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고려 전기

고려 문학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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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文學-特性

고려는 통일신라의 관료적 집권 봉건제의 성립을 이어받아 이를 발전시킨 단계로 중세기 문화의 초(初)를 장식한다. 이 때부터 민족의 상층과 하층의 분화(分化)가 싹트게 되었고, 관료적 봉건제도가 이로 인해 변질되기 시작하여 지배적인 관료 계급과 하층인 서민계급의 분열을 가져온다. 고려문학도 상층과 하층의 특이한 양면을 노출하게 되는데, 전자는 이른바 경기체가(景幾體歌)로 대표되고, 후자는 오늘의 <악학궤범>과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대표된다.

신라의 화랑과 승려들에 의해 창조되고 연마되어 온 향가는 고려 초기에까지 그 줄기찬 전통을 계승하고 유지해 왔다.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된 40여 년 후 신라는 망했다. 그러나 향가 중 사뇌가의 창연(蒼然)은 그치지 않아 고려에 들어와서도 균여대사의 찬불가(讚佛歌) 11수가 전해져 오고 오고 그보다 100여 년 후 현종(顯宗) 이하 군신이 사뇌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균여대사야말로 불학(佛學)의 사종(師宗)이요, 국학(國學)의 대가로 신라 때부터 본격화된 향가문학을 최후로 유지, 완성한 유일한 작가였다. 그러나 이 때는 벌써 고려 왕조의 봉건적이고도 사대주의(事大主義)에의 편집(偏執)으로 한시 한문(漢詩漢文)이 주류적 문학으로 의식되던 때이니만큼, 향가는 차츰 쇠퇴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시 절구(絶句)의 향토적인 모방과 아울러 그보다 2세기 후에는 향가의 형태가 당시의 신조(新調) 또는 단가(短歌) 등의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었다. 또 신라 이후 가요의 다른 줄기는 민간의 민요나 궁중의 연향(宴享)에서 부르는 연곡(宴曲)이나 또는 명산대천 기타 잡사(雜祀)·팔관(八關)·연등(燃燈)에 부르는 신가(神歌)·불가(佛歌) 등의 계통을 이은 가사(歌詞)가 한문 악장(樂章)에 대립, 전승되어 한문학의 번성한 그늘에서 고려의 문학이 오직 연향·제향(祭享)의 악장가사로서만 남게 되는 운명적 성격에 부딪쳤다.

또한 고려 초기 이후 지식인들에 의해서 새로운 시가의 형태가 모색된 끝에 등장한 새로운 시가형(詩歌型=경기체가)이 곧 시조형(時調形)과 별곡체(別曲體)이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중들의 절실한 요구에 따라 삼장육구체(三章六句體)의 민요의 한 형태는 새로운 시형을 모색하던 문인들의 세계로 차츰 녹아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문 어구에 토를 달던 한문투 시조형이 어느덧 그들의 서정성을 담는 그릇으로 되어, 딱딱하던 한문투는 점점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변형되었다. 한편 민요의 한 형태가 선비들의 집단 연회 자리에 오르내려 순 한문투의 별곡체라는 새로운 시형이 나타났다.

이 별곡체는 민요의 한 형태에서 파생한 별곡과 서로 영향을 주면서 형성, 뒤에 궁중 음악의 창사(唱詞)로 채택되어 조선 때까지 계승되었다. 그리고 한문 어구에 토를 다는 데서 파생한 새로운 문체가 형성되면서 <어부사(漁父詞)>와 같은 가사체(歌詞體) 문학의 출현을 보았다. 이리하여 고려의 시가문학은 한동안 향가의 잔영을 받으면서 차츰 새로운 형태를 발견, 시조형·별곡체·가사체 등의 새로운 시형을 창조, 발전시키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문을 통해 패관문학(稗官文學)의 성행으로 설화문학이 그 빛을 발하게 된 것도 고려문학에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이다.

