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러시아

글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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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hail Ivanovich Glinka(1804-1857)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고 한다. 러시아 민요와 민족무용의 리듬에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가지며, 게다가 당시의 낭만파음악의 양식도 흡수하여, 처음으로 러시아 국민음악을 창조하였다. 즉 가극, 관현악곡, 성악곡 등의 각 장르에 걸쳐 러시아 음악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창조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러시아 국민악파는 물론 차이코프스키 등도 글린카의 음악을 존중했고, 그것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1804년 6월 1일 스몰렌스크의 노보스파스코 마을에서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귀족가정의 음악적 환경(음악살롱) 속에서 자랐다. 글린카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민의 노래를 많이 들었고, 러시아 민요 특유의 합창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3세가 된 글린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숙학교에 들어가 6년간 학교생활을 보냈다. 그때 피아노와 작곡을 당시 러시아에서 평판이 높던 피아니스트 존 필드(1782-1837)에게 배웠고, 살롱 음악의 작곡도 시도하였다. 1822년, 학교를 나오자 휴양차 카프카즈(코카서스)로 갔다. 여기서 카프카즈 민족의 축제 때 그들의 경쾌한 춤이라든가 민족색이 짙은 민요를 들었다. 1824년에는 철도성에 근무하였으므로 음악공부를 규칙적으로 할 여유가 없었으나, 그 때부터 푸슈킨이나 그 밖의 작가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 뒤 1830년 봄,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밀라노 및 그 밖의 이탈리아의 도시에 살면서 음악적으로 얻은 바가 많았다. 1833년,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에 5개월쯤 베를린에서 지크프리트데인(1799-1858)으로부터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워, 자기의 지식을 체계화할 수가 있었다. 1835년부터 러시아 최초의 국민가극 <이반 수사닌>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이 가극은 1836년 11월 27일 <황제께 바친 목숨>이라는 제명(題名)으로 니콜라이 1세가 임석한 궁정극장에서 초연(初演)되었다. 1837년 1월 1일자로 제실성가대(帝室聖歌隊,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합창단)의 악장 지위에 올라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그해의 1월 19일,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이 37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글린카는 푸슈킨의 시로 가극을 작곡하였다. 1835년 봄, 마리아 베트로비나와 결혼하였으나 이 결혼은 불행에 그쳤고, 1841년 5월에 이혼하였다. 그 뒤 누이동생과 살면서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작곡을 결심하여, 성악대 악장직도 사임하고 이에 전념하였다. 괴로운 생활 속에서 제2의 가극 <루슬란>을 1842년 11월 27일에 완성하였다. 1844년 이후 고독한 그는 외국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 이해에는 프랑스에서 베를리오즈의 환영을 받아, 다음해 3월 16일 베를리오즈의 주선으로 글린카 작품연주회가 개최되었다. 그로부터 에스파냐로 음악여행을 떠났는데 그 곳에서 41세의 생일을 맞았다. 에스파냐에서 기타 음악에 흥미를 가져, 어떤 기타 연주가를 숙소로 초대하여 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에스파냐 특유의 무곡인 호타에 흥미를 가진 것도 이 무렵이다. 마드리드의 생활은 1847년까지 계속되고, 모국으로 돌아와서는 스몰렌스크·바르샤바·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냈다. 1852년 봄, 세 번째의 해외여행길에 올랐으나, 1854년부터 1856년 봄까지 상트페테부르크에서 누이동생인 쇼스타코바와 지냈다. 이 시기는 작곡보다도 자전적 수기의 집필에 시간을 보냈다. 당시 글린카의 집에서 매주(每週) 음악의 밤이 개최되었는데, 당시는 이미 가극 <루살카>의 작곡가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던 다르고미시스키나, 후에 러시아 국민악파의 지도자로 된 스타소프, 거기에다 젊은 바라키레프, 세로프 등이 이 모임에 출석하였다. 1856년 4월, 베를린으로 가서 음악이론의 연구를 시작했으나 간을 앓아 1857년 2월 15일에 그 곳에서 별세했다. 글린카의 음악은 합리적인 구성, 깊은 이지(理智)와 미묘한 정감(情感),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대표작은 뭐라 해도 2개의 가극이다. <이반 수사닌>은 당시의 가극이라 하면 으레 왕자와 왕녀가 등장하는 데 반해 러시아의 농민·민중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루슬란>에서는 동양적인 이국정서와 색채적인 관현악법이 특출하다. 관현악곡 <카마린스카야>(1848)는 2개의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서곡풍으로 만든 것이며, 관현악법은 러시아 음악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환상적 원무곡>(1838), <아라곤의 호타>(1842), <마드리드의 밤>(1851) 등의 관현악곡이 있다. 그는 가곡에서 많은 명곡을 남겼고, 실내악곡에서는 피아노·클라리넷·파곳을 위한 <비장(悲壯) 3중주곡>(1826-1827), <현악4중주곡>(1830) 등이 있다.

다르고미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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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Sergeyevich Dargomizhsky(1813-1869) 글린카의 직접적 후계자이며, 또 러시아 국민악파에로의 가교(架橋)가 된 작곡가이다. 1813년 2월 24일 아버지의 영지(領地) 다르고미슈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6세경에 피아노를 배우고, 뒤에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웠다. 1839년,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의한 가극 <에스메랄드>를 썼다. 1843년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에 몸을 바쳐, 1855년에 대표적인 가극 <루사르카>를 작곡하였다. 그가 성악을 가르칠 때 그의 주변에는 젊은 음악가가 모였다. 무소르그스키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경(生硬)한 말'을 토대로 한 낭영적(朗詠的)인 멜로디는 다르고미슈스키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1867년, 러시아 음악협회장으로 선출되어 국민악파의 운동을 측면에서 원조하였다. 1869년 2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앞서 말한 가극 외에 가곡에서 독특한 형식을 창조했는데, 그 중에서도 <늙은 병장>, <9등 문관> 등이 유명하다.

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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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Nikolaievich Serov(1820-1871) 작곡과 함께 평론을 써서 러시아 국민음악의 원리를 이론화하였다. 182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탄생하여 1871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1863년까지 관직에 있었으나 1863년에 가극 <유디스>가 상연되고, 그것이 성공한 후 외유하여 바그너를 알게 되어 서신을 주고받았다. 1851년 이후 20년간 평론할동을 하였다. 작곡으로는 가극 <로그네다>(1865), <적의 힘>(1867-1868) 외에 가곡 등이 있다.

보로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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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Porfirevich Borodin(1833-1887) 화학자이며, 여성의 교육·계몽 면에서의 사회활동에도 헌신하였고, 여가에 작곡을 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작품의 수는 적으나, 각 장르에서 우수한 개성적인 작품을 남긴 점에서 음악사상 매우 드물게 보는 천재라고 하겠다. 1833년 11월 12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하여 1887년 2월 27일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10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3세에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썼다. 젊었을 때에는 실내악에 흥미를 가지고, 첼로를 켜서 가정의 실내악단에 참가하였다. 1850년 육군 군의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도 음악을 계속하였다. 1860년 초에는 슈만의 작품에 마음이 이끌렸으며, 그 무렵 여류 피아니스트인 에카테리나 세르게에비나 푸로토포포바와 알게 되어, 1863년에 결혼하였다. 그 당시 발라키레프의 무리에 가담하고, 1867년에 <제1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곡이 1869년에 연주되자 매우 호평을 받았다. 이미 <제2교향곡>에 착수하였는데, 1877년에 이르러서야 완성하였다. 한편, 가극 <이고르공(公)>의 구상을 세우고 있었으나 결국 미완성에 그쳤다. 이 가극은 그의 사후 10년이 지나(1890년 10월) 그라즈노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필편곡(加筆編曲)으로 초연되었다. 보로딘의 음악적 특색은 사시적(史詩的) 또는 서사시적인 조용함과 막힘없는 평활함, 그리고 길게 퍼져나가는 큰 규모를 가진 창조력에 의한 폭과 크기에 있다. 이 음향에 가득찬 힘찬 음악은 극적 긴장에 이르면 점차 흔들려서 흥분상태에 달하며, 자연스레 발생하는 격발(激發)이 음악을 휘어잡아 그 속에서 에너지와 격정이 용솟음친다. 게다가 그 음악 속에서는 언제나 생생한 멜로디가 울려나온다. 또한 보로딘의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글린카의 밝음이며, 남성적인 우미성(優美性)이다. 그는 무소르그스키와 달라 주위의 생활 속에 조화가 잡힌 요소를 발견하고, 부정적(否定的)인 현상도 낙천주의 속에 승화시킨다. 그가 묘사한 <주정뱅이>의 장면(<이고르 공>에서는 폭력과 소란이 일어나도 밉지 않은 웃음이 솟는다. 거기에는 악의가 없다. 무소르그스키가 마음으로부터 미워한다고 하는 대목에서도 그는 마음으로부터 즐거워하는 식이다. 보로딘은 음악 속에 대중적인 축제라든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기쁨과 만족의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은 낙천주의는 일면에서 보면 피상적이며 소시민적인 쾌락으로 도피하는 위험성이 있지만, 그것이 보로딘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원만한 인품과 미래를 믿고 인간을 믿는 과학자의 세계관에서 나온 낙천주의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보로딘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대표작은 <제2교향곡(용사)>(나단조, 1877), <현악 4중주곡 제1번>(가장조, 1875-1879), 동 <제2번>(라장조, 1881-1885),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1880), 가극 <이고르공(公)>(1869-1870) 외 우수한 가곡을 들 수 있다.

