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근동 문학/아라비아

아리비아어 문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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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學-起源

아라비아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하여 현재에 이르러 동으로는 이라크에서 서쪽은 모로코까지, 북은 시리아로부터 남은 수단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전에는 이란이나 에스파냐 등지에서도 사용되었고 또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일부에서도 이 언어로써 문학 활동을 한 일이 많았다. 시대적으로는 6세기 이후가 되기 전까지는 볼 만한 작품이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외의 셈어게(Shem 어계)의 언어에 비교하여 그 역사는 짧다고 하겠다. 또 아라비아와 이슬람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크리스트 교도와 유태 교도도 제법 많지만 아라비아어의 보급은 이슬람교의 전파와 함께 행하여졌던 것이다.

아라비아에 이슬람교가 확립되기 전의 시대를 자힐리아 시대라 한다. 무지의 시대란 의미로 알라의 가르침을 몰랐던 시대란 뜻을 함축하고 있지만, 6세기에 들어선 무렵에는 아라비아 황야의 유목민 사회에 제법 세련된 서정시(敍情詩)가 만들어져 있다. 시를 아라비아어로 시울이라 부르며 시인은 범인(凡人)과 다른 영성(靈性)을 가지고 진(요정)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 산문이지만 각운을 함축하는 사주란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문자가 보급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문체라 하기보다는 카힌이라고 하는 일종의 무당과 같은 사람이 사용하는 특수한 언어였으리라 생각된다.

자힐리아 시대의 아라비아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처럼 뛰어난 조각 등을 남긴 사실은 없었으나 모방하기 어려운 언어의 예술다운 시를 남기고 있다. 가장 오랜 시형(詩形) 라쟈즈를 비롯하여 많은 시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시나 사주에 대한 정열은 오늘날까지 아라비아 문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슬람 시대에 들어와서는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어떠한 사람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것과 이슬람교 교도가 칭하는 <코란>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의 아라비아의 문학은 이 경전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쳐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우마이야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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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aya朝時代

(661-750)

이 시대에는 이슬람의 기원과 더불어 한때는 침체한 듯이 보였던 아랍의 시혼(詩魂)이 아라비아의 고원(高原)만이 아니고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등 광범한 세계에서 다시금 연소(燃燒)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힐리아 시대에도 거의 완성된 카시다(시의 장르) 이외에 분방한 나시브라고 하는 연애시의 형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산문의 갖가지 형식도 이 시대에 싹터 프바(설법·연설), 라사이르(서간·에세이), 하디스(전승) 등이 시작되고 하디스로부터는 역사도 기록되게 되었다.

압바스조의 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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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盛時 (750-1000경)

이 시대에 들어가면 아랍 지상주의에 대하여 반발하는 슈비아(아랍족 이외의 문화의 우수함을 인정하는 것)의 사상이 강하여져서 이것이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아랍족과 이란 백성의 문화적 융합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 시기로서 이란계의 천재들이 아라비아어로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어와 시리아어의 문헌들도 아라비아어로 많이 번역되고 있다. 시작(詩作)에도 이 시대에 술·사랑·정원 등을

제재(題材)로 하여 허무·염세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경향이 생겨서 결국 이슬람의 가르침을 무시할 만큼 자유분방한 사상을 표현하는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산문에서는 아답이란 장르가 유행하였다. 이 말은 오늘에 와서는 일반적인 문학을 의미하나 당시는 순수한 아랍만의 전통에 외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융합된 높은 교양이란 의미를 가지고, 더 나아가서 그와 같은 내용을 가진 유익하고 즐거운 문학 작품을 의미한 것이었다. 자히즈와 이븐 크타이바들을 아답 문학의 대표자라 말하고 있다. 아라비아어의 문법과 어휘(語彙)의 연구도 성행하였으나 바스라와 쿠파 두 도시의 학자들이 각각 독자적인 학파를 만들어 대립하였고, 8세기부터 10세기까지를 그들의 성시(盛詩)로 하고 있다.