고려 전기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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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前期-歌謠

시가 장르 가운데 향가는 신라에서 넘어와 발전하였다. 고려 초의 작으로 <균여전>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는 향가의 현존 작품으로서 최후의 것이 된다.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지어 불렀다는 <무애가(無▩歌)>는 <처용가>와 함께 고려대에 부연(敷衍)된 듯하다. 고려 초에 이루어진 <서경별곡(西京別曲)>과 <대동강(大洞江)> 등은 평양의 유풍으로 지어졌다 하며 <한송정(寒松亭)>은 광종(光宗) 때 장진공(張晋公)의 해시(解詩)로서 유명하나 작자미상이다. 지금에 전하고 있는 시조,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경포대(鏡浦臺)에 물결 잔제

유신(有信)한 백구(白鷗)는 오락가락 하건만은

엇더타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아니 오나니."는 그의 여류(餘類)일 것이며, 이 원시(原詩)는 향가에 들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초기에는 문학의 표기 수단으로 향찰이 또한 존재했다. 중기(中期)의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향가가 수록되고 있으므로 일연은 편찬자로서 이것을 읽었으리라 믿어진다. 균여시대에는 불경(佛經)의 해석까지 향찰로 하였고, 현종(顯宗) 때 왕이 현화사에 가서 신하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할 때 왕이 신하와 같이 지은 사뇌가 12수를 현판에 새기어 절에 걸었다는 기록이 <현화사비음기(玄化寺碑陰記)>에 있다. 다음 예종(睿宗) 자신이 지은

<벌곡조(伐谷鳥)> <도이장가(悼二將歌)>는 <균여전>이 편찬된 지 40년밖에 되지 않아서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30, 40년 뒤 인종(仁宗) 때 내시랑중(內侍郞中) 정서(鄭敍)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었는데 이 노래는 2수의 향가가 합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에 물들었던 향가가 문신들이 등장하게 되자 이들은 이를 습작하다가 한문에 물든 교양의 척도에 따라 한시(漢詩)로 창작을 충족시키고 예종 때 전래된 대성악(大晟樂)의 악장(樂章)의 멜로디를 전래 가곡의 멜로디에 대치시킨 것이다.

균여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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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大師 (923-973)

고려 때의 고승(高僧). 성은 변(邊), 본관은 황주(黃州). 어머니는 점명(占命). 얼굴이 못생겨서 부모는 그를 거리에 버렸으나 두 까마귀가 날개로 그를 덮는 것을 보고 부모는 회개하여 다시 데려다 길렀다 함. 어릴 때부터 <원만게(圓滿偈)>를 즐겨 읽었고 15세 때 부흥사(復興寺) 식현화상(識賢和尙)에게 학문을 배워 뒤에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순(義順)의 문인으로 수도에 힘썼다. 한편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하여, 향가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이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었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관혜(觀惠)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希朗)의 북악파(北岳派)의 통합을 위해 인유(仁裕)와 함께 대찰(大刹)의 승려를 찾아 설득하고 민간을 순회, 설교하여 종파간의 분쟁을 끝내게 했다. 958년(광종 9)에는 시관(試官)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했다. 법계(法階)는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에 이르렀다. 한때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詞岬寺)에 있었으며, 963년(광종 14) 왕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에서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그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는 불교 문학의 일대 결정(結晶)으로서 혁련정(赫蓮挺)이 지은 <균여전>에 수록되어 있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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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 고려 초기의 고승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11수.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십종원왕(十種願往)에 의해 지은 작품. 노래는 모두 향찰로 적혀 있으며, 형식은 10구체, 원래 '보현'의 원명 범음(梵音)은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 Samantabhadra)이며, '보'는 덕리주편(德利周編), '현'은 인자혜오(仁慈惠悟)의 뜻을 가졌고, 보현은 보살의 이름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釋迦)를 모시고 그 옆에 있음. 흰코끼리를 타고 부처의 오른쪽에 있으며, 연명의 덕이 있기 때문에 '연명보살'이라고도 함. <보현십원가> 11수는 모두 혁련정이 지은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 균여전> 제7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 실려 있음. 그 11수의 이름을 들면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등이다.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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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대사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 중의 하나. 10구체의 향가로 여러 부처님께 예배 드리는 노래이다.

