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현악주자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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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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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tz Kreisler(1875-1962) 크라이슬러는 근대의 가장 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의 기 쁨>, <사랑의 슬픔>, <중국의 큰북> 외에도 바이올린 소곡의 작곡자이기도 하고 편곡자로서도 최고로 평가된다. 그가 쓴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협주곡을 위한 카덴차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빈에서 태어나 아우어, 헤르메스베르거, 마살에게 사사하였다. 제2차대전 전에 프랑스에 귀화하였다가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그 후부터는 거의 연주회에서 멀어졌으며, 87세로 미국에서 영면하였다.

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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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Thibaud(1880-1953) 20세기 전반(前半)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 보르도 출신이며, 13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마르시크에게 배웠다. 당시의 대지휘자 에두아르 콜론에게 발견돼 그의 악단 '콩세르 콜론'에 들어가 독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연주여행도 세계 각국에 이르렀다. 1953년 3번째의 일본 방문 중 비행기가 일본 알프스산에 충돌하여 사망하였다. 빛이 나게 연마된 음빛깔의 소유자이며, 세련된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가 운궁(運弓)할 때마다 넘쳐흐른다고 할 정도로 보기 드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모차르트를 장기로 생상스, 포레 등에도 뛰어난 연주를 하였다. 실내악 면에서도 피아노의 코르토, 첼로의 카살스와 함께 한 연주는 '세기의 트리오'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또 음악학교에서 교편도 잡았고, 피아니스트인 마르그리트 론과 함께 '론·티보 콩쿠르'를 여는 등 연주활동 이외에서도 공적이 많다.

에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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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Enesco(1881-1955)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후진 지도와 그 밖에 악계(樂界)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루마니아 국립부쿠레슈티 필하모니 관현악단은 '에네스코'를 명예칭호로 하여 그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있다. 빈과 파리에서 헤르메스베르거와 마르식(바이올린), 마스네와 포레(작곡)에게 사사하였으며, <루마니아 랩소디>(2곡), 그 밖의 명곡을 남기고 파리에서 별세하였다.

후베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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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nisfaw Hubermann(1882-1947) 소년시절에 브람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작곡자를 감탄케 한 일화도 있는, 폴란드의 대바이올리니스트이다. 비할 데 없는 테크니션으로서 알려졌으나, 기교 본위의 작품을 싫어하였고, 실내악의 연주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유태인을 박해하는 나치스를 증오하여 유태인 음악가를 위한 팔레스티나 교향악단의 창립에 진력한 일로도 유명하다.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요아힘의 지도를 받았다. 오랫동안 빈에 살면서 교직에도 있었으나, 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으며 스위스에서 별세하였다.

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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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ha Elman(1891-1967) 20세기 전반(前半)에서 가장 대중적인 명성을 얻은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출신이며, 오데사의 음악원에서 배웠다. 그 후 거장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사사하여 하이페츠와 함께 그가 아끼는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에서 데뷔하여 일약 천재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 후 영국, 미국 등지에서 연주회를 열어 모두 크게 성공하였고, 나중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의 연주는 바이올린이 지닌 감미로운 음빛깔을 극한까지 추구한 것으로, 연주 스타일은 구식이지만 그의 독자적인 감미로운 음빛깔은 흔히 '엘만 톤'이라고 하여 애호되고 있다. 레퍼토리는 근대까지이다. 1967년 노쇠로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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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 Busch(1891-1973) 유명한 부슈 현악 4중주단의 창립자이자 제1바이올린 주자이다. 동생인 헤르만 부슈(첼로), 매제(妹弟)인 세르킨(피아노)과의 3중주단 및 부슈 실내관현악단의 주재자로도 알려졌고, 독주자이자 교수로도 이름이 높았다. 명지휘자 프리츠 부슈의 동생이기도 해서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독일에 머물러 있었으나,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시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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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Szigeti(1892-1973) 조국은 헝가리로서, 출생지인 부다페스트의 음악원에서 후바이에게 배웠다. 바이올린 역사상에 크게 기록되는 거장으로서, 전시대적인 명인예(名人藝) 중심의 연주 양식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작품에 대한 충실성을 주장하여 스스로 그 모범이 되어 현대 바이올린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또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회의 곡목에 정착시켰으며, 바르토크나 프로코피예프 등의 새로운 작품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레퍼토리를 크게 넓힌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래 기교파 타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고 음빛깔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나 구도적(求道的)인 근엄함을 지니고 악곡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진지한 태도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하여 일반적으로 기교가 떨어지는 만년의 연주에도 남이 따를 수 없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다. 1905년에 베를린에서 데뷔한 이후 영국, 스위스, 미국 등지에서 살았으며 1951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쿨렌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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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 Kulenkampff(1898-1948) 나치스 정권하 독일 최고의 바이올린 독주자. 교수로 알려졌고, 미발표된 채 방치되었던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계 초연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브레멘에서 태어나 헤스에게 사사하였고, 모교인 베를린 고등음악원의 교수와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콘서트 마스터로도 오래 있었다. 1943년에 플레시의 후임으로서 루체른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2차대전 후 얼마 안 있다가 스위스에서 별세했다.

