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국 문학/근대·현대

근대·현대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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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現代-文學

중국 역사상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아편(阿片)전쟁 이후를 말하는데, 문학상의 근대는 그 태동기(胎動期)를 포함해서 생각하더라도 대략 1900년 전후부터의 일이며, 질적으로 근대문학의 제일작(第一作)이라 할 수 있는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가 발표된 것은

1918년이다.

청(淸)말의 중국은 제국주의 제 열강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에 의해서 더욱 심각해져 가는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는 한편, 국내의 지배세력인 청조(淸朝)도 내부의 부패를 더하여 그의 무력 약체상(無力弱體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근대 초기의 중국은 이 제국주의의 압박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와 관련해서 청조를 어떻게 평가하여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를 주축으로 여러 가지 사상적·정치적 제 조류(諸潮流)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시대였다. 국내의 여러 체제에는 손을 쓰지 않고 서구의 기술, 그 중에서도 군사기술만을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상층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실패로 돌아간 후, 약간 개명되었던 광서제(光緖帝)를 중심으로 의회제(議會制)의 실시 등 위에서부터의 개혁에 의한 '근대화'를 도모하려고 했던 캉유웨이(康有爲)나 량치차오 등의 '변법운동(變法運動)'도 서태후(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인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 속에서 탄생한 견책소설(譴責小說)은 사회비판도 예리하지 못하고, 문학 면으로서도 낡은 것이기는 하나 소설의 존재 의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근대문학에의 준비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실시된 엄복, 린주 등에 의한 서양 문학·사상의 번역은 후에 근대적 문학자의 탄생을 촉구한 직접적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에 의해서 청조의 무력·부패상이 더욱 명백해지자, 사상계의 주류는 변법파로부터 쑨원(孫文, 1866-1925), 장빙린(章炳麟, 1868-1936) 등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로 옮겨졌다. 일본 유학 중의 루쉰의 사상이나, 그가 기도했던 문학운동의 성격도 여러 가지 독자적인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혁명파와 여러 가지 연관을 갖고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서 청조는 넘어졌으나, 봉건군벌과의 타협에 의해서 혁명의 성과는 오히려 봉건군벌에 가로채져서 1915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제선언(帝制宣言), 1917년 장쉰(張勳)에 의한 청제복벽이 시도되었다. 이것은 모두 실패로 그치기는 했으나 공화제는 위기에 직면하였고, 문학에서도 원앙호접파(鴛鴦蝴蝶派)라고 불리는 유희적(遊戱的) 문학이 지배하는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계몽적 지식인, 좌경 지식인의 통일전선에 의한 반격으로, 신해혁명 후에 새로이 고양(高揚)되어 일어난 것이 문학혁명이다.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중심으로 한 구어문학의 확립, 유교 도덕의 타도를 두 개의 주축(主軸)으로 하여 전개된 이 운동은 1919년의 5·4운동을 거친 다음 한편에서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중국인에게 공산주의가 유입되어 1922년의 중국공산당 창립에 연결시킴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루쉰의 작품을 낳았으며, 1920년의 문학연구회, 1921년의 창조사(創造社)의 결성을 가져옴으로써 중국에 근대문학을 탄생시켰다.

1920년대 전반은 5·4운동 후의 일시적 퇴조기(退潮期)에 해당되었다. 이 사이에 문학혁명에 참가했던 지식인 가운데서도 분화(分化)가 일어나서 후스 등이 봉건세력과 타협한 것에 대해서,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등은 급속도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고, 또한 루쉰 등은 앞날에 광명을 찾을 확고한 희망이 없으면서도 봉건세력과의 독자적이고 끈기있는 투쟁을 계속했다. '인생파(人生派)'라고 불린 문학연구회나 '예술파(藝術派)'라고 불린 창조사(創造社)는 당시 현실과의 투쟁을 뜻하는 각각의 표현이었다.

1925년의 5·30사건 이후 혁명운동은 새로이 고조되었고, 1926년에는 국민당(國民黨)·공산당의 합작에 의한 국민혁명군의 북벌(北伐)이 개시되었다. 문학자 가운데에서도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1927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4·12 국민당 혁명으로 인해 다시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리추리(李初梨), 펑나니차오(馮乃超 1901-) 등 일본의 좌경문학의 영향을 받아 귀국한 직후인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된 창조사는 오히려 그와 반대로 관념적·기계적인 혁명문학을 주장, 첸싱춴(錢杏邨, 1901- ? )과 장콴츠(蔣光慈, 1901-1931) 등에 의한 태양사(太陽社)와 함께 루쉰과 마오윈(茅盾) 등을 소부르주아 문학이라고 공격하여 격렬한 <혁명문학론>전(戰)이 전개되었다. 루쉰도 이 논쟁의 시기에 독자적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후 국민당에 반항하여 루쉰, 마오윈 등을 포함한 좌익은 1930년 좌익작가연맹을 결성하여 이 무렵부터 중국 근대문학의 주류는 좌익문학이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중국문학에도 예술지상주의, 비정치적인 문학의 조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대 말 창조사의 루쉰 등과 대립한 신월사(新月社)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30년대 이후도 이와 같은 문학자나 문학단체는 연이어 나타났다.