"心未筆留 慕呂白乎隱 佛體前衣 拜內乎隱身萬隱 法界 毛叱所只至去良 塵塵馬洛佛體叱刹亦 刹刹每如邀里白乎隱 法界滿賜隱佛體 九世盡良禮爲白齊 歎日身語意業務疲厭 此良夫沙毛叱等耶" (梁柱東 <古歌硏究>)

"以心爲筆盡(晝)空王 瞻拜唯應遍十方 一一塵塵諸佛國 重重刹刹衆尊堂 見聞自覺多生遠 禮敬寧辭浩劫長 身體語言兼意業 總无疲厭此爲常."(<균여전> 번역가)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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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중의 둘째번 노래. 문장은 향찰문으로 형식은 10구체. 여래를 칭찬하는 노래라는 뜻. 가사는 다음과 같음.

"今日部伊冬衣 南无佛也白孫舌良衣 無盡辯才叱海等 一念惡中涌出去良 塵塵虛物叱邀呂白乎隱 功德叱身乙對爲白惡只 際于萬隱德海朕 間王冬留讚伊白制 隔句 必只一毛叱德置 毛等盡良白乎隱乃兮." .

"遍於佛界聲丹衷 一唱无讚梵雄 辯海庶生三寸抄 言界希涌雨唇中 稱揚覺帝塵沙化 頌詠醫王刹上風 縱未談窮一毛德 此心直待盡虛空"(<균여전> 번역가).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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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의 셋째번 노래. 그 형식은 10구체이며 가사는 다음과 같다.(백과사전 22권 참고)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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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 중의 하나. 10구체 향가로 내용은 업장을 참회한 노래임. 문장은 향찰문, 한역가와 같이 <균여전>에 수록되어 전함.

"顚倒逸耶 菩提向焉道之迷派 造將來臥乎隱惡寸隱 法界餘音玉只出隱伊音叱如支 惡寸習落臥乎隱 三業 淨戒叱主留卜以支乃遣只 今日部頓部叱懺悔 十方叱佛體閼遣只賜立 落句 衆生界盡我懺盡來際永良造物捨齊."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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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의 다섯째 가요. 10구체의 향가로 부처의 공덕을

따라서 즐기는 노래. <균여전>에 실려 전함. (백과사전 22권 참고)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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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십원가> 중의 하나. 10구체의 향가로 문장은 향찰문. 법륜을 줄거리로 청하는 노래. 가사

― (백과사전 22권 참고)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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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십원가> 중의 하나. 10구체의 향가로 문장은 향찰문. 부처가 세상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는 노래란 뜻. 가사 ― (백과사전 22권 참고)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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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의 하나. 10구체의 향가. 언제나 부처를 따라 배우는 노래란 뜻.

(백과사전 22권 참고)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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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의 하나. 10구체 형식의 향가.

"覺樹王焉 迷火隱乙根中沙音賜焉逸良 大悲叱水留潤良只 不冬萎玉內乎留等耶 法界居得丘物叱 丘物叱 爲乙吾置同生同死 念念相續无間斷 佛體爲尸如敬叱等耶 打心 衆生安爲飛等 佛體頓叱善賜以留也."(백과사전 22권 참고)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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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의 열 번째 노래. 10구체 형식의 향가. 일체 중생에게 자기가 닦은 선업을 돌려주는 노래란 뜻.

"皆吾衣修孫 一切善陵頓部叱廻良只 衆生叱海惡中迷反群无 史悟內去齊 佛體叱海等成留焉日尸恨 懺爲如乎仁惡寸業置 法性叱宅阿叱寶良 舊留然叱爲事置耶 病吟 禮爲白孫隱佛體刀 吾衣身伊波人有叱下呂."-(백과사전 22권 참고)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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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십원가>의 하나. 10구체 형식의 향가로 문장은 향찰문.

"生階盡尸等隱吾衣願眞叱日置仁伊而也 衆生叱邊衣毛 際毛冬留願海伊過 此如趣可伊羅行根 向乎仁所留善陵道也 伊波普賢行願 又都佛體叱事伊置耶 阿耶 普賢叱心音阿于波 伊留叱餘音良他事捨齊."

"盡衆生界以爲期 生界无窮志豈移 師意要驚迷子夢 法歌能代願王詞 將除妄境須吟誦 欲返眞源莫厭疲 相續一心無間 斷大堪隨學普賢慈"(<균여전> 번역가).

혁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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赫連挺

고려 문종 때의 학자. 1075년(문종 29) 진사(進士)로서 광종 때의 고승 균여의 전기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 균여전>을 썼다. 1100년(숙종 5)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1105년(예종 즉위) 장락전 학사·판제학원사(長樂殿學士·判諸學院事)가 됨.