하이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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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cha Heifetz(1901-1987) 20세기의 대표적 명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 러시아의 빌나 출신이며, 그 곳의 음악원을 불과 8세 때 졸업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진학, 아우어에게 사사하였다. 1913년 12세 때 당시의 대지휘자 니키슈와의 협연으로 베를린에서 데뷔하여 일찍이 일류 연주가의 대열에 끼었다. 그러나 1917년의 혁명을 피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여 1926년 미국적을 얻고,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SP시대부터 레코드도 많았고, 영화 <카네기 홀>에도 출연하여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정확하기 비할 데 없는 기교로서, 어떠한 난곡도 연주해내고 해석도 현대식으로 잘 구성되어 있어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다. 레퍼토리는 매우 넓으며, 자기 스스로 독주용의 편곡도 했다.

밀스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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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Milstein(1904- ) 이페츠와 같이 미국에 귀화한 러시아 태생의 명바이올리니스트. 19세기 후반의 바이올린 교육의 중심지인 오데사 태생이며 스트리아르스키, 아우어, 이자이와 같은 명교사들에게 사사하였다. 맨 먼저 러시아에서 데뷔, 그리고 1925년에는 파리, 1929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계속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기교는 정확하고 연주 스타일은 단정하며, 무엇을 연주하든 조금도 빈틈이 없어 다소 찬 느낌마저 있지만, 거기에는 좋은 환경과 명교사들에게 둘러싸여 교육받은 기품이 깃들어 있다. 1960년에는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30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다.

프랑세스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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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o Francescatti(1905- ) 프랑스가 낳은 티보 이래의 명바이올리니스트.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 시보리에게 사사하였다. 이탈리아 사람인 아버지의 초보교육을 받아, 5세 때 이미 공개석에서 연주하였다. 후에 파리로 나와 티보에게 배우고, 각지를 연주여행하여 평판을 높였다. 미국 데뷔는 1939년이며, 센세이셔널한 높은 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뉴욕에 정주하여 바쁜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의 특질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빛깔과 밝은 라틴적 서정성이며,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 거기에다 랄로, 생상스 등의 라틴계 등 레퍼토리도 넓지만, 특히 파가니니 제자의 제자인 만큼 그의 파가니니는 현대 최고의 것으로 꼽혔다.

캄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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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edo Campoli(1906- ) 영국 국적의 이탈리아계 바이올리니스트. 로마에서 태어나 13세 때 영국으로 일가가 이주하였고, 바이올린은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교수인 아버지 로메오에게서 배웠다. 10세 때 데뷔한 이래 13세까지는 각종 콩쿠르에서 7개의 1등상, 2개의 금메달, 1개의 은배를 탔고, 일찍이 일류 주자로서 등장하였다. 그는 한번도 음악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는데, 연주는 그의 그러한 경력을 증명이나 하듯이 모가 없이 감미로우며 감성적인 아름다움에 넘쳐 있다.

오이스트라흐(다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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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Feodorovich Oistrakh(1908-1974) 구소련이 자랑한 세계 최고의 명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교사로서도 수많은 준재(俊才)를 길러내었고,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의 공연은 세계 악단의 명물이었다. 오데사에서 태어나 스트리알스키에게서 배우고, 1935년 바르샤바의 비냐푸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제2위, 1937년엔 브뤼셀의 이자이 국제콩쿠르에 제1위로 입상하여, 철의 장막에 싸여 있던 구소련에 놀랄 만한 천재바이올리니스트가 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나중에는 지휘자로서도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오드노포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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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ardo Odnoposoff(1914- ? ) 1937년 벨기에 브뤼셀의 이자이 국제콩쿠르에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제1위 특상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오래도록 빈 음악원 교수로 있었다. 양친은 모두 러시아인이며,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13세 때부터 베를린에서 데만과 플레시에게 배웠다. 1932년 빈 국제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였고, 이자이 콩쿠르의 해부터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7년간 일하였으며, 이후 솔로이스트로 활약하였다. 순수한 빈 스타일의 연주가는 아니지만, 슈나이더한과 함께 빈 악단의 중진으로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슈나이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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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Schneiderhan(1915-1993) 당대 빈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순수한 빈 사람으로서 어릴 적부터 명교수 셰프티크에게 사사하였고, 빈 교향악단과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터 및 빈 음악원의 교수로도 있었다. 독주자로서는 다소 선이 가늘지만 빈 전통의 계승자로서 귀중한 존재이며, 실내악 주자로서도 눈부신 활동을 했다.

