직·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록 구체제를 계승한 정치권력은 아니었지만, 모든 정파(政派)·사상을 망라하여 한민족 전체의 의사가 결집된 한반도 유일의 정통 정치권력이었다. 공산주의 계열을 제외하고는 국내외 모든 한민족의 지지와 참여하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회복하고, 한반도에 대한 사실적 통치권을 행사하였으며, 국제적으로도 대외주권을 선언, 외교적 노력 또한 활발하였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나 속방(屬邦)이 아니라 무력강점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축으로 각 정파(사회주의 계열 포함)가 국민적 지지하에 주권회복을 위한 무장전쟁을 벌이고 있고,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가면 주체적인 의사와 노력으로 정통·합법의 정치권력을 형성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광복을 위한 노력과 분투에 미국·서구제국들은 냉담했고, 중국 국민당 정부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광복군을 지원했을 뿐이다.
임정(臨政)은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일(對日) 항전을 전개했으며,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선전포고하였다. 광복군은 중국대륙에서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했고, 미국정보기관(OSS)의 대일 공작활동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해외동포들까지도 의용군으로서 연합군에 입대, 광복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자주적인 광복을 달성하고자 임정은 광복군 국내정진작전을 계획·추진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짐으로써 무산되었다(광복군의 작전예정은 1945년 9월이었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하면 한반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정통·유일·합법의 정치권력이 존재하고 있음이 국제법상의 승인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어도 그 존재는 인식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개최되었던 3국 수뇌회담에서 채택된 공공 코뮈니케(카이로선언)에서 특별조항으로 한반도의 독립(Independence)이 명문화되었으나 문제는 한반도의 위상(位相)이었다. '노예상태'로 표현된 미·영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의미하는 바는 얄타회담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미·소·영 3국 사이에는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이 소련의 공산주의혁명 확산 음모였다.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의 경고처럼 소련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소련은 1939년 8월 나치스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동년 9월 나치스와 공동으로 폴란드를 침공, 분할 합병화하였으며(폴란드 3차분할), '카친 숲 사건' 등 가공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1941년 4월에는 일본과 중립조약(불가침협정)을 체결, 태평양 전쟁기간 중에도 대일중립을 고수하여 오다가 얄타 비밀협정으로 대일참전을 밀약한 후, 일본의 항복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일소 중립조약을 일방 파기하고 만주로부터 침공을 개시하였다.
전쟁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의 창설 등을 주요의제로 했던 얄타회담은 동유럽 공산화, 독일·한반도의 분단, 유럽지역의 국경분쟁, 소련의 세력확대 등 20세기 비극의 근원지로서, 후일 비밀협정 내용이 밝혀지자 미국 내에서도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처칠 수상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전쟁의 조기종식을 이유로 스탈린에게 엄청난 권익을 양보하였다. 이미 동유럽에 진주한 소련이 '괴뢰정권 수립'이라는 마각을 드러냈음에도 루스벨트는 비밀협정을 통해 스탈린의 의도에 부합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양보와 타협을 하였다. 결국 한반도 분단과 중국 공산화를 가져온 소련의 대일참전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전후처리를 위하여 한반도를 북위 38°선으로 분할하여 미·소가 점령, 군정(軍政)을 실시한다는 미·소간 비밀합의 내용도 그 일부였다.
자신의 정치적 위상에만 급급했던 루스벨트의 독단이 야기시킨 비극은 비극의 악순환으로 계속되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과 세계에의 파급을 기도하였으나, 당연히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스탈린의 집권 이후 '피의 숙청'과 더불어 서구제국과의 격차는 나날히 벌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했던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위 공산주의 지도국으로서 미국과 대립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소위 '제3전선 구축'이란 명분하에 진행되었던 무조건적인 미국의 경제·군사지원과 상기할 정치적 타협·양보였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 선발대가 원산에 상륙하고 동월 22일 평양에 진입,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고, 사전계획대로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공작을 추진했다. 남한 지역의 미군 진주는 이보다 늦은 9월 8일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군 선발대는 9월 2일 비밀리에 서울에 진입, 조선총독부와 사전절차를 협의하였는데, 이 역시 분단과정에서 또 하나의 비극을 발생시켰다. 9월 7일 미국 극동군사령부는 미군 점령지역에 대한 군정(軍政)실시를 포고하였고, 동월 16일 소련도 북한지역에 대한 군정실시를 포고하였다. 한민족의 광복에의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미국·영국·소련 3국 외무장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12월 28일) 민족적 분노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12월 29일 모든 정파를 망라한 범민족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가 결성되고, 곧이어 시위·파업·철시 등 갖가지 형태로 전국에서 국민적 반탁(反託)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지하고 있다시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야심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즉 스탈린의 공산주의 세계혁명전략의 일환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부터의 진출기도까지 내재되어 있었는데, 당시 한반도의 사회구조로 볼 때 신탁통치실시란 소련으로서는 그 목적달성에 더할 나위없는 호재(好材)였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계열에 신탁통치 지지운동을 지령하였다. 1946년 1월 6일 '반탁국민총동원 중위'에 참가하여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던 조선공산당 등 공산주의 계열은 소련의 지령대로 신탁통치지지를 선언하고 찬탁으로 급선회, 남한에서는 좌우대립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일어났다. 북한에서의 반탁운동은 소군정에 의해 탄압, 중지되고 조만식 선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체포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는 신탁통치 결정과 더불어 한반도 통합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 협의기구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회의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되었으나 통합임시정부의 국체·정체(政體)를 놓고 미·소간 첨예한 의견차이를 나타냈으며, 정파 참여문제에 있어서도 소련이 3국 외무장관회담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反託運動 단체를 가리킴)는 통합임정 구성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 공전(空轉)되기 시작했고, 이 시점에 이르러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1946년 2월 1일 미극동군 사령부는 맥아더 사령관 명의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純宗)의 직(職)을 폐지하였는데, 1945년 8월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정선언과 더불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독선적 자세를 실증한 사례였다. 북한에서는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되어 김일성이 전면에 등장, 소군정의 비호 아래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남한에서는 2월 14일 미군정청 최고자문기관으로서 '남조선 민주의원'이 구성되어 의장에 이승만이 취임했다. 남한에서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이 파업과 모략활동을 전개, 우익과의 극심한 충돌로 곳곳에서 유혈사태를 빚었고, 민족주의 계열은 김구 선생의 임정과 이승만의 지지세력으로 사회주의계열(좌익)은 다시 온건우파와 소련의 사주를 받는 남조선노동당(南勞黨)으로 각각 분화되었다. 문제는 이승만과 미군정의 접근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임정 당시부터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여 1921년에는 임정 의정원에서 불신임결의를 받기도 했는데, 구미대표부 위원장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독단적인 월권을 행사, 물의가 많았다. 