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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국기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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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공화제 수 도:예루살렘(Jerusalem) 인 구:611만 6,533명(2003) 면 적:2만 770㎢ 소 득:1인당 GDP 1만 5,500달러(2002) 공 용 어 :히브리어, 아랍어 화폐단위 :신셰켈(New Sheqel / NIS) 주생산물 :각종 과일, 면화 / 광학기기, 플라스틱류, 화학제품 / 브롬, 인산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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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자연
편집Israel-自然
남북의 연장이 약 420㎞의 협장한 나라. 국토 폭은 최대 110㎞, 최소 10㎞이다.이스라엘은 4개의 지리학적 지형으로 나누어진다. 해안평야는 지중해까지 펼쳐져 있고 대륙의 25마일(40㎞)에 달하는 비옥한 농지와 모래 해안선이 있다. 이곳에 이스라엘 국민의 반 이상이 살고 있으며 도시 중심지, 심해 항구, 산업, 농업과 관광산업이 몰려 있다.북동부에는 화산의 폭발로 형성된 골란 고원의 현무암 풍경들이 훌라계곡을 내려다보며 가파른 절벽처럼 솟아 있다. 대부분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구성된 갈릴리 언덕은 해발 166피트에서 4,000피트의 높이로 솟아 있으며, 사계절 흐르는 시내와 비교적 풍부한 강우량은 일년내내 국토를 푸르게 한다.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농경지인 이즈르엘 계곡은 키부츠와 모샤브에 의해 경작되고 있다.이스라엘 땅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네게브는 낮은 사암고지와 평야가 특징을 이루는 불모지로, 큰 협곡과 가끔 겨울비로 갑작스런 홍수를일으키는 와디가 많이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분화구와 표면이 온통 바위로 덮인 고원지역을 볼 수 있다.요르단 계곡과 아라바의 북쪽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남쪽은 반건조 지역이다. 요르단 강은 우기 때 강물이 불어나긴 하지만 보통
때는 아주 좁고 얕다. 갈릴리 호수는 골란 고원 사이에 위치하며 이스라엘의 가장 큰 담수로서 주요한 저수지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기후
편집온대에서 열대기후까지 골고루 분포한다. 겨울 우기와 여름 건기가 뚜렷하며 강우량은 북쪽과 중부지방이 많은 반면 남쪽으로 갈수록 적다. 봄과 가을의 일교차가 심하고 지역적인 날씨 차이가 심하여 산악지대에는 가끔 눈이 내리고 봄과 가을은 무더운 바람으로 기온이 높다.
갈릴리호
편집Galilee湖
남북 20㎞, 동서 13㎞, 면적 165㎢의 호수. 호면은 해면하(下) 212m. 네게브 사막의 관개용수원이 되고 있으므로 대아랍 분규의 한 쟁점이 되고 있다.
사해
편집Dead Sea
해면하 400m에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갇힌 바다로 요르단 계곡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보통 바닷물에 비하여 10배에 가까운 가장 높은 염분과 비중을 지닌 이곳의 물은 식탁용 소금과 공업용 소금 뿐만 아니라 칼륨, 마그네슘, 브롬 등이 풍부하다. 또 수영을 하지 않아도 물에 뜨며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로 자연 건강치료를 위하여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사해물의 자연적 감소는 최근 몇 년간 가속화되어 상당히 높은 증발류로 해마다 16m씩 해수면이 낮아지고 또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물의 수요 때문에 수행되는 대규모의 분수 계획은 사해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75%나 감소시켰다. 그 결과 사해의 해수면이 1960년대 이후 약 10m 낮아졌다.
이스라엘의 주민·역사
편집-住民·歷史
660만을 넘는 인구 중에 약 80.1%가 유태인이며, 약 19.9%는 아랍계 비유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는 유태교 80.1%, 회교 14.6%, 기독교 2.1%이다.로마, 십자군(十字軍), 사라딘, 페르시아 등의 세력에 압박되어 2천년간 유랑민족으로 주로 유럽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지역에 자리를 잡았던 유태민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오니즘 운동(이스라엘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펴, 1947년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유엔의 승인으로 이스라엘 공화국을 선포했다.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시리아, 레바논·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했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 인구 1%에 해당하는 6천여명 이상이었다.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활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정치
편집-政治
독립전쟁시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이 인근 아랍제국으로 피난한 것이 아랍제국과의 대결이라는 숙명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유엔에 가맹해 있으나 아랍권은 이스라엘 국가를 승인하지 않으며 항상 군사·경제면에서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대서방권(圈) 관계는 우호적이다.정체는 민주 공화제이며 성문헌법은 없다. 귀환법, 국적법, 대통령법, 재판관법, 선거법 등 12조의 기본법이 헌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크네세트라고 하는 정원 120명의 의회가 최고통치기관이다. 임기는 4년.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대해서 투표하게 되며,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분배하는 완전비례대표제이다. 1996년 5월 이스라엘 최초 직접 선거를 통해 네타나후가 총리로 당선되었다. 이어 2001년 3월에는 샤론 총리가 당선되어, 2003년 1월 조기총선 승리 후 연임하였다.