그러나 봉건세력·관료자본주의 아래서 반(半)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여건에 놓여 있었던 당시의 중국에서는 그들이 그대로 존립·발전될 가능성은 적었기 때문에 결국 노골적인 어용문학자가 되든가, 아카데미즘 속으로 도피하든가, 또는 원이둬(聞一多), 주쯔칭(朱自淸, 1898-1948)과 같이 민주적·혁명적인 입장을 강화시켜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바진(巴金), 라오서(老舍) 등 1920년대 후반에 등장한 작가의 대부분은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의 인생·사회의 응시(凝視)와 비판을 통해 좌익에 접근한 사람들이었다.

좌익작가연맹은 루쉰 등의 지도 아래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혁명 문학'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문예의 대중화에 노력했고, 또한 러시아 문학작품·이론의 번역·연구에도 주력했다. 이 시기의 창작면에서의 대표작이 마오둔(茅盾)의 <자야(子夜)>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하이의 좌익문학에 노동자·농민과의 유대를 실현시킬 조건은 없었고, 좌익작가연맹 내부에는 인텔리 문학자 고유의 파벌주의가 끝까지 남아 있었다. 또한 운동방침에서도 당시 중앙을 지배하고 있던 극좌적 노선의 영향으로 광범위한 대중적 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국면을 크게 전환시킨 것은 항일전(抗日戰) 중 근거지의 성립, 일본군의 대도시 점령으로 인한 도시 지식층의 근거지에의 대량 이동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중국 문학자들에게 대중들과 결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그리고 1942년, 옌안(延安)의 문예좌담회(文藝座談會)에서 실시된 마오 쩌둥(毛澤東, 1893-1976)의 강화(講話), 이른바 '문예강화(文藝講話)'에서, 문학자는 먼저 노농병(勞農兵)에게 봉사해야 되고, 당시의 현실에서는 작품의 질적 향상보다도 보급이 첫째이며 향상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 기준을 향한 향상이 아니라 노농병의 현재의 수준에서의 그 내적 필연성에 입각한 향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그 후의 중국 문학은 좌경 색채를 농후하게 띠었다. 이후 중국문학은 양상이 바뀌어 이른바 인민문학이라고 불리는, 노농병을 위한 주로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많이 생겨났다. 자오수리(趙樹理)는 초기의 대표적 작가로 지목된다.

중공(中共)의 성립 후에도 이른바 '문예강화'의 문학이념은 주로 도시 지식층 출신의 문화인들로부터 크게 반발을 받아 당초부터 '문예강화'에 회의적이었던 후펑(胡風)이 이를 비판하였고, 딩링(丁玲), 친자오양(秦兆陽, 1918- ), 풍설봉(馮雪峰) 등 '문예강화'에서 이탈하는 문학자가 적지 않았다. 또한 기성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대중적 소설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1965년 가을부터 개시된 이른바 '문학혁명'에서는 문학·예술계가 반혁명 수정주의자의 손에 쥐어 있었다는 이유로 대숙청이 단행되었고, 종래의 마오 쩌둥 문예노선의 기수(旗手)라고 지목되고 있던 저우양(周揚)이 숙청되고 자오수리도 자살했다고 전해지며, 문화계는 다시 혼미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신청년(新靑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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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의 사상·문화잡지. 1915년 9월 창간. 1926년 7월 종간.

전부 63권이 발행되었는데, 잡지의 성격이나 발행소 등도 이 기간에 여러 번의 변천을 겪었다. 당초는 천두슈를 주간(主幹)으로 하여 상하이의 군익서사(群益書社)에서 발행, 1권 6호까지는 <청년잡지(靑年雜誌)>라고 칭했고, 1916년 9월의 2권 1호부터

<신청년>으로 개제했다. 1918년 말까지가 제1기로서 구어문학과 유교 타도를 주장한 문학혁명의 기관지적 성격이 강했고, 후스의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 천두슈의 <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 루쉰의 <광인일기> 등이 이 기간에 발표되었다.

1919년에 이르러 공산주의의 경향이 강해졌으며, 한편 루쉰의 <공을기(孔乙己)> 등도 발표되었다.

1920년 9월의 8권 1호부터 발행소를 신청년사(新靑年社=상하이)로 변경함과 동시에, 거의 천두슈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중국공산당 상하이 발기조(發起組)'의 기관지가 되어, 집필자도 차츰 공산주의자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1921년에는 발행소를 광저우(廣州) 신청년사로 옮겨 7월에는 거의 공산당 계열의 기관지가 되었다. 후스 등의 우파는 이 기간에 결별하였다. 문학적으로 의의가 컸던 것은 제1, 제2기로서 중국 근대문학 탄생의 무대가 이 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천두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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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獨秀 (1879-1942)

중국 근대의 사상가·정치가. 자는 중보(仲甫). 안후이(安徽) 화이닝(懷寧) 사람.

일본에서 도쿄 고등사범학교 속성과를 졸업한 후, 다시 프랑스에 유학. 신해혁명 후의 상황 변혁을 위하여 잡지 <신청년>을 창간하였고, 후스의 <문학개량추의>를 보다 예각적(銳角的)으로 폭을 넓힌 주장 <문학혁명론> 등을 통해 급진적인 전통비판에 의해서 청년층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혁명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베이징(北京)대학 문학과장에 취임하여 대학을 문학혁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후에 공산주의에 접근하여 중국공산당 창립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잡다한 요소를 가져서 제1차 국공(國共)합작 당시부터 국공분열 때까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우익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1929년에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여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저서에 <두슈문존(獨秀文存)>이 있다.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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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適 (1891-1961)

중국 근대의 철학자·교육가. 안후이(安徽) 치시(績溪) 사람.