균여전(均如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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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름은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 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고려 초기의 중 균여(均如, 923-973)의 일대기를 적은 전기. 고려 문종 29년(1075)에 균여의 문도(門徒)들이 혁련정(赫連挺)에게 제공한 자료에 의하여 찬술(撰述)했다. ①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 ② 출가청익분(出家請益分) ③ 자매제현분(姉妹齊賢分) ④ 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 ⑤ 해석제장분(解釋諸章分) ⑥ 감통신이분(感通神異分) ⑦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 ⑧ 역가현덕분(譯歌現德分) ⑨ 감응강마분(感應降魔分) ⑩ 변역생사분(變易生死分) 등 10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7 가행화세분에는 균여가 보현십원(普賢十願)에 의하여 지은 향가 11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희귀한 향가가 실려 있는 점에서 <삼국유사>와 더불어 고대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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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然 (1206-1289)

고려의 중이며 학자.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일연은 자(字)이다. 고려 희종 2년에 태어나 충렬왕 15년에 세상을 떠남.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에 의하여 중이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1261년(원종 2) 왕의 부름으로 상경,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었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통을 계승, 1268년(원종 9) 조지(朝旨)를 받고 운해사(雲海寺)에서 선교의 대덕(大德) 1백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개최,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 주지에 취임, 1281년 왕에게 법설을 강조했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의 호를 받고, 이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서 고향에 돌아갔다. 다음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백경(百頃)을 받아 경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했고 궁궐에 들어가서 구산 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고대의 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하고, 특히 향가를 비롯한 불교 관계 기사를 수록,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문학과 역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된다. 이 밖에 <조정사원(祖庭事苑)>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을 지었다. 시호는 보각(普覺).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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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유사를 모아 고려 충렬왕 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지은 책. 전 5권 2책. 제1은 왕력 기이(王歷紀異), 제2는 문호왕(文虎王) 내지 가락국기(駕洛國記), 제3은 흥법탑상(興法塔像), 제4는 의해(義解), 제5는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왕력에서 삼국과 가락국의 왕대와 연표를 싣고, 기이(紀異)에서는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등과 신라 최후의 왕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및 백제·후백제·가락국에 관계되는 역사 등 62편의 글을 싣고, 흥법(興法)에서는 37편의 글로 신라를 중심으로 불교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의해(義解)에서는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설화 13편을 수록했고, 신주(神呪)에서는 밀교(密敎)의 승려들에 대한 행적 3편을 싣고, 감통(感通)에서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자들의 설화를 실었으며, 피은(避隱)에서는 깊은 학문과 엄격한 도덕률을 지니고 있던 고승들의 이적(異蹟)에 대한 10편의 설화를 싣고, 효선(孝善)에서는 뛰어나게 효행을 한 5사람의 이야기를 수록했다. 특히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향찰문(鄕札文)으로 쓰인 향가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국어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되어 준다. 현재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보이지 않고, 중종 7년(1512)에 당시의 경주 부사 이계복에 의해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현재로는 최고본이며, 활자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08년에 된 도쿄 문과대학 사지총서본(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本)이고, 그 뒤 1921년에 교토 제대 문학부총서(京都帝大文學部叢書) 제6으로 정덕본을 영인했다. 이 밖에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계명구락부본(啓明俱樂部本)·삼중당본(三中堂本) 등과 이병도(李丙燾)의 역주본(譯註本)이 있다.

서경별곡(西京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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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의 속요.작자와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가요로서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 서경(西京=지금의 평양) 지방에서 불려진 노래인 듯함. 내용은 사나이와 헤어지는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것. 남녀 사이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노래하지 않고, 은근한 맛을 보여 엄격한 유자(儒者)들 사이에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논의되기는 했으나 고려가요 중 걸작의 하나.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되어 전하는데 그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西京이 아즐가 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닷곤대 아즐가 닷곤대 쇼셩경 고외마른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여해므론 아즐가 여해므론 질삼뵈 바리시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괴시란대 아즐가 괴시란대 우러곰 좃니노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대동강곡(大東江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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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의 가요.지은이와 연대는 미상. 내용은 <고려사> 악지(樂志)에 의하면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편안해졌으므로, 이를 기려 대동강을 중국 황하(黃河)에 비유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

