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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의 독립〔槪說〕
편집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의 독립은 영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1885년에 창립된 인도의 국민회의파는 60년의 반영투쟁(反英鬪爭) 경력과 수백만의 당원을 가져 언제든지 반영·비협력·비폭력적인 운동을 전개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와 네루의 지도하에 일어나는 이러한 반영 비협력 운동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영국의 노동당 애틀리 내각은 1946년 5월 인도 독립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도는 회교·힌두교(인도교) 양교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인도의 종교대립은 이슬람 세력의 침입 이래로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9세기 이후 특히 1909년부터 실시된 종파별 선거제도 이래로 이 양교도의 반목불화(反目不和)를 조장해온 영국의 전통적 식민정책을 배경으로 하여 그 대립은 더욱 거세졌다.
1906년 회교도의 정당으로 탄생하였던 인도 회교도연맹은 인도 국민회의파와 달리 전국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2차 대전 중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ad Ali Junnah)의 영도하에 무슬림 대중을 결집했으며, 1942년의 ‘철퇴요구’ 운동으로 회의파 간부가 전부 체포되었을 때에는 당원 수를 200만 명까지 증대시키고 있었다. 또한 1936년 이래 힌두교도와 분리되어 ‘깨끗한 나라’라는 뜻의 ‘파키스탄’을 수립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인도 인구의 약 ⅓을 차지하여 음식물·의복·관혼상제(冠婚喪祭) 등 생활양식이 힌두교도들과는 전혀 달랐다. 인도가 독립하는 기회에 파키스탄 수립을 꼭 실현하려던 그들은, 1947년 8월 16일 회교도가 다수인 캘커타에서 동일국가 건설을 거부하면서 사상초유의 대충돌 사건을 야기시켰다. 그 결과 5천 명의 사망자와 1만 5천 명의 부상, 15만 명의 피난민을 발생시켰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약탈·폭행·방화·추방 등 잇따른 혼란으로 1947년 2월에는 1천5백만의 유민(流民)을 발생시킨 ‘광란의 인도’가 초래되었다. 인도의 국민회의파는 통일을 주장하였으나 회교도연맹은 강경하게 분리 아니면 내란 둘 중 하나를 강요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와 같은 인도의 사태를 도저히 조정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47년 2월 파키스탄의 분리, 번왕국(藩王國)의 자발적 참가를 조건으로 하는 마운트바텐안(Mounybatten 案)을 양쪽에 확인시킴으로써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연방과 파키스탄은 영국연방을 구성하는 두 개의 자치령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뿌리깊은 종교적 대립은 양국이 독립한 후에도 해소되지 않아 캬슈미르 영유권을 둘러싸고 1947년, 1965년, 1971년 세 차례에 걸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1971년 파키스탄 내정이 불안해지자 인도는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지원, 파키스탄과의 전면전에서 승리, 방글라데시의 탄생을 이루게 하였다.
인도
편집印度 Republic of India
1948년 1월 국민회의파의 지도자 간디가 암살되었으나 네루가 그 뒤를 이어 1950년 1월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의회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나라를 재정비하였다. 인도는 1951년부터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였으며, 중도주의(中道主義) 외교정책을 취하여 소련·미국·서독·영국 등의 나라로부터 외자를 도입하고 원조를 받으면서도 어느 블럭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비동맹주의 정책을 취하여왔다. 이리하여 인도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을 중심으로 제3세력 형성운동을 주도하고 뚜렷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1962년 7월 중공과의 분쟁 이후 서방측으로부터 다량의 무기원조를 받는 등 의존도가 높아져서 비동맹정책은 빛을 잃었고,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의 영향력도 약해졌다. 대중공견제책(對中共牽制策)으로 소련 접근이 활발하며, 카슈미르의 귀속을 두고 대립을 계속해온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1966년 타시켄트 선언으로도 완전 해결을 보지 못했다. 1971년 3월 동·서파키스탄 충돌로 서파키스탄 정부군이 동파키스탄에서 대량학살을 감행, 1천만이 넘는 동파키스탄 난민(難民)이 인도로 넘어옴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 12월 3일에 파키스탄과 전면전(全面戰)에 돌입했다. 14일간의 전쟁은 파키스탄의 항복으로 끝나고 이 전쟁으로 동파키스탄이 독립하게 되는 등 인도의 국제적 위신은 높아졌으나 중국, 파키스탄과의 끊임없는 전쟁은 국내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어 1966년 이래 집권한 간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날로 고조되어갔다. 이에 맞서 간디정권은 비상사태의 선언으로 야당 및 언론을 탄압하는 등 정권 연장을 위한 독재화의 길을 강화하였으나 1977년의 총선거에서 간디 자신까지도 낙선하는 등 야당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1984년 인디라 간디는 피살되고 장남 라지브 간디에게 총리직이 승계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 1991년 5월 총선기간 유세중인 라지브 간디 전총리가 폭탄테러로 급서하여 라오총리가 총리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1997년 7월 대선에서 키르체릴 라만 나라야난 부통령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98년 총선에서는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가 총리직을 이양받았다.