메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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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hudi Menuhin(1916- ) 데뷔 당초부터 신동이라는 칭송이 높았던 유태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뉴욕 태생이나, 나중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명교사 퍼싱거에게 사사, 7세 때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과 협연(協演) 데뷔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9세 때엔 파리, 11세 때는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간 부슈, 에네스코에게 사사하였다. 젊었을 때의 그의 연주는 다소 기교적인 것이었으나 2차대전 후 한때 침체시기를 넘기고서 내성적인 안정을 되찾아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만년에는 영국에 정주하여 음악학교도 창립하여 여왕으로부터 나이트의 칭호까지 받았지만 그의 국적은 미국이다. 그의 가족은 모두 음악가 가족으로서, 누이동생 헤프치버 얄타, 사위인 푸촌은 피아니스트이다.

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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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ette Neveu(1919-1949) 젊어서 사고로 사망한 여류피아니스트이다. 파리의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7세 때 콘세르 콜론 관현악단과 협연하였고, 11세로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플레시에게 사사하였고, 1935년의 바르샤바 국제콩쿠르에서 비니아스푸스키 대상을 탔다. 다음 해에는 미국, 1938년에는 베를린, 1945년에는 런던에서 연주회를 열어 압도적인 인기를 차지하였다. 비행기 사고를 만난 것은 세 번째의 방미 도중의 일이며 반주자인 동생 장과 동행이었다. 레코드는 적으나 그의 연주는 정열적인 집중력이 있고, 더욱이 높은 기술과 예술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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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ac Stern(1920-2001) 현재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이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출생 후 곧 양친을 따라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정기공연에 출연하였다. 그의 가장 기념할 만한 독주회는 1943년 카네기 홀에서의 리사이틀이며, 이 대성공에 의하여 미국 내는 물론 유럽·근동·남미·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연주여행의 발자취를 남기고 일약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연주여행을 거듭함에 따라 그의 연주는 점점 원숙하여져, 음은 풍부하고 힘이 강해졌으며 스케일이 큰 연주를 하게 되었다. 레퍼토리도 바로크·고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으며, 나중에는 유진 이스트민, 레너드 로즈와 함께 스턴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면에서도 스테이지와 레코드 등에 정력적인 활약을 보였다.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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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ggiero Ricci(1920- ) 미국의 중견 바이올리니스트. 이탈리아계로서 샌프란시스코 태생이다. 스턴과 메뉴인, 그리고 퍼싱거에게 배웠고, 후에 프랑스로 건너가서 티보에게도 사사하였다. 8세로 일찍이 카네기 홀에서 뉴욕 필하모니와 협연, 신동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12세 때 유럽을 여행하였고 제2차대전 중에는 종군을 하였으며, 전후에는 세계 각국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같은 나이인 스턴 등에 비하면 스케일은 다소 작으나 뛰어난 기교를 지니며, 젊음에 넘친 음빛깔과 솔직한 해석은 호감을 갖게 하였다.

그뤼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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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Grumiaux(1921-1986) 뷰턴, 이자이와 함께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계승자로 지목받은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벨기에 태생으로, 조부에게서 기본 교육을 받고 샤를 르와 음악원, 브뤼셀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듀브와 및 에네스코에게 사사하였다. 1939년에는 뷰턴상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실내악 면에서 활약하고, 솔로이스트로서 주목되기는 2차대전 후이다. 그의 음빛깔은 맑고 깨끗하여 연주 스타일이 유려하다. 모차르트의 협주곡으로 호평을 받아 세상에 알려진 만큼 모차르트통으로서 정평이 있고, 그 밖에도 프랑스 근대의 것도 장기로 하였다. 또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하스킬과의 2중주도 명콤비로서 유명하였다.

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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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k Szeryng(1918-1988) 멕시코 쇼팽협회장을 지낸 바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의 기묘한 결연도 그가 폴란드의 출신이라는 것을 알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베를린에서는 플레시, 파리에서는 티보에게 사사하였고, 전쟁 중에는 폴란드의 난민 이민계획의 교섭차 멕시코로 갔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 나라에 영주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의 연주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세계인 형(世界人型)이며, 또 열정과 억제, 감정과 지성(知性)이 이상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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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 Haendel(1923- ) 유럽을 중심으로 활약한 중견 여류바이올리니스트. 폴란드 태생이며, 10세에 칼 플레시에게 사사하였고, 뒤에 에네스코에게 배웠다. 14세 때 영국에서 데뷔, 2차대전 후에는 유럽, 미국,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주여행하였다. 그의 연주는 윤택한 서정성을 띠면서도 한편 열띤 점도 있으며, 레퍼토리도 고전·낭만에서부터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오래도록 영국에 정주하였으며, 만년에는 캐나다에서 살았다.