이스라엘의 산업
편집-産業
계획적 사회주의 경제를 기조로 한 공업력은 서아시아 제1이며, 자동차 조립, 화학비료, 다이아몬드연마(硏磨) 등 각종의 현대적 공장이 있다.국토의 92%의 국유지에 키부츠, 모샤브라고 불리는 협정 체제의 농장이 분포해 있다. 관개산업이 잘 되어 베게브 사막지방도 옥토로 변해 가고 있다. 감귤류·면화 등이 주요 농작물이며, 특히 감귤류는 주요 수출품이다. 네게브 사막과 사해에는 구리·마그네슘·칼슘염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이스라엘의 사회
편집-社會
키부츠
편집독특한 사회 경제구조인 키부츠는 20세기 초 이스라엘의 개척사회에서 탄생하였고 평등주의와 공동사회 원칙을 기초로 한 영구적인 농촌 생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키부츠는 경제를 번영시켰고, 국가 건설에 이바지했던 키부츠 구성원들과 함께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국가 수립 이전과 수립 후 초기 몇 년 동안 키부츠는 정착, 이주, 보안, 농업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으나, 이러한 기능을 정부가 맡게 되자 키부츠와 이스라엘 주류 사회간의 상호 작용은 감소하였다. 사회적, 제도적 발전의 선봉으로서의 중심 위치는 감소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로 정치적 힘은 초기에는 과도하게 나타났으나 점차 수그러져 갔다. 그러나 국가적 산물에서 키부츠 정신의 몫은 이스라엘의 인구 비율보다 현저하게 더 증가하였다.최근 몇 십년 동안 키부츠의 기본적인 가치관도 다소 변질되어 키부츠 자체 내의 변화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인구 통계학적, 인종적 구조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키부츠 사회는 더욱 내성적 경향을 띠어 개인적인 업적, 사회적 응집력과 경제적 성장을 강조하게 되었다. 키부츠 구성원들의 일터도 유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키부츠 외에 다른 일터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번 임금을 키부츠로 가지고 온다. 동시에 키부츠에서의 외부 고용 인력에 관한 금기 사항이 완화되었으며 더 많은 비구성원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있다.오늘날 키부츠는 3대에 걸친 업적이다. 초기 설립자들은 강한 신념과 뚜렷한 사상에 동기를 부여받아 독특한 생활방식을 가진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미 존립하고 있는 사회 구조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는 키부츠의 경제, 사회 행정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현 세대는 이미 번창하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 현대 생활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키부츠가 본래의 원칙에서 멀어져가고 있다고 우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협하고 순응하는 능력이야말로 생존할 수 있는 열쇠라고 믿고 있다. 처음부터 키부츠의 성공요소는 키부츠의 실용주의, 키부츠의 구성원들과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필요성에 대처하는 능력에 있었다.이와 같이 최근 몇 년 동안의 논쟁은 개인과 키부츠 공동체간의 관계, 상호 책임의 본질, 기술과 의사 소통의 발달 세분화에 초점을 두었다. 키부츠에서 사용한 용어와 개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겠지만, 개방된 다원화된 공동체를 만든다는 목표는 계속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교통·도시
편집-交通·都市
이스라엘은 종횡단거리가 짧아서 자동차, 버스, 트럭 등의 교통수단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쉽게 갈 수 있게 해주는 광범위한 도로망이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철도는 전국으로 예루살렘, 텔아비브, 하이파, 나하리야를 오가며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벤구리온 국제 공항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주요 국제 공항이며 항구는 이스라엘을 남반구와 극동지역과 연결해주는 많은 여객선으로 항상 붐빈다.주요 도시는 대체로 해안평야에 집중해 있는데, 이스라엘 제1의 도시 텔아비브자파, 수도 예루살렘, 무역항 에이라트, 공업도시 하이파 등이 있다.