환국 후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규합, 김구 선생의 임정을 결원하였으며 친미·반일·반공 노선을 견지함과 동시에 미군정과 협력, 정치권력 확보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사회주의 세력을 망라한 임정을 의심하였고, 그들의 세계전략에서 볼 때 이승만을 보다 거래가 용이한 상대로 택하였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신탁통치와 관련된 양자의 견해였다. 즉, 김구 선생은 한민족의 주체적 결의에 의한 제파연합의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 미군정과 대립이 심화된 반면에 이승만은 원칙적인 반탁이지만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그 정부형태는 미국식 민주주의일 것을 주장, 당시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한반도의 비극은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북한은 소련의 지원에 의해 김일성이 공산주의 제파를 통합, 숙청과 거세로 완전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는데, 볼셰비키에 대한 토착공산주의 제파의 맹종은 참으로 어리석고 가엾은 것이었다(물론 이들은 196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에 의해 모두 제거된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권력장악을 위한 미군정의 지원이 강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미군정 산하 각 기관·경찰·경비대에 근무하고 있던 임정지지자들이 모두 축출되고 조속한 국가형성작업 추진을 이유로 미군?지지자들과 이승만계열 인사들로 대체되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과거 친일·부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남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다시 그들의 권력이 계속 유지되고 한반도의 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했는데, 이승만의 반일주의는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 사건에서 그 허구성을 드러냈다. 이상이 객관적 공정성은 부족하겠지만 한반도 분단의 과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이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1950년 6월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소련의 괴뢰로서 그들의 사주를 받아 동족상잔의 대비극을 일으켰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는 한 나라 한 민족이 하루 아침에 적이 되고, 거기에 세계 전사상 유래없는 잔학과 파괴의 참극을 빚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에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전제군주적 독재정권이 공산주의·주체사상을 주장하며 민족의 여망을 호도하고 있고, 남한에는 비민주적 일인독재·군사독재 정권이 반공과 통일을 명분으로 정권유지를 위한 갖가지 파행을 일삼아 왔다. 물론 이것은 각각 그 배후에서 분단의 주체들과 정권간의 공생적 관계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이와 같이 외생·내생 인자가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어, 남북한에 획기적 사태가 발생되지 않는 한은 현실의 정치쇼가 될 뿐이다.
베트남
편집Vietnam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월남공화국)가 북베트남 정부(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0여 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의 종식과 동시에 1945년 9월(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 이래 분단되었던 베트남은 외견상 통일을 달성했다. 이어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를 승계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Viet Cong의 정식명칭)'은 남·북베트남을 통합,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데올로기를 차치하고서 분단국가의 통일은 지상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의 통일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본질은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즉, 통일정부 수립과정에서 NLF는 베트남 전쟁의 주역이었음에도 종적인 위상에 그쳤으며, 이후 대부분 거세되었고, 구북베트남 정부 계열(胡志明派)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더욱이 사회개조작업의 명분 아래 구 남베트남의 지식인·자본가·지도층에 대한 교화 이상의 보복적인 탄압·숙청을 강화함으로써 민족적 동질성회복·화합·포용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결과는 통일 이후에도 극심한 경제파탄과 사회적 후진성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극복키 위한 노력보다는 공산주의 이식과 그 확산을 기도한 민족주의적인 국가재건을 망각하고 친소노선으로 편향함으로써 스스로 통일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한 민족해방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국제대리전쟁으로 격하시켰고,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는 국제적 난민 사태를 야기시켰다. 1988년 10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이기는 하지만 진보적이고 온건한 민주당·사회당 등 제파정당을 해체시키고 공산당 1당체제를 구축했는데, 친소·친동구권을 지향하고 있는 베트남이 오히려 당시 소련·동구권에서 일어나고 있던 대변혁사태에 역행한 것은 또한번 베트남 통일의 본질을 드러낸 사례인 것이다. 결국 베트남의 통일을 단지 '외형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파악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상기한 바와 같이 무엇인가 결여된 미완성으로 판단되기 때문인 것이다.
베트남의 분단과정은 지극히 비극적이다. 역사 이래 중국에 대한 종속과 투쟁을 계속해 왔던 베트남은 1802년 구엔푹안이 프랑스인의 도움을 얻어 위에(Hue)에 도읍, 구엔 왕조를 개창하였으나 1862년 그리스도교 박해사건으로 코친차이나가, 1883년에는 전역이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인도차이나 전역의 지배를 노려 1900년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3국을 통합,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시켰다. 반프랑스 독립투쟁은 1920년대 이후 본궤도에 올랐는데 베트남 청년동지회·광복회·국민당 등 민족주의 계열과 호치민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양축을 형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여 물러가고 일본이 침입하자 양파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동맹(Viet Minh)'을 결성, 반일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이 패주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의 베트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는데, 종전 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권 회복을 기도함으로써 베트남의 분단비극이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야욕에 가득찬 프랑스는 외인·용병 부대를 투입, 북베트남을 공격하는 한편 1949년 6월 바오 다이를 내세워 남베트남에 베트남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시켰다(보호령).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는 북베트남의 대프랑스 항전은 전형적인 민족해방전쟁으로 1954년 5월 북베트남군이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를 함락, 동년 7월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북베트남 정부를 승인했고, 베트남은 북위 17°선을 경계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동서냉전 체제하에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구 식민지배국들은 1955년 10월 남베트남의 베트남국을 해체시키고 친미·반공의 베트남공화국을 수립, 북베트남에 대항하게 했는데, 남베트남 정권은 파쇼군부와 매판자본가·토착지주들로 구성된 독재·부패의 온상이었다.
1956년 7월 북베트남 정부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통일을 위한 남·북베트남 총선거'를 남베트남 정부에 요구했으나 남베트남 정부는 이를 거부함은 물론 통일을 요구하는 민중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남베트남 지역의 민족주의자들과 민중운동 세력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대정부항전에 돌입했고, 북베트남 정부에 지원을 요청, 북베트남군이 개입함으로써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지칭되는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에 동남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봉쇄전략을 취하고 있던 미국이 '동남아시아 집단방위조약'을 근거로 정규군을 파견,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였는데,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전투에 직접 개입하였다. 이후 한국·타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가 참전하여 남베트남 정부측에 가담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은 소련의 무기원조를 받는 북베트남·NLF 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과 한국 등 참전국가간의 대결이라는 국제대리전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는데, 전쟁중에도 남베트남에서는 쿠데타가 연속되고, 온갖 부패가 만연되어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 베트남전쟁은 사실상 북베트남·NLF 대 미국·한국간의 전쟁이라는 기묘한 양상을 띠었다.
