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국 문학/한위육조

한위육조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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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魏六朝-文學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郡縣)제도를 폈는데, 국내가 정돈됨에 따라 새로운 문화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초사(楚辭)>의 계통을 잇는 부(賦)가 서사문학의 형식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점으로서,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가 궁전의 호화, 수렵의 웅대, 도시의 장려(壯麗) 등을 들어 표현의 아름다움을 다투었다.

이러한 것들은 '노래하지 않고, 읊는' 낭송(朗誦)문학이었는데, 대부분은 대화형식으로 구성되어 미사여구를 나열하고, 어휘의 배열과 중복에다 왜곡된 묘사를 시도하여, 사생서사의 글로서 특색을 보였다. 그 후 많은 모방작품이 나왔는데, 남북조에 이르러 서정성을 도입한 단편의 부(賦)가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한(漢)의 국력 신장에 따라 외국 음악이 유입되어 가요(歌謠)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신성(新聲)이 생겼다. 무제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악부(樂府)'를 설치하고 민요를 수집하고, 가곡(歌曲)을 제작·연주시켰기 때문에 가요는 번창하였고, '악부'는 후에 가요의 양식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그 중에는 서정성이 풍부한 단편의 여러 작품과 서사성이 풍부한 장편 <맥상상(陌上桑)>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등 훌륭한 작품이 적지 않다. 고취곡사(鼓吹曲辭), 단소요가는 특히 수입 악곡의 영향이 강한 장단구(長短句)의 시형(詩型)으로서 가사의 인상도 강렬하다.

민요는 위진(魏晋)의 시인들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는데, 나아가서 남북조에 이르러 강남(江南)의 정조(情調)를 전하는 <자야오가(子夜吳歌)> 등 특색있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민요의 특질은 민간에 의해 불려진 점에 생명력이 있다고는 하나, 그 의미에서 위진의 시인이 악부의 형식을 모방하여 그 장점을 훌륭하게 응용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위나라의 건안문학(建安文學)은 조조(曹操) 및 조비(曹丕), 조식(曹植)을 중심으로 꽃핀 궁정문학이었으나 악부의 체를 즐겨 썼고 오행시(五行詩)의 새 경지를 개척했다.

원래 고대의 가요집 <시경>은 4언시형이었으나, 한대(漢代)에는 새로이 5언시형이 성립되고 있었다. 후한(後漢)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는 5언의 시형으로 되어 있는데, 불교 전래의 영향을 받아 무상감(無常感)과 이별의 비애를 노래한 것이 많다. 5언시형은 그 후의 시단(詩壇)에 지배적인 시형이 되었고,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심약(沈約, 441-513)이 시의 리듬에 관한 이론(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연구한 것은 주로 5언시에 관한 것이었다.

7언시형의 성립은 5언보다 많이 뒤지지만,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大風歌)>나 무제의 <추풍사(秋風辭)>를 보면 7언의 기조(基調)에 가까워 7언시형의 선구라고 볼 수도 있다. 시 작풍(詩作風)의 변천에서 본다면, 한시의 무상감에 대해서 위진의 시인 완적(阮籍), 혜강 등이 노자(老子, 기원전 5세기-4세기), 장자(莊子, 기원전 365-290)의 초월적인 사상에 의해서 시를 읊었다는 것도 각박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문심조룡(文心雕龍)>에 "노장(老莊) 퇴(退)하기를 고하여 산수(山水) 바야흐로 자미롭다"라는 식으로, 진나라가 이민족의 세력에 밀려 북쪽을 버리고 강남으로 옮기고부터는 남쪽의 개발도 진전되어, 산수 수려하고 별빛 아름다운 강남의 풍경에 자극되어, 새로이 자연 관조(觀照)의 눈이 트여, 도잠(陶潛)의 전원시, 사영운(謝靈運)의 산수시가 탄생했다. 특히 도잠의 시는 전원에 몰입(沒入)되어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마찬가지로 남조의 시는 염려(艶麗)하지만, 청준(淸俊)한 작풍은 당시(唐詩)에 영향을 주었다. 북조의 작품은 많지 않으나 <칙륵가(勅勒歌)> <목란사(木蘭辭)>에는 웅장한 풍격이 보인다.

산문의 장르에서 주목할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 등의 간요한 사전(史傳)의 문체이다. 특히 <사기> 열전(列傳)의 문장은 전기를 엮어 매우 생기가 넘치고, 산문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부(賦)의 수식성이 산문에 도입되어 생긴 미문이 이른바 '변문(騈文)'으로서, '46변려(騈儷)'라고 칭하는 것은 변(騈=쌍두마차), 여(儷=부부)와 같이 대구(對句)를 존중하여 4자구(字句) 6자구를 기조로, 주로 표현의 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며, 진나라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의 문장은 유명하다. 이 때부터 남북조에 걸친 글이라면 변체(騈體)문장이 아닌 것은 없으며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편집한 <문선(文選)>에도 수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한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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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文學

중국에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의 이름이 있듯이 한대는 산문의 형식이 정리된 시대이다. 전체적으로 이 시대의 문학은 유교주의에 의한 실용적 경향이 강하다.