압바스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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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後期 (1000경-1258)

칼리프의 중앙권력이 쇠퇴하자 지방 왕조(王朝)가 각지에 출현하여 근대 페르시아어에 의한 문학 활동이 성행함과 동시에 아라비아어 문학이 지난날의 광채를 잃기 시작한 시기이다. 백은 시대(白銀時代)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 산문에서는 기교로써 내용의 공소(空疎)함을 보충하려는 경향이 생기고 시도 동방에서는 생명의 약동보다도 형식의 미에 숨은 폐단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이집트나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 방면에서는 오히려 걸출한 시인이 많이 나타났다. 시칠리아에서도 이븐 함디므(1055-1132)와 같은 빛나는 시인을 배출하였고 에스파냐에서는 무왓샤 혹은 자랄 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시형이 유행하였다.

침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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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滯時代 (1258-19세기 중엽)

각 분야의 작품이 많이 저작되었고 시작(詩作)도 끊긴 것은 아니었으나 독창성이 결핍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븐 캘둔과 같은 예외적인 거성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천일야화(千一夜話)>가 최후의 완성에 이른 것도 이 시대이며 이븐 배투타의 여행기와 같은 흥미로운 것도 나왔다. 특히 카이로에는 알 마크리지(1364-1442), 앗 스유티(?-1505), 그외 다작적(多作的) 사가(史家)가 나오고 있다.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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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

19세기에 들어와 유럽 문학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었기 때문에 희곡·소설·자유시 등 새로운 형식이 도입되었다. 꽤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오던 고전으로서의 아라비아어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하는 문예부흥의 기운도 19세기 중엽부터 레바논과 이집트 외에서도 성하게 되었다. 시작도 부흥하여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랍 전역에서 우수한 시인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카이로의 아흐마드 샤우키는 가장 빛나는 존재이다. 산문에도 이집트의 지르지 자이단(1861-1914)과 타이무르 형제, 타하 호세인 레바논의 하릴 자브란(?-1931), 그 밖에도 많이 있는데 자브란 등은 소년 시절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 곳과 파리에서 시와 소설을 썼다.

자힐리아 시대의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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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詩人-

이슬람역(曆)의 기원인 622년부터 6세기 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00여년 동안이 고대 아라비아 시(詩)의 전성기로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시인의 수는 100명에 가깝다.

그들의 작품은 구전(口傳)으로 후세에 전해져 왔는데 그것이 문자로 기록된 것은 8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이들 고대 시인들의 작품집으로서 가장 이름 높은 것은 <무알라카트>(걸려 있는 것이라는 뜻)나 <무파다리야트> 등이다.

전자는 8세기 후반의 어느 랍비(傳誦者) 일설에는 하마드란 사람)의 편찬으로 이무르 울 가이스, 타라파, 즈하일, 안다라, 라비드, 아므르 이븐 크루슴, 하리스 이븐 히리자 등 일곱 시인의 뛰어난 대표작들을 모은 것이다. 후자는 알 무파달(?-786)이 편찬한 것으로 약 70명의 시인들의 작품 120편 정도의 시를 모은 것이다.

그들 시인 중의 대부분은 아라비아 중북부의 고원 지방(高原地方)에서 유목 생활을 했던 사람들인데 당시에 이미 각 부족의 공통으로 이해하고 있던 세련된 언어가 발달하고 있어 그 언어를 구사하여 부족간의 싸움과 복수, 사막의 사랑과 여수(旅愁)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또 뛰어난 시인들은 일종의 신통력과 같은 것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서 부족민간에 존경을 받은 듯하다. 아브스족의 안타라는 탁월한 시인인 동시에 용감무쌍한 전사(戰士)였는데 그의 사적(事蹟)은 후세에 여러 가지로 윤색되어서 <시라트 안타라>(안타라 이야기)라는 장편소설로 발달하였고, <천일야화(千一夜話)> 및 그 밖의 것과 아울러 아랍 사회에서 애호하는 바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외에도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던 하팀 타이라든가, 무서운 사막의 살인자이기는 하나 불후의 시를 남긴 타바타 샬란이나 샨하라, 또는 여류 시인 중의 백미(白眉)라 할 알 한사 등 많은 수에 달한다.