이고르공(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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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or公 보로딘 작곡. 12세기에 저작된 <이고르공 군담기(軍談記)>에서 취재한 프롤로그와 4막 5장의 그랜드 오페라이다. 몽골·타타르의 침입을 받아, 이고르공(公) 부자(父子)가 원정을 나가 포로가 되었으나 운좋게 도망쳐 돌아온다는 이야기로, 제2막의 <타타르인의 춤>은 발레 음악으로 단독 상연되며 특히 유명하다. 보로딘의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에 의해 완성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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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Asia-草原- 보로딘 작곡(1880). 중앙아시아의 끝없는 초원을 낙타의 대상(隊商) 무리가 러시아병에게 호위되어 가까이 또는 멀리 가는 정경을 묘사한 명곡이다. 보로딘 특유의 그침없이 반복되는(오스티나트적) 리듬이 매끈한 멜로디와 얽혀 대자연을 배경으로 풍속적 파노라마를 전개하였다.

C sar Antonovich Cui(1835-1918) 국민악파 가운데서는 독창성이 약한 작곡가이나, 날카로운 평론으로 국민악파의 활동을 옹호한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35년 비르노시에서 출생하여 19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장교로서, 나폴레옹 전쟁 후 폴란드에 머무르면서 리트와 사람인 어머니와 결혼하였다. 퀴는 이 국제결혼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쇼팽에게 흥미를 가져, 당시 비르노에 살던 폴란드의 작곡가 모뉴슈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에 입학, 1857년 졸업 후는 동교 교수가 되었다. 1857년에 발라키레프와 교유하며 꽤 많은 가극·가곡·피아노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오늘날 가극으로 상연되는 것은 없고, 다만 가곡과 소품만이 연주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쇼팽과 슈만의 아기자기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미묘한 아름다움을 가지나, 힘찬 감동이나 큰 규모(스케일)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가극과 같은 큰 형식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그 점에 있다 하겠다. 가극으로는 <카프카즈의 포로>(1857-1858), <중국 관리의 아들>(1859), <윌리엄 라트크리프카>(1861-1868), 가곡에서는 마이코프, 하이네의 시에 의한 가곡집(1860년대와 1870년대), 푸슈킨, 네크라소프,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시에 의한 가곡집(1890년대와 1900년대), 거기에 피아노곡집(1880년대), 25의 피아노 전주곡(1890년대와 1900년대)이 있다.

발라키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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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y Alexeievich Balakirev(1837-1910) 작곡가로서는 피아노곡과 관현악곡에서 신선한 스타일을 창조하고, 러시아 국민악파의 지도자로서 러시아 음악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837년 1월 2일에 니주니노비고로드에서 태어나서 1910년 5월 28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별세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피아노를 배웠다. 그에게 음악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썼고 베토벤의 연구가이며 러시아 최초의 음악평론가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에비치 우루이비셰프(1794-1858)였다. 그의 집에서 연 음악회에서 발라키레프는 관현악의 지휘를 시작하였다. 카잔 대학의 수학과에서 2년간 배운 뒤 185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거기서 글린카와 알게 되었다. 다르고미슈스키, 퀴(1856), 무소르그스키(1857)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정력적이며 비상한 권위에 찼고, 박학다식하고 날카로운 비판력을 지닌 그는 그 주위에 유능한 젊은 작곡가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새 러시아 악파', '마그차야 쿠치카'(힘찬 친구들)라고 불리는 집단을 결성하였다. 그들의 슬로건은 '표현의 진실과 음악에 있어서의 국민성'이었다. 1862년 로마킨과 함께 무료음악학교를 열고, 안톤 루빈스타인의 음악원에 대항하였다. 1867년, 프라하로 가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미라>를 지휘하였고, 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음악협회 연주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작곡활동의 최성기(最盛期)는 6,70년이었다. 1874년부터 1881년에 걸쳐서 그는 정신적 위기에 빠졌다. 음악학교의 재정적 파산과 음악상의 반대자와의 투쟁에 지쳐 음악계로부터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힘찬 친구들'도 어느덧 흩어져 버렸다. 그 뒤, 재차 적극적으로 음악활동을 개시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조직적인 활동은 아니었다. 1883년부터 1894년에 걸쳐서 궁정 성가대의 악장이 되고, 1894년부터는 창작에 몰두함으로써 오래된 작품을 다시 고쳐 만들고 새로운 곡을 썼다. 만년의 생활은 이미 커다란 역사적 업적을 끝낸 뒤의 조용한 여생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주요 작품은 <세 개의 러시아적 주제에 의한 서곡>(1858), <리어왕> 음악(1856-1861), 서곡 <1천년>(후에 <루시>라고 개제)(1862), 교향시 <타마라>(1867), 피아노곡에서는 환상곡 <이스라메이>(1869), 그 밖에 가곡이 있다.

무소르크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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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st Petrovich Musorgski(1839-1881) 러시아 국민악파 중에서 가장 특출한 개성을 지녔고 농민적인 것, 민중적인 것에 특히 강한 애정을 기울인 작곡가였다. 1839년 3월 21일 푸스코프현 카리예보 마을 부모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10세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양친은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일찍부터 어머니의 피아노 교습을 받았으며, 뒤에는 전문적 여교사에게서 배웠다. 7세 때 리스트의 소곡을 연주하였고, 2년 후에는 무소르그스키가(家)의 사교회에서 존 필드의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1849년 1가(家)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무소르크스키는 당시 유명한 음악교사 안톤 아우구스트비치 게르케(1812-1870)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852년 가을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가, 1856년에 사관학교를 마치자 프레오브라졘스스키 기병연대에 입대하였다. 1856년 말, 동료의 한 사람이 다르고미슈스키를 소개해 주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연주회에서는 러시아 음악을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그는 글린카와 다르고미슈스키의 음악을 듣고 새로운 음악세계를 발견하였다. 그 중에 다르고미슈스키가 있는 곳에서 퀴를 만나고, 발라키레프에게 소개되었다.다시 블라디미르 바실리에비치 스타소프(1872-1915)도 만나 사상적으로도 계발(啓發)되었고,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의 작곡에 즈음해서는 자료제공을 비롯해 조언을 받았다. 무소르크스키는 발라키레프에 지도되어 러시아 및 서유럽 작곡가의 작품을 분석하였고,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최초는 정기적인 레슨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뒤에는 친구들끼리의 회담이라는 식으로 변하였다. 그는 음악을 일생의 사업으로 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아직 군직(軍職)은 그만두지 않았다. 스타소프는 유명한 시인 레르몬토프도 군직에 있으면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고 말하며 그만두는 데 반대하였다. 그런데 전근 명령이 내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발라키레프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작곡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버리는 것이었다. 1858년의 여름, 무소르크스키는 군직을 내놓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66년 가을부터 가극 <보리스 고두노프>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다음해 말에는 피아노 스코어를 서술했고, 그 다음해의 끝에 완성하였다. 그로서는 매우 빠른 속도였다. 이 스코어(總譜)를 제실극장에 제출하였으나 상연통지는 1년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오지 않았다. 1871년 2월, 상연 거부의 통지가 왔다. 제실극장의 간부들이 이 혁신적인 가극에 당황하고, 동시에 새로운 러시아 음악의 진보적인 조류에 너무나 무관심하였던 것이 이 상연거부로 명백히 표시되었다. 스타소프는 중창과 합창이 너무 많았고 개개의 등장인물에 있어 감동적인 장면이 적은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충고하였다. 이 충고에 따라 '폴란드 1막' 등을 더하고, 끝장면의 '크롬의 장(場)'도 새로 써넣었다. 그리하여 1872년 재차 제실극장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극장측은 상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극장으로부터 묵살당한 이 명작은 가정적인 그룹에서 상연되고 있었다. 어느 날 마린스키 극장의 배우들이 이를 보고 매우 감격했다. 그들의 강한 요구가 있어서 마린스키 극장의 지배인은 이 가극의 3개의 장면, 선술집의 장(場)과 폴란드의 전막(全幕)을 자기의 자선흥행에 올리기로 하였다. 개인적인 공연에는 극장위원회의 의결은 필요없었다. 이리하여 1873년 2월 17일에 일부분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음악애호가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전막 공연의 요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1874년 1월 27일, 마린스키 극장의 인기가수 프라트노바의 축의(祝儀)흥행으로서 전막공연이 실현되었다. 무소르크스키는 다시 가극 <호반시치나>와 <소로친스크 시장(市長)>의 구상을 세워 작곡을 진행하였으나 결국 미완성인 채 1881년 3월 16일에 육군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은 앞서의 가극 외에 <민둥산(벌거벗은 산)의 하룻밤>(1867)과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1874)이 가장 유명하지만, 가곡으로도 걸작인 <벼룩의 노래>를 비롯, 가곡집 <태양없이>(1874)와 <죽음의 노래와 춤>(1875-1877) 등 극히 개성적인 선율과 혁신적인 화성을 지닌 명곡(名曲)을 남겼다.

