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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국기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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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공화제 수 도:카이로(Cairo) 인 구:6,953만 6,644명(2001) 면 적:100만 1,450만㎢ 소 득:1인당 GDP 4,000달러2002) 공 용 어 :아랍어 화폐단위 :이집트파운드(£E) 주생산물 :감자 / 강철 / 석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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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자연
편집Egypt-自然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수에즈 지협(Suez地峽)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 대륙과 접하고, 북쪽은 지중해(地中海), 동쪽은 홍해(紅海)에 면하고 있다.국토의 95%가 사막인데 북부와 중부에 리비아 사막이 펼쳐져 있다. 최저 해면하 134m의 카타라 저지(低地)와 거기에서 칼가를 통과하여 아스완에까지 이르는 대상(帶狀) 저지를 제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표고 200m 이상의 대지 또는 산지이다. 시나이 반도에서 홍해 연안에 이르는 산지는 아프리카 지구대(地溝帶)에 연해 있다. 북서부에는 리비아 고원, 남서부에는 케빌 고원이 있다.
이집트의 기후
편집국토의 전역이 사막기후권에 들어가 있어 나일강 계곡이나 저지대 이외의 곳에서는 자연림을 볼 수 없다. 강우량은 매우 적어 카이로가 25㎜, 아스완이 2㎜이고, 시와처럼 10년에 한번 정도 비가 오는 곳도 있다. 우기는 북부에서는 동계, 남부에서는 하계이다.
나일강
편집Nile江
이집트는 나일강이 가져다 준 선물이란 헤로도투스의 말이 있다. 이 강은 전장(全長) 6,700㎞ 로 세계에서 첫번째로 길다. 고대부터 이집트의 주민과 문명을 떠받들어 온 강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하는 청(靑)나일과 빅토리아호(湖)에 원천을 두는 백(白)나일이 하르툼에서 합류하고, 다시 그 하류 320㎞에서 흑(黑)나일이라고 불리는 아트바라강이 합류하고 있다. 수량(水量)은 청나일이 가장 많은데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의 우기인 8월부터 10월까지의 시기가 증수기가 된다. 하구에서부터 와디 할피까지 항행할 수 있다.
나일 델타
편집Nile Delta
나일 강에 형성된 전형적인 삼각주 위를 로제타 강과 돔야트강의 지류로 연결되는 운하가 망상(網狀)으로 펼쳐져 있어 2만4,000㎢ 의 비옥한 농경지를 만들고 있다. 이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면화의 산지이다. 또한 델타는 곡창지대를 이루어 인구조밀지가 된다.
캄신
편집Khamsin
봄부터 여름까지 지중해를 저기압이 동진하는데, 여기에 이끌려서 사막에서 불어나오는 모래풍인 열풍을 말한다.
이집트의 역사
편집-歷史
홍적세(洪積世)에 서방(西方)의 대지(臺地) 위에서 살던 사람들이 충적세(沖積世)가 되어 건조화가 시작되자 나일 하곡에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토지생산성이 높은 나일의 하곡 지방에서 인류 최고의 문명이 개화하고, 유사시대에 들어와서는 30개의 왕조가 흥망했다.기원전 321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이 있었고, 그후에는 그리스인, 러시아인의 침입이 있었다. 7세기에는 아랍(Arab)인이 침입하는 등 외침(外侵)의 역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아랍인의 오랜 지배로 이집트는 아랍화(化)되어 이슬람 문화권에 끌려들어갔다. 19세기말 이집트(Egypt)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을 때 유럽군이 침입했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이 들어왔고, 이어 프랑스군과 대항하는 영국 세력이 들어와 터키로부터 독립한 마호메트 알리 왕조를 성립시켰다.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이집트의 전략적, 경제적 중요성이 더해져 1914년에는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차대전중 영국은 형식만의 독립을 인정했으나 실질적인 점령상태는 계속되었다.2차대전 후의 팔레스타인 전쟁의 패인은 왕과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국민에게 절감시켜, 끝내 1975년 7월 23일의 자유장교단(自由將校團)의 쿠데타를 유발시켰다. 이것이 이집트 혁명의 시초였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 정권이 발족하면서 나세르(Nasser)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나세르 정권하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영국군의 철수, 토지개혁 등이 단행되었다. 1958년 시리아와의 합병으로 나세르 아랍권 통일 구상의 첫단계인 통일아랍공화국이 발족했으나 3년 반 후 시리아는 분리했다.1967년 이스라엘과의 3차 중동전에서 패해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를 점령당했다. 1970년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다트는 4차 중동전에서 승리한 후, 대이스라엘 정책을 수정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82년에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계승한 무라바크 정권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받았다.
