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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미국〔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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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세계의 지도국가로 발전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완전히 공산위성국을 제외한 자유세계의 주도국가로 자리잡았다.

대전 말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급서(急逝)하자,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트루먼이 당면하였던 첫 과제는 막중한 전후 처리 문제와 아울러 여러 가지 국내 문제였다. 대전이 끝나자 미국 경제는 막대한 해외 구제수출과 원조를 강행해야 했기 때문에 거액의 적자예산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트루먼은 뉴딜 정책에 근원을 둔 농산물 가격의 유지와 사회보장 제도의 확대, 완전고용과 최저임금의 인상 등을 골자로 하는 복지정책으로서 페어딜 정책(Fair Deal 政策)을 세웠다. 그러나 대통령과 대립된 공화당 의회는 페어딜 정책의 실현을 저지하고 1947년 7월 태프트 하틀리법을 통과시켜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1948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페어딜 정책에 대한 농민·노동자·지식인의 지지와 의회에 대한 매스컴의 맹렬한 공격이 트루먼을 당선시켰다. 그의 중도(中道)정책은 평화수립을 위한 외교정책과 국내의 전시산업을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 막중한 사업을 큰 과오 없이 수행케 했다.

1952년의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전후(戰後) 미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매카시즘(McCarthyism) 선풍을 일으켜 미국을 뒤흔들었으나 미국민의 비난은 매카시(J. McCarthy) 개인에게만 돌아갔다. 1956년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3P(Peace, Progress, Pro- sperity)의 슬로건을 걸고 재선하여, 이른바 롤 백 정책을 제창하였다. 그는 자유세계의 상호 안전보장 계획을 강조하는 한편 많은 군사·경제 원조와 사절단·군대를 해외로 보냄으로써 자유세계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구상한 사람은 덜레스(J. F. Dulles) 국무장관으로, 그는 대일강화조약을 강행하고 시토(SEATO)를 조직함으로써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덜레스가 급서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소외교(對蘇外交)는 빛을 잃기 시작하였다. 1957년 1월의 소련 인공위성의 발사와 베를린 문제에 관한 흐루시초프의 6개월 기한부 해결안 등이 미국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듯했다. 더욱이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나세르와 영국의 충돌에서 미국은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선포하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중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지위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 외교의 후퇴, 대소외교의 약화에 실망한 미국민은 1961년에 ‘뉴 프런티어’를 외치고 나온 젊고 패기에 찬 민주당 후보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는 자유세계의 절대적인 신망을 받아 쿠바의 적절한 경제봉쇄와 서유럽 제국의 결속, 평화군단의 조직, 인공위성의 성공적 발사 등으로 미·소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과시하였으나 불행히도 1963년 11월 22일 암살을 당하였다.

케네디를 이은 존슨 대통령의 기본외교도 대체로 케네디 외교를 잇는 것이었으나, 1965년 3월 월남분쟁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한 결과 평화공존의 대소관계(對蘇關係)가 냉각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3월 존슨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베트남전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동년 5월 파리에서 미·월맹(越盟)간에 평화회담을 개최하였다.

1969년 1월에 출범한 닉슨 공화당 정권은 내정면에서 ‘법과 질서’를 내걸고 외교면에서는 소위 ‘닉슨 독트린’을 발표, 월남전의 월남화, 아시아에서의 철군계획을 밝혔으며, 이에 따라 주한 미군의 일부 철수도 구체화하였다. 또한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소련을 방문했으며,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 조인에 성공함으로써 베트남전 종식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그뉴 부통령의 탈세혐의에 의한 사임, 보좌관들의 부패 등으로 궁지에 몰렸던 닉슨은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대한 도청사건으로 하원의 탄핵을 받아 1974년 8월 29일 사임하고 말았다. 닉슨의 부도덕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에서의 패전을 맛보는 등 세계 최강이자 자유진영의 기수로서 위신을 크게 손상당한 채 카터에게 정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카터는 취임 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 제한교섭을 성공시켰으나 1979년 이란인들의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1980년 미 인질구출작전의 실패와 경제정책의 파탄 등으로 1980년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

