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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댄스의 성립과 배경
편집modern dance-成立-背景댄스(舞踊)의 역사는 오래 되나, 모던 댄스(現代舞踊)는 그 역사가 짧다. 왜냐하면 그것은 20세기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의 유럽의 무용을 주도(主導)했던 것은 발레였다. 그때까지의 발레는 다만 하나의 무용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발레는 파리를 중심으로 19세기 전반의 로맨틱 발레 전성시대를 절정으로 하여, 이윽고 매너리즘에 빠져 차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를 대신해서 러시아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어 고전 발레를 완성시켰으나 그 고전 발레가 고도화함과 동시에 기교의 편중을 초래하고 무용의 참된 예술성은 상실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거기에 무용의 커다란 전기(轉機)가 필요해졌음은 당연한 귀추였다.
더구나 20세기는 모든 의미에서, 즉 사상적으로는 인간해방, 예술적으로는 창조의 시대로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인간성을 억압했던 기교의 편중, 일정한 형(型)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게 된 발레에 대해 욕구불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국면을 타파하는 운동이 발레계 자체에 일어나 디아길레프의 화려한 발레 뤼스(Ballet Russe)의 활약이 있었음은 이미 상술한대로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미 발레의 낡은 구각에서 탈피하여 그것과는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참된 무용정신을 회복하고 독자적인 무용예술을 확립하려는 운동이 20세기에 일어났다. 그것이 곧 모던 댄스이다.
덩컨, 이사도라
편집Isadora Duncan(1878-1927)
모던 댄스의 개척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인 여성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다. 덩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모던 댄스의 새로운 무용정신이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음은 흥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했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덩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더 자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그 결과 덩컨이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는 토우 슈즈, 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츠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추었다. 그것이 기교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음은 당연했으리라.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덩컨의 영향
편집Duncan-影響
덩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공명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라고 불려, 육체문화운동이 활발했는데, 덩컨은 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덩컨이 그러한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그녀는 그 뒤 프랑스, 미국, 소련 등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덩컨이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 곳에서 디아길레프나 포킨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덩컨은 모던 댄스의 융성을 촉구하고, 특히 독일의 모던 댄스에 힘찬 목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던 댄스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준 영향은 큰 것이었다.
덩커니즘
편집Duncanism
이와 같이 덩컨에 의한 '자유댄스'는 모던 댄스의 선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은 첫째로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로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1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 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사모(思慕)로서 나타났다. 그녀는 또한 기성의 음악곡을, 악보를 분석하거나 음표를 더듬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정서깊게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쇼팽이나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조차 자기 멋대로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성적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으며, 기법(技法) 그 자체,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여, 그 결과로 무용예술을 한정된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길을 개척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어 '모던 댄스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으며 1927년에 프랑스의 니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덩컨은 정열을 다하여 새로운 무용 미학의 실천에 힘썼다.
육체문화운동
편집肉體文化運動
20세기를 맞이할 때까지 독일은 무용면에서는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다. 발레가 그토록 전성을 자랑하고 있었던 시대에도 독일은 다만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로는, 발레가 라틴 민족의 예술이었으므로 게르만 민족인 독일인으로서는 무연(無緣)의 예술로서 반발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독일에 19세기 이후 프리드리히 얀(1778-1852)이라든가 루츠 무츠(1759-1839)가 제창한 육체문화운동이 국민 전반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에 영향을 주고 목표를 암시한 것이 앞서 말한 덩컨이었다.
이후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노동자나 학생, 그 밖의 근로계급을 포함한 수많은 일반인이 육체문화운동에 참가하고 덩컨식의 신무용을 향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것을 라이엔탄츠(일반인 무용)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무용의 영역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발레의 기교적인 부자연스러움은 없다 해도, 그 자연운동은 통제가 없고 이른바 무용의 법칙조차 갖지 못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 무용적인 보건운동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크로즈, 에밀
편집Emile Dalcroze(1865-1950)
이러한 무질서한 시대가 계속 되는 동안에 주네브의 음악 교사였던 에밀 달크로즈가 리듬 교육을 창도하기 시작했다. 달크로즈의 본명은 자크 달크로즈(Jaques Dalcroze)이다.
달크로즈는 독일인은 아니며, 오스트리아의 빈 태생이다. 주네브의 음악학교에서 작곡법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종래의 음악교육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느끼고, 그는 음악적 감각은 리듬적인 것이며, 그 리듬은 단순히 청각으로 지각되는 것 뿐만 아니라 전유기적(全有機的)으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근육이나 신경감각을 완전히 무시하고 귀에만 의존하려는 종래의 음악교육은 극히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새로운 리듬교육인 '유리드믹스'를 창안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달크로즈가 독일의 헬레라우 교외에 리드믹 학교를 설립하고 독특한 리듬교육을 시작한 것은 1910년이었다.