세계 제일의 경제력과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미국이 참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전투에 나선 미국의 젊은 병사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음에 비해 북베트남군과 NLF의 전투원들은 그 의미가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소총 대 죽창'의 대결에서 죽창의 승리라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통일 작업에서 NLF는 북베트남 정부에 철저히 배신당하고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스탈린주의가 퇴조하는 시대적 조류 앞에서 베트남은 오히려 역행하였다. 더욱이 민중이 환상에서 눈을 뜨자 공산당정권은 과거 남베트남 정권이 행한 것 이상으로 대국민 세뇌작업과 탄압을 강화했다.
독일
편집獨逸 1990년 9월 12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독일민주공화국(동독)·미·영·프·소(2+4) 6국간에 '독일문제에 관한 최종적 협의협정'이 체결됨으로써 1990년 10월 3일 동독의회는 주권포기와 서독과의 통합을 의결했고, 0시를 기해 독일은 분단 45년만에 '독일연방공화국(FRG)'로 통합·재출범했다. 금세기 최고의 정치적 사건이며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독일의 통합은 유럽의 신질서구축, 얄타체제의 종식, 유럽의 통합, 국제질서 재편 등 갖가지 수식으로도 형용키 어려울 만큼이나 주변국가에 끼친 충격파도 크다. 그것은 독일의 역사와 분단화과정 및 국가통합과정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독일은 게르만 민족사 그대로 상무적·진취적·독자적·관료적·분립적 의식이 강해 내부적으로는 정치적·종교적·분열로 내전이 연속되었고, 국가통일기에는 정복사업에 몰두, '유럽의 화약고'로 일컬어졌다. 프로이센에 의한 통일 이후 군국주의·제국주의 노선으로 일관, '독일의 유럽'을 내세우며 침략주의적 노선을 견지, 결국 제1·2차대전을 도발하였다. 이 때문에 독일과 접경한 국가들은 항상 그 위협에 시달리며 민족적 역사적 사실 갈등을 겪었다. 독일의 분단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히틀러의 제3제국에 의해 도발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이후 주도권을 차지한 연합국 수뇌들은 전후 독일의 처리 문제를 논하기 시작했는데, 독일은 일본·이탈리아와는 다른 차원에서 취급되었다. 1945년 4월 히틀러의 자살로 유럽전쟁이 종결된 후 미·영·소 수뇌들은 포츠담에서 '독일의 전후처리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에 의해 독일 분할이 결정되었다. 동협정에서 연합국은 독일의 침략주의 포기를 궁극적 목표로 무장해제·비군사화·비나치화·민주화를 위해 분할점령하되(중앙정부수립 억제) 단일단위로 취급하며, 배상금부과와 과거의 점령영토를 환원시킬 것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은 미·영·프·소에 분할점령되었고(베를린도 4분되었다), 힌터포메른·슐레지엔은 폴란드에, 수데텐은 체코슬로바키아에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일부 영토가 할양되었다(이들 4개 지역은 통일독일에 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협정체결과정에서 관계당사자인 프랑스가 배제됨으로써 이후 독일 문제를 둘러싸고 반발이 야기되었으며, 독일의 동부국경선을 오데르-나이제강으로 설정함으로써 국경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4개국의 독일 분할점령·관리 과정에서 미·영·프 3국과 소련의 이견차이가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공동관리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 갔으며, 소련은 점령지구에서 포츠담협정의 이행을 명분으로 경제·사회 분야에 대한 전면적인 개조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산업설비·자산(資産)의 수탈과 공산주의 이식이었으며, 이에 대항해 3국은 1946년 12월부터 점령지구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4개국 관리이사회도 점차 기능이 약화되어 가다가 1948년 3월 소련이 탈퇴를 선언, 양분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3국과 소련간의 정책대립이 직접 원인이었으나 근본 원인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지역에 대한 공산주의 이식과 그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대응조치, 즉 동서냉전의 가시화에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던 소련은 대전 초기 독일과 야합하여 폴란드를 분할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미국의 각종 원조로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루스벨트의 양보와 타협으로 동유럽 지역을 석권하자 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서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서유럽 국가들의 전후복구사업 지원을 위한 경제원조(마셜 플랜)를 실시하고,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코자 서유럽 국가들과 연계된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47년 6월 3국 점령지구(西獨)가 마셜 플랜 수혜대상에 포함되자 소련은 사회주의 통일당(SED;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체한 동독의 수권정당)을 내세워 독일 재통일 시위를 획책하였다. 1948년 6월 3국 점령지구에서 화폐개혁이 실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독의 신통화가 베를린의 소련측 점령지구에 유입, 경제혼란이 발생하자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고, 이에 대해 3국은 '베를린 대공수작전'으로 맞섰다. 물론 이 사태 역시 동서냉전의 심화가 근본 원인이었는데 아무튼 서독은 마셜 플랜에 힘입어 '라인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동서냉전체제가 심화되자 미국은 대소·대유럽 정책을 수정, 서독을 재무장시켜 서방측 전위로서 소련·동유럽제국에 대항케 하려는 신전략을 수립했고, 그 일환으로 독일국민들의 재통일요구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련 당사국(영·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들과 서독정부수립을 위한 6개국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결과 1949년 5월 23일 미·영·프 3국 점령지구에 '독일연방공화국(FRG)'이 수립되었고, 1949년 10월 7일 소련이 자국 점령지구에 '독일민주공화국(GDR)'을 수립시킴으로써 분단국가 독일이 탄생하였다. 전쟁도발의 주범이기는 하나 독일 역시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주체적 의사는 완전히 무시된 채 강대국에 의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확정을 당하여 원치도 않는 공산주의 대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체제적 대립을 강요받았다. 서독은 미국의 지원 아래 급속한 경제부흥을 달성하여 OEEC-ESCS 등 서방측 경제협력기구에 가입, 소련과 동구권에 대항하는 서방측 최전위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는데, 1952년 5월 26일 점령 3개국과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점령체제가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서독을 재무장시켜 서방측 군사기구에 편입시키고자 한 미국의 의도는 프랑스의 거부로 지연되었으나 1955년 5월 '파리협정'에 의해 주권이 회복되고 재무장이 승인되어 NATO-WEU에 정식 가입했다.