시의 구성은 전후의 2행을 합하여 바이트라 하고 이것에 얼마를 보태어 나가는데 운율과 각운(脚韻)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운율에는 16의 형(型)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6세기 전반의 사막의 시인들은 곧잘 '카시다'체의 시를 쓰는 데에 진력하였다. 이것은 서정시의 일종으로 그 옛날 노영(露營)의 자취 속에 어려 있는 애수, 연인을 향한 모정(慕情), 뜨거운 사막의 황야를 여행하는 괴로움 등의 주제를 바꾸어 가며 어느 인물을 찬미하는 말로 끝맺는다. 이미 5세기 중에 아라비아 고원의 시는 카시다체(體)의 시로서 완벽의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라비아어 문학 중에서 동맥(動脈)에 견줄 만큼의 중요성을 지속할 수 있었다.

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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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an

이슬람교의 경전(經典). 이슬람 교도의 신념에 따르면 알라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마호메트(Mahomet)에게 <코란>을 전하고 그는 또 이것을 아라비아의 백성에게 전하였다. 이 계시의 집대성은 명확한 아라비아어로 표현되고 있다. 알 쿠르안이란 '암송하는 것'이란 뜻이다. 이슬람 교도 이외의 사람들은 이 한 권의 서적이 마호메트의 전기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근본 자료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무튼 이슬람의 교의와 가르침이 출현한 의의 등이 이 한 권에 의하여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다. 문학이란 견지에서 보아도 큰 의의를 가지며, 아라비아어 문학의 전형으로서도 또한 문학 활동의 기준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코란>이 결집(結集)된 것은 마호메트 사후의 일이었고, 한때는 유사(類似)한 것도 꽤 많이 있었으나 제3대 칼리프(Caliph=아라비아어로 할리파. 예언자의 사후 그의 정치와 군사 등의 통솔 활동을 계승한 사람이라는 의미) 오스만(Othm

n=재위 644-656) 때에 표준본(標準本)을 정하고 그 외의 것은 폐기하였다. 내용은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날을 격한 어조로 눈에 보는 듯이 말한 메카(Mecca) 시대 초기의 부분과 고대 여러 민족과 예언자들의 행적 등을 소상하게 되풀이해서 말한 부분 및 평탄한 어조로써 궤도상의 일들을 기술한 부분으로 나누고 있어서 각각의 입장에서 독자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아라비아어 문학의 최고봉이며 후세의 사람들이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 교도의 평가이며 그의 용어는 자힐리아 시대의 시어(詩語)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오마르 이븐 아비 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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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ar Ibn Abi Rabiah (644?-720?)

아라비아 우마이아조(朝) 시대의 시인.

메카 출생이며, 크라이슈족 사람이다. 대정복의 결과 호사와 향락의 기풍이 일어난 아라비아 도시의 부유한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쉽고 명백하면서도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여성의 아름다움과 연애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재위(在位)한 칼리프 알 와리드(재위 705-715)도 일대의 풍운아로 술과 미녀의 사이에서 보낸 젊은 날의 환락을 노래했고, 당시의 일부에서는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을 만큼 환락의 기풍이 조성되어 있었다. 오마르의 시는 그러한 시대가 남긴 절묘한 예술이며 아라비아 문학 가운데서도 근래에 이르러 더욱 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아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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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htal (640?-710),

자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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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rir (672-732?),

파라즈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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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azdaq (641?-728)

아라비아의 우마이 아조 시대의 시인들이다.

고대 아라비아어의 유목 시인들의 기풍을 이어받은 3대가라 불리고 있다. 아크탈은 이라크 출생이며 다그리브족 사람이다. 술과 가수(歌手)를 사랑하였으나 일면 경건한 크리스찬이었으며, 칼리프 아브돌 말리크(재위, 685-705)의 우대를 받았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또 다마스커스의 사치스러운 도시 생활에도 싫증을 느껴 유목민의 생활을 즐겼다.