보리스 고두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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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Godunov 무소르크스키 작곡. 푸슈킨의 시극에 의한 것으로 어린 황태자를 사살하고 제위에 오른 보리스의 양심의 가책, 모스크바 궁정 내의 귀족의 파벌적 음모, 민중의 고뇌 등이 교차하는 극히 드라마틱한 가극으로, 본국 이외에서도 수시로 상연되는 걸작이다. 낭독조(朗讀調)의 영창(詠唱), 민중의 합창에서도 무소르그스키의 독창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 편곡이 쓰이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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展覽會-繪畵 무소르크스키 작곡(1874). 화가 가르트만을 추도하는 전람회가 개최되어 무소르크스키는 친구의 그림에 깊은 감동을 받아 10장의 그림 인상을 음악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옛성'에서는 서정시적인 중세적 조용함이 있고, '두 사람의 유태 사람'에는 날카로운 캐리커처가 표현되고 있다. 이 곡은 라벨에 의하여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었으나 원곡은 피아노곡이다.

민둥산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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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르크스키 작곡의 환상곡. 처음 1867년에 작곡, 그 뒤로 여러 차례 개작하였다. 악마들이 나타나서 이상한 술잔치를 벌이다가 새벽종소리와 더불어 악마들이 사라진다는 환상적인 장경(場景)을 묘사한 것이다. 격심한 리듬의 변화와 선명한 회화적 색채는 그의 독특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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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Ilich Tchaikovsky(1840-1893) 발라키레프 일파의 국민악파와 함께 글린카의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전당을 구축하였다. 게다가 한층 넓은 시야로 유럽 음악의 수준에까지 높인다는 뜻에서 전자가 이루지 못한 일을 완성하였다. 그는 음악의 민족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음악예술의 보편성을 중시하였다. 사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친근해 있는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돼있다. 1840년 5월 7일에 우랄 지방의 워트킨스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산기사이며 국영공장의 공장장이었다.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나 전문적 음악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당시의 중류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법률학교에 들어갔다. 185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를 나오자 사법성에 근무하였다. 재학 중의 루돌프 쿤칭겔(1832-1913)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나 경제상적인 사정으로 3년쯤 해서 그만두고 말았다. 이 스승은 차이코프스키의 소질을 인정하였지만, 관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음악을 공부할 것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리생활로 접어들게 되자 음악에 대한 매력이 도리어 강해졌다. 무능한 한 관리로 평생을 마친다는 데 의문이 생겼다. 그리하여 1860년에 러시아 음악협회가 음악교실을 개설하자 이듬해,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그는 이 교실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1862년에는 이 교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미 22세가 돼 있었던 차이코프스키는 이 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음악원장은 리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피아니스트라고 칭해졌던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이었다. 1865년 음악원을 나오자 모스크바 음악원에 초청되어 1878년까지 교단에 서서 작곡과 평론으로 다방면의 활동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안톤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5-1881)이 음악원장으로 있었다. 동생은 형에 못지않은 피아니스트이며, 또한 지휘자로서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니콜라이를 중심으로 한 모스크바의 예술가 서클이 있었는데, 유명한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1813-1886)와 글린카의 이해자이고 뛰어난 문예평론가인 블라디미르·오도예프스키 공(1803-1869), 그 위에 배우와 시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 서클의 근저에는 1860년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사상의 조류가 있어, 그 영향을 받았다. 1878년부터 그는 음악원을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하였다. 한편 1877년 7월 6일, 제자의 청혼으로 결혼하였으나 불과 2개월 뒤에 이혼하고, 그 후로는 독신으로 지냈다. 그 직전에 나데즈아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연 6천루블의 원조를 받게 되어 안심하고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9세 위의 미망인으로서 교양도 깊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음악과 문학에 관하여 자세한 서신 왕래가 있었지만 결국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종종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1891년 3월에는 파리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그로 인해 카네기홀의 최초 흥행에 초대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예상 외의 환영을 받았으며, 뉴욕 외에 워싱턴, 필라델피아, 보스턴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5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친구들과 다시 시골로 달려갔다. 그러나 프로로푸스코에 마을도 숲이 벌채되었기 때문에 마이다노보로 옮기고, 그로부터 크린에 적당한 집을 발견하여 여기에 거처를 정했다. 그는 조용한 교회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현안의 <제6교향곡>의 완성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교향곡을 지휘한 지 수일 후에 콜레라로 급사하였다(1893년 11월 6일). 크린의 집은 지금 차이코프스키 기념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작품은 매우 많으나, 우선 교향곡으로는 <제4>(1877), <제5>(1888), <제6>(1893)이 유명하다. 이 3대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모두 작곡가의 인생관을 교향곡양식을 빌려 고백한 것으로, 교향곡사상(史上) 하나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았다. 가극은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인데 <에프게니 오네긴>(1877-1878)과 <스페이드의 여왕>(1890)이 가장 유명하다. 3개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18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1892)은 모두가 고전적 명작으로 되었다. 관현악곡에는 발라키레프 일파와의 교섭이 있었던 시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운지나>(1869), <프란체스카 다 라미니>(1876)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슬라브 행진곡>(1876), 대서곡(大序曲) <1812년>(1882), <이탈리아 기상곡(綺想曲)>(1880)도 유명하다. 피아노 협주곡은 3편이 있는데 <제1>(1875)이 가장 유명하다. <바이올린 협주곡>(1878), 현악 4중주곡 제1번(1871), 피아노 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1882), <현악합주를 위한 세레나데>(1880) 등의 기악곡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피아노곡으로는 <4철>(1876), <어린이의 앨범>(1878) 등의 소품 외에 그랜드 소나타(작품37, 1878)가 주목된다. 이상의 것 외에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1876)은 첼로 연주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곡이 되고 있다. 가곡으로는 그의 특유한 서정성과 아름다운 선율에 가득찬 명곡이 많다. <6개의 로망스> 작품6(1869), 작품25(1874), 작28(1875), <7개의 로망스> 작품47(1880), <12개의 로망스> 작품60(1886) 등 103곡(이 가운데서 16곡은 동요)에 이르고 있다.

교향곡 제6번 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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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響曲第六番<悲愴> 차이코프스키 작곡 B단조, 작품 74(1893). 최후의 교향곡이며, <비창>의 표제는 출판사의 요구로 붙여진 것이다. 원래는 표제가 없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사상과 감정, 즉 19세기 말 러시아의 어두운 시대에 산 예술가의 인생관을 깊은 정감(情感)으로써 표현했다고 보아야겠다. 첫머리의 침통한 아다지오는 당장에 깊은 슬픔으로 이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제1악장의 제2주제는 무엇인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이며, 제2악장은 5박자의 변형된 원무곡이고, 제3악장은 타란텔라와 행진곡의 조합이며, 종악장은 다시 비통한 아다지오로 된다. 이 같이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매우 새로운 특징을 지니는 교향곡이다.

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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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鳥-湖水 차이코프스키 작곡 작품20 (1875), 발레. 초연 때는 연출이나 무대장치가 서툴렀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았으나, 작곡가의 페티파와 이바노프의 연출로 처음으로 그 참값이 인정되고, 로맨틱 발레의 고전으로서 각국에서 상연되기에 이르렀다. 전체에 넘쳐흐르는 감미로운 선율은 오데타 공주의 슬픈 운명을 묘사하였고, 또한 제3막의 궁정무도회의 성격무용에서는 민족적 리듬을 지닌 소곡을 차례로 전개한다. 오데타 공주의 주제음악은 특히 유명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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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女 차이코프스키 작곡 작품66(1890), 발레. 펠로의 동화로 한 것으로, 물론 환상적인 것이나, 음악은 <백조의 호수>와 비교하여 퍽 밝은 감이 있다. 악의 요정 카라보스와 우아한 리라의 정(精)과의 대조로서, 정의가 악(惡)에 이기고, 백년 잠에 빠져 있었던 오로라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써 잠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이나, 제3막의 결혼식에서는 펠로의 동화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며 다채로운 음악을 전개한다.