1981년 출범한 레이건 정부는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하였고, 1989년 취임한 부시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1992년 패하였다. 1996년 11월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미국 정치가 한층 더한 실리위주로 진행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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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y Shippe Truman (1884

1972, 재임 1948

1952)

미국 제33대 대통령. 민주당 소속. 미주리주(州)에서 출생. 1934년 상원의원에 당선, 1944년에 루스벨트와 함께 부통령에 당선,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이 되었다. 1947년 소련의 공산세력에 대항하는 반소(反蘇)·반공(反共)의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마셜 플랜과 NATO를 결성하였으며, 1948년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어 페어딜(Fair Deal) 정책을 성명하였다.

태프트·하틀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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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ft-Hartley法

1947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노자조정법(勞資調整法). 뉴딜(New Deal)의 노동입법 정신을 부정 또는 수정하여 이 해 6월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성립된 법이다. 제안자는 상원의 태프트와 하원의 하틀리로서 각각 노동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 법은 클로즈드 숍(clased shop)을 금지하고, 노동자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였다.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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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ight David Eisenhower (1890

1969, 재임 1953

1961)

미국 제34대 대통령. 공화당 소속. 텍사스주(州) 출신. 1933년 맥아더(Mac Arthur) 군사고문의 보좌관으로서 필리핀의 방위강화에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활약, 북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서부작전의 총지휘를 담당, 원수로 승진하여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48년 퇴역한 후 콜럼비아 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1950년 북대서양 조약에 의한 유럽통일군 창설과 함께 동(同)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서유럽측의 재군비 촉진에 힘썼다. 1952년 대통령에 당선, 대담한 대자본의 대표를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 공산권에 대한 롤 백(Roll Back) 정책을 제창하였고, 흐루시초프와 정상회담을 열어 평화공존노선을 택하였다. 1956년 재선되었다가 1960년 임기를 마쳤다.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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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itzgerald Kennedy (1917

1963, 재임 1961

1963)

미국 제35대 대통령. 민주당 소속. 보스턴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 가문에서 출생. 아버지는 조세프 케네디. 하버드(Harvard)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 1942년 해군에 입대, 남태평양에서 부상당하였다. 1947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하원의원, 1953년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젊은 지성인들을 참모로 하는 참신한 행정부를 구성하였다. 현상의 타개를 부르짖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책을 내세워 냉전의 해소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평화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했다. 또한 평화군의 창설, 인종차별의 철폐를 위한 인권법안의 의회 제출, 그리고 1962년 10월 쿠바 내 소련기지의 강제철거 등 의욕적이고 용기있는 정책을 추진하여 온건한 진보파로서 신망이 높았다. 1963년 부분핵실험 금지조약의 체결에 성공하였으나 1963년 11월 22일 유세여행 중 달라스에서 오스왈드에게 암살당하였다.

인종차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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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種差別問題

미국 총인구의 11%를 점유하고 있는 미국의 흑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노동력의 부족을 흑인들로 메운 결과 일부 흑인들은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법률적·경제적·사회관습면 등에서 많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흑인의 실업률은 항상 백인들의 2배를 넘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백인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까지도 흑백분리가 행하여지고 있다.

흑인의 해방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마카스 가베의 외침 이후 왕성하였다. 1964년, 1965년 이래 흑인인권에 대한 많은 입법이 이루어졌지만 차별문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흑인측에서도 흑인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한 ‘블랙 캐피터리즘’ ‘블랙 내셔널리즘’ 운동이 뚜렷해졌다. 주요 흑인 단체로는 고(故) 킹 목사가 주도하던 남부기독교 지도자회의, 전미흑인지위 향상협회 등의 온건파와 흑인교도단, 블랙 팬터 등의 과격파가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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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17일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닉슨 재선위원회가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란 이름의 빌딩 6층 민주당 본부에서 열린 전당대회 준비회의 내용을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닉슨의 선거 방해·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드러났다.