미국 유학 중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를 기고하여 구어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사상적으로는 개량주의·프래그머티즘의 조류를 대표했다. 후에는 주로 철학사·문학사 연구에 종사했으며, 국민당과의 유대도 강하여 주미대사(駐美大使) 등을 역임했다.

중공 내의 학계에 대한 사상적 영향력이 강하여 1954년에는 그의 영향 일소를 목적으로 한 대대적인 후스 비판운동이 전개되었다.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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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迅 (1881-1936)

중국 근대의 문학자·사상가. 본명은 주수인(周樹人). 자는 예재(豫才). 루쉰 이외에 당사(唐俟), 파인(巴人) 등 수십 가지의 필명을 사용했다. 저장(浙江) 사오싱(紹興) 사람.

중류 정도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했다. 조부는 중앙정부의 관리였으며 소년시대에 집이 몰락하여 생활난도 경험했다. 난징(南京)의 광로학당 재학 중 엄복(嚴復) 번역에 의한 서양 근대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일본에 유학, 도호쿠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이 무렵부터 사상적으로는 혁명파에 속하여 반청(反淸)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에도 소속했다.

의학을 도중에 중단하고 문학운동을 지향했고, 발간을 계획했던 잡지는 유산되었으나 다른 잡지에 <파악성론(破惡聲論)>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마라시역설(魔羅詩力說)> 등 강렬한 개성과 반항정신으로써 민중을 각성시키는 '정신계의 전사(戰士)'의 출현을 호소하는 문장을 썼고, 또한 동부유럽 여러 나라의 단편 번역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아우인 저우쭤런(周作人)과 공역으로 출판했다. 귀국 후 향리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으며 신해혁명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국민정부의 교육부원으로서 참가하여 베이징으로 옮겼다. 그러나 혁명 후의 현실에 실망,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 대한 반동도 있어 잠시 침묵의 생활을 보냈다. 문학혁명이 개시되자 잡감(雜感)이라고 불리는 예리한 문학 사회 비판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 등 중국사회와 민중의 현실을 그린 소설을 발표, 중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또한 이 무렵 베이징 대학에서 실시한 강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은 소설사 연구의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고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는 '미명사(未名社)' '어사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에 의한 문학운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청년 문학자의 지도에도 힘썼다.

1926년의 군벌정부에 의한 학생 시민 데모 사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샤먼(廈門)을 거쳐 광둥(廣東)으로 옮겼으며, 다시 장제스의 국민당 혁명 후 상하이로 옮겼다. 상하이에서는 혁명문학파로부터 소부르주아 문학자라고 공격을 받았으며, 또한 그는 그들의 관념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사상·문학은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민중에 대한 절실한 관심에 차 있다. 그는 반봉건·반식민지적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구미를 좇는 근대주의와는 대치(對峙)되는 입장에 서지만, 동시에 그는 외국의 사상과 문화의 치밀하고 정확한 번역과 소개를 중시했다.

아큐정전(阿Q正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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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루쉰(魯迅)의 대표적 중편소설. 베이징 신문 <진보부간(晨報副刊)>에 연재되었다. 최하층의 한 날품팔이인 아큐(阿Q)를 주인공으로 중국 구사회와 민중이 지닌 문제를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파헤치고 있다.

작품의 전반에 그려진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은 민중 자신 속에 있는 노예근성이며, 작가의 붓은 아큐를 그 집중적 존재로서 그리고 있다. 따라서 아큐라는 이름은 널리 그와 같은 성격의 대명사로 사용되기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개에 따라서 아큐는 차츰 피압박자로서의 양상을 깊이 하여 작자는 아큐의 운명에 대한 동정과 접근을 더해 간다. 아큐는 최후에 신해혁명 후의 지방정부의 손에 총살당하는데, 그것은 동시에 구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존재인 아큐들의 입장이 어떤 형태로든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어떠한 혁명도 무력하며, 오히려 민중은 그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의 폭로이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로맹 롤랑을 깊이 감동시켰다고 한다.

문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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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硏究會

이른바 '5·4' 신문화운동의 조류에 실려 생긴 문학단체로서 1920년 11월, 저우쭤런(周作人), 마오윈(茅盾), 예사오쥔(葉紹鈞) 등 12명이 서명한 선언(宣言)을 기초로 다수의 참가자를 얻어 다음해 1월 베이징에서 성립되었다.

마오윈이 편집하고 있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소설월보(小說月報)>를 기관지로 하여 내용을 신문학(新文學) 일색으로 고치고, 각지의 분회(分會)에서도 자주적으로 간행물을 발행하여 신문학 초기의 대세를 이끌었다. 특정한 주장 아래 결집된 운동체라기보다 직업단체 같은 부드러운 결합체에 지나지 않았으나 \"문예를 기분 좋을 때의 놀이나, 실의(失意) 때의 여기라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선언)라는 공통적인 태도를 지녔으며 여기에는 신문학의 사활(死活)이 걸려 있었다. 그 점에 한해서의 동인(同人)의 결속은 단단했다고 할 수 있다.

'인생파(人生派)'라는 지칭도 다음의 창조사(創造社)와의 비교에서 생긴 것으로, 불확실하나 견실한 리얼리스트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신문학의 정착과 함께 동인의식은 흐려져 1932년 <소설월보>의 폐간에 의해서 자연 소멸되었다.

