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모든 것을 조리한다. 상상은 이 세상의 온갖 것, 즉 미와 정의 혹은 행복을 창조한다.
서로 닮은 두 얼굴은 따로따로 있을 때는 별로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 없지만 둘이 나란히 있으면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웃긴다.
정열은 과도한 것이 아니면 아름다울 수 없다. 사람은 지나치게 사랑할 때가 아니면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도박을 하는 자는 모두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하여 확실한 것을 건다.
나는 이 편지를 여느 때보다 훨씬 더 길게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웅변은 사상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다 그리고 난 뒤에도 가필하는 사람은 초상화 대신에 상상화를 만들고 만다.
호기심은 허영심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이 알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말로 나타내기 위함이다.
신을 안다는 것과 신을 사랑한다는 것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일이다.
신앙과 미신은 다르다. 신앙심이 견고한 나머지 미신을 믿게까지 된다면 그것은 신앙을 파괴하는 일이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이것을 눌러 부수기 위하여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나 한 방울의 물도 이것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설령 우주가 이것을 눌러 부순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더 숭고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또 우주에 대한 자기의 우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부의 지식을 머릿속에 넣을 수는 없다. 오늘의 과학은 이 무한대한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과 전진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모순 없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모순 그대로가 현실이며, 한편으로는 진실의 표상이다. 거짓과 죄악 속에만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위대함을 보이지 않고 금수와 다름없는 점만 보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반면 인간의 비루한 점을 이야기하지 않고 위대한 점만 이야기하는 것도 역시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 양면을 한꺼번에 이야기하여야 한다.
생활이란 생각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오로지 사고에 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모순되는 두 요소, 즉 천사의 일면과 금수의 일면 중 어느 쪽이 나를 지배하는가는 나의 사고에 달려 있다.
이미 세워진 권위라도 우리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면 의심하라. 남이 나쁘다 하여도 그대 마음의 소리가 옳다고 하면 따르라. 그러나 이 원리를 잘못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심하지 않을 것을 의심하고, 마땅히 따라야 할 일에 대해서 교만을 피우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뇌에 복종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오히려 쾌락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치욕이다.
연애란 것에는 연령이 없다. 그것은 언제든지 생각난다.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너무 늙어도 그러하다.
사람은 혼자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사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제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점에 있다. 나무는 제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전혀 없다면 사람은 타락이 무엇인가를 조금도 알지 못할 것이다. 또 광명이 전혀 없다면 사람은 구원을 전혀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그림자가 어느 정도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유익하다.
사소한 일이 우리들을 위로해 준다. 마치 사소한 일이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기적은 교리의 진위를 분별하고 교리는 기적의 진가를 분별한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뒤꽁무니에서 하는 말을 얼굴을 맞대놓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들끼리의 결합은 이와 같은 상호간의 기만 위에서만이 이루어진다. 만약 자기가 없는 곳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을 모두 안다고 하면 설사 진지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정이란 것은 거의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