의론(議論)의 글은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 <과진론(過秦論)>,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의 <현량대책(賢良對策)> 등이 대표적이며, 역대 황제가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자기의 의견을 노출(露出)시켰기 때문에 왕성해졌다. 다음으로 역사기술의 글이 이후의 역사에 중요한 규범성을 갖는다. <사기>는 독창적인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의식에 의해서 기술된 '정사(正史)'의 시초로서, 역사문학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반고(班固)와 반소(班昭=반고의 누이)의 <한서(漢書)>는 <사기>의 뒤를 이은 것으로 문장이 정연하여 또 다른 의미로서의 전형(典型)이며, 이 두 책은 명·청(明淸)의 고문가(古文家)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사부(辭賦)는 한대(漢代)를 대표하는 운문(韻文)으로서 <초사> 등의 시형을 계승하는 긴 노래이다. 그러나 <초사>의 격렬한 감정 표출과 서정성은 계승되지 못하고, 사실을 나열적으로 자세히 기술하여 말의 외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인다. 부(賦)의 형식은 운문과 산문의 중간에 위치하며, 압운(押韻), 대우(對偶)의 존중 등 후의 '변문(騈文)'에 영향을 준다. 부의 작가로는 사마상여(司馬相如), 후한의 반고, 양웅(揚雄, 기원전 53-기원후 18), 장형(張衡, 78-139) 등이 유명하다. 부에서 볼 수 있는 한자(漢字)의 나열은, 한자를 사용하는 문학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한대에는 한편으로 민요의 계열에 속하는 '악부(樂府)'가 있다. 한나라 무제는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예식에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악부'라는 관서를 만들고, 사마상여 등에게 작시를 시키고, 이연년(李延年)에게 작곡을 시켜 종래의 '아성(雅聲)'과는 다른 중앙아시아풍의 신성(新聲), 변곡(變曲)을 만들게 했다. 이 악가(樂歌)를 '악부'라고 칭하게 되었고, 그 중에도 <고취요가> <단소요가>에서 불려지는 내용은, 온유(溫柔)한 <시경>의 전통에 비해 극히 격한 감정의 표출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질적인 음악에 밑받침되어 비로소 생겨날 수 있었던 변화일 것이다. 악부는 후세에 계승되어 많이 불려진다. 5언시의 발생은 이 시대에 질적 변모를 이룬 민간가요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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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誼 (기원전 201-169)

전한(前漢) 문제 때의 문신(文臣).

일찍부터 문장에 재능을 보여, 20여 세로 문제에게 기용되어 박사가 되었다. 후에 공경(公卿)의 자리에 추대되었으나 고조 이래의 공신들의 반대로 좌천되었다. <굴원조부(屈原弔賦)>를 지었고, 또한 불상조(不祥鳥)인 '복(산올빼미)'를 빌려 <복조부>를 지어, 좌절의 신세를 위로했다. 후에 다시 문제에게 기용되어 여러 정책을 상서(上書)하고 시폐(時弊)를 논했다. 의론은 유교에 바탕을 두어 웅장하다. 33세에 죽었다. <신서(新書)> 10권이 있다.

칠발(七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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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초기의 부(賦)의 대표작. 작자인 매승(枚乘, ? -기원전 140)은 경제(景帝) 시대의 명신이다. 이 부는 문답형식으로서, <초사> 가운데의 <초혼(招魂)> <대초(大招)>와 흡사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제명도 '칠간(七諫)'에서 유래한 것 같다. 초나라 태자가 병이 났기 때문에 오나라 손님이 문병을 와서, 음악이나 유렵(遊獵)의 즐거움을 설명하고, 최후에 방술사(方術士)로 하여금 천하의 정미(精微), 만물의 시비(是非)를 설명하게 함으로써 병이 낫는다는 내용으로, 소박하지만 짜임새가 있고, 장려(壯麗)한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그 수법은 한부(漢賦)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사마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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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相如 (기원전 179 ?-117)

전한의 문학자. 쓰촨성 청두(成都)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경제(景帝)를 섬겼는데 경제는 상여의 특기인 사부(辭賦)를 싫어해서, 그 곳을 떠나 양(梁)의 효왕(孝王)에게 몸을 의탁하고, 추양(鄒陽)이나 매승(枚乘, ? -기원전 140)과 교유했다. 효왕이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 토호인 탁왕손(卓王孫)의 딸 문군(文君)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되었다. <자허부(子虛賦)>에 의해서 무제의 부름을 받고, 서남(西南)의 만이(蠻夷) 땅에서 공적을 올렸다. 정치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황제 측근의 문학자로서 무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의식(儀式)의 가사(歌辭) 제정 등을 하고, 특히 부가(賦家)의 제1인자라고 칭송되었으며, 후세에도 그를 능가하는 부가는 나오지 못했다.