저우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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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作人 (1885-1967)

중국 현대의 수필가·번역가. 루쉰(魯迅)의 친동생으로서 형에 이어 일본에 유학, 릿쿄(立敎)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 중에 형제가 번역 소설집 <역외소설집> 2권을 내놓았다. 귀국 후 베이징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신청년>에 러시아·일본의 사조와 문학을 소개하였으며, 때마침 일어난 문학혁명운동에 호응해서 <인간의 문학> <사상혁명(思想革命)> 등의 평론으로써, 언문일치론(言文一致論)을 둘러싸고 비등했던 운동에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의 의의(意義)를 부여했다.

신문학의 한 분야로서 짧은 산문의 개발을 시도, 1924년 루쉰 등과 함께 창간한 주간(週刊) <어사(語絲)>에는 감상문과 함께 시사비판을 많이 발표하였으나 정치적 격동에 따르지 못하게 되어 차츰 은일(隱逸)의 경향이 짙어졌다. 일본 점령하의 베이징에서 점령정치에 협력, 항전 승리 후 투옥당하기까지 했으나 노성(老成)한 문장은 더욱 빛을 더해 갔다.

수필집은 <우천서(雨天書)>(1924)를 비롯하여 <지당을유문편(知堂乙酉文篇)> 등 다수가 있다.

마오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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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盾 (1896-1981)

중국 현대의 작가·비평가. 본명은 선데홍(沈德鴻), 자는 안빙(雁氷).

베이징대학 예과 수료 후 상하이 상무인서관에 근무하면서 서구문학을 익혔다. 문학연구회 기관지가 된 <소설월보>의 편집을 담당, 평론이나 해외·문단소식의 소개 등을 통하여 정력적으로 신문학 계몽을 수행했다. 1924년부터 1927년의 국공(國共) 양당 분열시까지 혁명운동에 가담한 뒤, 실패의 환멸 속에서 창작의 길에 전념, 졸라, 톨스토이에게서 배운 지론(持論)인 사실주의를 실천에 옮겨서 대혁명기의 인텔리 청년의 '환멸' '동요' '추구'를 담은 3부작 <식(蝕)>(1927-28)을 집필하였다. 근대적인 최초의 장편소설로서 문학사에 남을 작품이다.

이어 일본으로 망명, 평론 <고령에서 도쿄(東京)로>(1928)에서, 혁명문학의 국민적인 기반을 굳히면서 소상인이나 중소농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 루쉰과 같이 또 하나의 각도에서 프로 파(派)의 낭만적인 주관성(主觀性)을 비판했다. <임상점(林商店)> <춘잠> 등의 단편에서 그의 주장에 충실하게 도시·농촌의 중·하층 생활인의 파산(破産)을 그렸고, 그 정점은 민족자본가의 비극을 추구한 대작 <자야(子夜)>에 이른다.

항일전쟁 중에는 루쉰 사후의 문단의 중진으로 활약했으며, 여간첩(女間諜)의 수기형식으로 된 국민당의 부패상을 파헤친 후기의 대표 장편 <부식(腐蝕)>(1942)은 심화(深化)된 리얼리즘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계속된 대하소설 <상엽홍사이월화(霜葉紅似二月花)>(1943)는 제1부만으로 미완성이며, <마오둔 문집(茅盾文集)> 10권이 있다.

자야(子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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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둔의 장편소설. 1933년 간행. 무대는 세계 경제공황하의 상하이.

정한(精悍)한 합리주의자인 한 민족자본가의 분투와 그 패배의 과정을 통하여 외국 자본의 침략과 국내의 전란 때문에 요람기(搖籃期)에서부터 비뚤어져 좌절되어 가는 민족 공업의 운명을 극명(克明)하게 추구하고 있다. 당대(當代) 사회의 비판적·전면적 묘사를 지향하는 작가의 눈은 당연히 비극의 희생자가 되는 노동자의 투쟁에도 미쳐서 그 내부의 복잡한 갈등에까지 분석을 가하고 있다.

인간 관찰에는 아직 깊이가 부족하나 굴지의 대작임에는 틀림없다. <자야>의 뜻은 한밤중이란 뜻이다.

예사오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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葉紹鈞 (1894- ? )

중국 현대의 소설가. 자는 성도(聖陶).

중학교를 나와 교원이 되어 구식 소설에 손을 대었으나 본격적인 출발은 문학연구회 발족 전후이다. 신구 양세력의 갈등 속에서 고투하는 평범하고 성실한 시골 교사를 그린 <예환지(倪煥之)>(1928), <격막(隔膜)>(1922) 이하의 단편집은 음울한 지방생활을 무대로 개화기의 문제의식을 호소하여 신문학 초기의 착실한 작품을 대표한다. 또한 <허수아비>(1923)는 중국 최초의 동화집이다. 이후는 교육·출판 관계의 일이 주가 되었다.

창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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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造社

문학 연구회에 1년 뒤져서 1921년 결성된 중국 근대문학 초기의 문학단체이다.