1952년 3월 소련은 독일을 재통일시켜 중립화하는 '전(全)독일 강화조약안'을 3국에 제시했다가 거부되자 동독 정부의 민정이양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파리협정이 체결되자 동년 9월 동독과 '주권회복에 관한 조약'을 체결, 동독의 주권을 회복시켜 WTO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독일은 '1독일 2국가(분단체)'로 나뉘어져 서독은 NATO, 동독은 WTO의 전력핵심으로서 첨예히 대립하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독일은 이데올로기, 특히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한 한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도 체험적이고 뿌리깊은 역사적 경험과 소산을 지니고 있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향수도 지니고 있었다. 종전 이후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탈출자가 대략 3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며, 그 중 상당수가 지식인·기술자·전문인 등 고급인력이어서 동독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고, 그 저지책으로 발생한 사건이 1961년 8월의 '베를린 장벽 구축'이었다.
독일국민의 근면성과 노력, 미국과 소련의 의도적 지원이 맞물려 서독은 세계 최고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서방측 최전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독 역시 동유럽국가 중에서 제1의 성장을 이루어, 소련에 이어 제2의 공업생산력을 보유함과 동시에 국민소득 수준에서는 오히려 소련을 능가하여 WTO·COMECON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5년 9월 당시 서독 외무차관 할슈타인은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합법 정부이므로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거부·단절하겠다(소련은 제외)'는 '할슈타인 원칙'을 선언, 1960년대 서독의 기본외교 방침으로 굳어졌는데, 동독은 이에 대해 '1독일 2국가'를 주장하여 양측의 대립은 마치 한반도의 재판과 같았다. 서독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유럽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동독 또한 '동구권의 우등생'으로 지칭될 만큼 위상을 굳혀갔으나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 양자간의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근본 원인은 물론 공산주의의 본질적 모순과 한계이며, 더욱이 동독은 정치·군사적으로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적 지위에 지나지 않아, 일정 단계에 도달한 경제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교역이 필요한데, 이러한 경제적 욕구와 정치·군사적 입장의 균형이란 시대상황 논리로 볼 때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통일 논의는 1968년 1월 이후 서독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기본적 여건이 조성되었고, 1969년 9월 집권한 브란트 총리가 '동방외교'라 불리는 대소·동구권 관계 개선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시작됐다. 그 결과 1970년 3월 에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양측간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1972년 6월부터 관계정상화 및 통일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간의 협상 분위기는 1971년 9월 베를린의 지위에 관한 미·영·프·소 4개국간의 '베를린 협정'에서 마련되었다. 베를린 문제의 종식 기반을 구축한 동협정에서 사방 3국은 동독에 대해 정식 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서방측 국가들 가운데서도 서독의 할슈타인 원칙을 거부하고 동독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국가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었다.
1972년 12월 22일 동·서독은 관계를 정상화하고 상호존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기본조약'을 체결, 1973년 5월 의회비준을 거쳐 1974년 6월 30일 쌍방의 수도에 상주 대표부를 설치·교환함으로써 분단 26년간의 대립체계를 종식시키고 평화공존관계를 수립했다. 전문 10조로 구성된 기본조약은 전문에서 평화유지, 긴장완화와 안전보장, 무력사용의 포기, 민족문제의 협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립·논쟁의 유보를 기본원칙으로 밝히고, 이를 다시 본문 각조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즉 상호동등한 권리 인정 및 정상화된 선린관계유지, 국제연합헌장의 목적 및 원칙의 존중, 무력사용 포기와 국경선 존중, 단독대표권의 포기, CSCE 정신존중 및 군비축소, 영역한정의 원칙 및 독립·자주성의 존중, 상호협력 및 사회개방, 상주대표부의 설치 및 교환, 기체결조약의 상호존중이 그것이다. 특히 서독은 상호협력 및 사회개방에 중점을 두어 동독의 서독에 의한 국가 승인요구와 연개해 타결시켰는데, 사실상 독일통일의 원동력은 여기에 있었다. 즉, 이에 의해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와 상호자유왕래, 통신·전파개방이 이루어짐으로써 동독국민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고, 분단 후 이질화 되었던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통일의 싹이 자라난 것이다.
서독은 이 기본조약체결이 분단의 현상화가 아니라 독일통일의 초석임을 분명히 했고,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법적 근거까지 확보했다. 1973년 9월 15일 동·서독은 나란히 국제연합에 가입했고, 1974년에는 보건협정이, 1976년에는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되어 양국간 인적·물적 교류가 계속 확대되었다. 이러한 통일 노력은 서독정부가 국민적 지지에 바탕을 두고 전향적으로 추진했는데, 소련과 동독의 집권 공산당정부는 동독에 대한 국가승인 문제와 분단현상화를 기도, 동독 내에서 국민적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독은 독일의 통일에 외생적 인자가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미·영·프·소), 국제적인 기반 확보에 노력을 경주했는데, 그 성과의 하나가 1975년 8월 체결된 CSCE 결의안, 일명 '헬싱키 협정'이었다. 동독의 경제·비정치적 분야에 대한 서독의 원조·협력·공세가 꾸준히 계속되는 가운데 1979년 10월 동독의 고위각료가 서독을 방문하고 양국간 정상회담이 논의되는 등 해빙무드가 고조되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폴란드 자유노조 파업사태로 빚어진 신냉전체제의 도래로 동·서독 관계 역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통행료 폐지와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2개의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자유노조의 민주화요구로 인한 폴란드 공산당정부의 위기를 지켜본 동독은 자유화 운동의 파급을 억제하기 위해 여행자들의 체류지참금 하한을 대폭인상하는 동시에 서독인의 입국을 제한하였다. 서독은 이에 대항해 경제협정에 의한 대동독원조를 동결함으로써 양국관계가 원점으로 회귀하는 듯하였으나 1981년 7월 동베를린에서의 대사급 군축회담을 시작으로, 동년 10월에는 쌍방간 피체첩보원 교환이 이루어졌고, 동년 12월에는 슈미트·호네커 회담이 이루어져 회복기미를 나타냈다. 그러나 통일논의는 당시 미·소간 대립상황으로 회피되었고, 1983년 여름 국경지역 검문소에서 서독인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 양국관계가 다시 냉각되기 시작한 가운데 동독 총리의 조카딸 일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서독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 1984년 3월 서독이 이를 허가함으로써 새로운 외교분쟁이 야기되었다. 