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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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ido Kogan(1924-1982) 오이스트라프(부친)의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구소련의 명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세계 최고(最高)의 한 사람이다. 부인인 엘리자베타(명피아니스트, 기레리스의 누이동생)도 1937년의 이자이 국제콩쿠르에서 3위를 입상한 재원이며 이 두 사람의 2중주는 유명하다.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얌폴리스키에게 사사하여 1951년 브뤼셀의 엘리자베스여왕 국제콩쿠르에서 제1위를 획득하였으며, 1958년에는 미·소문화협정 체결의 제1진으로서 미국을 방문하였다.

빌코미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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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a Wilkomirska(1929- ) 현대의 폴란드를 대표하는 여류바이올리니스트로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루제 음악원과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배우고, 파리에서 세링에게도 사사하였다. 현대곡을 의욕적으로 다루었으며, 근년의 폴란드 바이올린곡의 과반수를 초연(初演)하고 있다.

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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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Suk(1929- ) 체코를 대표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현대 최고의 명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꼽힌 수크트리오의 창립자이며, 바이올린 주자로도 유명하다. 프라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명인 코치안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다시 프라하 음악원에서 배웠다. 조부도 요제프 수크라라고 하며, 드보르자크 사위가 되는 체코의 중요한 작곡자였고, 증조부도 당시 알려졌던 음악가였다.

베즈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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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or Bezrodny(1930- ) 구소련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 중의 하나이며, 그루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A. 얌폴리스키에게 사사하였고, 1947년 프라하의 제1차 세계청년호우제(好友祭), 1949년 얀 쿠베리크, 1950년 라이프치히의 바흐 2백년 기념의 각 국제콩쿠르에 제1위로 입상하였다. 카바레프스키로부터 바이올린 협주곡(1948)의 헌정을 받기도 하였다.

코바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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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vacs Denes(1930- ) 헝가리의 국적을 가진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중 가장 활동적인 사람이며, 헝가리 최고의 국가상인 코슈트상도 받았다. 헝가리의 버치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배웠으며, 1951년부터 헝가리 국립가극장 관현악단 콘서트마스터로 있었고, 나중에는 독주자 겸 모교의 교수직을 맡았다.

오이스트라흐(이고 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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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or Feodorovich Oistrakh(1931-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아들이며, 아버지와의 바이올린 2중주는 유명하다. 구소련의 젊은 사람 중에는 최고 수준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와 같은 오데사 태생이며, 스트랴르스키에게 사사하였고, 1949년에는 부다페스트, 1952년에는 바르샤바의 비냐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중부터는 국외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구트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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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Gutnikov(1931- ) 구소련의 영재(英材)교육의 성과를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실례의 하나로 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1956년에는 프라하, 1957년에는 파리의 론=티보, 1962년에는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의 각 국제콩쿠르에서 모두 제1위로 입상하여, 그의 완벽한 기교는 감탄의 표적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그 곳 음악원에서 유리 에이드린에게 사사하였다.

클리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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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ry Klimov(1931- ) 1958년의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의 우승자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오이스트라흐에게 사사하였고, 재학중 동베를린, 파리, 프라하의 국제콩쿠르에 입상한 바 있다.

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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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an Ruha(1931- ) 모스크바의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제3위, 또한 1958년 부쿠레슈티의 에네스코 국제콩쿠르에서는 제1위의 입상을 한 루마니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출생지는 루마니아 북부의 카레이.

페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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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Ferras(1933- ) 유럽의 젊은 세대를 대표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이다. 북부프랑스에서 태어나, 후에 니스로 이주하였고, 그 곳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하여 파리 음악원에 진학, 여기서도 1등으로 졸업하였다. 1949년도 롱티보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고,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여 최근에는 카라얀에게 실력이 평가되어 자주 협연하였다. 선이 다소 가늘기는 하지만 균형이 잡힌 솔직한 음악성의 소유자이다.

프리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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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k Friedman(1939- ) 젊은 세대의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 미국 뉴저지주 출신으로서, 8세 때 이미 공개석에서 연주를 한 바 있으며, 그 뒤 카라미안, 밀스타인, 하이페츠의 총애를 받았다. 역연형(力演型)의 연주가이며, 기교적으로는 연마가 덜 되어 있으나, 연주 스타일은 스승인 하이페츠를 방불케 하는 면이 있다. 1966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제6위에 입상하였다.