이집트의 주민
편집-住民
이집트인(人)은 햄인종(Ham人種) 중의 동부 햄인종에 속한다. 이 인종은 처음 지중해인종과 흑인종의 혼혈로 형성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고대 왕조 이후 페르시아·그리스·로마·아랍·터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조금씩 변화해 온 이 인종은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피부색이 검어진다.처음에는 기독교도였으나 7세기 이후 아랍인과 터키인의 지배를 받는 사이에 이슬람화되어 기독교도는 6%에 불과하고 94%가 이슬람 교도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할 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 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이 병존하고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한다. 아즈할·카이로 등 각 대학이 있어 아랍세계의 지적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집트의 정치
편집-政治
정체는 공화정이고 대통령 중심제로 80년 5월 22일의 국민투표에서 승인된 개정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 의회는 단원제 인민의회로 정원 454명, 임기는 5년이다. 경제 정책 실패로 내각이 총사퇴함에 따라 1986년 아테프 세드키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성립했다.1987년 4월 인민회의 선거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 민주당(NDP)이 대통령 지명 10석을 제외하고 448석 중 338석을 획득하여 압승했다. 10월 13일 부분 개각이 있었으나 주요 각료들은 유임됐고 해외 협력부를 신설했다. 1987년 4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 349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이집트의 외교는 1967년 중동전 참패 후 대미 단교에 이어 친소 외교 정책을 추구했으나 다시 독자 노선을 취했다. 1974년 대미 복교와 더불어 1976년 대소 우호조약 폐기로 친미 정책으로 선회했다. 1984년 7월 대소 외교를 재개하고 대사를 교환했다. 1979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1980년 대사를 교환, 대 이스라엘 관계를 정성화했다. 대 아랍 관계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 이후 크게 악화되어 1979년 오만·소말리아·수단을 제외한 전 아랍국들이 대 이집트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1984년 요르단이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 지부티도 복교했다.
이집트의 산업
편집-産業
주요산업인 농업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공업으로는 석유·철강석 등이 산출된다.1959년에 국가계획 최고회의가 설치되어 제1차 5개년 계획과 긴급 3개년 계획을 입안하여 공업화와 개발에 의한 국민소득의 증대를 도모했으나 중동전쟁 같은 사건으로 차질이 생겼다. 1992∼1993년도에는 규제완화, 토지개혁, 농산물 수출추진 등 제3차 5개년 경제사회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했다.이집트의 농경지는 대체로 나일 하곡·델타·오아시스 등지에 있다. 경지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면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밀·보리·쌀·콩·과실·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면화는 섬유가 긴 종류가 많고 품질은 최고급이며 가장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총수출의 60%를 차지한다.토지개혁의 결과 대지주의 수는 줄었으나 경지 5페단 미만의 영세농민이 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부는 이들의 협동화를 추진시키고 있다.인구의 높은 증가율로 인한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하여, 농지 조성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심층지하수를 끌어올려 사막을 관개(灌漑)하는 방식과 유수(流水)의 고도이용에 의한 토지개간 방식이 취해지고 있다.이집트의 공업은 혁명 전에도 섬유공업, 식품공업 등이 있었으나 혁명 후에는 공업화 정책으로 철강, 정유, 기계, 자동차조립, 화학, 건재, 제지 등의 공업이 새로 일어났다.이집트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자원은 시나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유전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다. 대부분은 국영정유공장에서 정제되는데 수에즈항을 중심으로 정유공업이 발달했다. 지금도 새로운 석유자원의 탐사가 진행되고 있다.석유 외에 철강·인광·망간 등의 지하자원이 있다. 공업화 추진의 원동력이 되는 전력생산은 아스완댐과 아스완하이댐의 건설에 따라 크게 증가하였다. 북부의 카타라 저지(低地)에서는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여 낙차에 의한 대규모 발전이 계획되고 있다.