1983년 이후 서독은 저리차관공여·합작투자 등의 방법으로 동독에 대한 경제 원조·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동독인의 서독방문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동독일인들의 망명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1984년 2월 이후 동독은 국경지역의 탈출방지용 지뢰지대·기관총좌 등을 철거하면서도 베를린 장벽 후방에 새로운 장벽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이것 또한 망명자 급증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상기한 바처럼 독일의 통일을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만 논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과거 독일의 침략을 경험했던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서 다소의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일례로 1984년 9월 호네커의 서독 방문취소는 양국관계의 변화를 주지하고 있던 소련의 압력 때문이었다. 1985년 5월 본에서 개최된 미·영·프·서·독·일·이탈리아·캐나다 7개국 선진국 정상회담에서는 '정치선언문' 채택을 통해 '통일국민들은 통일을 정당한 권리로 기대할 수 있다'고 공식언급, 서독의 통일 노력에 일대승리를 안겨 주었다. 즉, 독일의 통일은 서독·동독간의 합의와는 별도로 미·영·프·소 등 4개국의 승인절차가 개재되어 있었는데(2+4합의), 이로써 협상대상은 동독과 소련, 엄밀히 하면 소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미 동독은 서독의 문화권에 흡수되어 정치적 절충만이 남았을 뿐으로 전파매체, 특히 TV가 끼친 영향은 '낮에는 동·서독, 밤에는 독일'이라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지대하였다. 다만 1980년대 중반 미·소간 군축협상의 난항으로 동독에 대한 소련의 주시가 심화되어 양국간 협상이 다소 둔화되기는 했으나 동독국민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1985년 8월 발생한 서독정부 고위층과 관련된 동독간첩 스캔들로 인해 일시 냉각되었던 양국관계가 회복기미를 나타내기 시작, 1986년 5월 6일 협상 13년만에 동·서독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문화협정'이 체결되었는데(이는 기본조약 제7조의 구현이다), 분단국가의 통일문제에 있어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민족정기 고취가 그 근본임을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7년 9월 호네커가 서독을 방문하여 양국관계는 다시 고조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소련의 동구권 간섭완화가 있었다. 콜·호네커간 회담에서는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양국협력과 관계개선 증진방안이 협의되어 '학문과 기술에 관한 협정' 등 3개 쌍무협정이 체결되었고, 특히 경제분야에서의 공동협력을 위한 '합동경제위원회'의 설치에 합의했으며, 동독 내의 정치범석방과 서독 망명허용, 동독인의 서독방문 증대, 서독의 동유럽 시장진출 등을 유발·촉진하기 위한 서독의 대동독 경제지원이 약속되었다. 독일 재통일과정의 한 장을 장식한 호네커의 서독방문과 회담성과는 동년 12월 미·소간 INF 폐기협정의 체결로 예상되는 새로운 군사적 상황에 대해 당사자인 양국이 공동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튼 1987년 1월 동안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은 500만 명에 달했으며, 서독은 동독에 상당액을 지불하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켜 서방측에 망명토록 주선해 왔다(1987년 1년 동안만 600여 명으로 추산). 이상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독 공산당정부의 해체, 그리고 독일 재통일이 결코 국제정세를 틈탄 우연이 아니며, 그 견인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1988년 10월 콜 총리는 소련을 방문,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에서 동·서독 통일문제를 협의했고, 그와 연계해 경제협력을 제의,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1989년 6월 서독을 공식방문, 유럽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투자보호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실세인 서독과 소련과의 독일 재통일 협상은 점차 구체화·가시화되었는데, 이는 고도의 정치적 거래이기도 했다. 소련으로서는 동구권의 공산당 정부 붕괴사태와 더불어 동독의 해체란 WTO·COMECON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며, 세계 최고수준의 경제력을 지닌 서독과 동유럽 제일의 동독이 통합, WEU·NATO·EC 체제에 가세할 경우 나타날 유럽의 신질서 상황에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90년 2월 오타와에서 개최된 '2+4 회담'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는 서방측에서도 일말의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동유럽 공산당정부 해체와 신정부의 친서방화 경향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서방측의 태도불변과 관련, 딜레마에 봉착했다. 실상 4개국 중미·영·프의 독일통일에 관련된 이해관계는 상대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소련으로서는 동유럽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소련은 통일독일의 중립화와 NATO체제의 변화 및 신안전보장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은 협상에서 평행상태를 유지하기에는 국내문제, 즉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과 구체적 성과획득을 위한 서방국가의 원조·협력확보가 선결과제였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소련은 경제 개혁·부흥을 위해 동독을 포기하는 대신 서방의 협력자로서 통일독일을 택하였으며, 서독으로서는 동독의 재건과 관련해 부담은 있지만 민간부분의 투자가 확대된다면 재정부담은 완화될 것이고, 실제로 서독의 기업들이 긍정적 반응을 나타냄으로써 소련의 구상을 받아들였다. 동년 7월 카프카스에서 이루어진 서독·소련간의 담판으로 독일 통일문제는 최대의 난관을 타개하였다.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비난(이것은 독일 재통일 이후 유럽에서의 자국의 영향력 감소를 예상한 반발이기도 했다)이 있었지만 통일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자 수만 명의 동독인이 헝가리를 경유, 서독으로 집단탈출하기 시작했다. 동월 라이프치히에서 지방인민회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점차 자유화 요구 시위로 전환, 각 도시로 확대되었다. 동년 7월 공산당정부는 서독으로의 탈출자에 대한 발포를 금지했는데, 이는 물리적인 저지가 더이상 불가능하고 강제할 경우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정부가 근본적인 개혁없이 인접국가의 정치·경제개혁조치를 비난하는 시대착오적 형태를 거듭하자 동년 9월 자유화·개혁세력들이 노이에스포름을 결성, 10월 초부터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10월 12일 동독의 유수한 학술연구기관인 예술아카데미가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고, 호네커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촉구 경고가 연잇는 가운데 10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대규모 반호네커 시위가 발생했다. 그 결과 1971년 이래 18년간 집권해 온 호네커가 실각하고 개혁파에 속하는 크렌츠가 집권했으나 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크렌츠는 사회주의 범주 내에서의 개혁만을 상정하고 있었다(이는 동독국민의 의사를 간파하지 못한 무지로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크렌츠 퇴진 및 자유총선거실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공산당정부의 내각총사퇴와 개혁파 신임총리선출, 정치국원 사퇴 등 권력지반 자체가 동요되는 가운데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즉, 크렌츠가 베를린 장벽을 포함, 동·서독간 국경을 전면개방하고 동독국민의 해외여행을 완전 자유화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는 크렌츠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통제해제 조치가 명령하달 과정에서 증폭, 실무자들에 의해 일어난 사태라는 보고가 나왔는데, 이 시점에 이르러 동독 공산당정부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11월 14일 공산주의 종식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정부조각에 비공산당계 인사들이 대거 입각하였으며, 12월 1일 콜 총리의 '3단계 독일 통일안'이 제시됨과 함께 인민의회는 헌법상의 공산당의 권력독점조항을 폐기했다. 