호두까기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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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桃-人形 차이코프스키 작곡 작품71 (1892), 발레. 호프만의 동화로 한 것으로, <백조의 호수>에 이어 널리 상연되었고, 또 모음곡(組曲)으로서 종종 연주되고 있을 정도로 그 음악이 매우 대중적이다. 모음곡엔 매우 선명한 리듬의 행진곡, 우아한 꽃의 원무곡, 성격무용의 트레팩, 아라비아의 춤, 중국의 춤, 풀피리의 춤 등이 포함되며, 소년·소년들도 좋아한다.

바이올린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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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in 協奏曲 차이코프스키 작곡, 라장조, 작품35(1878). 작곡가의 깊은 정감, 러시아적 애수에 찬 것으로서 매우 유명하다. 제1악장은 형태대로의 소나타 형식이어서 달콤한 선율이 매력적이고, 제2악장의 칸초네타는 약음기(弱音器)를 지닌 독주악기가 아름다운 선율을 부르며 종악장은 밝은 기분에 차 있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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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協奏曲第一番 차이코프스키 작곡 내림나장조, 작품23(1875). 피아노 협주곡은 3개가 있으나, 제1번이 유명하다. 제1악장은 매우 웅대한 서주로 시작되고, 민요풍의 제1주제로 옮는다. 이것은 우크라이나의 맹인음악사(師)가 노래하던 선율을 취했다고 한다. 제2악장은 서정적인 조용한 생각에 잠기는 느낌이지만, 중간부는 프랑스의 샹소네트로부터 따온 스케르초풍의 경쾌한 부분이다. 종악장에서는 농민이 봄의 환희를 노래하는 듯한 밝음이 느껴지며, 생명의 약동에 차 있다.

안단테 칸타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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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ante Cantabile 차이코프스키 작곡(1871). 현악 4중주곡 제1번의 제2악장이지만, 이는 바이올린 독주곡에 편곡되어서 특히 유명하며, 이 악장만 단독으로 현악합주 등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림스키코르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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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Andreievich Rimsky-Korsakov (1844-1908) 국민악파의 5사람 중에서 가장 넓게 활동하였고, 관현악법에 새로운 면을 개척하였다. 특히 만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새로운 작곡가를 육성한 공적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1844년 3월 18일 노브고로드현 치프빈시에서 태어났다. 185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해병학교에 입학하여 1862년에 졸업하였다. 1861년에는 발라키레프 그룹에 참가하였고, 1865년 원양항해 중에도 작곡을 계속하였다. 187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과 관현악법의 수업을 담당하고, 본격적인 이론연구를 개시하였다. 1874년부터 1881년까지 발라키레프의 무료 음악학교장 겸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다채로운 작곡활동과 병행하여 음악 및 사회사업, 그리고 교육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9년에는 파리의 러시아 음악 연주회에서 지휘봉을 들었고, 1886년부터 1900년까지 미트로판 페트로비치 벨랴예프(1836-1904)에 의해 조직된 교향악연주회에서 지휘하였다. 벨랴예프는 유명한 음악애호가이며, 악보 출판사업과 연주회활동으로 러시아 음악발전에 이바지한 중요한 인물이다. 1905년 3월 27일, 코미살제프스카야의 연극장(演劇場)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불사신(不死身) 마왕(魔王)>이 상연되었다. 그후 이 음악원에 봉직하면서 교육활동에 헌신하다가, 1908년 6월 21일 새벽에 영면(永眠)하였다. 작품은 각 장르에 걸쳐 매우 다채로우나, 우선 가극으로는 초기의 <푸스코프의 딸>(1861-1871)을 비롯하여 <스네그로치카(雪娘)>(1881), <사도코>(1895-1896), <황제의 신부>(1898), <살탄왕의 이야기>(1898), <불사신 마왕>(1901), <보이지 않는 키테지시(市)의 이야기>(1903-1904), <금계(金鷄)>(1905) 등이 유명하다. <금계>는 전제정치를 풍자하는 것이라 하여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화려한 관현악법을 보인 것으로서 <에스파냐 기상곡(綺想曲)>(1887), <셰헤라자데>(1888)는 널리 환영받고 있으며, 가곡에도 서정적인, 또 동양풍의 독자적인 맛을 지니는 걸작이 많다.

에스파냐 기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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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 綺想曲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곡 작품34(1887). 그의 색채적인 관현악법의 특색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다. 기상곡의 이름대로 일정한 형식은 없으며, 에스파냐의 민요와 춤곡·풍경 등을 매우 선명한 관현악법을 써서 묘사하였고, 매우 맑고 매력적이며,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셰헤라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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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herazade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곡, 작품35(1888). '아라비아 야화'에 있는 몇 장면을 교향시곡풍으로 묘사한 교향모음곡. 즉 '바다와 신밧드의 배', '카란달공(公)의 이야기', '젊은 왕자와 젊은 왕녀', '바그다드의 축제·바다· 배는 청동의 기사가 앉아 있는 바위에 난파하다. 결말'의 4악장으로 되어 있다. 해군 장교로서 원양항해의 경험이 있으므로 바다묘사에는 현실감이 있으며, 동양적인 색채감도 그의 장기인 관현악법에 의해서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셰헤라자데의 주제는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리야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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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ol Konstantinocich Liadov(1855-1914)1855년 5월 11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시아 가극의 지휘자로 존경받고 있었다. 187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한때 음악원을 그만두었다가 1878년에 다시 입학하였다가 졸업 후 교사로서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의 문하로부터는 프로코피예프, 미야스코프스키가 나왔다. 18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하고, 그때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던 벨랴예프를 알게 되었다. 1880년 중엽에는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와도 사귀었다. 19세기 말경부터 러시아 민요의 수집에 흥미를 가져 이를 편곡하였다. 그는 1900년 초까지 40곡의 피아노 소품을 썼으나, 그 뒤의 것으로서 <관현악을 위한 8개의 민요>(1906), 교향모음곡 <바바 야가>(1904), <마의 호수>(1909), <키키모라>(1910) 등이 있다.

타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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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Ivanovich Taneiev(1856-1915) 작곡가이자 명피아니스트였으며, 동시에 이론가·음악교육가로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 음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56년 11월 25일에 블라디미르에서 태어났고 1915년 6월 19일에 모스크바 근교의 뒤디코보 마을에서 별세하였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1866년 가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 배웠다. 차이코프스키와의 친교는 평생 계속되었고, 그 기억은 그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1875년에 음악원을 졸업하고, 작곡과 피아노 부문에서 대금(大金)메달을 받았다. 1871년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와 러시아 각지를 연주여행하였고, 1879년 말에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음악가들과 만났다. 1878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을 그만둔 뒤 그 후임으로서 이론교수가 되었고, 1881-1888년까지 피아노 교수도 담당했다. 그리고 1883년에는 상급 작곡반도 담당하였으며, 1885-1888년까지 음악원 원장을 지냈다. 1889-1905년(음악원을 퇴직한 해)까지 다성법(多聲法)과 악식론(樂式論)의 수업만을 계속하였다. 옛 작곡가들의 다성형식 연구와 이 형식의 완전한 습득에 의한 대위법, 카논에 관한 뛰어난 분석적 저서를 썼다. 대표 작품으로서는 실내악곡으로 6개의 현악 4중주곡과 2개의 5중주곡(1892-1906), 기타의 곡으로 2개의 칸타타 <요안 다마스킨>(1884)과 <성가를 읽고>(1912-1914)가 있고, 가극으로 <오레스테아>(1887-1894)와 그 서곡(1889) 등이 있다. 그의 문하로부터는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코뉴우스, 바시렌코, 카투아르 등의 작곡가가 나왔고, 프로코피예프도 그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정규(正規) 이론연구에 들어갔다. 1880년,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자 "유럽 음악의 고전적 시대는 지나, 그것은 공연한 허영이나 매너리즘에 빠져 있으며,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 된 듯하다"라고 말하고, 유럽 음악의 고전을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의 작곡가라는 하는 자부심과 자랑을 품게 되었다.

이폴리토프 이바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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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hail Mikhailovich Ippolitov Ivanov(1859-1935) 1859년 11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방의 가치나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1935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별세하였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사키예프 성당 부속의 아동합창대를 위한 음악교실에서 배웠다. 그리고 16세 때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장학생으로서 입학하고, 1882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곡반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스)에서 음악활동을 개시하여 우선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극을 지휘하여 상연하였다. 1879년에는 발라키레프의 음악모임에 참가했고, 보로딘과도 친해졌으며, 1885년부터는 차이코프스키와도 사귀었다. 1893년까지 티플리스에서 살면서 그루지아 민족음악을 연구하였다. 1893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06년에는 원장이 되었고, 1917년 이후 음악원 총장이 되었다. 1925년 이후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새로 편곡된 <보리스 고두노프>를 상연하였다. 작곡도 가극·관현악곡 등이 있는데, <코카서스의 풍경>(1894)은 매우 유명하다.