아카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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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tore Accardo(1941- ) 제노바의 파가니니 국제콩쿠르에 제1위로 입상한 이탈리아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난곡도 어렵지 않게 연주해 내는 명인예(名人藝)와 아름다운 노래넘김으로 파가니니의 재현(再現)이라고까지 칭찬되고 있다. 나폴리 태생이며, 담브로지오와 아스트뤼크에게 사사하였고, 이 밖에도 여러 콩쿠르에서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라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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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me Laredo(1941- ) 1959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여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끈 남미 볼리비아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그 해 RCA(미국 빅터)의 전속이 되어 음반에도 많은 녹음을 하였다. 커티스 음악원의 명교수 카라미안의 가장 탁월한 제자의 한 사람이다.

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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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zhak Perlman(1945- ) 이스라엘 델아비브 출생. 줄리아드 음악학교 졸업. 1964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제1위. 1963년 카네기홀 공연. 협주곡, 소나타, 소품 연주. 4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부자유스러웠다. 5세 때부터 텔아비브에서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10세 때 이스라엘 방송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 1958년 미국에서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연찬을 쌓았다. 주커만과 함께 현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곡> 전6곡,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치오> 등과 같은 난곡에서도 높은 평가를 얻었는데, 나중에는 내면이 한층 성숙해지면서 베토벤과 브람스의 소나타에서도 충실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또 실내악에서도 열심이어서 피아니스트 아슈케나지, 첼리스트 하렐과 함께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레코딩하기도 했다. 소품도 능숙하여 크라이슬러, 조플린의 작품에서도 독특한 맛을 빚어냈다.

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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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Sophie Mutter(1963- ) 스위스 라인펠덴스 출생. 에르나 호니히베르가, 아이다 슈투키에게 사사. 1974년 독일청소년음악콩쿠르 제1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3, 5번연주. 고전에서 현대곡까지 망라. 정확한 음정과 아름다운 음을 내는 매끄러운 운궁법 등에 근대 바이올린 주법의 한 정점을 이룬다. 루체른 음악제의 연주를 들은 카라얀에 의해 세상에 소개된 것이 13세 때로 데뷔반(盤)의 연주는 그 완성도의 높이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현대음악의 연주에도 적극적이며,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루토스와프스키의 바이올린 작품을 많이 다루고 있다. <파르티타>(바이올린과 피아노)와 <체인Ⅱ>(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등을 초연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다. 1981년에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폰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서 처음으로 극동 공연을 가졌다.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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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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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Casals(1876-1973) 현대의 첼로 연주법을 확립한 역사적인 명가(名家)이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의 진가를 처음으로 세상사람에게 알려준 공적은 매우 크다. 첼로의 신(神)이라고도 불리며, 현대의 첼리스트이면 누구나 직접·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에스파냐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바르셀로나 관현악단을 창립하여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티보, 코르토와 함께 카살스 3중주단을 결성한 것은 유명하다. 1936년 에스파냐내란으로 수립된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조국을 떠나, 1950년부터 남프랑스의 프라도에서 살면서 매년 카살스 음악제를 열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살며 카살스 음악제·카살스 첼로 콩쿠르를 열었으며, 본의 베토벤의 집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특정한 연주회와 마르보로 등 소수의 음악제에 한해서만 출연했다. 작곡도 하였으며, 만년의 작품으로 오라토리오가 있다.

마레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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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Marechal(1892-1962) 프랑스의 고명한 첼리스트이며, 1942년에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디종 태생으로 카살스를 비롯 코르토, 티보와 트리오를 짰으며, 라벨, 미요, 오네게르 작품의 초인사로서도 기억된다.

마이나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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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Mainardi(1897-1976) 밀라노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명첼리스트이며, 작곡가로서도 알려져 제2차대전 후에는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 졸업 후 베를린 고등음악원에서 파울 베커에게 사사하였고, 13세로 데뷔하였다. 에드윈, 피셔, 제키(피아노), 쿨렌캄프, 슈나이더한(바이올린) 등과의 실내악연주로도 유명하며, 교육자로서도 세계적으로 존경받았다.

카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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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par Cassado(1897-1966) 카살스와 함께 에스파냐가 낳은 명첼리스트로서 이름있는 작곡가이며 합창지휘자인 호아킨 카사도의 아들로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카살스에게 사사하여, 21세 때부터 독주자로서 또는 실내악 주자로서 활약, 오래도록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과 쾰른 음악원의 교수로 있었다. 작곡에도 뜻을 두어,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의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편곡자로서도 이름이 높다.