동독 공산당을 파탄을 막고자 자체적인 대개혁을 추진, 당명을 민주사회당으로 변경하고,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동시에 노이에스포름 등 재야의 정치참여를 수락했다. 공산당이 체질개선과 변신을 통해 재기를 꾀했던 이유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사회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 2월 공산당계·비공산당계연립 내각은 서독에 '통일 독일의 중립화안'을 제의했는데, 상기한 바와 같이 이는 소련을 의식한 것이었으나, 동년 7월 서독·소련간의 카프카스담판이 성사됨으로써 독일통일은 절차상의 과정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3월 18일 동독 내에서는 24개 정치세력이 참가한 가운데 최초의 자유총선이 실시되었는데, 기민당(서독의 기민당과 제휴)·민주당·독일사회연맹 등 3개 보수우파연합인 독일동맹이 50%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했고, 중도파인 사회민주당이 제2당, 민주사회당(구 공산당)은 제3당으로 전락했다. 특히 서독의 정당들은 통일 후에 대비해 동독의 민주우파계열 정당들과 제휴, 협력관계를 맺고 총선에서 각종 지원을 행하였는데, 콜 총리가 이끄는 서독의 집권 기민당과 제휴한 동독의 기민당이 승리함으로써 독일통일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동독의 총선 후 콜 총리는 1993년 이전의 통일실현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통일의 주역이었던 그도 불과 6개월 후 통일이 실현될 것을 예상치 못할 만큼 독일 재통일은 급격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통일독일의 위상이었다. 이는 야누스와 같은 독일통일의 양면성으로 NATO·WEU·EC의 중심적 존재인 서독과 WTO·COMECON의 핵심인 동독의 통일은 유럽 최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거대 독일의 등장을 의미하며, 그 방식이 동독의 주권포기에 의한 국가통합이기 때문에 소련은 물론 서유럽국가들도 유럽 체제재편 이후에 대해 나름대로의 민감한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동유럽 공산당정군의 몰락과 독일의 통일이 자본주의 승리라고 환영하면서도 가시화되고 있는 EC·CSCE를 축으로 한 유럽통합이 궁극적으로 NATO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영향력 감소와 위상격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려를 나타냈다. GATT·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발생한 미국·서유럽 국가간의 공방전도 그 일례이며, 향후에도 이러한 양측간의 정치적·경제적 긴장은 때때로 야기될 것이다. 유럽 국가들도 군사적 긴장해소라는 측면에서는 환영하지만 거대 독일의 등장으로 기존의 세력균형이 파괴될 가능성이 높고,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그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구축될 신질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간파한 콜 총리는, 이미 동독총선에서 귀속통합방안을 내세운 독일동맹이 의결정족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였고, 제2당인 사민당 연정에 참여함으로써(의결정족수 확보) 민족내부의 통일작업이 달성됨에 따라 독일통일을 위한 외부적 조건, 즉 점령 4개국의 승인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콜은 CSCE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EC·NATO의 지지를 확보하고, 실제적 협상대상인 소련과의 담판을 준비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련의 우려는 극히 심각했고, '2+4 회담'에서 양국의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1990년 7월 1일 동·서독은 경제통합을 실시,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했고, 남은 것은 통일 독일의 위상과 관련된 소련과의 담판이었다. 7월 5일 콜 총리는 NATO 정상회담에서 핵무기의 최후수단화, 통독군(統獨軍) 감축(37만명)이라는 대소 군사양보안을 제시했고, 7월 9일 휴스턴에서 개최된 선진 7개국 정상회담(G-7)에서 30억 달러 규모의 대소 경제지원안을 제시했다. '제3차 2+4 회담'을 앞둔 7월 17일 콜 총리는 이상의 양보·지원안을 가지고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방문했고, 그 결과 독일 재통일의 최대 난관이었던 통일 독일의 NATO 잔류에 대한 소련의 승인, 즉 서독·소련간의 '카프카스의 담판'이 성사되어 독일 재통일은 초읽기에 들어 갔다. 독일의 정치적 통일을 결정지은 '카프카스의 담판'에 관해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민족주의적·독자적 태도를 지적했다. 1990년 9월 12일 개최된 '제3차 2+4 회담'에서 연합국(점령 4개국)의 '독일에 대한 권리'의 전면 포기와 통일 독일의 완전한 주권승인을 내용으로 하는 '2+4 조약'이 조인되어 독일분단을 전제로 45년간 존재해 왔던 얄 체제(냉전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독일통일은 또 한차례의 국제적 승인절차를 요하고 있었는데 이는 CSCE의 '헬싱키 협정'당사자로서의 의무였다. 소련은 자신이 제안한 CSCE를 통해 전후 유럽의 현상고착화를 기도(즉,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와 2개의 독일을 기정사실화)하여 서방측의 인정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1975년 7월 헬싱키에서 조인된 '유럽안보협력의정서(CSCE 결의 또는 헬싱키 협정)'는 오히려 소련으로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 되었다. 협상진행 과정에서 서독과 소련은 '제1부 유럽안보에 관한 문제의 10대 지도원칙'중 '국경불가침'과 '자결권의 인정'을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서독은 국경불가침의 원칙에 '협약·평화적 수단·국제법의 3조건 충족에 의한 국경변경인정'이라는 유보조항을 삽입시키는 데 성공, 국제상의 통일근거를 마련했다. 이 조항대로 독일의 통일은 11월 19일 개최된 CSCE(34개국)에 상정되고, 동월 21일 채택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 헌장'에서 최종 승인을 받았다. 독일의 재통일은 국제법상의 주권국가 2국 중 1국의 주권포기에 의한 국가통합의 형식·절차로 이루어졌지만 과정은 지극히 긍정적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단 40여 년간 진행된 인적·물적 교류와 국민적 노력의 결과이며, 독일인 민족주의의 승리이다. 서독국민과 정부는 일찍이 통일의 장애가 외생적 요인(주변국가의 이해관계)에 있음을 직시하고, 그 극복은 독일인의 민족적 자결에 있음을 깨달아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국내적으로 정치·경제의 안정과 내치에 힘쓰는 한편 통일을 밑받침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근거를 성실히 마련하였으며, 그를 바탕으로 양국간의 교류를 확대(서독의 일방적인 지원의 형태였다), 갈등을 해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통일의 원동력(민족적 의지)을 배양시켜 나갔다. 또 독일을 둘러싼 주변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제적인 외교노력을 전개하여 국제법상의 근거를 확보하는 등 국제적 차원의 각고와 인내도 기울였다. 그러나 독일은 이제 금세기 최고의 실험대에 올라섰다. 즉 기쁨과 환희·희망만큼이나 통일에 따른 모순과 갈등, 그리고 부담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동독인들은 전혀 경험치 못한 자본주의 앞에서 다소 불안해 하고 있으며, 실상 통일이 너무 급작스러웠기 때문에 구체제가 정리되지 않아 부분적인 혼란도 일어나고 있다. 반대로 서독인들은 부담해야 될 대가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고, 동독의 기층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상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독일정부는 동독지역·동독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자본주의 개조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과거 40여 년간의 공산주의 잔재 청산이 그리 쉽지는 않을 듯하다.