리드믹
편집rhythmic
달크로즈의 이 리드믹 이론과 그 교육법은 순식간에 호평을 받아, 음악상으로는 물론 무용교육상으로도 대단히 효과가 있음이 알려져, 세계 각지에서부터 입학하러 오는 무용가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각지에서 발레나 모던 댄스로 활약, 한층더 리드믹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무용의 발전 향상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리드믹은, 달크로즈 자신이 말했듯이 그 자체는 음악적인 교육법이지 무용은 아니다. 즉 새로운 음악교육법이며, 동시에 무용교육법이기도 했다. 따라서 기초적인 예술 표현의 수단인 것으로서, 그는 리듬의 감득(感得)과 리듬적 감각의 세련은 무엇보다도 기초적인 조건이므로 단순히 귀에 호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육체 전체에 리드미컬한 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올바른 리듬감각을 지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라반의 출현
편집Laban-出現
덩컨이나 달크로즈의 영향을 받아 독일이 겨우 독자적인 새로운 무용을 창조하고자 그 실천에 착수하기 시작할 무렵, 독일 신무용의 창조적 개척자로 등장한 사람이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이었다. 그리고 이 라반의 출현으로 독일 신무용은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라반은 헝가리 태생의 무용가였는데 무용수라기보다도 오히려 무용 이론가이며, 그 이론은 그의 저서인 <무용가의 세계>(1920)와 <체조와 무용>(1925), <안무(按舞)>(1925) 등에 의해서 세계의 신무용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신무용은 라반의 이론에 의거하여 확립된 것이다.
라반의 이론
편집Laban-理論 라반은 무용에 있어서 종래의 미의식(美意識)을 완전히 개혁하게 했다. 종래의 관념으로서는 추악한 것이나 기괴한 것 등의 전부를 무용 표현의 중요한 테마로 삼았다. 또한 몸짓 이론이나 공간론, 감정과 이성(理性)의 문제, 무용적 감수성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고 치밀한 이론체계를 제시하고, 무용의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언급하는 무용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긴장의 에너지와 함께 육체의 이완(弛緩)에 의한 무용 표현도 제창했다.
그러한 라반의 보다더 흥미있는 문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창의적인 것은 무용코러스의 이론이다. 그가 말하는 무용코러스는 지휘자가 있는 한 개 또한 몇 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반의 현대의 무용에서 제전(祭典)이나 극장에서 맛보는 무용적인 기쁨을 코러스로 옮긴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육체 문화의 면에서 가장 건전하고 올바른 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무용 코러스는 일반 시민이라든가 노동자에게 축제일의 기쁨을 주는 사회적 대중성에 입각한 최고의 무용예술이라고 라반은 생각했다.
라바노테이션
편집Lavanotation
라반의 또 하나의 커다란 업적은 무용보(舞踊普)의 창안이라 하겠다. 무용보의 완성은 그때까지 몇 번이고 시도되었으나, 음악의 악보처럼 비교적 용이하고, 더구나 완전에 가까운 것은 무용이 복잡한 운동을 수반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형예술이라는 성질 때문에 좀처럼 성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그는 독특한 라반 방식에 의해 완벽한 무용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것은 5선보의 중앙선(세로로 쓰는 경우)에서부터 우측으로는 우반신(右半身), 좌측으로는 좌반신 운동을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말할 수 없이 정확하고 상세한 것이었다. 라반의 이 무용보를 라바노테이션이라고 하며, 현재에도 그 혜택을 받고 있는 무용가가 적지 않다.
그는 또한 이코자에다라는 운동기구도 창안했다. 무용가가 그 속에 들어가서 방향과 선의 정확성을 얻기 위해 연습하는 다각체의 바구니 모양을 한 기구이다.
라반은 1910년에 뮌헨에서 학교를 설립, 1929년에는 에센에서도 개교를 함으로써 후진에게 그 이론과 무용 창작법을 지도했으며, 1926년 이래 라반 코레오그래피 연구소를 주재한 독일 신무용계의 공로자였다.
비그만, 마리
편집Mary Wigman(1886-1973)
라반 문하의 마리 비그만은 라반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 더욱이 독자적인 무용 이념을 확립함으로써 그 이상(理想)을 실현시킨 독일 신무용계의 최고봉이다.