한송정(寒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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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가요.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 가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 악지에 다음과 같은 삽화가 실려 있을 뿐이다. 일찍이 이 노래가 거문고 밑바닥에 적혀 중국 강남(江南) 땅까지 흘러간 일이 있는데, 그 곳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궁금히 생각하고 있다가, 고려 광종 때 그 곳에 사신으로 간 장진공(張晋公)이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한시로 풀이했다 한다.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이는 조선 영조 때 김수장(金壽長)이 엮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실린 작자 미상의 시조,

"한숑뎡 달 밝은 밤의 경포대예 물결 잔제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 하건마난

엇더타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아니 오나니"의 원시(原詩)이라 추측된다.

현화사비음기(玄化寺碑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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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대찰(大刹) 현화사에 고려 제8대 현종이 거동하여 향가 12수를 군신과 더불어 현판(懸板)에 새겼다는 비문(碑文). 그러나 가사는 전하지 않으며, 기록이 <금석총람(金石總覽)> 하권에 보일 뿐이다.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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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 (1079-1122)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 숙종의 태자. 1100년(숙종 5) 왕태자로 책봉, 즉위 후 1107년 윤관에게 여진을 토벌케 하고, 다음해 다시 윤관에게 9성(城)을 쌓게 했으나 1109년 9성을 여진에게 반환했다. 1119년 학교를 세우고, 육경(六經)을 강론케 하여 학자와 문신을 배출시켜 유학(儒學)을 크게 일어나게 했다. 1120년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김낙(金樂), 신숭겸(申崇謙) 두 공신을 추도하여 향가 계열의 여요(麗謠) <도이장가>를 지었다. 이 밖에 <벌곡조>와 단가 2수를 지었다 한다. 시호는 문효(文孝), 능은 유릉(裕陵=開城)에 있다.

벌곡조(伐谷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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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가요.고려 제16대 예종이 지은 것으로 왕이 자기가 베푼 정사(政事)의 잘잘못을 백성한테 들으려고 지어 부른 노래라 함. 학자에 따라 고려 때 가요 <유구곡(維鳩曲=속칭 비로기)>이 <벌곡조>가 아닌가 보고 있음.

도이장가(悼二將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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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계열의 고려가요로 형식은 8구체. 고려 예종이 재위 15년(1120) 10월 서경에서 베푼 팔관회에 참석하여 지은 노래. 내용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과 김낙의 두 장수를 추도한 노래로 향찰문으로 표기되어 있음.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문집인 <장절공 유사(壯節公遺事)> 속에 실려 전해옴.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主己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望彌阿里剌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백과사전 22권 참고)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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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대 미상)

고려 때 문인.호는 과정(瓜亭). 본관은 동래(東萊). 벼슬이 내시랑중(內侍郞中)에 이름. 공예대후(恭睿大后:仁宗妃)의 여동생의 남편으로서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1151년(의종 5) 정함, 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고향 동래로 귀양을 갈 때 의종으로부터 곧 불러 올리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연군(戀君)의 정을 노래로 읊었다. 이를 <악학궤범>에서는 <삼진작>이라 했고, 후세 사람들은 <정과정(鄭瓜亭)>이라 이름 지었다. 1170년(명종 즉위) 용서를 받고 다시 복직되었다. 문집으로 <과정잡서(瓜亭雜書)>가 있고 묵죽화(墨竹畵)에 능했다.

정과정(鄭瓜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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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계통의 고려가요. 형식은 10구체.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가 지음. 국어로 기사된 가사 가운데 작가가 알려진 유일한 작품으로 <악학궤범>에 실려 전함.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풍류(風流) 재예(才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궁중을 중심으로 한 외척(外戚) 권신(權臣)들의 정쟁(政爭)으로 조정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의 고향인 동래(東萊)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 때 의종의 말이 오래지 않아 곧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오랫동안 아무 기별이 없자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는 것. 이 노래의 내용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산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었으므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노래(忠臣戀主之詞)'라 하여 궁중음악으로 불렸다. 이 노래는 <동국통감>에는 <정과정>이라 하였고, <악학궤범>에는 <삼진작(三眞勺)>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이 삼진작이란 이름은 정과정에 붙인 악곡명이고, 가사명은 아니다. 즉 <삼진작>은 가사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내 님믈 그자므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숫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말힛마러신뎌