아덴협정과 예멘통일
편집Adent協定-Yemen統一
1980년대는 예멘의 통일환경이 성숙되어 1990년 5월 22일 공식적으로 통일예멘국가가 탄생하였다. 북예멘은 살레흐대통령 시대를 맞아서 임기 5년의 3선 대통령이 되면서 국내정치가 안정되었다. 살레흐대통령은 민주개혁정책으로 국내정치를 안정시켜 활성화하였다. 1979년 5월 살레흐대통령은 15명의 대통령평의회를 구성하였으며 입법의회도 159명으로 확대시켰다. 1980년 5월에는 국정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체인민대회를 중국식으로 개최하도록 준비시켰다. 1982년 8월-9월 전인민대회가 임기 4년의 1,0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전체회의는 매 2년마다 당선은 북예멘의 정치환경을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12월 다마르(Dhamar)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에 대한 살레흐대통령의 복구사업정책은 위기상황에서 지도력이 재평가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살레흐대통령은 긴급재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아랍국가들과 미국, 유럽 등 전세계 국가들로부터 지진구제사업 지원을 받았다. 이와 같은 국제적 지원은 북예멘이 남예멘보다 친서방적인 개방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남예멘에 좋은 정치교훈이 되었으며 이 지진으로 인하여 북예멘은 단결과 국민적 협력관계를 경험하였다. 1982년 8월과 1983년 12월 레바논 전쟁으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북예멘 정부는 긴급피난민으로, 또 이슬람형제로 받아들였다. 아랍세계에서 원조만 받는 국가입장에서 도와주는 입장으로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예멘은 통일정책과는 반대로 아덴에 본부를 두고 북예멘 내에서 게릴라활동을 하고 있는 민족민주전선(약 5,000명 정도)를 지원하고 있었다. 북예멘에 대한 사회주의혁명을 통일정책의 보이지 않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남북예멘의 관계를 자주 긴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남예멘은 1980년대에도 끊임 없는 이념과 권력투쟁이 계속되어 국내정치가 불안한 상태였다.
가슈미대통령 암살사건으로 남북에멘의 지도부가 새로이 바뀌어 북예멘이 정치적 안정을 이룬 것에 반하여 남에멘은 이스마일대통령(1978-1980)에서 1980년에는 알리 나세르 무하마드 호스니(Ali Nasser Muhammad Hosni:1980-1996)가 정권을 잡았으며 1986년 권력투쟁으로 일어난 알리 나세르의 쿠데타 음모로 나세르는 추방되어 하이다르 압부 바크르 알-아타스(Haidar Abu Bakr al-Attas:1986-1990)가 대통령이 되어 계속적인 권력투쟁의 불안정을 보였다.
그러나 아타스 남예멘대통령은 적극적인 통일정책에 참여하여 통일예멘공화국에서 초대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남에멘은 아타스정권에 와서야 권력투쟁 환경이 휴면하였다. 북예멘의 살레흐대통령은 1980년 5월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예멘 수도인 아덴을 방문하여 통일정책의 일환으로 공동경제개발 사업게획 등에 합의하고 경제·안보·통신부문에 대한 공동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동의하였다. 또한 정보, 문화 등에 관하여도 협정을 체결하였다.
통일정책의 진행과정을 연대기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아덴정상회담:공동경제사업과 통일협력 1981년 5월
사나공동각료위원회 구성:통일정책에 대한 완
전 합의 발표
1982년
예멘공화국으로 국명 채택
1983년
8월
남북예멘 통일헌법 초안 심의 1988년 5월
남북예멘간 여행규제 완화 합의
1989년 11월
여행규제 완화 실시
1989년 12월
아덴정상회담:통일헌법 초안을 의회의 비준을
받아 국민투표 실시 합의
1990년 5월 22일
통일예멘공화국 선포
1982년 1월에 남북예멘이 136조로 구성된 통일헌법으로 동의하였다. 이로써 예멘의 통일정책은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었다. 양국은 6개월마다 사나와 아덴을 회담장소로 번갈아 가면서 통일위원회를 개최하여 통일정책과는 반대로 이 기간에 남예멘이 지원하는 민족민주전선(NDF) 게릴라들이 게릴라활동과 다하마르대지진으로 북예멘은 비상사태까지 선포되었다.
1981년 12월 남예멘은 NDF게릴라에 지원을 중단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지만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되는 NDF그룹이 반정부게릴라 봉기로 통일환경을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양국 정상은 예멘의 안보, 평화, 안정에 대한 필요성과 통일에 대한 책임으로 평화통일협상을 계속하여 왔다. 제1차 남북공동위원회가 1983년 8월에 사나에서 열려 통일정책을 토의하였으며 6개월 후인 1984년 2월에 제2차 남북공동위원회가 아덴에서 개최되어 예멘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제2차 회의에서는 통일외교정책 방향을 위하여 각료급 실무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협의하였다. 남북예멘이 한쪽으로는 국경분쟁협상은 계속되는 특별한 환경을 보여주었다. 양국 정상은 통일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으로 양국은 정상회담을 열어 통일에 대한 민족주의 감정을 국민에게 교육시켰다.
1988년 5월 사나회담은 북예멘의 살레흐 대통령과 남예멘의 살림알-바이드(Salim alBaid) 예멘사회주의당(PSP) 서기장간의 통일에 대한 협상이었다. 협상합의 내용은 ① 상호 국경지대에서 군대철수, ② 비무장지대 설정(2,200㎢), ③ 양국의 시민들의 사회운동에 편의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실질적인 문제는 마리브(Marib)와 샤브와흐(Shabwah) 사이에 있는 2,299㎢ 지역의 공동 석유개발사업이 통일에 대한 한 과정으로 취급되었다. 살레흐 대통령은 1986년 6월에 남예멘이 동의한다면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안을 제출하겠다고 발표하여 통일정책을 재확인하였다.