자리르는 중앙아라비아 출생으로 이라크에 이주하였다. 동방 총독(東方總督) 알 하자지의 총애를 받아 후에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아조 칼리프들의 궁정에 출입하였다. 특히 풍자시에 예리한 패기를 보여 파라즈닥과는 40년 동안을 서로 작품을 가지고 겨루었다. 이 방면의 활동 때문에 자랑으로 여긴 애가(哀歌)에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여가를 잃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라즈닥은 바스라에서 태어났고 심술쟁이이며 호색가여서 뼈를 찌를 만한 풍자시로 남을 비웃고 꼬집었다. 그 때문에 안주할 곳을 얻지 못하였으나 불우한 알리(마호메트의 조카, 제4대의 정통 칼리프)의 일족과 사회적으로 혜택을 못받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 등이 그의 작품 경향이었고, 또한 최대의 천재이기도 했다. 그가 만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라비아 시어(詩語)의 거의 3분의 1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븐 알 무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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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Al-Muqaffa (?-757?)

이란계의 문학자·시인.

이란의 파르스 지방에서 태어나 배화교(拜火敎)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인도의 우화집인 <판차탄트라>가 6세기에 중세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다시 아라비아어로 중역(重譯)했다. <카리라와 딤나>란 이름으로 보급하여 이 책을 유럽에도 퍼뜨리는 중개인이 되었고, 또한 그의 아라비아어 문장은 사람들에게 애호되어 아랍 세계에서 산문의 모범이 되었다.

이븐 히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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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Hisham (?-834)

아라비아의 문학자.바스라에서 출생하여 이집트의 푸스타트에서 죽었다. 이븐 이스하크(메디나 출생, ?-768)가 지적한 <예언자(마호메트)전>을 개서(改書)하였다. 이븐 이스하크의 작품은 소멸되었지만 이븐 히샴의 것으로 불후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문학 작품으로서도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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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hiz, 'Amr ibn Bahr (776?-868)

압바스조의 문학자·이라크인.

이슬람 세계를 통하여 학술의 중심이 되었던 무렵의 바스라 태생이며, 비상한 재능과 탐구심을 가지고 90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다. 아다브라 불리는 유익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문학의 한 장르는 이 자히즈에 의해서 개화되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중 최대의 장편은 <동물의 서(書)>이며 <구두쇠들>도 훌륭하게 인간의 본질에 육박하고 있다. 라사일체의 단편 중에는 남녀 성격의 아이라든가 흑인과 백인의 우열 및 터키족의 공적론(功績論), 그 밖에 흥미있는 에세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븐 쿠타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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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Qutaiba (828-889)

압바스조의 문학자이다.

바그다드에서 출생하였다. 이란계였으나 아라비아어로 문학활동을 했고, <시와 시인들> <설화(說話)의 샘> <지식의 서(書)>, 그 밖의 명저를 남겨 자히즈와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아부 누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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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 Nuwas (756?-810)

압바스조의 시인. 본명은 알 하산 이븐 하니.

아흐바즈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아랍, 모친은 이란계이다. 바스라와 쿠파에서 살다가 바그다드에 나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알 아민의 궁정에서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술과 사랑의 시, 분방한 생활 태도로 유명하였고, 알 무다나비(915-965)와 아브르 알라 알 마알리(975-1058)들과 더불어 압바스조 시대의 새로운 아라비아어 시계(詩界)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 선두에 섰다고 할 수 있다.

알 마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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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asud

, 'Al

al-Husain (?-956?)

아랍의 역사가·문학자.

바그다드에서 출생하여 젊어서부터 각지를 여행하였다. 인도와 실론을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고 하며, 동아프리카에도 갔고 푸스타트(옛 카이로)에서 죽었다. 자연과 인생의 여러 면에 깊은 흥미를 품고 예리한 관찰안(觀察眼)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저서는 역사·지리의 분야에서 독특한 것이 많았는가 하면 문학적 가치도 높다. 최장편의 <시대의 이야기>는 없어졌으나 <황금의 목장>은 거의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최후의 저작인 <통보(通報)와 개정(改訂)의 서(書)>는 문장이 다소 건조(乾燥)하긴 하지만 독자적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아부 알 파라지 알 이스파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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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 Al-Faraj Al-Isfahane (897-967)

아라비아의 문학자.

