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무 용/한국의 무용/한국의 무용〔서설〕
韓國-舞踊〔序說〕 한국의 근대무용사는 '춤'이란 명사의 변천으로 설명된다. 1900년대에 이르러 춤도 어차피 원각사(圓覺社)라는 서구식 무대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직 가악무(歌樂舞) 일체에서 독립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무도라는 용어와 더불어 새로운 춤이 등장했다. 슬라브 계통의 이 춤은 러시아 민속무(民俗舞)라는 의미보다 '신식(新式)'이라는 뜻에서 신학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1920년대 초기부터는 신문·잡지에 무용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도와 무용, 이 두 단어는 혼용(混用)되었다. 그러나 무용이란 것이 무도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춤의 형태를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이 두 서구 춤의 용어가 나타나면서 이제까지의 춤의 시대적 개념이 명확하여졌다. 즉 무도는 '코파크' 댄스 같은 발로 추는 흥겨움 위주의 춤인데 반하여, 무용은 학교에서 하는 유희나 율동과 같은 것이란 정도이다. 1926년 신무용이란 명사와 더불어 그 춤의 실체가 우리에게 소개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의 근대무용은 이 신무용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신무용'이란 새로운 술어는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춤은 곧 예술'이라는 선언처럼 큰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1926년 이래 여기에 참가한 신무용의 선각자들은 서구식의 춤으로 출발하였으면서 모두 우리 춤의 개혁자로 전환했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장한 10여명의 우리 대학생 음악단 일행의 고국 방문단이 부산환(釜山丸)을 타고 해로(海路)로 성진(城津)을 거쳐 경성(京城)에 들어왔을 때, 그 일행 박세몬 등이 반장화(半長靴)에 루바시카를 입고 슬라브의 민속무용 코파크를 춤췄다. 이 춤의 유행은 춤을 천시하던 당시의 대중을 크게 계몽시켜 주었다. 192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대학 음악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김동환(金東煥)은 그 해 현철(玄哲)과 더불어 예술학원을 개설하였다. 외국인으로는 1924년 백계(白系) 러시아인 헬렌이란 소녀와 그 일행의 백러시아 피난민 자선회 모금운동을 위한 '러시아인의 음악무도대회'가 우미관(優美館)의 막간을 이용하여 행하여졌다. 이것도 초기의 양무용관(洋舞踊觀)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외국인 무용단이 온 것은 같은 해에 에레나 에르니크 부인과 나타 에르니크양(孃)이 이끄는 이탈리아 무용단이었다. 1925년 이병삼(李炳三)은 낙원동에 구미무용학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무도만으로는 초유의 정식 강습소였다. 1926년 3월 21일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여동생 이시이 고나미가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신무용 공연'을 가졌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춤의 출현은 이제까지의 춤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춤이 예술이란 것을 확인시킨 것이다. 당시 이시이는 발레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노이에 탄츠(Neue Tsnz)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에 유럽주를 유학하고 온 직후 우리나라로 온 것이다. 이렇게 이른바 한국의 신무용도 갑오경장(甲午更張)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민족 스스로의 진취적인 힘에서가 아니고 일본인의 대(對) 식민지 흥행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이시이의 신무용에 감명받은 최승희(崔承喜)가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음해 그의 제2회 공연 때에 조택원(趙澤元)이 또 그를 따라 나섰다. 본격적인 양인 무용으로는 1927년 스라비안스카야 합창단의 공연이 있었다. 그때 그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슬라보니아 춤' 등 몇 개의 춤이 들어 있는 것이 처음의 일이다. 1928년 일본인 시마후지(島藤吉太郎)의 러시아 민속무용 공연과 '발레'라는 이름의 춤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은 후지다(藤田繁)와 사카이(堺千代子)의 발레 공연이었다. 1929년 한국인으로선 최초의 '무용발표회'라는 명분을 들고 무용공연을 한 사람은 배구자이다. 물론 배구자는 이 이전에도 음악과 춤을 곁들인 무용회에 출연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앞에서 말한 우리나라 사람으로 '무용발표회'란 공식 명칭의 간판을 들고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물론 배구자의 춤은 한낱 레뷰적인 흥미 본위의 '쇼'에 불과하나 신무용 초기에 있어서 이것도 무용의 사회적 인식에 크게 촉매적 작용을 하였다. 또 그녀는 처음으로 발레화인 토우 슈즈를 신고 무대 위에 오른 여성이기도 하다. 최승희의 제1회 발표회는 1930년 경성공회당에서 <인도의 비가(悲歌)> <영산무> <해방을 구하는 사람> <적막한 왈츠> 등 표제부터가 새로왔고 당시 매스컴의 힘이나 민족의식 같은 것과 결부되어 무용은 확고하게 토착했다. 특히 '영산무(靈山舞)'에서처럼 고전무용을 현대화하여 보려는 시도작품이라는 말은 한국무용의 명제처럼 되기도 하였다. 다음해 그의 제2회 공연과 1931년의 제3회 공연은 모두 흥행면에서 실패했다. 이것은 그의 춤이 당시의 관객의 수준과 너무도 동떨어지게 고답적(高踏的)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 세계적 무용시인(詩人) 사하로프 부처가 내한, YMCA에서 작품 <곡마단의 환상> <고야에게> 등을 공연하였고, 같은해 희락관(喜樂館)에서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본격적인 발레 공연이 있었다. 작품은 <빈사의 백조> 등이었다. 1934년 이시이 문하에서 돌아온 조택원의 제1회 발표회, 그리고 다음해인 1935년에는 제2회 발표회가 있었다. 모두 한국춤의 무대화에 힘을 기울인 것이었다. 같은 1935년 국내 공연에서 계속 실패한 최승희가 일본 도쿄의 공연에서 한국 춤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 사실은 후일 최의 춤이 마치 한국춤의 원형인 것 처럼 거꾸로 역수입(逆輸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한성준(韓成俊) 같은 사람은 우리춤의 원형을 지키고, 다시 흩어져 있는 민속무를 집대성하는 작업도 하였다. 광복 후 1946년 한국 최초로 무용 협의체로서 '조선무용예술협회'가 만들어지고 그 창립공연을 국도극장에서 가졌다.(위원장에 조택원). 그러나 이 협회는 무용가들의 불화로 제대로의 구실을 못하고 말았다. 6·25전쟁 이후는 남아있는 젊은 무용가들에 의해 '한국무용단'이 만들어졌으며, 1·4후퇴시 대구·부산 등지에서 무용의 명맥을 이어 수복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趙 東 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