글라주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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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Konstantionvich Glazunov(1865-1936) 1865년 8월 20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21일에 파리에서 객사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고, 1879년에는 발라키레프와 만나 고전음악, 특히 베토벤을 연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2년간 작곡을 배웠다. 1882년 3월 17일, 16세 때 어린 글라주노프의 <제1교향곡>이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初演)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 교향곡은 1884년의 바이마르 음악제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은 유럽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벨라예프는 그를 사랑하여 이 음악제에도 데리고 갔는데, 두 사람은 리스트와도 만났다. 같은 해에 차이코프스키와도 알게 되었고, 더욱이 타네예프와도 사귀게 됨으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가 지니는 음악예술의 최량의 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였다. 188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교향시 <스텐카 라진>과 <제2교향곡>을 썼다. 이 2개는 보로딘의 영향을 받아 썼다고 하며, 전자는 보로딘에게 바쳤다. 이 교향시곡은 민요로 노래불려진 극적인 장면을 교향적으로 그린 전형적인 표제음악으로서, <볼가강의 뱃노래>가 주제로 쓰이고 있다. 1887년, 보로딘의 사망에 따라 그 초고(草稿)를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정리하였고, 가극 <이고리공(公)>을 원작자의 마음이 되어 완성하였다. 또 미완성의 제3교향곡도 생전에 피아노로 들은 기억에 의해서 완성하였다. 18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가 되고, 1905년엔 음악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다작가(多作家)여서, 교향곡은 8곡―<제3>(1889), <제4>(1893), <제5>(1895), <제6>(1896), <제7>(전원, 1902), <제8>(1907) 중 제6이 대표작이다. 발레음악에서는 <4계절>(1899)이 유명하며, 이것은 모음곡으로도 되어 있다. 바이올린 곡에서는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1845-1930)에 바친 협주곡(1904)이 유명하며, 현악 4중주곡은 7곡, 피아노곡에선 <협주곡 제1번>(1910)과 2개의 관악곡(둘다 1901), 그 밖에 다수의 기악곡이 있다. 그는 원래 관현악곡과 기악곡의 작곡가로서 가극은 없고 성악곡도 적지만, 서정적인 가곡은 20곡쯤 작곡하였다.

칼리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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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sili Sergeievich Kalinnikov(1866-1901) 1866년 6월 13일에 오룔현(縣)의 보인이라는 마을에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그 무렵의 많은 음악가들과는 달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 지방에 있는 신학교 합창단에 참가하고, 14세 때에 합창단을 맡아 지도하였다. 1884년, 신학교의 4년과정을 마치자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1년간 배운 뒤 필하모니의 학교로 옮겨가 그리고리고리에프 같은 우수한 스승의 지도를 받을 수가 있었다. 장학금을 타기 위하여 작곡반의 공부와 함께 파곳반에 들어갔다. 이는 관현악단에 들어가 학비를 버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무리한 공부와 노동으로 결핵에 걸렸으나, 1892년 학교를 마치자 마루이 극장의 지휘자 채용시험을 치렀다. 그 심사위원에 차이코프스키가 있었는데, 젊은 작곡가의 스코어(總譜)를 보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를 격려하였다. 1895년에 제1교향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외국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이어서 1897년에 제2교향곡 A장조를 작곡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교향적 회화(繪畵) <삼나무와 종려나무>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마루이 극장의 주문으로 알렉세이 톨스토이(1817-1875)의 사극 <황제 보리스>의 음악을 작곡하였다(1899년 1월 상연). 결핵에 신음하면서도 마몬토프 가극장을 위하여 가극 <1812년>을 썼고, 1901년 1월 11일, 이 천재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스크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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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Nikolaievich Scriabin(1872-1915)극히 개성적인 작곡가이며, 그의 특이한 작품은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 독창성과 풍부한 재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872년 1월 6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톤 루빈스타인에게서 배운 피아니스트였으나, 스크랴빈을 낳고 오래지 않아 사망했으며, 친할머니와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1882-1889년까지 육군유년학교에서 배웠다. 그는 처음 게오르기 코뉴스(1862-1933)에게서 음악교육을 받고, 그 뒤 타네예프에게서 이론을 배웠다. 그는 그 무렵 이미 상당히 많은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눈에 띄게 발전하여 13-14세 때엔 음악원의 학생연주회(그땐 아직 음악원에 들어가지 않았다)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1888년에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는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에게서, 이론과 작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인 알렌스키(1861-1906)에게서 배웠다. 1893년에 최초의 작품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소년시절에 쓴 피아노곡으로서, 일부는 음악원 입학 전의 것이었다. 다음해 벨라예프와 만나고, 1895-1896년에 걸쳐 벨라예프는 그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에 걸치는 연주여행길에 데리고 갔다. 귀국 후에도 러시아 각지를 연주여행하였다. 1897년, 이사케비치라고 하는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남편 작품의 좋은 연주자가 되었다. 1898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으나, 1904년 봄에는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스위스를 정주지(定住地)로 하고 외국을 여행하였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명지휘자 니키슈의 지휘로 <신성한 시>가 초연되었다. 1909년 러시아로 돌아와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1915년 초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회를 몇 번 열었으며, 그 마지막은 4월 2일이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에, 윗입술에 생긴 종기가 원인이 되어 파상풍으로 4월 27일에 급사하였다. 스크랴빈의 작품은 시대의 격변을 반영(反映)하여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제3교향곡 <신성한 시>는 그의 정신적 과정을 보이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며, 추상적인 신비철학을 내용으로 하면서 음악 자체를 극히 아름다운 현실성을 띠게 하였다. 이런 점에 그의 음악에 이상한 매력과 깊은 비밀이 숨겨 있다. 교향곡은 앞서 말한 것 외에 <법열(法悅)의 시>(1907-1908)와 교향시 <프로메테>(1907-1910)가 있다. 이는 몇 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대규모의 종교극 <미스테리아>의 최초 스케치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10곡) 외에 피아니스트의 흥미를 끄는 10여곡의 소품이 있다.

라흐마니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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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Vassilievich Rachmaninov(1873-1943)차이코프스키의 흐름에 속하는 작곡가이며, 또한 세계적 명피아니스트이다. 1873년 4월 1일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음악을 애호하는 집이었고,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유년시대는 오네그라는 곳에서 보냈으나, 온 집안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자 9살이 된 그는 음악원에 들어갔다. 1885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리스트의 제자인 명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지로티(1863-1945)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왔을 때 지로티의 제안으로 모스크바로 불려서 유명한 피아노 교수 스베레프의 제자가 되었다. 스크랴빈도 같은 해에 이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선생은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인정하여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4년간이나 스베레프의 집에서 지냈으며, 작곡에 흥미를 느끼자 온종일 피아노를 치는 것이 역겨워져서 그 집을 나왔다. 1889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지로티의 피아노관에 들어가 타네예프에게서 이론을 배웠다. 1891년 음악원의 피아노과를 졸업하였고, 1년 뒤에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시험에서 푸슈킨의 시 <집시>에 의한 가극 <아레코>를 작곡하였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이 작품을 격찬하였고, 1893년 봄 볼쇼이 극장 상연에 협력해 주었다. 그는 연주활동과 작곡활동을 병행하면서, 1892-1894년에 걸쳐서 피아노 시리즈, 가곡, 기악곡 등을 작곡하였다. 1895년에 완성한 제1교향곡은 1897년 3월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나 실패하였고, 그 뒤 수년간 큰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1897년, 모스크바의 마몬토프 가극장의 부지휘자가 되고, 샤리아핀과 친교를 맺었다. 1899년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되었다. 1904년-1906년에 걸쳐서 볼쇼이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되고, 글린카의 <이반 수사닌>의 새로운 상연이라든가 차이코프스키의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의 재연(再演)을 지휘하였다. 1906년 봄, 가족과 함께 플로렌스로 갔다가 다시 드레스덴으로 옮겨가, 거기서 3년간을 지냈다. 1909년 봄부터 다시금 모스크바에서 살았으며, 유럽이나 미국으로 연주여행차 떠났었다. 1917년,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자 곧 스위스로 망명한 다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영주하였다. 러시아를 떠난 그는 연주활동에 열중하여 유럽 각지를 돌았다. 작곡활동은 중단되었으나, 1928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이어서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狂詩曲)>(1934), <제3교향곡 A단조>(1935-1936) 등을 썼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구소련 국민의 싸움에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강한 애국심에 불탔다. 그는 수시로 연주회를 열고, 그 수입의 전부를 조국에 보냈다. 이 늙은 대가의 애국적 열정에 구소련의 국민들은 감동하여 이 대가를 조국으로 영접할 날을 기대하였으나, 불행히도 그날이 있기 전 1943년 3월 28일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의 주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4개의 협주곡 속에서는 <제2번 C단조>(1900-1901), <제3번 D단조>(1909)가 특히 유명하고, 소품에서는 초기의 피아노 시리즈(작품 3의 5곡, 작품10의 7곡, 작품11의 연탄용(連彈用) 6곡)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제2모음곡>(1901), 10의 피아노 전주곡(작품 23, 1901), 마찬가지로 작품32(1917), 2편의 <연습곡·회화(繪畵)>, 작품33(1911)과 작품39(1917), <소나타 내림B단조>(1913) 등 피아니스트의 흥미를 끄는 것이 많다. 그의 작품에서는 가곡도 중요하다. 초기의 작품 4와 8을 비롯하여 가곡집 작품 14(1896), 작품21(1902), 작품26(1908), 작품38(1916) 등 83곡이 남아 있다. 그의 가곡은 서정적으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피아노 파트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며,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정서에 차 있다.