궈모뤄(郭沫若), 위다푸(郁達夫), 청팡우(成彷吾), 톈한(田漢) 등을 초기의 동인으로 하여 기관지 <창조계간(創造季刊)> <창조주보(創造週報)> <창조일(創造日)> 등을 발간, 또한 궈모뤄의 <여신(女神)>, 유이달후의 <심륜(沈淪)> 등을 비롯한 창조사 총서(叢書)를 출판하였다. 개성의 해방, 낭만적인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했으나, 결코 사회적인 것은 아니었고 현실에 대한 반역적인 지식 표현의 하나였다. 1925년경부터 혁명운동으로 강하게 기울어지고, 1927-1928년경부터 <홍수(洪水)> <창조월간(創造月刊)> <문화비판(文化批判)> 등을 기관지로 하여 혁명문학을 제창했다.

이 무렵은 새로 일본 유학을 통해 좌경문학운동의 영향으로 펑나이차오(馮乃超)(1901- ? ), 리추리(李初梨) 등도 가담하여 루쉰, 마오윈 등을 극복의 대상이 되는 당연한 소부르주아 문학자라고 공격하여 그들로부터 신랄한 반대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첸싱춴(錢杏邨, 1901- ? ), 장콴츠(蔣光慈, 1901-1931) 등의 태양사(太陽社)와 함께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을 가진 문학을 강하게 제창하였다.

궈모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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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沫若 (1892-1978)

중국 현대의 시인·작가·역사가. 쓰촨성(四川省) 자딩(嘉定) 사람.

몰락한 중류 지주의 집안에서 출생. 어릴 때부터 반항정신이 강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두 번이나 퇴학처분을 받았다. 청두(成都)의 중학 재학중 신해혁명을 경험한 다음 1914년 일본에 유학, 제6고등학교, 규슈(九州) 대학에서 수학했다. 유학중에 위다푸(郁達夫), 청팡우 등과 '창조사'를 결성했다. 1921년에는 일시 귀국하여 처녀시집 <여신(女神)>을 출판하고, 1922년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번역했다. 초기의 그에게는 일체의 것에 반항하고 그것을 직선적으로 토로하는 경향이 강했다. 직정적(直情的)인 그는 그 후 혁명의 진전과 함께 이에 접근, 문학과 혁명의 결합을 제창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북벌의 좌절 직후에 일어난 혁명문학 논쟁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본에서 중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쓴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硏究)>는 많은 약점을 가지면서도 고대사회에 처음으로 과학적 조명(照明)을 비친 획기적 업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자서전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항일 전후에까지 걸친 그의 방대한 자서전은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이다. 중일(中日)전쟁이 발발하자 고민 끝에 처자를 남기고 귀국하여 항전(抗戰)에 참가했다. 이 때에 <굴원(屈原)>등 일련의 낭만적인 멋이 살려진 역사극을 발표하여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종전 후에는 <무측천(武則天>(1962) 등 사극도 썼는데, 1965년 가을부터의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는 자기는 노농병(勞農兵)에게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고, 자기의 작품에는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표명하여 세계의 화제(話題)가 되었다.

위다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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郁達夫 (1896-1945)

중국 현대문학 초기의 소설가.

저장성 후양(富陽) 출신.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대학 경제학부에 재학중, 도쿄에서 궈모뤄 등과 창조사를 결성. 문학연구회의 '사실파(寫實派)' '인생파(人生派)'에 대해서 '낭만파(浪漫派)'

'예술파(藝術派)'라고 불려졌고 초창기 문단의 하나의 업적을 이룩했다. 그의 소설은 궈모뤄의 시와 나란히 초기 창조사를 대표한다. 8년 반의 일본유학을 통하여 사토하루오(佐藤春夫) 등의 신(新)낭만파, 그리고 다우슨 등 영국 세기말 문학 등의 영향을 받아 사소설(私小說)풍의 단편에서 퇴폐와 감상(感傷)의 시인이란 이름을 얻었다. 1927년, 대혁명의 좌절을 전후하여 자기 변혁과 작풍(作風) 전환에 고민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1930년경 문인의 세계로 물러앉았다. 산수유기(山水遊記) 종류가 많으며, 종전 직후 수마트라에서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했다.

심륜(沈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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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위다푸의 작. 고백체(告白體)의 중편소설. 1921년 상하이 태동서국(泰東書局)에서 출판. 신문학 최초로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로 비난을 받았으나 저우쭤런의 변호로 그의 출세작이 되었다. 나고야(名古屋)의 제8고등학교 유학중의 생활에서 취재한 것으로 고독한 한 유학생이 성적 억울(抑鬱)과 일본인의 '지나인(支那人)' 멸시에 대한 비분 때문에 드디어 '조국이여 빨리 부강해 다오'라고 절규하면서 자살할 때까지의 '청년의 우울증'을 묘사하고 있다. 성(性)과 퇴폐를 자기 고뇌의 고백으로 하여 그대로 민족적·사회적 항의가 되어 있는 점에 특징이 있다.

청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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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吾 (1894- ? )

중국 현대의 평론가·교육가. 석후생(石厚生)이란 필명을 사용한 일도 있다. 후난성(湖南省) 신화(新化) 사람.

일본 유학중에 궈모뤄 등과 창조사를 결성, 주로 평론으로 활약했다. 특히 1928년, 창조사 후기에 발표한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으로>는 혁명문학론의 대표적 논문의 하나로 꼽히는데 논문 자체에 파벌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후에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했으며 <홍위병 난동>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리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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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初梨 (생몰연도 미상)

중국 현대의 문예 이론가. 쓰촨성(四川省) 사람.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대학 재학중에 창조사의 청팡우 등과 접촉했고, 1928년 귀국한 후 창조사에 가입하여 <어떻게 하여 혁명문학을 건설할 것인가>를 발표, 펑나이차오(馮乃超, 1901-1983) 등과 후기 창조사의 중심이 되었다. 이 논문은 혁명문학을 제창한 논문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으며 파벌의식도 약하다. 그는 후에 오히려 정치적 분야에서 활동했다.