살읏브뎌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전기의 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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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期-漢文學

고려시대는 한문학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한문학의 융성을 보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한 후로 정치에 입신(立身)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익혀야 했기 때문에 이를 애써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한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고, 특히 산문보다는 시가(詩歌)가 발달하여 한문·당시(唐詩)로써 종풍(宗風)을 삼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사부(詞賦)는 정치적 입신은 물론 복잡한 외교정책에 이바지한 점이 많았다. 또 예종(睿宗, 1079-1122) 4년(1109)에는 국학(國學)에 칠재(七齋)가 설치되었고, 문종(文宗, 1019-1083) 때에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이름높은 최충(崔沖)에 의해 사학(私學)의 권위가 국학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학풍의 진흥과 더불어 한문학도 시가를 중심으로 고려문학의 위치에 차츰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가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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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歌-發達

고려 전기의 시가는 박인량(朴寅亮), 김황원(金黃元), 정지상(鄭知常) 등의 삼가(三家)로 대표된다. 이제 그 세 사람의 작가를 중심으로 동학(同學) 혹은 선후배의 이름있는 여러 작가와 작품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최승로(崔承老)는 일찍이 <응구언서(應求言書)>를 올려서 시무(時務)를 논한 바 있는데 그는 산문에도 능하여 <금중잡저시고(禁中雜著詩藁)>가 있었다 한다. 해동공자로 이름높은 최충은 대교 육가인 동시에 시율(詩律)에서도 석학(碩學)의 풍모를 나타냈고, 박인량은 최치원 이후의 제일 명가(名家)이다. 윤언이는 일찍이 정지상(鄭知常), 권적(權適)과 더불어 시정(時政)을 논하다가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김부식(金富軾)과 불화(不和)하여 벼슬을 버렸다. 만년에는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스스로 금강거사(金剛居士)라 일컬을 정도였다.

김황원(金黃元)의 시율은 정지상 이전의 당대 제일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회자(膾炙)되었던 <장성대야(長城大野)>의 명구(名句)를 남겼다. 김황원과 가장 막역한 시인이었던 곽여(郭輿)는 문학으로서 예종에게 총애를 받은 바 있는 일대의 풍류사백(風流詞伯)이었다. 정지상은 당대의 대가로서 <악부> <송우인(送友人)> 등 많은 명시를 남겼다. 김부식은 그의 아우 김부의(金富儀)와 더불어 문학에 있어 당대의 백미(白眉)를 이루었고, 특히 예종은 문과(文科)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국학에 칠재(七齋)를 두는 한편 문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설화 문학의 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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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話文學-進展

고려의 산문은 비록 그 수준이 시가에 미칠 수 없다 해도, 그리 한산하지만은 않다. 당시 인쇄술의 침체와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그 전적(典籍)이 전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며, 몇 개의 잡록(雜錄)과 사전(史傳) 등에 산문 내지 설화문학의 유산을 전하고 있다. 박인량과 김근 공저인 <소화집(小華集)>을 비롯해 박인량의 <고금록(古今錄)> <수이전(殊異傳)>, 김인존(金仁存), 최선(崔璿) 등의 공저인 <해동비록(海東秘錄)>,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서의 <잡록(雜錄)> 등이 이 시대 산문문학을 대변하고 있다.

최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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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老 (927-989)

고려 때의 문신.본관은 경주(慶州). 12세 때 왕 앞에서 <논어(論語)>를 암송하여 경탄을 받았고, 원봉선(元鳳省) 학사가 되어 한문 연구에 전심했다. 982년(성종 1) 왕명으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 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 관제의 확정, 관복(官服)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偶像)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국가 전반적인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여 고려 왕조의 기초를 닦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오르고 청하후(靖河候)에 봉해졌다. 태사·대광(太師大匡)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산문은 물론 운문에도 능하여 <금중잡저시고(禁中雜著詩藁)>를 남겼다 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동지신죽(東池新竹)> <대인기원(大人寄遠)> 등의 일절(一絶)은 그의 대표작이다.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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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1068)