이란 이스파한에서 태어났고 아랍계로 우마이아 왕가의 최후의 후예(後裔)였다. 바그다드에서 공부한 후 각지에 편력하여 아랍 시인들의 사적을 조사하였다. 필생의 사업인 <키타브 알 아가니>(Kitab al-Aqhani=노래의 書)는 고대부터의 시인과 가수들의 일화나 작품을 집대성하여 세련된 문장으로 기록한 것이며, 아랍족의 문화사(文化史)로서 단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다. 이 작품의 완역(完譯)은 아직도 세계의 어느 누구도 못하고 있다.

천일야화(千一夜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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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중세 페르시아어로 옮겨진 인도의 설화집(說話集)을 모체로 하여 이슬람 시대가 되자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고, 더 나아가서 이리크와 시리아 및 이집트에서 많은 설화가 첨가되어 14세기 내지 15세기경에 거의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역사 이야기·우화·연애 이야기·교훈담, 여러 나라의 기담(奇譚)·기사(騎士) 이야기 등 많은 종류를 포함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아내에게 배반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여성을 원수로 보는 페르시아 대왕을 위하여 사하라자드라고 하는 현명한 여성이 천일야(千一夜)에 걸쳐 계속하여 이야기했다고 하는 토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8세기 초엽에 앙트완느 가랭(1646-1719)이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부터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아랍 사회에서는 이 외에도 민간에 전해져 내려온 긴 설화가 적잖이 있다.

바이바르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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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bars

이집트의 맘루크 조의 왕 바이바르스(재위 1260-1277)가 노예로부터 출발하여 일대의 명군이 되어 치세 17년간 정벌을 행한 것이 35회, 십자군과 몽고군을 격파하는 등의 파란 많은 생애를 윤색(潤色)한 장편 역사 이야기인데 완성은 18세기중이라 하나 작자는 미상이다. 카이로 시민의 생활도 잘 묘사하고 있으며, 아랍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독서물로서 친숙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이프 이븐 디 야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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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말 아라비아의 야마시 왕자로서 아비시니아인의 지배를 물리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적 이야기인데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것인 듯 그 풍토적 요소가 농후하다.

하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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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

r

(1054-1122)

이라크의 문학자.바스라 근처에서 태어나 바스라시(市)경찰 장관을 지냈다. 바디웃 자만(시대의 경이)이라 불렀던 알 하마다니(969-1008)가 시작하였다고 하는 문학의 한 장르인 마카마트(마카마의 복수형, 집회를 의미한다)는 약 1세기를 지나 나오게 된 하리리의 저작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라비아어의 특질을 발휘한 박학과 기교의 결정이라 할 만한

것이나 이슬람 세계에서 <천일야화> 등은 통속물로 경시(輕視)되고, 마카마트와 같은 기교의 미를 다한, 제법 페댄틱한 것이 최고급의 문학으로서 존중된다고 하는 기풍이 근년에까지 남아 있다. 이것은 학문과 문학을 극히 일부 인사가 독점한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카마트는 아라비아 문학 중 가장 서양의 드라마에 가까운 성격을 띤 것이며, 하리리의 것은 알 하리스라는 화자(話者)가 아브 자이드라고 하는 표박(漂泊)의 노옹과 거듭 만난다는 줄거리로 한 번의 상봉(相逢)을 마카마(단수형)라고 한다.

이븐 캘리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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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Khallik

n (1211-1282)

이집트 맘루크조 시대의 역사가.

이라크의 아르베라에서 출생하여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조와 맘루크조 아래서 법관과 교수를 지냈다. 이슬람 초기(단 마호메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제외)부터 그의 시대까지의 유명한 사람 약 900명의 인명 사전(人名事典)을 저작하였다. 이 사전은 그 이전부터 <타바카트>(類別)라 불리며 당시 있었던 몇 개의 유서(類書)보다 뛰어나 정채(精彩)하고 풍요하므로

문학적 가치도 높아 이것을 모방한 서적도 많이 나왔다.

이븐 주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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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Jubair (1145-1217)

에스파냐 여행가이다.