그녀는 하노버 태생인데 소녀 시절에 암스테르담에서 달크로즈의 <무도(舞蹈)에의 권유>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헬레라우에 있는 달크로즈의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 학교에서 모든 과정을 끝마쳤을 때는 그 음악 편중(偏重)의 리듬 이론에 심각한 의문을 품고, 1913년에 라반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해에, 비그만은 처음으로 뮌헨에 있는 라반의 학교에서 완전히 그녀 독자적인 표현에 의한 무음악 무용 <무녀(巫女)의 춤>을 추어 새로운 여성 무용가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한동안 무대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라투스트라의 시를 무용화(舞踊化)한 <죽음의 무용>(1916)의 최초의 스케치 등을 발표하고 1918년에는 라반에게서 독립했다. 그 해에 그녀는 최초의 집단무용 <인생의 일곱 무용>을 창작하고, 이어서 드레스덴에서 무용학교를 설립했다.
비그만 예술
편집Wigman 藝術
비그만의 예술이 세상의 주목을 끌고 순조롭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거의 1923년 이후부터였다. 그때까지의 그녀는 예컨대 1919년부터 20년에 걸쳐서는 독일 각처에서 순회 공연을 했으나, 악평과 조소밖에 받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후 그녀의 초기 걸작이라는 <동양풍의 4개 무용>을 드레스덴에서 발표하여 겨우 그 예술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비그만의 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내적 경험과 그 강렬한 표현이라고 하겠으며, 형식적이기보다도 정신적이며 내성적(內省的)인 표현주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래의 미적관념에 의한 유려함이라든가 우아함 등등, 모든 미의 이상적인 것을 주요한 명제로 삼는 고전 발레와는 완전히 대립했으며, 인생의 모든 추잡스런 것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보고 반드시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이나 고통, 두려움이나 전율까지도 무용예술의 영역 안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무음악 무용
편집無音樂舞踊
비그만이 던진 가장 큰 문제의 하나에 음악과 무용간의 관계가 있다. 무용이 음악에 종속하는 입장에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시도는 종래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녀에 의하여 '무음악 무용'이라는 이상(理想) 실현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비그만은 우선 기성 음악을 버리고 타악기만이라든가 단순한 피아노 연주에 의한 무용을 창작했다. 1930년에 상연된 <묘표(墓標)>는 그의 한 예로서, 타악기만으로서의 오케스트라를 음악으로 삼았다. 이윽고 그녀는 무용을 창작하고 난 다음에 작곡을 시킨다고 하는 새로운 순서도 배척하고서 무용과 음악을 동시에 창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발전시킨 것이 무음악 무용의 실현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종래의 종합예술로서의 무용을 가능한 한 순수무용의 영역으로까지 높였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모던 댄스는, 요컨대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인의 고뇌에서 생긴 예술이었다. 그것 자체는 무용예술에 전신적인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또한 뛰어난 무용가도 배출시켰는데, 결국 그 전성기는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댄스의 나라 미국
편집dance-美國
독일의 모던 댄스가 그 지도성을 잃자, 이를 대신하여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현재도 전세계에서 모던 댄스에 가장 열중하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 것이다.
미국은 문화의 신흥국이었다. 따라서 댄스의 전통이 없는 나라이다. 그런 점이 바로 모던 발레가 발전한 이유가 된다. 때문에 미국은 모던 댄스에 무용문화의 운명을 걸고 그 육성 발전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결과 아메리칸 댄스라고 불리는 한 장르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국의 모던 댄스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곧 덩컨과 비그만이었다. 그리고 특히 비그만에게 배운 홀름(Hanya Holm)이 있다.
그는 1931년에 뉴욕에서 비그만 무용학교를 세우고, 1936년부터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학교이름을 고치고서 독일식 모던 댄스를 미국에 이식했다.
세인트 데니스, 루드
편집Ruth St. Denis(1877?-1968)그보다 앞서 순수한 미국인 모던 댄서로서 선구적인 활약을 했던 세인트 데니스가 있었다.
덩컨이 그리스를 이상(理想)으로 삼았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동양의 종교적인 신비주의를 채택한 모던 댄스로 이름을 떨쳤고, 1906년에는 인도 무용 <라다>로 최초의 성공을 거두고 제1인자가 되었다.
그녀의 가장 화려한 활약기는 1914년에 숀(Ted Shawn, 1891-1972)과 결혼한 후 데니숀 무용학교를 세우고 같은 이름의 무용단을 조직했었던 때이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1931년에 이혼하고 동시에 무용단도 해산했지만 오랫동안 미국 모던 댄스의 개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할리우드에 은퇴해 있는 동안 무용을 종교와 연결시키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레이엄, 마더
편집Martha Graham(1895-?)