예루살렘
편집Jerusalem
해발 800m의 유대 산악지대에 발달한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인구 55만. 유태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인데 과거와 현재가 잘 조화된 불가사의한 도시이다. 엷은 베이지색의 돌 건축물이 펼쳐지는데 이는 영국의 위임통치시대의 시조례로부터 지금까지 이곳 특유의 베이지색 돌만을 사용하여 짓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누어 불려진다. 구시가는 3,000년전 이래의 고대도시 흔적 위에 서기 16년 오토만 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에 의해 세워진 성벽 내의 도시로 유태인, 기독교, 회교,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루어진 지역을 지칭하며 요르단령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고적으로는 겟세마네 동산, 성모교회, 통곡의 벽 등이 있다. 신시가는 이스라엘령으로 구시가 서편에 발달되었고 이스라엘 국회의사당, 정부관공서, 신헤브라이대학, 국립박물관 같은 기관이 있다.
텔아비브자파
편집Tel Aviv Jaffa
지중해에 접한 이스라엘의 가장 번화한 도시이며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텔아비브는 현대적이고 진보적이며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도시로 자유 분방함과 개방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기후는 여름철은 지중해의 영향으로 무덥고 비는 내리지 않으나 습도는 매우 높은 편이며 겨울에는 따뜻하다. 텔아비브에는 많은 대학과 도서관, 박물관 등이 있으며 해안을 따라 수영휴양지 및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관광중심지이기도 하다. 자파를 병합하고 급속히 발전한 이스라엘 최대인구 밀집지역이다.
나사렛
편집Nazareth
이스라엘의 비옥한 농경지 이스르엘 평야 가까이에 있는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도시다. 나사렛은 예루살렘, 베들레헴과 더불어 전세계의 순례객들이 주로 찾는 성지로서 회교도의 점령, 십자군의 침공 살라딘의 역습 등 무수한 붕괴와 재건을 되풀이했으나 오스만터어키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17세기부터 비로소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나사렛에 사는 것이 허락되면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나사렛에는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반반씩 사는 인구 4만여명의 이태리풍 도시다. 주요 순례명소로는 수태고지교회와 성요셉교회, 시나고그교회, 그리고 마리아 우물 등이 있다.
하이파
편집Haifa
이스라엘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인구 25만명의 지중해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지중해로 통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하이파는 시드니나 나폴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항구로, 바닷가는 산의 경사진 면을 따라 펼쳐져 있어 시원하고 멋지다. 이곳은 갈멜산과 이스라엘 해안 평야가 만나는 장소로 해안지대엔 항구로, 언덕엔 주거지로, 갈멜산 정상은 교육상업지역으로 구분되며 십자군 전쟁시대까지는 북쪽도시 악고의 그늘에서 발전을 못하다가 1918년 영국의 신탁통치시대부터 근대 항구도시로 번영하였다.
베들레헴
편집Bethlehem 베들레헴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이집트를 잇는 중간지역으로 예루살렘 남쪽 7km에 위치한 아랍도시다. AD330년 콘스탄틴황제에 의해 세워진 후 십자군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르는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수 탄생장소로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연중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다. 또한 이곳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어 아이가 없는 유대교 여자들이 자주 찾아간다고 한다. 베들레헴 교회에서는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양치기의 들(Shepherds’ Field)을 볼 수도 있다.
티베리아스
편집Tiberias
갈릴리 호수 남서쪽 연안과 경사진 곳에 발달한 인구 약 3만의 도시로서 많은 호텔과 온천이 있으며 이곳 갈릴리 호수지역 리조트산업의 중심지이다. 기원전 20년경 헤롯 안디바드리에 의해 처음 건설된 도시로 당시 로마황제인 아우구스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지었다. 이곳엔 십자군시대의 베드로교회가 해안에 있으며 랍비 아키바와 람밤등 유대교 학자들이 무덤이 있다. 특히 예루살렘이 망한 뒤 유대문화의 중심지로서 200년 무렵에는 랍비 유프타 하나에 의해 성전 미시나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400년경에는 예루살렙 탈무드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무깃도
편집Meggido
무깃도는 애굽에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이르는 바닷길(비아마리스;Via Maris)목으로 이스르엘 평야 중에서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오랜 옛날부터 제국의 군대는 이곳을 통과하여 지나갈 수밖에 없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솔로몬왕은 무깃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을 강화시켰고, 이 지역을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서기 913년경 애굽의 시삭은 무깃도를 파괴하고, 이후 아합왕 때 다시 재건되었다.유대왕 요시아가 북진하는 애굽군대를 이곳에서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며, 서기 1917년 영국의 알렌비 장군이 터키군을 패배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무깃도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게돈(히르마게돈)’을 히랍어로 옮긴 말이다.무깃도는 1925∼1939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그 실체가 들어났는데, 이 곳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식 신전, 솔로몬의 마굿간 등이 발견되었다. 무깃도는 이집트의 기원전 15세기 문서에 언급된 도시로 헬라시대에 쇠퇴되었다.