중국과 대만의 문제
편집中國-臺灣-問題
대만은 반공을 기치로 1949년부터 1978년 말까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 일변도의 외교 관계를 지속시켜 왔으나 1975년 이후 대만 정부는 급격하게 외교적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6월 '통일 3개항'을 발표했는데, 이는 양측 대표가 교류확대문제에 관해 조속히 협상하고, 공산당과 국민당 대표 간의 접촉을 통해 적대 관계를 종식하며, 이를 위해 국민당 수뇌 또는 권한을 위임받은 인사의 대륙 방문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대만은 양안 교류를 총괄하는 '대만 지구·대륙 지구 인민 관계 조례'(1992.7)를 공포하여 중국과의 적대관계 청산 및 대륙 정책의 전환 의지를 보였다. 이처럼 대만의 '국가 통일 강령'과 '인민 관계 조례'는 기존의 부정적이고 비현실적인 대륙 정책을 지양한 새로운 차원의 양안 관계 수립을 위한 것으로 정치적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뜻한다. 특히, 1993년 4월 27일-28일 싱가포르에서 44년 만에 처음 고위 민간회담이 개최되었는데, 즉 '해협 양안 관계협의'의 왕도함 회장과 '해양 교류 기금회'의 고진보 회장의 '왕고 회담(汪辜會談)'에서 합의한 '양안 등기 우편물 조회와 유실물 보상협의'는 우편물이 직접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으며, '삼통' 중 '통우'와 '통상'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직접 교류의 '삼통'이 완전히 이루어지자면 아직도 많은 시일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의 '1국가 2체제' 통일 원칙은 불평등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는 주권을 갖는 정치적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 자치권만을 갖는 제한받는 정치적 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란 단일 국가를 말하고 연방제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만은 연방제의 구성원이 아니라 중앙 정부에 종속되는 지방 정부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만 정부는 중국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은 하나 대만도 중국의 일부이듯이 중국 대륙도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2개의 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1국가 2정부'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정부 대 정부 차원의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대륙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대만에 유리한 통일환경을 조성하고자 경제 교류 활성화를 바라고 있는 대만 정부가 1991년 9월 유엔 재가입 의사를 피력하고, 10월에는 대만의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이 대만의 분리 독립과 유엔 가입을 골자로 한 '대만주권 공화국 건립'을 당강령으로 정식 채택하자 중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만의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1993년 4월 29일 공식입장을 밝혔다. 즉 ① 유엔은 주권국들의 조직으로서 중국의 일부분인 대만은 가입자격이 없다. ② 대만이 유엔에 가입하고자 하는 것은 '1중국 1대만'을 조장하여 중국의 분열 상태를 장기화하려는 것이다. ③ 이는 중화 민족의 근본 이익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대만 동포를 포함한 중국 인민 모두가 결사 반대하는 것이다. 아무튼, 중국은 1993년 5월 27일 '양안의 적대 관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감소했다'고 강조하고, 5월 30일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 사용 가능성과 관련하여, '중국은 1국가 2체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며 대만에 대한 무력 사용은 ① 대만의 독립 추구, ② 대만 문제에 대한 외세 개입 등의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만과의 우호 관계를 말하면서도 대만의 독립과 외세 개입에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 통일문제
편집韓半島統一問題
독일과 한반도의 분담은 외형상 유사하다. 그래서 종종 비교되기도 하는데 독일의 재통일과 관련, 새롭게 한반도 통일 논의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접목이나 다각적인 분석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사점이란 외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한반도의 통일논의는 이제 시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서독이 유럽에서 서방측 최전위의 역할을 요구받았듯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반공전위 역할을 요구받았으나 본질상 차이가 있다. 즉, 남한은 서독에 비해 정치적·경제적 지위보다는 군사적 가치에 비중이 있으며(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파트너는 일본이다), 단지 그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과거의 정권들은 그에 편승,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민주적 독재와 파행을 일삼았다. 한반도분단의 주체인 미국은 그들 특유의 이중성으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깊숙히 개입, 오직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했으며, 남한 지도층은 그들의 주구로 전락, 자신들의 이해타산에만 급급했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분단과정에서 기술한 대로 근본적으로는 정부수립과정의 모순에 서 있으며, 6·25전쟁으로 그 논리적 근거까지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단역사의 왜곡에 겹쳐 6·25는 민족 이질화의 골을 심화시켰고, 이 때문에 1970년대 후반까지도 통일논의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1970년 '8·15선언'이래 '남북적십자 회담'·'7·4 공동성명' 등 정부차원의 교섭이 있었으나 양측 모두 정치적 제스처에 그치는 허상일 뿐이었다.
한반도 대립과 갈등의 역사는 미·소에 의해 시작되었고, 6·25로 가속되었으며, 정권유지에 몰두한 남·북한 정권에 의해 굳어졌다. 그러나 독일의 예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서독은 내부적 안정을 이루고, 외부적 노력을 기울이며 동독의 변화를 기다렸다. 환언하면, 서독국민과 정부는 통일의지로 결집되어 국제적으로 민족자결을 주장하고, 이해당사국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양보할 만큼 국가의 부와 위상을 확립시켜 놓음으로써 동독 스스로 귀속통합을 결정하게 한 것이었다. 한반도에 독일통일 모델을 상정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되는 까닭은 언급한 바처럼 서독과 남한, 동독과 북한을 비교해 볼 때 그 차이가 너무도 엄청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살펴볼 때 통일은 고사하고 국제적 위상을 확립하기에도 요원하다. 또한 김일성 부자의 장기집권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비민주적 모순과 갈등, 집권층과 기층세력의 권익유지 기도, 너무나 큰 빈부격차와 체제적 불안정과 다수 의사의 부재 때문이다. 통일은 한민족의 지상과제이다. 그 방식과 통일 후의 체제 및 질서의 조정 등이 과제이긴 하지만, 한반도의 독자적 통일 모델이 머지않아 도출되고 통일논의는 그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우리의 통일은 민족적 화합과 의지가 요구되고, 남북한이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막연한 계획이나 의지만으로는 안되며,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대개혁과 사고의 전환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성실한 자세와 인내로 남북한 모두의 변혁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북한의 진정한 민주화와 경제적 안정, 국제적 지위확보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