이러한 와중에서 하원 법사위원회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및 증거인멸 행위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수집하여 1974년 7월 19일 마침내 사임권고안을 가결시키자 8월 9일 닉슨 대통령은 사임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닉슨의 사임과 관련자들의 구속으로 일단락지어졌지만 미국의 전통적 정의와 평등정신의 재확인, 의회를 통한 참여민주주의의 승리, 지도자에 대한 도덕성의 촉구 등 위기에 섰던 미국 민주주의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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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Earl Cater Jr. (1921

)

미국 제39대 대통령. 조지아주 플레인즈읍 태생, 1946년 해군사관학교 졸업. 1953년까지 해군에서 핵잠수함 개발에 참여, 1970년 조지아주지사에 당선, 1976년 새 아메리카의 건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 등을 외치고 도의혁명을 주창하여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에 당선. ‘인플레’ 통제, 낭비일소를 국내정책으로 하고 키신저식 ‘힘의 외교’에 반대하여 인권외교, 도덕외교를 펼쳤다. 1980년 임기를 마쳤다.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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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 Reagan (1911

)

미국 제39

40대 대통령. 일리노이주의 탐피코에서 출생. 1932년 유레카 대학 경제학과 졸업 후 아나운서, 스포츠 해설자, 배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1962년 공화당에 입당,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3차례 출마하여 1981년 69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7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중거래핵전략(INF) 폐기조약에 서명해 핵군축시대의 막을 열었다.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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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 )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출생. 1948년 예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6년 텍사스주 하원의원에 당선. 1970년대 중반에는 베이징(北京) 연락사무소 소장을 역임. 1981년 부통령이 된 후 198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B. 클린턴과 맞붙어 재선에 실패하였다.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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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Clinton (1946~

)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1971년과 1976년의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인 G. 맥거번과 J. 카터의 선거운동을 지휘하였고, 1976년 아칸소주 법무장관에 선출되었으며, 1978년 32세에 미국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우파에 소속되어 1992년 G.H.W.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사상 세번째로 젊은 46세의 대통령이 되었다.

전후세대로서 최강의 군사력과 적극적인 경제정책으로 미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노선을 지향하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6년 11월 실시된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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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W. Bush (1946∼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제41대 대통령인 조지 H. 부시의 아들이다. 1986년 아버지의 참모·연설 초안자로 대통령 선거전에 참여하였다. 1993년 텍사스주지사에 당선되었으며, 1998년 주지사 선거에서 다시 승리함으로써 텍사스주 최초의 재선 주지사가 되었다. 200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쿠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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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혁명군이 악명 높은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한 사건. 처음에는 미국에서도 성원을 보냈지만, 카스트로 혁명정권이 외국자본 국외반출을 금지하는 등 좌경화 기색을 보이자 1961년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미국 내에 조직을 갖고 있던 망명 쿠바인 부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한 후에는 이것이 미국 CIA의 원조하에 감행된 것이라는 비난과 함께 카스트로 정권의 친소 좌경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미국 양식에 호소하는 많은 비판이 쌓이기도 했었다.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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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del Castro Ruz (1927

)

쿠바의 정치가. 아르헨티나에서 출생, 아바나의 베렌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1947년 도미니카의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뒤에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하여 노동자 혁명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여 멕시코와 뉴욕으로 망명하였다. 1950년 쿠바로 되돌아오자 혁명운동조직을 다시 만들어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워 스스로 수상이 되었다. 그는 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독자노선을 취하고 있다.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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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o Che Guevara (1928∼1967)

아르헨티나 태생의 쿠바의 혁명지도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혁명운동에 참가하였다. 1954년 멕시코로 망명,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던 카스트로와 알게 되어 쿠바 혁명군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카스트로 군대에 합류, 1956년 쿠바 국내로 진입하여 게릴라전을 펼쳐 카스트로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뇌’라 불렸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7년 볼리비아군의 게릴라 소탕전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중남미 혁명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이론을 겸비한 직업적 혁명가이다.

저서에 『게릴라 전쟁』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