포이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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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Feuermann(1902-1942) 오스트리아의 명첼리스트이며, 제2의 카살스라고 주목되었으나 대전 중에 미국에서 요절하였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클렝겔에게 사사하였고, 1929년부터 베를린 고등음악원의 교수를 겸무하였으나,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다음 해에 빈으로 이주하고,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루빈스타인과 피아티고르스키와의 3인으로 된 트리오의 연주로도 유명하다.

피아티고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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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 Piatigorsky(1903-1976)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태어난 미국의 고명한 첼로 주자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배우고, 혁명 때 폴란드로 피하였다가, 후에 베를린에서 다시 클렝겔에게 사사하였다. 1924년에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 첼로 주자가 되었고, 호로비츠(피아노), 밀스틴(바이올린)과 3중주단도 결성하였다. 1942년 미국 국적을 얻었고, 그 전해부터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만년에는 하이페츠와 함께 실내악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힌데미트의 첼로 협주곡, 그 밖에 그가 초연한 현대곡도 적지 않다.

벤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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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ust Wenzinger(1905- ? ) 비올라 다 감바와 첼로의 명수로서, 바로크 및 고전음악의 연구가로서도 유명하며, 1954년부터 쾰른 고전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도 활약중이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나, 그륨머에게 사사하였고, 1934년부터 바젤 스콜라 칸토룸의 교수로 있었다.

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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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Fournier(1906-1986) 유럽에서 활발한 활약을 했던 명수로서, '첼로의 왕자'로 불렸다. 파리 태생이며,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소아마비로 다리의 자유를 잃고 첼로로 바꾸었다. 파리 음악원에 진학하여 에킹에게 배웠고, 이어 바즈렐에게 사사하였다. 1923년 1등상으로 졸업하고, 다음해에 파리에서 데뷔한 이래 늘 제1선에서 활약하였다. 별칭과 같이 매우 전아(典雅)하고 신경이 쓰인 연주이나, 반면에 누구에게도 호감이 가는 것은 음빛깔과 표현의 따뜻함 때문이다. 레퍼토리도 넓어, 작은 곡에서 큰 곡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연주를 하며, 또한 실내악 주자로서도 뛰어났다. 1953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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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Hoelscher(1907- ? ) 나치스 정권하와 전후 독일의 첼로 연주의 제1인자이다. 조링겐에서 태어났고, 포이어만이나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 클렝겔에게 사사하였다. 1930년에 멘델스존상을 수상, 베를린 고등음악원을 비롯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음악원의 교수도 역임하였다. 현대 첼로곡의 초연도 많은 수에 이르고 있다.

크누셰비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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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yatoslav Knushevitzky(1908-1963) 구소련의 명첼리스트이며, 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과의 3중주단이나 오이스트라흐 현악 4중주단 첼로 주자로서도 알려졌고, 1950년엔 스탈린상, 1956년에는 러시아공화국 공로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 출생지에서 가까운 사라토프의 음악원에서 마조르포프에게 배웠고, 그 뒤 스승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오래도록 볼쇼이극장의 수석 첼로 주자로 있었다. 2차대전 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인재를 키웠다.

나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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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Navarra(1911- ? ) 20세기 명첼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라틴적 색채가 강한 연주가이다. 에스파냐의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나, 투르 음악원에서 파리 음악원으로 진학하였다. 1등으로 졸업한 뒤 바이올린 기법을 연구하였고, 첼로를 위하여 플레시에게 배우고 계속 카살스에게 사사하였다. 1937년 빈의 콩쿠르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데뷔,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였고, 그레트리 현악 4중주단의 멤버로도 있었다. 1949년에는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예술문화 훈장도 받았다. 그의 연주는 매우 빛나며, 색채적이어서, 생상스나 랄로, 보케리니 등의 연주에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사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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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os Sadlo(1912- ? ) 한때 스쿠 3중주단에도 가담하였던 체코의 첼로 주자이며, 1961년에 발견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다(C)장조의 세계 초연(初演)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라하 태생으로, 아버지에게서 첼로를 배워 1929년에 데뷔하였다. 뒤에 카살스에게도 사사하였으며, 프라하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토르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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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Tortelier(1914- ? ) 명연주가가 많은 프랑스 첼로계에서도 가장 풍성한 활약을 하고 있다. 토박이 파리장으로, 파리 음악원에서는 푸르니에를 키운 에킹에게 사사하여, 1등으로 졸업한 후 카살스에게서 배웠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는 보스턴 교향악단 수석 주자로, 나중에는 독주자로 자리를 바꾸어, 전후의 카살스 음악제에 대부분 출연하였으며, 1952년에는 뉴욕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1956년부터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근무하였다. 뛰어난 기교를 지녔으며 스케일이 크고 유연하며, 최근에는 한층 원숙함을 더하고 있다. 또한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으로도 상을 탄 바 있고, 첼로의 작품도 적지않게 작곡하고 있다.