고려의 문신이며 학자.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보(月圃). 본관은 해주(海州).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壯元), 1013년 국사 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1050년 개부의 동삼사·수대부(開府儀同三司·守大傅)로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이 되었으며 서북면 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경계를 강화하도록 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 그 뒤에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 내는 데 힘썼다. 당시 다른 유학자들이 그의 사숙을 본떠 11개의 사숙이 개설되어 그의 사숙과 함께 12공도(公徒)라 불렸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일컬음을 받았으며, 당시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 시조 2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에 전함.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일(白日)은 서산(西山)에 지고, 황하(黃河)는 동해(東海)로 들고, 고래(古來) 영웅은 북망(北邙)으로 든닷 말가. 두워라 물유성쇠(物有盛衰)니 한(恨)할 줄이 잇시랴."

박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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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亮 ( ? - 1096)

고려 문종의 문장가.자는 대천(代天), 호는 소화(小華), 본관은 죽산(竹山) 또는 평산(平山)이라고도 함. 문종 때 문과에 급제. 1075년(문종 29)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압록강을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 요나라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한다. 후에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어 1080년(문종 34) 호부 상서 유홍(柳洪), 김근(金覲)의 등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시문(詩文)으로 크게 격찬을 받은 뒤 김근의 글을 합친 <소화집(小華集)>을 중국에서 발간했다. 귀국 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내고, 숙종 때 우복야·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문장이 아름답고 뛰어나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문서를 담당했고,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음.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소화집(小華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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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량(朴寅亮)과 김근(金覲)이 중국에서 발간한 문집. 1080년(문종 34년) 예부 시랑 박인량이 호부 상서 유홍(柳洪), 김근 등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중국인에 의해 이 책이 발간됨.

고금록(古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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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박인량이 지은 사서(史書). 10권으로 이루어졌다 하나 지금 전하지 않음.

수이전(殊異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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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선종 때 사람 박인량이 지었다는 설화 문학집. 우리나라 최초의 설화집으로 책은 전하지 않고 이 책에 실렸던 이야기 몇 편이 흩어져 전함. 곧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과 <아도전(阿道傳)>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심화요탑(心火繞塔)> <죽통미녀(竹筒美女)> <노옹화구(老翁化狗)> <호원(虎願)> <수삽석남(首揷石枏)> <선녀홍대(仙女紅袋)>가, <삼국유사>에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가,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보개(寶開)> <신라 고사(新羅古事)>가 각각 전한다. <수이전>의 작자에 대해서는 신라 말의 최치원, 또는 연대 미상의 김척명(金陟明)이라는 이설도 있음.

김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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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黃元 (1045-1117)

고려 때의 시인이며 학자. 자는 천민(天民), 본관은

광양(光陽).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고, 고시(古詩)를 짓는 데 이름을 날려 당대의 제일인자로 알려졌다. 한림원(翰林院)에 있을 때 요나라의 사신을 시(詩)로써 맞아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을 당한 북부 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 시랑(禮部侍郞)·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찍이 평양 부벽루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보고 시를 짓다가 두 줄만 짓고 나머지는 표현하지 못해서 울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다. "長城-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긴 성 한 쪽을 끼고 넓은 물이 질펀하게 흘러가고, 너른 벌 동쪽 가엔, 점점이 산이더라)"는 그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는 문장에서 정지상(鄭知常) 이전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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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輿 (1058-1130)

고려 때의 시인. 자는 몽득(夢得), 본관은 청주(淸州). 일찍이 문과에 급제, 내시부(內侍部)에 속했다가 함문 지후(閤門祉侯)를 거쳐 홍주(洪州)를 다스리고, 예부원 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에 돌아가 시작(詩作)에 골몰했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자일 때 사귄 정으로 궁중에 불리어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談論)에 응했다. 뒤에 물러날 때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若頭山)에 산재(山齋)를 짓게 하고, 허정재(虛靜齋)라는 편액(扁額)을 하사, 왕이 산책을 나오면 함께 시를 읊고 즐겼다 함. 죽은 뒤 왕이 정지상에게 <산재기(山齋記)>를 쓰게 하고, 비(碑)를 세웠다. 다음 시조 2수가 그의 작이라 하여 전해오나 믿을 수는 없다.

"오장원(五丈原) 추야월에 어엿블손 제갈 무후.

갈충보국(喝忠報國)다가 장성이 떠러지니.