린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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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語堂 (1895-1976)

중국 현대의 작가·저널리스트.

푸젠성(福建省) 룽시(龍溪) 사람. 원래는 임옥당(林玉堂)이라고 칭했다.

목사의 집안에서 선교사 계통의 교육을 받았다. 미국과 독일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에는 베이징대학 교수로서 루쉰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했고, 국공 분열 당시는 무한(武漢) 정부에 들어갔다. 이 기간은 그의 가장 급진적이었던 시기로 무한정부 붕괴 후는 상하이에서 <논어(論語)> <인간세(人間世)> <우주풍(宇宙風)> 등을 발간, 유머와 소품문(小品文)을 제창했다.

저작에는 중·영 양국어를 사용하였고, 1935년까지의 단편(斷片)을 집대성한 <나의 국토, 나의 국민>을 미국에서 출판한 것을 비롯하여 1936년 미국에 건너간 이후의 저작 등 구미인에게 중국을 이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으며, 전체적으로 구미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변형된 중국의 모습을 부각했다. 수필 <생활의 발견> 등을 비롯하여 소설 <베이징 호일(北京好 日)> <나뭇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 있다> 등 다수가 있으나 중국의 현실에서 약간 유리된 경향을 띠고 있다.

베이징 호일(北京好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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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린위탕의 장편 역사소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에서부터 1937년의 난징(南京) 함락 후까지의 베이징 상류가족의 이야기이다. <현대 중국 생활의 소설>이란 부제(副題)가 붙은 것과 같이 중국의 역사적 상황과 중국인의 생활을 구미인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고 사건이나 풍습이 명료하게 그려진 반면, 작자의 주장·사관(史觀)이 약하여 전체적으로 멜로드라마적 대하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원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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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一多 (1899-1946)

중국 현대의 시인·고전문학 연구가. 이름은 가화, 이둬는 필명. 후베이(湖北) 희수 태생.

베이징 칭화학교(淸華學校=후의 淸華대학) 졸업 후 시카고 미술학원, 콜로라도 대학에 유학. 귀국 후 '신월사(新月社)'의 동인으로서 현대시의 창작과 시론 발표에 힘을 기울였으나, 우한(武漢)대학, 칭도(靑島) 대학 등을 거쳐, 모교인 칭화 대학 중국문학과 교수에 취임한 후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고전문학 연구에 몰두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항일전쟁 중 쿤밍(昆明)으로 옮겼고 민주운동 활약중에 암살당했다.

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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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漢 (1898-1968)

중국 현대의 극작가. 자는 수창(壽昌), 호는 진유(陳瑜), 철서장(鐵瑞章), 후난(湖南) 한쇼(漢壽) 사람.

도쿄 고등사범 유학 중에 극작을 시작하고, 후에 창조사(創造社)의 결성에 참가했다. 그 후 영화사를 세우고 각 대학의 연극 지도를 하는 한편 많은 단막극을 발표했다. 또한 극단 남국극사(南國劇社)를 결성하여 낭만적·감상적인 작품으로 연극계를 이끌었다. 항일전쟁 중 많은 항일희곡을 집필했으며, 혁명 후는 문화계·극작가협회의 대표로서 활약했으며, 문화 대혁명' 때에 숙청당했다.

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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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

중국 현대의 극작가. 본명은 완자바오(萬家寶). 후베이 쳰장(潛江) 사람.

베이징의 칭화대학에서 유럽 문학과 그리스 비극(悲劇)을 전공. 처음에는 본명으로 소설을 썼으며 차위란 이름으로 발표한 희곡 <뇌우(雷雨)> 4막(1934)에 의해서 일약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어서 <일출(日出)> 4막(1936), <원야(原野)> 3막(1939) 등을 발표, 근대극의 수법을 구사한 치밀한 구성과 심각한 내용으로 중국 근대극의 창시자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항일전쟁 직전에 국립 희극학교 교수, 전시 중에는 전국 희극계 항적(抗敵)협회 이사가 되었다.

1946년 봄 라오셔(老舍)와 함께 도미, 각지에서 중국 연극을 강연했다. 귀국 후 한때 청화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후에 홍콩(香港)에서 시나리오 <염양천(艶陽天)>을 썼다. 이 밖에도 입센, 오닐 등의 번역작이 많이 있다.

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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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金 (1905-2004 )

중국 현대의 작가. 본명은 림페이간이다.

쓰촨(四川) 청두(成都)의 대지주 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5·4운동에 의해 신사상(新思想)에 각성하고 후에 아나키즘에 심취했다. 1923년 집을 나와 난징(南京)에 유학, 다시 상하이로 나와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 프랑스에 유학, 파리에서 쓴 <멸망(滅亡)>이 귀국과 동시에 발표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 생가(生家)를 모델로 한 <집>(후에 <봄> <가을>을 추가하여 <격류(激流)> 3부작으로 불린다)은 청년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종전(終戰) 전의 작품으로서는 최고의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그 후도 계속 장편을 발표하였고 항일전에서 종전 직전에 걸친 작품으로 <게원(憩園)> <한야(寒夜)> 등과 동화·단편 등 수많은 작품이 있다.