야니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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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Janigro(1918- ? ) 출생지인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 파리의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알렉사니안에게 사사한 이탈리아의 명첼리스트이나, 1939년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 음악원의 교수로 근무하였고, 2차대전 후에는 자그레브 합주단을 창립하여 그 지휘자가 되어서 반은 유고의 음악가로 활동을 하였다. 또한 나중에는 빈 음악원의 교직도 겸무하였다.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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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 Rose(1918- ? ) 워싱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첼리스트이며, 1951년까지 7년간 뉴욕의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 첼로 주자로 있었고, 그 뒤 솔로이스트로 활약하였으며, 수턴, 이스트민과의 3중주로서도 주목을 끌었다. 커티스 음악원에서 자르몬도에게 사사하였다.

장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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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Gendron(1920- ) 프랑스의 중견 첼리스트. 니스 태생으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을 하여 첼로과를 1등으로 졸업한 뒤 카살스에게 사사하였다. 독주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이며, 한편으로 서독일, 자르브뤼켄 음악원에서 교편도 잡았고,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의 원전판(原典版)을 발견하여 초연하기도 한 연주가로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연주는 긴장된 기교로 딱딱하나 화려함을 지니고 있어, 프랑스인이면서 베토벤, 브람스 등 독일의 작품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이고 있다.

샤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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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il Shafran(1923- ) 1950년 프라하의 국제콩쿠르에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제1위에 입상한 구소련의 첼로주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첼로의 명수였던 아버지와 슈트리메르에게 배우고, 14세로 전 소비에트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뒤 다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도 배웠다.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서정적인 예풍(藝風)을 지녔고, 독주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슈타르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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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os Starker(1924- ? ) 1954년에 미국의 시민권을 얻은 헝가리 출신의 첼리스트로서,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돌프 시퍼와 레오 베이넬에게 사사하고, 10세로 부쿠레슈티에서 공개 연주를 하였다. 1946년에 조국을 떠나,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댈러스 교향악단, 메트로폴리탄가극장 관현악단, 시카고 교향악단의 수석 첼로 주자를 역임하였고,1959년부터 독주 활동에 전념하였다. 경이적인 기교와 음악적인 깊이를 공유하여 현대 최고의 첼리스트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거주지인 시카고에 가까운 인디애나폴리스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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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islav Rostropovich(1927- ) 구소련이 자랑하는 경이적인 명첼리스트로서, 그의 명성은 스타르케르와 푸르니에를 능가하는 바가 있다.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수도 바쿠에서 태어나, 4세 때 모스크바로 이주, 코조르포프에게 사사하였다. 10세로 데뷔하였고, 1948년에 모교인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도 겸하였다. 1945년의 전 소련 콩쿠르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콩쿠르에 연속 제1위의 입상을 기록하였고, 리히텔과의 2중주, 기레리스와 코간 및 코간과 바르샤이와의 3중주도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짜임이라고 칭송되고 있었다. 레퍼토리는 매우 넓으며, 많은 작곡가가 그에게 작품을 증정하였으며, 고금의 첼로 명곡의 세부까지 치밀하게 연마된 정력적인 연주는 절찬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제1급의 솜씨를 보여 주었다.

후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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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Chuchro(1941- ) 수크 3중주단의 창립 이래의 멤버(한때 은사인 사드로와 교체하였다)이며, 1959년 멕시코의 카살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체코의 젊은 첼로 주자이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사드로에게 사사하였고, 위에 적은 것 이외의 콩쿠르에서도 상위로 입상하고 있다.

듀 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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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ine Du Pre(1946-1987) 영국의 신진 여류첼리스트이며, 카살스로부터도 배운 바 있다. 1962년에 런던에서 데뷔하였으며, 1966년부터 다시 모스크바에서 로스트로포비치에게도 사사했다.

보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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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r Borowizky(1930- ) 1954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 첼로주자로 활약한 명수이다. 독주자로서도 서독일 최고의 호프로 지목되고 있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52년에는 뮌헨, 1953년에는 제네바의 국제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한 바 있다.