아스완하이댐
편집Aswan high dam
1902년, 고도 아스완 남방에 나일강의 유수량 조절과 관개 목적으로 영국인이 건설한 아스완댐 상류 7㎞ 에 있는 댐으로 구소련으로부터의 차관과 기술원조로 1960년 착공하여 제1기 공사는 1964년 5월에 완성, 제2기 공사는 아부심벨 신전 등의 이전 작업 때문에 진행이 늦어져 1971년에 완성되었다. 만수시에 수면의 높이 111m, 저수량 1,570억㎥ 의 어스(earth) 및 록필식 댐(rock fill dam)으로 제방 위는 너비 40 m 의 도로가 있다. 이 댐으로 12만 페단의 농지가 조성되고 연간 100억㎾
의 전력공급으로 새로운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거대한 인구를 흡수하게 되었으며 이집트 공업의 젖줄이 되었다.
이집트의 무역
편집-貿易
이집트는 급속한 공업화의 추진 때문에 공업용 자재와 원료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심각한 외화위기가 생겼다. 한편, 주요 수출품인 면화와 쌀의 수출이 부진한 데다가 1974년 10월 전쟁의 막대한 전비와 구소련의 차관(약 60억 달러)상환 압력으로 사다트 대통령은 경제파탄에 처하게 되어 구소련과의 우호조약을 폐기하면서 서방측의 차관으로 활로를 찾았던 적도 있고, 1984년 대소외교를 재개했다. 1993년 수출 35억 달러, 수입 105억 달러를 기록했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와 석유제품, 원면, 면사와 면제품이며,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다. 주요 수출국은 이탈리아·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이며, 수입국은 미국·독일이다.
이집트의 사회
편집-社會
피라미드와 신전으로 대표되는 수천년의 문화적 전통과 지중해의 여러 문화, 이슬람, 서유럽 문화 속에서 이집트 국민은 붙임성이 있으며 인정미가 넘치고 온화하지만 이기적이며 자기 주장이 강하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며 결혼에 있어서도 상대자와 혼인자금에 대한 교섭을 갖는 등 여성의 지위가 낮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이런 현상과는 달리 실질적 권한은 아내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문화시설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도시에는 잘 정비되어 있다. 카이로에는 전 인구의 8분의 1이 모여 주택난이 가중되고 있다. 계층간 소득격차도 매우 심해 실업자가 많다. 일자리를 찾아 주변의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으로 나가는 기술 노동자 수도 꽤 많다. 초등학교는 무상이고 졸업시험을 거쳐 중학교나 실업학교로 진학한다.
이집트의 교통·도시
편집-交通·都市
소규모(小規模)의 것을 제외하고 교통기관은 전부 국영이다. 자동차교통의 발달에 따라 도로도 정비되고 있으며 철도는 1859년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 철도를 효시로, 카이로를 중심으로 해서 발달해 왔다. 총연장은 광궤(廣軌) 7,102㎞, 협궤(狹軌) 1,400㎞이다. 카이로 공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국제항공의 요충이 되고 있다. 국도의 총연장은 2만 6,000㎞이며, 나일강은 수단에 이르는 내륙수로 교통로로서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주로 한다.
수에즈 운하
편집Suez 運河
프랑스인 레셉스가 1869년에 완성한 운하. 전장 162㎞. 홍해쪽에 수에즈, 지중해쪽에 포트사이드가 있다. 완성당시에는 폭 22m, 수심 8m 였으나, 그후 개축되어 1962년에는 5만 5,000t 급의 선박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1979년까지 15만t 급의 선박이 통과할 있도록 하는 확장공사가 계획되어 1976년 2월, 1단계가 공사가 착공되었다.
카이로
편집Cairo10세기에 파티마 왕조의 할 알 루미 장군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알 카히라(Al Kahira:승려)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이로이다. 시(市)는 나일 강을 가운데 끼고 양쪽으로 펼쳐지는데, 한쪽은 아랍풍의 구시가이고, 또 한쪽은 유럽풍의 신시가이다. 시내에는 카이로 국립박물관과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알 아즈할 대학 등이 있고 교외에는 피라미드(Pyramid) 군(群)이 있다. 인구 1,007만 2,000명(2000).
알렉산드리아
편집Alexandria
인구 약 338만(1991)의 도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시 건설되었다 하여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됐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이며 최대의 무역항이다. 쌀·면화 등을 수출하고, 화학·식품·섬유·조선공업이 성하다.
포트사이드
편집Port Said
수에즈 운하 북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1859년 건설된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박용 보급기지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지중해쪽 출입구로서 발전했다.
이집트의 관광명소
편집-觀光名所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을 끼고 있는 이집트는 세계문명의 선구자로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룩소르신전 등 신비스런 관광명소로 가득찬 곳이다.