그의 작품은 약자에 대한 강한 애정이 깔려 있으며 평범한 소시민의 심리 등을 면밀하게 파고든 작풍을 특색으로 한다. 종전 후는 공적(公的) 기관에서의 활동도 많았으며 최근의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는 '부르주아 전위(前衛)'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라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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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舍 (1898-1969 ?)

중국 현대의 작가. 본명은 수칭천(舒慶春). 베이징(北京) 사람.

처음에는 교육계에 투신했으나 1924년 영국으로 가서 창작을 시작했다. <장씨의 철학(老張的哲學)> <조자왈(趙子曰)> <이마(二馬)> 등 유학중의 작품을 <소설월보(小說月報)>에 보내 호평을 받았고, 1930년 귀국 후는 <소파탄생일(小坡誕生日)> <이혼(離婚)> <우천사전(牛天賜傳)> 등을 계속 발표했다. 특히 1936년 작품 <낙타 상자(駱駝祥子)> 는 베이징 인력거꾼 상자의 불쌍한 생애를 그려서 그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항전 중에는 주로 항전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종사했는데 종전 직전에서부터 <사세동당(四世同堂)>의 집필을 시작, 1945년부터 1951년에 걸쳐 발표했다.

작품은 고도(古都) 베이징과 그 곳에 사는 서민에 대한 애정에 넘쳐 있는 것이 특색으로서, 이것이 귀국 후의 재건되어 가는 베이징을 보고, 희곡 <방진주(方珍珠)> <용염구(龍髥溝)>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 후에 단편이나 희곡, 또는 민간 설화 등의 평가, 창작에도 활약했다. 그러나 1965년 가을부터 개시된 '홍위병 난동'기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사세동당(四世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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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황혹(惶惑)>(1945), 제2부 <투생(偸生)>(1946), 제3부 <기황(飢荒)>(1949-1951)으로 된 라오서의 장편소설.

베이징에 사는 4대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四世同堂) 것을 평생의 이상으로 하고 있던 기씨 가문(祁氏家門)이 일본군의 베이징 점령으로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주축(主軸)으로 베이징 시민의 갖가지 고통·저항·타락을 묘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거친 곳이 있으나 작자의 베이징에 대한 애정의 깊이와 그것을 더럽히는 자에 대한 분노가 이 작품에 생명을 주고 있다.

선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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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從文 (1903- ? )

중국의 현대 소설가.소년시대부터 지방 군벌의 부대에 말려들어 전전하다가 20세쯤에 베이징에서 작가생활에 들어갔다. 딩링(丁玲), 후예핀(胡也頻, 1903-31) 부처와 친하게 지냈으며 프로 문학에 대항하여 야성적이고 우미한 이향(異鄕) 정취의 단편을 연이어 발표했다. 명작 <변성(邊城)>(1934)은 후난(湖南) 변경의 야성적인 처녀를 둘러싼, 현실을 떠난 비련의 이야기이다. <췅원자전(從文自傳)> <딩링에 대해서> 등 전기(傳記) 작품도 훌륭하다. 종전 후 자기비판을 발표했으나 작품은 거의 없다.

딩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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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玲 (1907-1986)

중국 현대의 여류작가. 본명은 장위문(蔣褘文). 후난성 린리(臨澧) 사람.

몰락 지주의 집안에서 출생. 어릴 때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구소설과 임역(林澤)소설을 탐독했다. 1927년 처녀작 <몽가(夢珂)>에 이어 <사비 여사의 일기(莎菲女士的日記)>를 발표, 여성의 해방을 연애와 성의 해방에서 찾는 강렬한 색채로서 문제를 던졌다. 수해(水害) 때의 농민폭동을 그린 <수(水)>는 당시의 대표작이다. 후에 옌안(延安)으로 옮겨, 단편 <하촌에 있었을 때(我在霞村的時侯)> 등을 썼다.

종전 후 토지개혁을 그린 장편 <태양은 쌍간허(桑乾河)를 비친다>에서 호평을 받았으나 옌안 시대부터 개인주의적 경향이 있다 하여 몇 번이나 비판을 받았고, 특히 1957년의 반우파(反右派) 투쟁 때에 우파분자라고 비판을 받아 사회적·문학적 활동에서 숙청당했다.

샤오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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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軍 (1907- ? )

중국 현대의 작가. 본명은 류싼랑(劉三郞), 톈쥔(田軍)이란 필명도 사용한다. 동북(東北) 출신. 1934년에 루쉰을 따라 상하이로 나와 처녀작 <8월의 향촌(八月的鄕村)>(1934)으로 일약 각광을 받았다. 웅대한 구상력과 섬세한 휴머니즘은 장편 <제삼대(第三代)>(1937)에서 최고의 결실을 보였는데, 이것은 후에 옌안에서 제8부까지 계속되어 <과거의 연대(過去的年代)>(1957)라고 개제되었다.

항전 후 하얼빈에 돌아와서 문화활동에 종사했으나 반소적 언론, 나아가서 개인주의의 경향이 있다고 연달아 비판당하고 제1선에서 숙청당했다.

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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柔石 (1901-1931)

중국 현대의 작가. 본명은 자오핑푸(趙平復). 저장성(浙江省) 닝하이(寧海) 사람.

