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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독일〔槪說〕
편집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에 분할·점령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은 최후까지 단일체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서(東西) 대립의 격화와 함께 분할점령은 고정화하고 1949년 9월에는 서방측 점령구역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성립했다. 한편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소위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독일의 분할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1954년의 파리협정에 따라 서독의 주권회복과 재무장(再武裝), 그리고 나토 가입 등이 확정되어 재군비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아데나워의 반공정책과 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침에 반감을 가졌던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게 되었다. 1966년에는 서독의 키징거 정부에 의하여 브란트 외상을 중심으로 동방접근정책이 시도되고, 1969년 브란트 정부는 처음으로 동독을 ‘국가로서의 존재’로 인정하게 되었고, 1972년에는 양독일간 일반통행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동년 12월 21일에는 ‘정상화된 선린관계’를 규정하는 독일역사의 새 장(章)을 연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1969년 서독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1971년 9월 베를린 협정을 체결, 통일에 관한 협의가 시작됐다. 그 후 경제 부문에서의 협력을 기반으로 통일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던 중 1989년 자유화요구 시위로 동독이 공산당 일당독재를 포기함으로써 통일 분위기가 고조, 90년 7월 경제통합이 실시되더니 10월 3일 분단 40여 년 만에 국가통합이 이루어졌다.
서독
편집西獨
독일연방공화국.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의 점령지구인 서부 11주의 대표들이 모여 기본법을 만들고 5월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성립됐다. 같은 해 8월 총선거에서 기독교민주동맹이 승리해 대통령에 호이스, 총리에 아데나워가 선출되었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제창한 에르하르트가 경제상에 취임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1955년 1월 국교정상화를 결정, 1957년 자르를 통합하고, EEC를 기반으로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지속하였으며, 1969년 사민당(社民黨)의 브란트의 등장으로 적극적인 대(對)동방 접근정책을 취했다. 또한 1972년에는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1974년 브란트는 스파이 사건으로 사임하고 사민·자민당의 연립정권에 의하여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로 선출되어 슈미트는 동독에서 열린 양독(兩獨) 정상회담에서 양측의 관계정상화, 경제협력의 증대문제를 토의했다(1981). 그 뒤를 이어 기민당의 콜 총리도 동독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후 동독과의 통일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다가 1990년 10월 3일 공식으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
편집Konrad Adenauer (1876
1976)
서독의 정치가. 전전(戰前)에는 쾰른 시장으로 반(反)나치운동에 참가했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총리를 지내면서 전후 독일의 경제부흥을 이룩했고, 1954년 파리협정 비준 후에는 미국의 강력한 원조 아래 서류 재군비를 추진했다. 1956년 9월 소련을 방문하여 억류자 5만의 석방을 추진했고, EEC에 가입하여 프랑스와 협력관계를 강화했다.
콜
편집Helmut Kohl (1930
)
서독의 총리. 루트비히스하펜에서 출생.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했고 1973년부터 기민당 위원장으로 있었다. 1982년 중도 우파 연립 내각의 총리로 취임. 1987년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의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합동경제위원회의 설치와 여행제한을 차차 해제키로 합의하였다. 1987년 1월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그리고 1990년 12월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한편 같은 해 10월 독일 통일을 이룩하여 ‘통일총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유럽통합의 완성’이라는 문제를 이상주의적 비전을 가지고 추진해 나갔다.
동독
편집東獨
독일민주공화국. 1949년 10월 소련의 점령지역에 수립된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동독은 인구자원에 있어서 서독에 비해 떨어져 있다. 특히 1953년 베를린의 노동자파업에 따른 폭동으로 인하여 소련은 동독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출동시켰으나 반공운동이 격화되었다. 1947년에서 1954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피난민은 7년간에 무려 122만명이나 되었으므로 동독은 서부국경의 감시망과 금족지구를 확대, 장벽을 구축하였다.
동독의 경제는 1949년의 2개년 계획, 1951년의 제1차 5개년 계획, 1964년의 제2차 7개년 계획 등을 통하여 부흥을 이룩하고 공업생산고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제2위를 차지하였다. 1968년 서독과 6년 동안의 장기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사실상 서독을 승인했으며, 1972년 서독과 상호관계를 정상화하고 상호존재를 인정하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1987년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은 서독과 양국관계 증진방안을 협의했다. 그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서독과의 통일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다가 1990년 10월 3일 공식 통일이 이루어졌다.
1994년 10월 총선결과에서 콜 총리의 집권 여당이 승리, 제5차 콜 정권이 탄생하였다. 1997년 10월 콜 총리는 집권 기독교민주동맹(CDU)의 총리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1998년 9월에는 슈뢰더가 새 총리로 추대되었다.
울브리히트
편집Walter Ulbricht (1893
1971)
동독의 정치가. 라이프치히에서 출생. 제1차 대전 후에는 독일공산당에 입당하고 이후 모스크바에 망명했다. 1946년 사회주의 통일당을 창당, 1949년 동독일공화국 성립과 동시에 제1부수상이 되었다. 1960년 국가원수에 취임하여 중공업 부문의 성장에 노력하였다. 서독의 아데나워와 쌍벽을 이루었던 냉전체제 최후의 인물로 1971년에 제1서기직을 사임했다.
호네커
편집Erich Honecker (1912
1994)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자르 탄광 광원의 아들로 출생. 1929년 공산당에 입당, 1946년 사회주의 통일당이 창립되자 지도부에 있었고, 인민의회 의원, 중앙정치위원회 정치국원 등을 역임했다. 1976년에 국가평의회 의장 겸 사회주의 통일당 서기장이 되었다. 1987년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양국관계를 증진시키기도 했으나 독일 통일 후 러시아로 피신하였다가 강제 소환당해 1994년 사망하였다.
통일 독일
편집統一獨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급속도로 통일논의가 진행되었고 1990년 10월 3일 공식 통일이 이루어졌다. 12월 2일 58년 만에 전독일 총선이 실시되어 통일의회 및 정부 구성을 마쳤다. 통일 독일의 국기와 정치·경제·사회·사법제도는 모두 서독의 것으로 서독 흡수 통합 형태이다.
슈뢰더
편집Schroeder (1944
)
독일의 총리.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독일 중도좌파의 희망으로 떠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 1998년 선거운동 기간 ‘새로운 중도노선’, ‘좌파 속의 우파’ 등을 외쳐 ‘제3의 길’을 역설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같은 실용적 이념으로 과격 이미지를 탈색시킨 것이 선거에 주효했다.
1944년생인 슈뢰더는 나치병사였던 아버지가 1944년 루마니아에서 전사한 뒤 세탁부로 일한 어머니 밑에서 4형제와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꿈이었던 그는 17세부터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고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하여 명문 괴팅겐대 법과를 이수하면서 76년 변호사 자격증을 따냈다. 1963년 사민당(SPD)에 가입한 슈뢰더는 전통적 좌파이념에 몰두했으며, 정열적인 활동력과 정연한 논리와 탁월한 언변으로 1978년에는 사민당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의 의장을 맡았다. 한때 도시게릴라 적군파(RAF)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슈뢰더는 1980년 연방하원의원, 1986년 니더작센주의회 SPD 원내의장, 1990년 주총리를 거치면서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해 SPD내 온건파의 지도자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