아부심벨 대신전
편집아부심벨은 이집트 최남단의 관광지로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280km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이 있다. 1968년,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할 때 신전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70m를 끌어올렸다. 아부심벨 신전은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300년경에 세웠다. 자신을 위해 지은 신전으로 정면 높이 32m, 너비 38m이며 입구에 22m의 람세스 2세 조각상이 4개 있다.
룩소르 신전
편집룩소르 신전은 제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건립하고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중축하였다. 꽃이 피어 있는 파피루스와 피지 않은 파피루스 기둥이 특이하다. 높이 16m의 원주열은 주랑 측벽에 투탕카멘왕이 오페드 축제 내용을 새긴 얕은 부조와 함께 신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대탑문, 람세스 2세의 뜰, 제2탑문, 열주실 등으로 이어져 있다.
암굴 분묘군
편집나일을 굽어보는 구릉 위의 단애를 뚫어 만든 분묘군으로 39기중 12기는 벽화·부조의 장식이 있다. 제11, 12왕조 시대에 호족이 축조한 것이다. 이 분묘들 중에는 콥트 문자를 쓴 비문이 남아 있는 네테르나크트의 묘, 파피루스 수확 장이 그려진 케티의 묘, 북쪽 벽에 사냥 장면이 그려진 바케트 3세의 묘, 입구에 16면체의 기둥 2개가 있고, 남쪽에 가계도가 새겨진 크놈헤테프의 묘, 베니하산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인 레슬링 그림이 있는 아메넴헤트의 묘가 있다.
아케트아텐
편집아멘 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에서 아텐 신을 유일 절대의 신으로 정한 이크나톤에 의해 축조되었다. 경역은 남북 10㎞ 정도이고, 주위에는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중앙의 건축물들, 북쪽의 암굴 분묘들, 남쪽의 암국 분묘들이 관광거리이다. 건축물들은 왕궁, 아텐신전, 북궁전, 주거, 공방 등인데, 북궁전 이외의 것은 심하게 파손되어 벽돌 더미로 남아 있다. 분들 중 북쪽의 것은 벽화 따위로 장식되어 있는데, 푸야의 묘, 메리라 2세의묘, 아프모제의 묘, 메리라 1세의 묘, 펜투의 묘 등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4㎞ 떨어져 있는 남쪽의 분묘들은 아리의 묘, 마야의 묘, 튜튜의 묘 등이다.
하트호르 신전
편집유적의 입구에서부터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탄생전, 콥트 교회 터, 네크타네보의 탄생전, 하트호르 신전, 이시스 신전을 통틀어 하트호르 신전이라고 부른다. 먼저 보이는 탄생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탄생전이다. 안뜰을 사이에 두고 세워진 것이 하트호르 신전인데, 암소머리의 여신 하트호르에게 바친 것으로 구조는 그 시대에 세워진 신전의 전형적인 것으로 2개의 열주실에 전실과 지성소가 잇달아 있는데, 지성소를 둘러싸고 예배당, 태양신 ‘라’의 옥좌, 불의 방, 물의 방, 공물의 방 등 11개의 작은 방이 딸려 있다. 예배당에는 하트호르 여신상이 있고, 고대에는 신년의식이 여기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신전의 남쪽 벽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6세의 부조가 뚜렷이 보이고, 그 밖에 전체도, 상형문자 해독의 단서가 된 카르투시 등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룩소르 박물관
편집테베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소장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1975년에 개관했다. 진열실은 1, 2층으로 나뉘어 있고, 출토품의 연대는 5,000년 이상 지난 선왕조시대로부터 이슬람이 점령한 시대까지 약 3,000년에 이른다. 적색 화강암의 아멘호테프 3세의 두상, 하트셰프수트 여왕의 부조, 람세스 3세의 작은 오벨리스크, 힉소스와의 싸움을 기록한 카메스의 비석, 아멘호테프 4세의 벽화 등이 유명하다.