피아노 협주곡 제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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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協奏曲第二番 라흐마니노프 작곡으로 C단조 작품(1901)이며, 몇 편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걸작의 하나라고 한다. 제1악장은 웅대한 열정적인 제1주제와 시정이 풍부한 제2주제로 되고, 제2악장은 서정적인 아름다운 멜로디를 갖고, 따뜻한 정서에 넘쳐 있으며, 종악장은 피아노의 표현력을 충분히 발휘한 뛰어난 악장이다.

글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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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hold Moritzovich Gli re(1875-1956) 러시아 국민음악을 직접 이어받은 음악가이며, 특히 구소련의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등의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현지의 젊은 작곡가들과 협력하여 민족적 가극을 만들었고, 또한 민족적 주제에 의한 표제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875년 1월 11일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음악학교에서 오트칼 셰프티크(1852-1934)에 이어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알렌스키와 코뉴스에게서 화성법을, 타네예프에게서 폴리포니와 악식론을, 이폴리토프 이바노프에게서 자유작곡을 배웠다. 1900년에 작곡과를 금메달로 졸업하였다(졸업작품은 바이론에 의한 가극 오라토리오 <천지>). 1900년대 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벨라예프파의 모임에 참가하고, 1900년부터 교육에 종사하였다. 미야스코프스키와 프로코피예프는 일찍부터 그의 지도를 받았다. 1920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근하여 작곡반을 담당하였다. 그 반에서는 구소련의 여러 작곡가들이 배출되었는데, 아람 하차투리안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1941년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 근무하면서 각종 음악사업에 참가하였으며, 1910년 이후는 지휘자로서 구소련 각지를 돌아다녔다. 1956년 6월 23일 81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은 각 장르에 걸쳐 그 수가 많으나, 외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발레곡 <붉은 겨자>(1927)와 푸슈킨의 시로 된 <청동(靑銅)의 기사(騎士)>가 유명하다. 한편 <하프 협주곡>(1838), <첼로 협주곡>(1945),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1942), <현악 4중주곡 제4번>(1943) 등이 대표작이다.

미야스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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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y Yakovievich Miaskovsky(1881-1950) 27편이나 되는 교향곡을 썼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시대와 달리 현대의 교향곡을 27편이나 작곡한 점만으로도 그는 20세기의 교향곡 작가로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교향곡의 발전과정은, 러시아 음악으로부터 구소련 음악으로 가는 이정표를 보여주는 뜻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는 1881년 4월 20일에 태어나, 1950년 8월 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니제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육군유년학교에서 배우고(1893-1899), 상트페테르부르크 육군기술학교를 1902년에 마쳤다. 그러나 음악에 흥미를 계속 가지고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글리에르와 이반 크루이쟈노프스키(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 1867-1924)에게 작곡하는 것을 배우고, 1911년에 음악원을 졸업하였다(리야도프의 작곡과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과). 제1차세계대전중에는 군대에 있었다. 1918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살았으며, 1921년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쳐, 그 문하에서 카발레프스키, 하차투리안, 셰바린 등 많은 작곡가를 배출하였다. 그의 작품은 가극과 발레를 제외하고는 각종 기악곡에 걸쳐 매우 많다. 교향곡은 <제1>(1908)을 비롯해서 <제5>(1918)는 서정적이고, <제6>(1921-1923)은 합창이 붙은 것으로 매우 격정적이며, <제19>(1939)에서는 교향곡 장르를 대중에게 친근케 하기 위하여 취주악을 사용하는 등 변화에 찬 과정을 거쳐 교향곡 탐구의 길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제27교향곡>(1950)을 최후의 최고봉으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악 4중주곡은 13곡, 피아노 소나타는 9곡, 그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성악곡 등이 있다.

스트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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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or Feodorovich Stravinsky(1882-1971)프로코피예프와 함께 러시아가 낳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1882년 1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까운 오라니엔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표트르(1843-1901)는 마린스키 극장의 베이스 가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법률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음악의 재능도 일찍부터 나타나, 음악교육을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받고 관현악 작곡가가 되었다. 1907년에는 교향곡을 작곡하였으나, 이것은 아직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관현악과 성악모음곡(組曲) <목신(牧神)과 목녀(牧女)>(푸슈킨에 의함)와 관현악곡인 <불꽃과 환상적 스케르초>(1909)를 발표하였다. 이 곡은 아버지의 친구이며 유명한 발레 연출가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에게 주목을 받았고, 젊은 작곡가에게 발레곡 <불새(火鳥)>의 작곡을 의뢰하였다. 1910년 이것이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자, 빛나는 색채에 가득찬 음악은 파리의 음악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전혀 독창적인 발레 <페트루슈카>가 동일하게 파리에서 상연되고, 이어서 1913년에 <봄의 제전>이 초연되자 그 대담한 화성법에 의해 온유럽악단에 큰 화제를 던졌다. 한편 이 무렵부터 러시아를 떠나 제네바 호숫가의 몬트로에 살면서 종종 파리로 나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후에는 미국에 정주하면서, 초기 러시아 음악의 민족적 전통으로부터 떠난 코스모폴리탄트로서 계속적으로 신기한 기법(技法)을 노리는 작품을 정력적으로 만들게 되어, 20세기를 대표하는 매우 개성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작품은 매우 많으며, 위에서 말한 발레곡 외에 <병사(兵士)의 이야기>(1918), <뮤즈의 사제(司祭) 아폴로>(1927), <요정(妖精)의 키스>(1928), <카드놀이>(1937) 등의 발레곡이 유명하며, 가극에서는 초기의 <밤꾀꼬리>(1914), <오이디푸스 왕>(1926), 기악곡에서는 <시편에 의한 교향곡>(1930), 11의 악기를 위한 <래그 타임>(1918-1919), <피아노 협주곡 제1>(1924), 제2>(1929) 등 매우 다채롭다.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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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鳥 스트라빈스키 작곡(1910).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작곡하였고, 1910년 6월 23일에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상연되었다. 제재는 러시아 민화에서 땄으나, 그 음악은 재래의 형식을 대담하게 깨뜨린 것이었다. 이 발레곡에 의해 모음곡이 만들어져 '서곡(序曲), 불새와 춤, 불새의 변주곡', '왕녀의 론도', '카티에이왕의 마(魔)의 춤', '자장가-마침곡(終曲)' 등으로 되어 있다.

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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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祭典 스트라빈스키 작곡. <불새>, <페트루슈카>에 계속되는 작품으로, 이것도 역시 파리에서 초연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강렬한 리듬과 대담한 관현악법에 대해 일부에서는 반감의 외침이 일어났으며, 장내에는 소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원시인의 성(性)에 대한 눈뜸과 그 제전(祭典)을 강렬한 리듬과 음향으로써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이상한 흥분지경으로 몰고 가는 특이한 음악이다.