데니스의 문하생에는 미국 모던 댄스를 현대의 융성으로 쌓아올린 마더 그레이엄, 도리스 험프리, 찰스 와이드먼 등 수많은 뛰어난 준재(俊才)들이 있다.
그레이엄은 미국의 무용가 가운데서 현역 제1인자이다. 1916년에 데니숀 무용학교에서 배우고, 1923년까지 그 무용단에서 활약했는데, 1926년에는 독립하여 뉴욕에서 데뷔했다. 그 후 제1선에서 미국의 무용계를 주도했고, 그 작품은 백수십편을 헤아리며, 해외에도 진출함으로써 미국에 있어서의 현대의 비그만이라는 칭송까지 듣고 있다.
험프리, 도리스
편집Doris Humphrey(1895-1958)
1915년에 데니숀 무용단 창립과 함께 중요 멤버로서 참가, 28년에는 동료인 와이드먼과 독립하여 험프리·와이드먼 무용단 및 그 부속 무용학교를 설립한 일이 있다.
제2차 대전 후는 무대에서 물러나, 오로지 안무와 제자의 육성에 전념, 이론가로서도 미국의 무용계에 큰 공헌을 했다.
와이드먼, 찰스
편집Charis Weidman(1901-75)
미국 모던 댄스의 공로자. 그는 추상적인 모던 댄스에 대해 오히려 드라마틱한 작품을 주장하는 특이한 존재로서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선배의 뒤를 이어 미국 모던 댄스의 후속부대는 제2차 대전 후에 급속한 활약으로 바로 오늘날의 융성과 발전을 이룩했으며, 독일의 모던 댄스가 발레의 요소를 철저히 거부했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은 엄격하게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말하자면 절충주의에 의해 폭넓게 모던 댄스의 활로를 발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모던 댄스의 부정형 기법
편집modern dance-不定型技法모던 댄스는 고전 발레의 레지스탕스로서 발생, 이를 신조로 삼아 발전한 것이므로, 고전발레의 모든 기법을 부정(否定)함으로써 성립되고 있다. 즉 정형적(定型的)인 기법의 거부인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모던 댄스의 부정형(不定型)적인 기법이 생겨난다.
기법이란 원래가 표현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고전 발레처럼 그 기법이 극도로 발달하면 정형적인 패턴이 생겨나게 되어, 정해진 기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된다고 모던 댄스는 주장한다. 그러나 고전 발레의 경우는, 그것이 공통된 표현법으로서 그러한 정형적인 것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던 댄스의 경우는 개성의 존중과 그 표현자체에 독창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공통어(共通語)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 부정형의 기법이 생겨난다.
그러나 부정형이라고는 해도 거기에는 각자 나름의 독자적인 표현법이 생기게 된다. 다만, 그것은 고전 발레처럼 공통된 기법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 따라서 모던 댄서는 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법을 스스로가 창안하여, 그 시스템을 확립시키고 각자 나름으로 기법의 독자성을 발휘하고 강조한다.
즉, 모던 댄스에서는 기법 그 자체에 중요한 의의가 있고, 그 자체가 예술적인 표현과 연결되는 것이니까 제각기 독자적으로 기법을 창안하게 되며, 따라서 부정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정형이기 때문에 어떠한 표현이라도 가능하게끔 우선 육체의 단련부터 시작한다. 단련된 육체가 아니고서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운 표현은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모던 댄스의 독자성과 타협성
편집modern dance-獨自性-妥協性
그러나 모던 댄스라고 해도 그 표현하는 바는 갖가지이므로 독일파의 신무용처럼 절대적으로 고전 발레의 기법을 거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류의 아메리칸 댄스, 필요하다면 고전 발레뿐만 아니라 온갖 무용 표현이 가능한 기법을 채택하여 표현법을 풍부하게 하려는 것도 있어, 이러한 점에서도 모던 댄스의 기법은 부정형(不定型)이다.
이와 같은 기법에 대한 해석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그 가운데는 고전 발레의 기본을 그대로 기본으로써 채용(採用)하여, 거기에 독자적인 기법을 전개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처럼 모던 댄스에서는 그 기법에서도 독자성을 주장하고 절대적으로 기성 기법(旣成技法)을 배제하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고전 발레가 어떤 단계에서 타협을 한다는 식도 있기 때문에 그 양상은 천태만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독일파의 신무용처럼 그 독자성을 엄수하고 순수함을 지키려는 입장의 모던 댄스는 타협적인 모던 댄스마저 부정하여 엄밀한 의미에서의 모던 댄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모던 댄스의 의미를 좁은 뜻으로 해석하느냐 넓은 뜻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던 댄스의 양상은 제각기 달라진다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