카르나크 신전
편집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 신전 북쪽 3㎞ 지점에 있고,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기원전 200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지만, 역대왕에 의해 증개축이 되풀이되어, 초기의 유구로는 제12왕조 세누세르트 1세의 성당만이 남아 있다. 현재의 신전은 신왕국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제19왕조의 창시자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로 여왕이 된 하트셰프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투트모세 3세 신전, 람세스 3세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서 안쪽의 하트셰프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네크로 폴리스
편집룩소스 서쪽, 네크로폴리스라 불리는 이곳은 시왕국시대의 영화를 상기시키는 곳으로 산 사람들의 도시 테베에 비해서, 나일강 서쪽 기슭은 죽은 자들의 도시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무덤의 수효는 몇천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 죽은 자들의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 바위뿐이고, 생명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자연환경은 3,000년 세월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다. 투탕카멘 왕의 황금마스크가 발굴된 왕가의 골짜기를 비롯하여 왕비의 골짜기, 귀족의 묘, 신전 등이 황량한 사막 속에 줄지어 있다.
왕가의 골짜기
편집기자의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 약 1,000년 뒤인 기원전 1600년 테베에서 일어난 신왕국시대의 제18왕조 이후로 기원전 1200년의 제20왕조까지 여러 왕들의 묘소로 만든 암굴분묘형식으로 고쳐졌는데, 그 이유는 내세에 부활할 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 미라도굴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왕가의 골짜기에는 투탕카멘 왕의 묘까지 62기가 확인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제18왕조 제3대 투르못 1세의 것이다.
데르 알바하리 신전
편집고대 이집트 여왕 하트셰프수트 신전이라고도 불리며, 바위산의 단애를 파낸 것 같은 모양으로 단순하면서 웅대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건축가 세넨무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3층의 테라스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테라스들을 연결한 비탈길이 잘 어울리고 있다. 테라스 안쪽 벽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첫번째 테라스에는 오벨리스크 건립의 모습, 두번째 테라스에는 여왕의 위엄과 계보, 세번째 테라스에는 후세의 투트모세 3세가 새긴 자신의 이름이 있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
편집세계 최대의 건축물로서 쿠푸왕·카프라왕·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를 말한다. 높이는 146.7m. 쿠푸왕의 것을 비롯하여 이곳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약 4500년전인 기원전 26세기경에 건조되었다. 가까이 가보면 겉에 돌을 쌓아올린 것도 드러나 보이지만, 건축할 때에는 화장석으로 겉을 마무리해서 매끄럽게 되어 있었으나, 풍화와 약탈로 인해 표면 화장석이 벗겨져서 현재 상태가 되었다. 내부는 좁고 가파른 통로를 통해 큰 회랑을 거쳐 왕의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카프라왕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143m로서 피라미드 가운데 비교적 잘 보관되어 있고, 표면의 화장석도 일부 남아 있어,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지니고 있다.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65m로 3대 피라미드 중에서는 가장 작다. 카프라왕의 것과 같은 배열의 신전, 하안신전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호루스 신전
편집기원전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착공한 후 역대의 여러 왕을 거쳐 기원전 57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오랫동안 흙속에 묻혀 있던 것을 20세기초에 프랑스 고고학회가 발굴하여 수복했는데 탑문, 주벽 등의 구조는 물론, 부조 등의 장식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당시의 신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콤옴보 신전
편집악어머리의 소베크 신과 매의 머리를 가진 하로에리스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주요부분 전부가 이중구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건축되었는데, 장식에서 호루스 신전과 비슷하다. 파손이 심한 편이나 파피루스 기둥 등이 매우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신전이다.입구가 2개인 탑문을 들어서면 안뜰인데, 주벽을 따라 세워진 16개의 열주는 대좌 부분만이 남아 있고, 정면은 제1열주실인데, 왕의 이름을 새긴 카르투시가 새겨져 있다. 그 안쪽이 제2열주실인데, 벽면에는 호루스 신과 토트 신에게서 물려 받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그려져 있으며, 전실에 3개의 방이 있는데 보존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지성소를 둘러싼 회랑도 이중구조로 되어 있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남쪽의 것이 소베크 신에게, 북쪽의 것이 하로에리스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모하메드 알리 모스크
편집모하메드 알리 모스크는 2개의 높은 첨탑과 거대한 돔이 특징이며, 다량의 석고가 건축에 쓰였기 때문에 ‘앨러배스터 모스크’라고도 부른다. 1824년에 착공, 1857년 모하메드 알리의 아들 사이드 파샤의 시대에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많은 등과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주위를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도 아름답다. 안뜰의 구석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받은 큰 시계가 놓여 있으며 이것은 모하메드 알리가 프랑스에 오벨리스크를 선물하고 답례품으로 받은 것인데, 그 오벨리스크는 지금도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