<자허·상림(上林)의 부>는 황제의 장대(壯大)한 수렵의 모습을 등장인물의 회화를 빌어서 묘사하였고, 신선한 가운데 한자의 모든 가능성을 추구하여 부의 문학양식을 확립했다. <대인부(大人賦)> 외에 <촉부노난(蜀父老難)> <파촉유격(巴蜀諭檄)> 등의 문(文)을 저술, 문 및 부(賦)에서의 미문화(美文化)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술에는 자서(字書) <범장편(凡將篇)> 1권이 있다.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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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 (기원전 145 ?-86 ?)

중국 전한의 역사가. 자는 자장(子長). 하양(夏陽=陜西省 韓城縣) 사람. 그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일정하지 않다.

부친은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이다. 20세에 부친의 명을 받아 강(江)·회(淮) 방면에 여행, 전국(戰國) 제후의 기록을 수집하였고, 다시 제(齊)·노(魯)나라를 들러서, 황제에 근시(近侍), 현재(賢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원봉 원년(元封元年=기원전110), 무제가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의 의(儀)를 올렸을 때, 부친은 수행을 못한 채 중병의 자리로 사마천을 불러, 울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수사(修史)의 일을 부탁했다. 원봉 3년 태사령이 되어 제후의 역사, 궁정의 비서(秘書)를 자유롭게 읽고, 태초개력(太初改曆)의 안을 상신했다.

천한(天漢) 3년(기원전 99), 흉노(匈奴)에 붙잡힌 장군 이능(李陵)을 변호하여 무제의 격노를 사서, 다음해 궁형(宮刑)에 처해지자, 고민 속에서 수사(修史)의 뜻을 굳혔다. <임안보서(任安報書)>에는 극형(極刑)을 당할지라도 천인(天人)의 신분을 다하고, 일가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수사의 사업을 완성시키려는 결의가 기술되어 있다. 세상의 냉대를 받으면서 형을 마친 그가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관계에 돌아온

것은 천자(天子)의 측근에 있는 것이 수사 편찬을 위해서 편리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바, 이는 불퇴전(不退轉)의 결의이다. <사기> 130권은 고대로부터 사마천의 시대까지의 통사(通史)로서 그가 평생을 건 웅혼(雄渾)한 사서(史書)이다.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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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서로서 '정사(正史)'의 시초이며, 중국 고대의 통사로서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천의 저서이다.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도 칭한다.

<사기>의 명칭은 후에 붙여졌는데 사관(史官)의 기록이란 뜻이다. 본기(本記)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계 130권이다. 부친 사마담의 유언에 의하여 대략 기원전 104년경부터 편찬에 착수하고, 기원전 91년경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경제본기(景帝本紀)> 외 약 10편은 저소손 등이 보필(補筆)하였고, <삼황본기(三皇本紀)>는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에 의해서 첨가된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 후인의 손이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사마천 개인의 뛰어난 독창성에 의한 사서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문학으로도 불굴의 가치를 갖는다. 그 글은 서사문(敍事文)의 전형으로서 후세 문장가의 규범이 되었으며, 서술은 물론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것이나 그 필치에는 깊은 정열이 담겨 있고, 때로는 이상한 광채(光彩)를 발한다. <본기(本紀)>에서부터 <화식전(貨殖傳)>으로 끝나는 전체의 구상에도 사마천의 세계관이 엿보이며, 태고에서 현대까지를 통사로서 정리하고, 역사가의 입장에서 세계 전체를 그리려고 한 웅대(雄大)함을 엿볼 수 있다.