아사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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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Vladimirovich Assafiev(1884-1949)러시아 발레 음악의 창조자로서 유명하며, 이고리 그레보프의 필명으로 음악연구서를 썼으며, 러시아의 대표적 음악학자로서도 권위가 있다. 1884년 7월 29일(구력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고 1949년에 모스크바에서 별세하였다.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철학과를 졸업하고, 1910년에 음악원에 들어가 리야도프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25년부터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1910년부터 1937년에 걸쳐서 마린스키 극장,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키로프 기념극장의 고문 겸 작곡가가 되었다. 1925년부터 음악원의 음악사 및 음악이론 교수, 1943년까지 포위된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레르부르크)에 있었으나, 1943년부터는 모스크바로 이사하고, 음악원 교수·구소련 과학아카데미 예술사연구소 최고참 연구소원 등 음악학자로서 중요한 지위에 올라, 1947년에는 구소련 국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의 연구논문은 매우 많아, <선집(選集)>이 간행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초기의 <러시아 음악>, <글린카>(1947)가 유명하다. 가극, 발레, 기악곡, 극의 부대음악 등 작품의 수는 많으나, 그 중에서도 발레곡은 20곡에 달하고 있다. 그 중에서 <파리의 불길>(1932)과 <바프티살라이의 샘>이 대표작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테마로 한 것인데, 프랑스 혁명 때 노래 불려진 민요의 모티프를 교묘히 사용하여 민중의 기쁨을 생기발랄하게 표현하고, 피레네의 바스크족의 활발한 춤리듬과 멜로디를 써서 민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참으로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매우 맑은 관현악법, 특히 금관악기 울림은 밝고 건강하다. 후자는 푸슈킨의 시로 노래된 슬픈 이야기이며, 고전적인 낭만파 발레양식으로 된 서정적인 작품으로, 러시아 발레 음악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프로코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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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Sergeivich Prokofiev(1891-1953)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교향곡 작곡가로서 발레, 가극, 영화음악, 기악곡(특히 초기의 피아노곡) 등 모든 장르에서 혁신적인 작품을 썼다. 러시아의 전통적 음악교육을 받은 이 천재적인 작곡가는 한때 구소련을 떠났으나, 귀국 후에는 전적으로 구소련음악의 창조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891년 4월 23일 에카네리노슬라프주(현재의 우크라이나)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나,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5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이미 그 무렵부터 피아노곡과 가극 등을 쓰기 시작했다. 1902년 모스크바에서 타네예프와 만나 그 재능을 인정받게 되고, 모스크바 체재 중에는 포메란체프로부터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해의 여름, 글리에르가 타네예프의 소개로 손초프카로 왔다. 소년 프로코피예프에게 글리에르의 교육은 매우 유익하였다. 1904년 그라즈노프의 권유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시험을 치렀다. 15세의 소년은 림스키코르사코프 앞에서 자기의 작품을 피아노로 치기도 하고, 노래 부르기도 했다. 그의 천분(天分)이 인정되어 입학이 허락된 1909년에는 랴도프의 작곡과 림스키코르사코프, 후에는 비트리의 관현악법과를 졸업했으며, 1914년에는 에시포와 부인의 피아노과를 나왔다. 그 무렵 이미 매우 개성적인 피아노 소나타라든가 소품 외에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0)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루빈스타인상(賞)을 차지했다. 1912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자기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였다. 1915년 처음으로 외국(로마)에서 연주했는데,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자기가 만든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1917년의 혁명 후 마음놓고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미국으로 가면 여러 가지로 새로운 활동분야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미(渡美)하기로 결심하였다. 1918년 9월 초 뉴욕에 도착하였으며, 미국에서 연주활동을 하면서 구소련에서 구상(構想)한 것을 완성하여 가극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1917-1919)을 작곡하였다. 1920년 4월 파리와 런던으로 가서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와 만났고, 가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 시카고와 유럽 여행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1922년 3월에는 남부독일의 바바리아 알프스 기슭의 에테르에 정착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친구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 구소련에서도 소개되고 있었다. 1926년 이탈리아 여행 때, 때마침 고리키를 만나서 환담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 뒤 귀국의 기회를 몹시 바라게 되었다. 1927년 1월, 14년 만에 조국땅을 밟고, 친구인 미야스코프스키, 아사피예프 등과 만났다. 그리고 구소련 각지를 연주여행하였다. 그 후 1929년 11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1932년 11월 이후에는 모스크바에 주거를 정한 후 영화 <키제 중위>의 음악을 담당했는데, 그 음악에 의한 모음곡은 그의 파퓰러한 작품의 하나가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 발휘된 기발한 개성적 매력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특유의 개성적 멜로디, 경쾌한 리듬, 투명한 화성(和聲) 등의 독창성과 혁신성은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많으며, 초기의 피아노곡 <사르카즘>(1912-1914), <잠깐 동안 환영(幻影)>(1915-1917), <늙은 조모의 이야기>(1919) 등의 소품은 이미 개성적 혁신성이 나타나 있다. 피아노 소나타는 9곡이 있으며, <제4번>(1908), <제7번>(1939-1942), <제8번>(1939-1944) 등이 유명하다. 가극은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1919),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한 <도박사>(1917), <불타는 천사>(1919) 등의 초기작품 외에 톨스토이의 명작으로 된 <전쟁과 평화>가 있다. 이는 1946년 6월 12일 상테페테르부르크의 마루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1955년 4월 1일 제2고(稿)에 의해 같은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제1고는 1943년에 출판되었다. 이는 명작의 가극화로서 그 규모의 장대(壯大)한 점에서 구소련 음악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발레에서는 초기 아파나슈프의 러시아 민화에 의한 <광대>(1915-1920), <강철의 걸음>(1924) 외에 구소련으로 돌아간 뒤의 3개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1935-1936), <신데렐라>(1940-1941), <석화(石花)>(1948-1950)가 유명하다. 교향곡은 7곡이 있고, 제1번의 <고전(古典) 교향곡>(1916-1917), <제5>(1944), <제7>(1951-1952)이 유명하다. 피아노 협주곡도 그의 중요한 장르로서 <제1번>(1911), <제2번>(1913, 第2稿 1923), <제3번>(1921), <제4번>(1931), <제5번>(1932) 등 5곡이 있고, 바이올린 협주곡은 <제1번>(1917-1921)과 <제2번>(1935)의 2곡, 첼로 협주곡은 1곡뿐으로(1933-1938) <제2번 사단조>는 미완성품이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서는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1939), 오라토리오 <평화의 수호>(1950), 성악·교향악 모음곡 <겨울의 모닥불>, 그리고 모스크바의 아동극장을 위해 작곡한 <피터와 이리>(1936)도 유명하다.

고전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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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交響曲 프로코피예프 작곡 라장조, 작품25(1917). 연주시간 20분 가량의 매우 짧은 교향곡이다. 그는 이 제1교향곡에 대해서 "만일 하이든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 자신의 스타일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흡수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쓰고 싶은 종류의 교향곡, 즉 고전적 스타일의 교향곡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이든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거기에는 특유의 새로운 개성적 창조가 엿보인다.

피터와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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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 작곡 작품67(1936). 모스크바의 유명한 중앙아동극장을 위해 작곡된 것으로서, 소년 피터가 나쁜 이리를 사로잡는다고 하는 동화를 음악과 함께 전개하였는데, 더욱이 피터의 친구인 작은 새, 고양이, 거위, 잔소리 많은 할아버지 등의 등장인물들을 각 악기로 표현하여, 어린아이라도 쉽사리 알 수 있으므로 세계 각국에서 연주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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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64(1935).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의한 4막 10장의 발레이다. 로맨틱 발레의 고전적 전통을 지키면서 정경묘사나 심리묘사에 매우 개성적인 멜로디가 사용되었다. 또한 이 발레곡에 의하여 제1(작품64의 2), 제2(작품64의 3), 제3(작품101, 1946)의 3개의 모음곡이 있으며, 합계 20곡의 주요 장면을 묘사하는 음악이 포함되어 있어 이 발레곡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두나이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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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ac Osipovich Dunaievsky(1900-1955)1900년 1월 3일 폴타바주 로프비츠에서 태어나고, 1955년 7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대중적인 작곡가이다. 1910년에 러시아 음악협회 하르코프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웠다. 중학교를 나와 대학 법학부의 제3학년에 진학하였고, 1919년에는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다. 그 이후는 극장의 작곡가, 신문기자, 인민대학의 음악강사, 육군 클럽의 음악 스튜디오나 서클의 조직자 등이 되어 직접 대중(大衆)과 접촉하는 음악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작품은 발레, 합창곡, 극음악 등도 있으나 영화음악과 대중가곡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 레베졔프 쿠마치의 시에 의한 <조국의 노래>(1936)는 모스크바 방송국의 콜사인으로도 쓰이고 있다. 1951년, 베를린의 세계민주청년 페스티벌에 입상한 <청년의 노래>, 영화 <쿠만의 카자크> 속의 <이삭 줍는 노래>(1949)는 유명하다. 또 한편 1934년의 영화 <쾌활한 친구들>은 구소련에서 처음으로 재즈를 끌어들인 희극으로서 획기적인 작품이다. 그의 음악은 재즈적인 리듬을 취해 들었고, 더욱이 건강한 노동의 에너지에 넘쳐 있는 것이 특색이다.