1928년 상하이로 나와 루쉰의 인정을 받아 잡지 <어사(語絲)>와 <조화사(朝華社)>의 일에 참여하였고, 작품은 단편 <노예(奴隸)가 된 모친(母親)>, 중편 <이월(二月)>(1929) 등 발랄하고 관념적인 작품을 썼다.

취먀오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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瞿秋白 (1899-1935)

중국 현대의 혁명가·문학자. 먀오쯔는 필명이고 본명은 솽(霜)이며 그 외에 수십의 필명을 사용했다. 장쑤성(江蘇省) 무진(武進) 사람.

러시아 문학의 연구·번역가로서 1931년 후에는 루쉰과 함께 이른바 좌익작가연맹을 지도하며 평론·창작, 러시아 문학의 번역 등을 했다. 1932년에는 <루쉰잡감선집(魯迅雜感選集)>을 편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후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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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風 (1904-1985)

중국 현대의 평론가. 본명은 장광인(張光人). 필명은 곡비(谷非)라고도 한다. 후베이성(湖北省) 치춘 사람.

일본에 유학하고 귀국 후 발표한 <린위탕론(林語堂論)>(1934)으로 호평을 받았고, 또한 루쉰과 친교를 맺었다. 국방문학논전(國防文學論戰) 등에서 저우양(周揚) 등과 대립하였고, 전쟁 중에는 충칭(重慶)에서 <칠월(七月)> <희망(希望)> 등을 발간, '주관적 전투정신(主觀的戰鬪精神)'을 제창하여 <문예강화(文藝講話)>에 대항했다. 중공 정권 이후에도 때때로 비판을 받으면서 집요하게 당의 문예정책에 반대했다. 1954년에는 의견서를 제출하여 당의 문예정책의 근본적 변경을 요구했으나 반대로 전면적 비판을 받았고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당했다.

저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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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揚 (1908- ? )

중국 현대의 문예평론가. 자는 치잉(起應). 후난성(湖南省) 이양(益陽) 사람.

상하이의 대하(大夏)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였고 귀국 후 1932년경부터 주로 문예평론과 러시아 문학의 번역 등을 했었으며, 국방문학 논전에서는 루쉰과 마오윈(茅盾) 등으로부터 통일전선에 대한 우익적인 이해와 특히 그의 당파주의적 작풍이 매섭게 비판받았다. 항전 중에는 루쉰 예술학원 그 밖에 여러 점령구에서의 문화활동을 지도했다. 중공 정권하에서는 예술계의 최고 책임자였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는 국방문학 논전의 그의 입장은 부르주아적이었다고 지적되었고, 나아가서 그는 반당(反黨)·반사회주의·반혁명의 수정(修正)주의자로서, 중공 집권 이래 일관하여 마오 쩌둥(毛澤東) 문예노선에 반대했고, 문학예술계에서 부르주아 독재를 실시해 왔던 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허치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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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其芳 (1912- ? )

중국 현대의 시인·비평가. 쓰촨성(四川省) 완셴(萬縣) 사람.

1930년대에 리광텐(李光田, 1907-1968), 볜즈린(卞之琳)(1910- ? )과 <한원집(漢園集)>을 발간하는 등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시풍으로 알려졌으며, 항일전 개시 후 옌안으로 가서 평론활동에 주력했다. 평론집으로 <현실주의(現實主義)에 대해서>(1950). <문학예술의 봄>(1964)이 있고, 풍부한 감상력과 섬세한 논리적 평론을 썼으나 문화혁명 때 저우양과 관련된 '부르주아 권위'라고 비판을 받았다.

자오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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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樹理 (1905-1966)

중국 현대의 작가. 산시성(山西省) 심수(沁水) 사람.

몰락한 중농의 집안에서 출생. 성립(省立)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재학시절부터 중국 및 유럽의 근대문학에 접하면서 스스로도 습작을 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대중소설과 희곡을 썼다. 항전 중에는 타이항(太行)산맥 속의 점령구에서 신문 편집 등으로 선전활동에 종사하였다. 그의 특징은 민중의 낙천적인 발상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점. 민화풍(民話風)의 형식, 이야기의 실마리를 훌륭한 단편으로 살리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 후 장편 <이가장(李家莊)의 변천>에서 한 농민의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후도 농업합작사(農業合作社)를 그린 장편 <삼리만(三里灣)>(1955)이나 항쟁시대의 산시(山西) 농촌의 젊은 소작농을 묘사한 <영천동(靈泉洞)>(1959, 미완) 등을 썼고 단편도 많이 발표했다.

그러나 1964년에는 그가 시대의 선두에 서는 인물을 묘사하는 점에서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문화대혁명'에서는 저우양과 연결되는 수정주의 문예의 대표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앞의 여러 작품의 가치도 부정되었으며 일설에는 자살했다고도 전해진다.

로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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駱賓基 (1917- ? )

중국 현대의 소설가. 동북지방 출신으로서 중학교 때 만주 사변(滿洲事變, 1931)을 맞아 의용군에 참가하였고, 후에 상하이로 가서 창작을 시작했다. 얼마 후에 항일전에 투신, 활약했고, 그 경험에서 단편집 <대상하이(大上海)의 하루>(1939)를 발표하여 항전문학의 드문 명작이라고 칭찬받았다. 그 후 각지를 전전하며 단편집 <북망원(北望園)의 봄>(1947), 자서전적 장편 <혼돈(混沌)>(1947) 등을 발표했다. 섬세한 관찰과 묘사력에 뛰어난 이색(異色) 작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