에스파냐 바렌시아의 아랍족 키나나 족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메카의 순례를 위하여 1183년에 고향을 출발하여 이집트·시리아·이라크 등을 역방하고서 1185년에 귀국하였다. 그 <리프라>(여행기)는 쉽고 명료한 문장에도 유머가 어리어 제1급의 기행 문학으로 평가되며 십자군 시대의 지중해역(地中海域)의 정세까지 잘 전하여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 제2회 동방 여행 중 이집트에서 죽었다.

이븐 배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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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Battutah (1307-1377경)

모로코의 여행가.

모로코의 단자에서 태어나 1325년 메카 순례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육로로 이집트를 거쳐 성지에 들어가 서아시아 각지와 아프리카 동해안,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편력한 후 인도에서 약 10년쯤 체재, 원조(元祖) 말기의 중국을 돌아보고 고향에 돌아왔으며, 안달루시아와 서(西)수단도 여행하였다. 이븐 주자이가 필록(筆錄)한 그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1254-1324)의 글과 아울러 몽고제국 시대의 유라시아 대륙의 사정을 잘 전해 주는 기록이며, 아라비아어 기행 문학 중에도 특출한 것이다.

이븐 캘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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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 Khaldun (1332-1406)

아랍의 역사가·사상가.

튀니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본래 남아프리카에서 에스파냐의 세비야로 옮겼던 아랍의 구가(舊家)였다.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의 여러 왕가를 섬기었고, 발군(拔群)의 재능이 있었으나 오히려 안주할 곳을 얻지 못해 알제리아의 고성(古城)에 3년간 은퇴하여(1375-1378) 세계사를 정리하였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의 역사 부문에 전력하였으며 권두의 긴 서설은 그의 탁월한 역사관과 사회의 발전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으로 그후 세계적인 명성을 확립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사상·학예(學藝)가 침체와 혼미를 계속한 시대에 이처럼 독창적 대사상가가 나온 이유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한 해석을 못하고 있다. 만년은 이집트에서 보냈고 그간에 다마스커스 부근에서의 티무르(1336-1405)와의 회견도 유명하다. 역사가 그리고 사상가로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나 아라비아 문학사(文學史)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드 샤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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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mad Shauqi Bey (1868-1932)

아랍의 시인.

카이로에서 태어났고 그의 집안은 아랍·그리스·터키·쿠르드 등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인 복잡한 혈통이다. 출생지에서 법률을 배우고 프랑스에 유학하여 몽펠리에와 파리에 2년간 있으면서 그 사이에 프랑스 시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1927년에는 '시인의 통령(統領)'이란 경칭(敬稱)을 받았고 희극도 몇 편 발표하였다.

무하마드 타이무르,마무드 타이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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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hammad Taimur (1892-1921),Mahm

d Taim

r (1894- ? )

이집트 작가.

두 사람 모두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무하마드 타이무르가 형이며 마무드는 동생이다. 형은 처음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학업을 마치기 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귀국하여 문학으로 길을 바꾸어 모파상을 사숙(私淑), 콩트를 썼고 희곡에도 정진하였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아라비아 문학에 받아들인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시작을 보자 끝나 버렸다.

동생 마무드가 뜻을 이어,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의 깊은 교양을 바탕으로 이집트 민중 생활을 소재로 뛰어난 소설을 세상에 많이 냈다. 그는 문장에 있어 유럽어와 아라비아어의 특색을 융합시킨 새로운 영역을 열었고 작풍(作風)에도 모파상, 체호프, 부르제 등에게 배운 바가 많았다. 또 희곡에도 가작이 많다. 다우피크 알하킴과 아울러 가장 널리 여러 외국에 알려진 현대의 아라비아 문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타하 후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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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ha Husain (1889-1974)

이집트의 작가이다. 상(上)이집트의 농촌 출신으로 어려서 맹인이 되었다. 아즈할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대학교수와 문교부장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평론과 에세이, 그리고 소설에 뛰어난 업적을 보이고 있다. <알 아이얌>(1929년의 상권과 1939년의 하권으로 2권)은 자서전적인 소설로,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그 외에 <사하라자드의 꿈> <마호메트전(傳)의 여백(餘白)에>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