하차투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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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m Ilich Khatchaturian(1903-1978) 구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 동방민족의 선명한 색채감은 매우 강렬하다. 1903년 6월 6일 티플리스(현재 그루지아 공화국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민족악기 등을 다루었지만 음악가가 될 생각은 없었고 수학자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18세 때 트빌리시로부터 모스크바로 향발(向發), 여행 도중 어느 역에서 베푼 음악회에서 민족타악기를 연주하였던 바, 그 재능이 주목되어 음악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때까지 가극도 교향곡도 들어본 적이 없던 그는 19세 때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922년, 모스크바의 그네신 음악전문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배우고, 1934년에는 음악원의 미야스코프스키의 작곡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며, 1937년에는 미야스코프스키의 조수가 되었다. 많은 유명한 작곡가에 비하여 만학(晩學)이었으나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1934년에는 관현악을 위한 <무용모음곡>을 작곡하였으며, 선명하고도 감동적인 음악으로 일찍이 주목을 끌었다. 1936년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였는데 다음해 7월 12일 오보린의 피아노로 초연(初演)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또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프에게 바친 <바이올린 협주곡>은 세계 각국에서 연주되는 명곡으로 되었다(1940년 11월 16일, D. 오이스트라프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는 작곡활동과 함께 지휘자로서도 구소련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또한 해외로도 나가 여러 나라의 관현악을 지휘하여 자기 작품을 연주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1942년에 상연이 된 발레 <가야네>가 유명하다. 그 모음곡 속의 '검무(劍舞)'는 산간민족의 급격한 리듬의 약동에 의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곡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단독곡으로서도 연주되고 있다. 같은 모음곡인 <자장가>는 조용한 서정성 속에 민족색이 풍부한 멜로디가 아름답다. 또한 발레에서는 <스파르타쿠스>(1952-1954)도 유명하다. 위에서 말한 협주곡 외에 <첼로 협주곡>(1946)이 있고, 영화음악으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1949) 등이 있다. 동양민족에게는 오히려 야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강렬한 리듬과 동양적인 멜로디로 이어 나가는 극적인 관현악법은 독특하며, 눈부실 만큼 선명한 색채를 발산한다. 그런 만큼 통속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소련의 민족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의 독창성과 예술성은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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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in 協奏曲 하차투리안 작곡(1940). 그의 민족성이 농후하게 발휘된 작품. 민족적 리듬과 동양적인 멜로디로 짜여지는 극적인 관현악법은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만큼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프에게 바쳐졌으며, 초연된 후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채택되어, 현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카발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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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itry Borisovich Kabalevsky(1904-1989) 밝고 건강한 대중성을 지닌 작곡가로서 1904년 12월 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29년엔 미야스코프스키의 작곡과를, 1930년에는 알렉산드르 골리덴바이제르의 피아노과를 졸업하였다. 다음해인 1931년 12월 11일 볼쇼이 극장의 교향악 연주회에서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었는데, 이것이 음악에의 데뷔였다. 그의 작품은 모든 장르에 걸쳐 있지만, 특히 가극에 힘을 기울인 작곡가로서 주목되고 있다. 로맹 롤랑의 소설에서 취재한 <코라 부르뇬>(1937)의 경쾌한 서곡과 모음곡은 유명하다. 1949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였는데, 싱싱하고 밝은 곡으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 밖에 성악곡, 극의 부대(附帶)음악, 영화음악 등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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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itry Dimitrievich Shostakovich(1906-1975)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였으며, 특히 대규모 형식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사람이 적어진 현대에 본격적인 교향곡 작곡가로서 손꼽힌다. 1906년 9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아버지도 음악을 애호하여, 어릴 때부터 좋은 음악환경에서 자랐다. 피아노의 초보를 9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1919년에 음악원에서 피아노과의 시험을 받았는데, 그때 시험관으로서 글라주노프가 입석하였다.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에게 작곡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거기서 쇼스타코비치는 자작한 것 중의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글라주노프는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그(1836-1946)의 작곡과에 들어가도록 권고하였다. 이 작곡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로서 뛰어난 교육가였다. 그는 학생에게 러시아 및 외국의 고전음악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었다. 피아노를 처음에는 로자노프에게서 배우고, 1년 후에는 유명한 레오니드 니콜라에프(1878-1942) 교수의 피아노과에 들어갔다. 쇼스타코비치는 혁명 후의 어려운 시대에 학교생활을 보냈다. "나의 음악공부 시대는 끊임없이 글라주노프의 아버지와 같은 감시 아래 있었다. 그는 나의 진보를 주의깊게 지켜보았고, 나의 작품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1921년 아버지의 사망 후에는 나의 경제상태에도 따뜻한 염려를 해주었다. 그 무렵 글라주노프의 지시로 나는 장학금을 지급받았는데, 보로딘 기금이 지급되었다. 음악원 학습시대는 곤란한 시대였다. 난방이 없는 음악원의 차디찬 교실 등이 회상된다. 전차도 없어서 먼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1956년의 수기에서). 1926년 5월 12일, 니콜라이 말리코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의 연주로 <제1교향곡>이 연주되었다. 졸업작품으로서 작곡된 이 작품은 스케일은 작지만 대신 긴장된 충실감이 있고, 생생한 젊음과 새로운 시대의 지성과 감각을 느끼게 하였다. 드디어 이 곡은 외국에서도 연주되고, 새로운 천재가 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일찍이 글라주노프는 16살에 <제1교향곡>을 발표했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기의 후계자를 발견했었는데, 지금 글라주노프는 19살의 청년 쇼스타코비치에게서 자기의 후계자를 발견한 셈이다. 그러나 그부터의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국가에서 새로운 음악예술을 창조하는 데는 많은 사상적인 문제가 얽히게 된다. 그가 풍성한 신분을 타고난 작곡가인 만큼 작품에 대한 비판도 냉엄하였다. 그는 <제1교향곡>을 쓴 후에 <제2>(1927), <제3>(1931), <제4>(1935-1936)를 작곡하였다. 이들 작품은 작곡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면적인 연소(燃燒)가 없다는 사실을 자인하였다. 한편, 가극 <코(鼻)>(1927-1928), <무첸스크군(群)의 마크베드 부인> 또는 <카테리나 이즈마이로바>(1930), 발레 <황금시대>(1929-1930), <밝은 시내>(1935) 등이 발표되었으나, 이들 작품은 구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의하여 엄하게 비판되었다. 구소련에서는 서구적 모더니즘, 이른바 형식주의의 경향이 예술에 침투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이 천재적 작곡가가 공산당 노선에 호응하는 길에 서기를 강요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 그는 독일군의 공습과 포위의 위험에 노출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러 있으면서 음악원의 옥상 감시원이 되었다. 그 전화(戰火) 속에서 <제7교향곡>(1941)을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은 구소련만이 아니라 나치스와 싸우는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어 전쟁의 비극을 생각케 한 장중한 <제8교향곡>(1943)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그후 1948년 2월의 구소련 음악회의에서 다시금 형식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일고 그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제9교향곡>(1945)은 그의 개성이 잘 발휘된 작품이었는데, 양식적(樣式的)으로는 오히려 고전파의 실내악적 교향곡이라고도 할 만한 차분한 곡이다. 비판을 받게 된 그는 구소련의 자연개조 계획을 찬양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1949)를 작곡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깊은 사상성을 지니는 <제10교향곡>(1953), 표제적(標題的)인 <제11교향곡>(1956), <제12교향곡>(1961)을 작곡하였다. 그의 작품은 앞에 든 작품 외에도 매우 많으나 대표적인 것을 들면,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33)과 <제2번>(1960), <바이올린 협주곡>(1947-1948), <첼로 협주곡>(1959) 외에 실내악곡으로서 <피아노 소나타 24>(1926과 1942), 24의 피아노 전주곡과 푸가(1932-1933), 8곡의 현악 4중주 중에서 <제3번>(1946), <제4번>(1949), <제8번>(1960), <피아노 5중주곡>(1934), <피아노 3중주곡>(1944), <첼로 소나타>(1934) 등이 있다. 성악곡으로는 소프라노·알토·테너와 피아노를 위한 <유대의 민족시에서>(1948)와 무반주 합창곡 <10의 시(詩)>(1951)가 유명하다. 영화음악도 많으며, 대표작으로는 <호응계획>(1932), <젊은 친위대>(1948) 등이 있다. 그가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새로이 오케스트레이트하여 원작자의 의도를 보다 정확하게 재생한(1939-1940) 것도 하나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향곡 제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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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響曲第五番 쇼스타코비치 작곡 라단조, 작품47(1937). 세계적으로 널리 연주되는 작품이다. 그는 이 교향곡으로 비로소 자기가 추구하는 이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제1악장은 비통한 현악기의 주제로 시작되고, 전체로서 비극적 정서 속에서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하는 강렬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깊은 내용을 지닌 악장이다. 제2악장은 그의 특기인 스케르초이며, 그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제3악장은 라르고이며, 어둡게 러시아 국민의 탄식을 노래하는 듯하다. 종악장은 힘찬 행진곡으로 끝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