<본기>는 각 왕조 및 한나라 천자의 연대기이며, <표>는 왕조의 계보(系譜), 제국(諸國)의 대조연표 등이다. <서>는 예악(禮樂), 율력(律曆), 종교, 치수(治水), 경제에 걸친 제도사(制度史)이며, <세가>는 주(周) 이래의 제후의 나라별 열국지(列國志). <열전>은 역사적 인물들의 전기이다. 이러한 분류는 기전체(紀傳體)의 시조가 된 서술형식이며, 그 중 항우(項羽, 기원전 232- 202)를 본기에 넣고, 제후가 아닌 공자(孔子, 기원전 551/52-479)를 세가에,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 진(秦)에 대한 반역자도 <세가>에 포함시키는 등 도식적(圖式的) 범주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찾아볼 수 있고, 각각의 인물을 역사적 역할에 따라서 배열·기술하여 서술에 생기를 주고 있다. <열전>가운데의 <유림(儒林)>(학자들), <혹리(酷吏)>(가혹한 관리), <유협(游俠)>(건달·협객), <화식(貨殖)>(벼락부자) 등은 사마천이 당시의 현저한 현상을 독창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한 것으로서, 그 필치도 극히 격조 높은 부분이다. 이 밖에도 굴원, 가의, 관중(管仲, ? - 기원전 645), 안영(춘추시대의 제나라 정치가) 등의 같은 유형이라고 보여지는 경우는, 시대를 달리하고 있더라도 자유로이 같은 열전에 수록하여, 개인의 전기로서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사회사적 관점에 의한 유기적인 관련을 지으려고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궁형(宮刑)을 당하여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이겨 나갔기 때문인지, 그 필치는 불우한 인물을 묘사할 경우 특히 정열을 띠고 감격에 넘친다. 성공리에 끝난 인물에게는 쉽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오자서(俉子胥)·항우·굴원 등의 비극의 영웅, 좌절의 명신(名臣)에게 붙이는 필치는 이채를 발산한다. 저술의 목적은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인간상을 그리는 것에 있으며, 사실의 기록임과 동시에 역사문학의 위대한 금자탑이라고도 하겠다. 표현기교에서도 반복표현, 주제의 강조, 자료와 형식의 다양성, 소설적 수법 등 <사기>가 산문문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것은 이유가 있으며, 고래로 비견되고 있는 <한서(漢書)>도 그 점에서는 일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시 십구수(古詩十九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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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중엽)

<문선(文選)> 29에 실린, 작자 불명의 5언시 19수. 19수 중 8수는 <옥제신영(玉題新詠)>에 매승(枚乘)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고, 또 1수는 <문심조룡(文心雕龍)>에 후한 부의(傅毅)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시기의 작품도 아니고, 한 사람의 작품도 아니다. 5언시의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서 주목되고, 민요의 내용에 문인이 손질을 한 것같이 보여진다.

말투는 문인적이나 내용은 민간가요의 색채가 깊어 이별의 슬픔, 생의 허무함,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비탄, 불우한 강개(慷慨) 등 인간들에게 공통된 심정을 노래하였고, 그 훌륭한 표현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것을 '축신(逐臣)' '기사(棄士)'의 정과 관련짓는 주석도 있으나 그대로 순수히 해석해도 좋겠다. 직녀(織女)의 슬픔, 기녀(妓女)의 생활 등 묘사는 굴절도 많고 점잖으며, 슬픔에 차 있다. 이 한 무리의 시는 건안(建安)의 시인들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이후 모방작이 수없이 나타났다.

맥상상(陌上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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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시로서, 작자는 불명이다. 일명 <일출동남우행(日出東南隅行)> 또는 <염가나부행(艶歌羅敷行)>이라고도 불린다.

악부체(樂賦體)의 시로서, 삼해(三解=三殷)로 나뉘어져 가창되었다. 진씨(秦氏)의 아름다운 딸 나부가 뽕을 따러 나가면 사나이들은 매혹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주(州)지사가 아내로 삼으려 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훌륭한 남편이 이미 있노라고 한다. 당시의 '대곡(大曲)'의 형식으로 연주되어 5언의 리듬을 가졌고 이야기식 악곡으로서 후에 모방작이 많이 나왔다.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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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 초기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장편 서사시. 작가 불명. 일명 <고시위초중경처작(古詩爲焦仲卿妻作)>. 그 처음의 한 구절을 따서 <공작동남비>라고 한다. <옥제신영>1, <고시상석(古詩賞析)>7에 실려 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시달리고 그 남편은 아내를 감싸는 순수한 부부의 애정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비극으로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 것 같다. 때는 후한 말 건안 연간(196-220)에 여강부(廬江府)의 말단관리 초중경(焦仲卿)과 그의 아내 유난지(劉蘭芝)는 중경의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이별당한다.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친정에서는 재혼을 강요하므로 투신자살한다. 남편 중경도 이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죽는다.

전편 353구(1765字)에 걸친 장시로서 당시 가정의 공통된 문제를 다루었고, 그 묘사는 평이하고 성실하며, 특히 대화 부분에는 자상하고 생생한 심정이 잘 묘사되어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짜임새를 보였고, <목란사(木蘭辭)>와 함께, 현재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경극(京劇)'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형식으로 각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