이스라엘의 관광명소
편집-觀光名所
서양문명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의 출생지 베들레헴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에는 여러 민족·종교가 숙명적으로 얽혀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유적지와 관광명소가 많다.
쿰란
편집Qumran
사해사본을 발견한 장소이다.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사본을 기록한 엣센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이 있었다.이 지역은 1951∼1956년에 발견되었으며 폐허 속의 주건물은 폭 27m, 길이 44m정도로 석고가 거칠게 발라져 있는 큰돌로 만들어졌다. 북쪽에는 수비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있는 식당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쿰란 주변 동굴에서는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사해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쿰란공동체의 규율집들로써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리루그우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들이다.사해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편집Via Dolorosa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의 길까지를 의미한다.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관저에서 예수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채찍아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14번을 멈추었던 고난의 길이다.
마사다
편집Massada
사해 서쪽해안에 위치한 천혜의 절벽요새이다. 높이 400m, 정상은 길이 600m, 폭 250m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마사다는 헤롯왕의 요새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 전쟁 최후의 비극적 격전지로 유명하다. 1963 ∼1965년 고고학자 이갈 야딘 교수의 발굴작업으로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다.서기 70년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오자, 유태인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이르가 이끄는 유대인 열성당원(Zealot)들 약 960명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로마군단은 마사다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쉽게 정벌하지 못하고 장장 3년 동안이나 공격을 계속해 오던 끝에 엄청난 토담을 쌓아 마사다 요새에 접근한다.이로써 마사다의 수비벽이 무너지고 로마군단의 진격이 확실시되자 지도자 벤야이르는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리리 자유인으로서 영광되게 죽기를 결심한다. 각 가족의 가장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모든 남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고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다신 한 명을 뽑아 아홉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는데, 요새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엘리아제르 친척노인 1명 모두 7명이 생존하여 이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3년 동안 한맺힌 포위작전에 대한 영광의 대가를 바랬던 로마군은 960구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했으며 그 비극적인 전설같은 사실이 오늘날까지 전승화되고 있어 이스라엘인들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다.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수승천기념경당
편집Ascension Chaple
올리브산(감람산) 정상에 위치한 회교경당으로 예수님 승천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383년 귀족출신 포이메니아가 소성당으로 봉헌하였고,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후, 6756년에 재건되었으며, 1009년 하킴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 1198년 살라딘이 회교경당으로 개조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회교에서도 예수님을 중요한 예언자와 마지막 심판자로 공경하고 있다.
시온산
편집Mt. Zion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문(다윗의 문) 밖이 시온산이다. 이곳은 제2성전시대의 예루살렘 위쪽의 도시 남단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구약성서에 이 지명이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유대인에게도 예루살렘이나 성지를 일컫는 지명이기도 하다. 시온산에는 다윗왕의 무덤, 최후의 만찬장소, 마가의 다락방, 베드로 통곡교회 등의 유적이 있다.
갈릴리 호수
편집Galilee
남북길이 21km, 수심 210m의 이 호수는 그 모양이 옛날 현악기 중의 하나인 입금(키노르)과 같이 생겼다하여 히브리어로 긴네렛이라고도 불린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아름다운 경치와 비옥한 토양이어서 여러 도시들과 키부츠들이 들어서 있으며, 호숫물은 이스라엘 땅의 중요한 식수원이며 생명선이다.한편 갈릴리 호수는 예수의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대부분의 예수 제자들이 이곳에서 부름을 받았고, 베드로가 살았던 곳도 이곳 갈릴리 호수변의 가버나움 마을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던 장소도, 그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바로 이곳의 연안이요, 언덕이었다. 그당시 이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많은 인구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엘 악사 사원
편집EL Aksa Mosque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회교사원이다.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엘 악사 사원은 원래 비잔틴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만든 것인데 그후 지진 등으로 훼손되어 수차례 수리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066년에 완성되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있고 스테인글라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겟세마네 교회
편집Gethsemane
감람산 서쪽 기슭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예수가 로마군에게 잡하시기 전날 밤 무릎을 꿇고 기도한 곳이다.이곳에 세워진 겟세마네 교회는 서기 375 ∼395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건축된 교회였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입시 파괴되었으며 8세기에 지진으로 또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919년에 세워진 것으로 가능한 한 옛 모습을 재현코자 했기 때문에 4세기 종반의 바실리카 모양이나 비잔틴 시대의 모양과 벽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한편 이 교회는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만국민의 교회라고도 불린다.