Yo-Yo Ma(1955- ) 프랑스 파리 출생. 줄리아드 음악학교, 하버드 대학 졸업. 고전·낭만파 연주. 대만계 중국인인 음악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사이틀로 데뷔한 6세 이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7세에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천재적 재능을 로즈 등에게 배움으로써 한층 발전시켰고, 8세에 슈테른과 공연했다. 번스타인이 진행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첼로의 역량과 함께 인기도 올라가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폰 오케스트라와의 공연을 비롯하여 빈 폰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폰 오케스트라 등에도 초청공연을 갔다. 높은 기교와 아름답고 시원한 음색을 들려준다. 게다가 동양인 특유의 서정성과 섬세한 감정표현이 있고, 음색이나 프레이징의 미묘한 뉘앙스는 동양적 전통음악과도 통한다.

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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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림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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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iam Primrose(1903-1982) 당대 유일이라고 호칭될 만한 비올라의 명수이며, 전성기를 보낸 만년에도 그의 연주의 빛남은 비할 데가 없었다. 글래스고 태생이며, 바이올린 주자로 데뷔하였으나 1925년부터 다시 이자이에게 사사하였고, 이자이의 권유로 비올라 주자로 전향하였다. 독주자 겸 실내악 주자로서의 경력은 길며, 후에도 하이페츠 또는 피아티고르스키와 함께 활발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바르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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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Barshai(1924- ) 헝가리 태생의 비올라의 명수로서 오래도록 구소련에서 활약하였으며, 모스크바 실내관현악단의 창립자이자 지휘자로서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출신학교는 모스크바 음악원이고 졸업한 다음해(1949) 부다페스트의 세계청년학생제 및 국제콩쿠르에서 최고 명예상을 받았다. 코강, 로스트로포비치와 편성한 현악 3중주단도 유명하였다.

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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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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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y Laskine(1893- ? ) 1948년부터 파리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했던 20세기 최고의 여류 하프 주자이며, 아니 살랑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한 하프 주자를 문하에서 배출하였다. 파리에서 태어나 핫세르만에게 사사하였고, 독주자로서 구미(歐美)에서 활약하였고,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작품의 헌정을 받았다.

자발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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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anor Zabaleta(1907- ? ) 독주자로서 국제적으로 활약한 에스파냐의 하프 주자. 에스파냐의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음악원 재학중에 일찍이 공개석에서 연주를 하였고, 1925년 다시 파리에서 투르니에에게 배워 그 해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구미의 교향악단과의 협연만도 대단히 많았으며, 여가에는 후진 지도에 힘썼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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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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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s Segovia(1893-1987) 20세기 기타음악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선각자로서, 첼로의 카살스, 하프시코드의 란도프스카와 함께 알려진 대가이다.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독학으로 기타를 습득하여 에스파냐 전국에서 연주했고, 30세 때 파리에서 리사이틀을 가져 기타 음악 진수를 유럽악단에 보였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기타 주자가 배출되고 있음은 세고비아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퐁세라든가 가스테르누오보데데스고, 그 밖의 현대작곡가들이 기타를 위한 새로운 곡을 작곡하였는데 이는 세고비아에 의해 기타음악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현대 기타주법의 시조로서도 그의 이름은 불멸할 것이다.

알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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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rindo Almeida(1917- ? )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양칼잡이로 유명한 브라질의 기타 주자이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습득하였고, 전쟁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1950년 카네기홀 리사이틀에서 클래식의 연주가로서도 대호평을 받아 그 후부터 스타적 기타 주자로 널리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예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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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o Yepes(1927- ? ) 세고비아에 계속되는 에스파냐의 기타 명수로서,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의 반주음악을 단독으로 담당한 데서 일약 그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퍼졌다. 에스파냐의 무르시아주에서 태어나, 세고비아와 같이 타르레가 문하인 데 라 마사에게 사사하였고, 1947년에 데뷔하였으나 다시 피아노를 기제킹에게, 바이올린을 에네스코에게서 배워, 기타의 표현력을 한층 풍족하게 하기 위한 연구를 하였다. 전위적인 작품도 즐겨 연주하여, 레퍼토리의 광대성으로도 주목받았다.

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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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n Bream(1933- ) 천재적 기타 주자이며, 류트 음악과 연주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다. 런던 근교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에서 배웠고, 어릴 때부터의 기타와 류트에 대한 애호와 실기(實技)의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세고비아 격려와 지침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엘리자베스 왕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플렉트럼음악의 풍부한 보고를 차례로 발굴하여 세상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였다. 기타·류트 주자로서만이 아니라 현대에 가장 주목되는 젊은 비르투오소의 한 사람이다.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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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iliams(1941- ) 세고비아에게서 배운 영국의 젊은 기타 주자.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태어나, 1951년 런던으로 가서 왕립음악원을 졸업하였다. 기타의 왕자라는 별호와 같이 앞으로의 대성이 기대되고 있는 명수(名手)로서, 기교적으로는 이미 대가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