지금히 양표충언(兩表忠言)을 못내 슬허 하노라."

"남양(南陽)에 궁경(躬耕)함은 이윤(伊尹)의 경륜(經綸)이요.

삼고초려(三顧草廬)함은 태공의 왕좌재(王佐才)라.

남대후 정대 인물(正大人物)은 무후(武侯)런가 하노라."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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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知常 ( ? -1135)

고려 예종·인종 때의 문신이며 시인. 본관은 서경(西京).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1114년(예종 9) 문과에 급제.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윤언이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설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등의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믿어 한때 묘청, 백수한 등과 함께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을 서경에 옮길 것과 금나라를 정벌하고 고려 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했다. 1130년 시인 곽여가 죽자 왕명으로 <산재기>를 지었고,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혐의로 백수한과 함께 김부식 일파에게 몰리어 피살됨. 그는 고려 한문학상에 있어 문호(文豪)이며 사상가로 특히 시에 뛰어나 고려 12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역학(易學)과 불전(佛典)에 정통하고, 그림·글씨에 능했으며 노장철학(老莊哲學)에도 조예가 깊다. 그의 대표적인 한시 <송우인(送友人)>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비 멎은 긴 둑에 우거진 풀빛. 슬픈 노래 남포로 임은 가신다. 강물은 어느 제 다해진다니. 창파를 보태주는 이별의 눈물)."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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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富軾 (1075-1151)

고려 문종·의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본관은 경주(慶州). 일찍이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직한림(直翰林)·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2년(인종 즉위) 박승중(朴昇中),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 1126년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평장사(平章事)·수사공(守司空)에 이르렀다. 1134년(인종 12) 묘청이 도참설(圖讖說)로써 왕을 설득시켜 서경(西京)에 천도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이듬해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로서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지상, 백수한, 김안(金安) 등을 반도(叛徒)들과의 내통혐의로 몰아 죽이고 난을 평정시켰다. 1138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의 벼슬을 겸직, 1142년에 벼슬을 물러나자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이 되었다. 1145년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끝냈고, 이듬해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했다. 특히 그는 사대주의의 신봉자로 그의 형 부일(富佾, 1071-1132)과 아우 부의(富儀, ? -1136)와 함께 한문학에 뛰어났다. 문집 20권이 있으나 전하지 않으며, 중서령(中書令)에 추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列傳)은 우리나라 고대 전기문학으로서 가치가 크다. 그는 또 시문(詩文)에 대한 질투심이 몹시 강해 정지상의 <천색유리(天色琉璃)>의 경구(警句)를 빼앗으려다 이루지 못하고 종말에는 정지상을 반역시인으로 몰아 죽이기까지에 이르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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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엮은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기록한 역사책. 그 체제는 중국의 정사체(正史體) 또는 기전체(紀傳體)를 취한 것임. 내용은 신라본기(新羅本紀) 12권,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권, 백제본기(百濟本紀) 6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 계 50권으로 되어 있다. 참고 문헌으로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등 우리나라의 옛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의 사료를 참고하여 엮었다. 이 책의 지리지(地理志)는 옛말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 열전은 고대문학의 윤곽을 알아보는 데 기여하였다. 유명한 설총의 설화 <화왕계>도 여기에 전함. <삼국유사>와 더불어 통일신라 시대까지의 한국 고대사와 문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 되어 줌. 유교적 사대주의의 입장에서 편찬하여 귀중한 사료를 싣지 않은 것이 흠이다. 이 책은 고려 때의 간행본은 없고, 조선 태조 3년(1394)에 경주부사 김거두(金居斗)에 의해 개간되었으나 역시 전하지 않고, 중종 7년(1512)에 이계복(李繼福)이 개간한 것이 현재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장되어 있고, 이것이 1913년 도쿄 대학에서 영인되었다.

잡록(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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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문인 정서(鄭敍)가 지었다는 산문. 지금은 전하지 않음.

해동비록(海東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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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 1106년(예종 1)에 김인존(金仁存), 최선(崔璿), 이재(李載), 이덕우(李德羽), 박승중(朴昇中) 등이 예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 당시까지 전해 오던 여러 음양지리서를 정리하여 한권으로 만들어 예종에게 증정. 예종이 <해동비록>이라 이름지은 것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