예수님 눈물교회
편집Dominus Flevit
감람산에서 겟세마네로 내려오는 중간지점에 있는 눈물방울 형태를 지닌 교회로서 6세기경에 비잔틴 양식의 소성당 위에다 1955년에 건축한 프란시스코교회이다. 이 교회 중앙에서 똑바로 눈을 들면 예루살렘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다. 예수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 붕괴를 예언하였다.
올리브산(감람산)
편집Mt. Olives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 해발고도 약 800m. 기드론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옛시가 성벽과 대치하고 있는 산으로, 중앙·남팔레스타인에서 남북으로 뻗은 산맥의 일부이다. 산맥은 정상이 3개이고, 동쪽은 요르단 계곡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은 기드론골짜기 쪽으로 경사져 있다. 예수 당시는 산 전체가 올리브로 덮여 있었는데, 현재는 서쪽 산기슭에 있는 예수 수난의 땅인 겟세마네 동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올리브를 볼 수 없다.
다윗성
편집Castle of David
다윗시대의 예루살렘성을 의미하며 시온성이라고도 불린다. 모리아산에서 기드론 골짜기 서쪽 언덕을 따라 실로암 연못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에비스인의 요새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설한 곳으로 예루살렘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이다. 이곳은 제1신전시대의 성벽 흔적인 느헤미야 성벽 등 많은 유적이 발굴 보존되어 있다.
바위사원
편집Dome of the Rock
성전이 있던 장소에 세워진 팔각형의 황금색의 둥근 지붕의 회교건물로서 서기 691년 압델 말릭에 의해 세워졌으며 돔 한가운데의 나무에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쳐 번제를 지내려던 장소로 전해진다. 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승천하였다고 한다. 돔의 내부는 대리석 기둥들이 바치고 있는데 그 기둥의 색깔, 높이, 두께 등이 모두 다르다. 그
이유는 이 기둥들이 비잔틴이나 로마시대 신전의 것으로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
편집Wailing Wall
헤롯왕이 예루살렘 신전을 중개축할 때 구축한 신전 서쪽 옹벽의 일부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벽의 지상부분은 길이 약 50m, 높이 약 20m. 로마에 대한 절망적인 반란이 비극으로 끝난 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4세기에야 그들은 1년에 한번 신전이 파괴된 날로 전하는 아빕월(유대력 5월) 9일에 허물어진 신전을 찾아가 신전의 소실과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나중에 신전터에 이슬람 성소가 건설되어 통곡의 장소는 서쪽 벽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1948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 측에 속하였으나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통곡의 벽을 장악하였다. 유대교의 가장 인상깊은 상징물이다.
주기도문교회
편집Pater Noster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말을 따서 지은 교회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이며,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해서 말씀하신 곳이라 전해진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예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감람산 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 침공시 파괴되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교회 또한 회교도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현재의 교회는 1875년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카르멜파수녀들을 위한 수녀원과 같이 건립한 것으로 수녀원 건물벽에는 한국어를 포함하여 세계 62개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새겨 놓고 있다.
압살롬 기념비
편집Yad Abshalom
예루살렘 북쪽 기드론 골짜기에는 제1신전과 제2신전시대의 무덤들이 많다. 그 중 성밖 남동쪽에 위치한 무덤과 기념비가 있는데, 이곳이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의 무덤과 기념비이다. 계단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그 예술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전체 높이가 18.5m이다.
다볼산
편집Mt. Tabor
이스라엘 골짜기에 위치한 해발 588m의 종모양을 한 산으로 다볼산 정상에는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에 서기 1921년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변화(Trasfiguration)를 기념하고 있으며, 십자군 시대의 성벽과 건물의 유적이 있다. 또한 그리스 정교회의 엘리아 기념교회도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타브가
편집Tabgha
갈릴리호수 북쪽 가버나움 부근에 위치한 장소로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행하셨다는 지역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베네딕또 수도회의 교회와 베드로 수위권을 기념하는 프란치스꼬 수도회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