네루
편집Pandid Jawaharal Nehru (1889
1964)
인도의 정치가. 간디의 친구인 모틸랄 네루(Motilal Nehru)의 아들로 1905년 영국에 유학해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1912년 귀국했다. 간디의 감화(感化)를 받아, 국민회의파(國民會議派)가 지도하는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 불복종운동(不服從運動), 1922년에는 외국제 직물의 보이콧 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되었다. 1926년부터 유럽여행 길에 올라 각지를 순방한 후 귀국하자마자 인도 국민회의파의 중심 지도자가 되고, 1929년 12월에는 회의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사회주의 경향이 농후한 소위 네루 시대를 만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인도의 완전독립을 결의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9회나 투옥되면서도 인도의 자치독립 달성을 위하여 분투하였다. 1930년 4월 염세(鹽稅) 항의 때문에 투옥되었으며, 그 이후는 석방과 투옥이 되풀이되어, 3년 6개월의 감옥생활을 거쳐 1935년에 석방되었다. 1936∼1938년 인도국민회의파 의장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8월에는 간디의 제3회 반(反)영국 불복종운동에 참가, 지도하던 중 체포되었다. 1945년 6월 출옥, 1946년 인도 임시정부 부수상(副首相), 1947년 독립 후는 수상(首相) 겸 외상(外相)이 되었다. 수상에 취임한 후부터는 그는 이전에 보였던 사회주의적 경향을 포기하였으나, 이는 국민회의파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회의파내의 우파(右派)와 타협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외교면에서는 동서양진영(東西兩陣營)의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는 자립평화외교(自立平和外交)를 강력히 추진하여 제3세력 블록을 형성하였으나, 중·인 국경분쟁(中印國境紛爭) 이래 점차 반공색(反共色)을 강화하다가 1964년 사망하였다. 『마하트마 간디』(1948) 『인도의 발견』(1946) 『자서전』 『세계사 이야기』(1936)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간디
편집Indira Gandi (1917
1984)
인도의 정치가. 고(故) 네루 수상의 장녀. 1938년 반영투쟁에서 13개월간 투옥된 경력이 있다. 1966년 샤스트리 수상의 서거로 제3대 인도 수상에 취임한 간디는 1971년 총선에서 압승, 확고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75년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의 그에 대한 선거부정 유죄판결을 분수령으로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검거하는 등 인도 민주주의에 일대 오점을 찍는 강압·독재정치를 행하였다.
간디의 독재통치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체포와 언론에 가혹한 통제를 가하였으며, 그의 차남 산자이는 공직자도 아니면서 국정에 적극 관여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강압적인 간디의 비상통치는 전국민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며 여당인 국민의회파까지도 분열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의 압력에 못이겨 1977년 3월 총선거를 치르게 되자 간디 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 산자이, 법무상, 국방상 등 간디식 비상통치의 핵심인물이 모두 낙선하는 대참패를 맛보게 되었다. 인도의 ‘제2의 독립’이라고 일컬어지는 간디 정권의 붕괴는 인도 반도의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게도 민주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미국의 인권외교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1984년 경호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데사이
편집Morarji Desai (1896∼1995)
인도의 정치가. 구자라트에서 출생. 봄베이 대학을 졸업하고 봄베이주(州) 관리를 지냈으며, M. 간디의 불복종운동에 참가하였다. 1952년 봄베이주 총리, 1956년 인도정부 상공장관을 역임하였다. 네루가 죽은 뒤 샤스트리와 수반(首班)을 다투다 패배하였다. 1967년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취임했지만 국민회의파 분열 후에는 야당 국민회의파 총재가 되어 I.간디 내각에 대항하다가 1975∼1977년까지 투옥되었다.
그 후 야당연합세력인 자나타당(黨)에서 활약하여 1977년 총선에서 자나타당의 승리로 총리에 취임했으나, 당내대립으로 1979년 사임했다. 그는 자유주의 경제를 주장하는 열렬한 간디주의자였다.
인도의 5개년 계획
편집印度-五個年計劃
1951년부터 급속한 공업화와 각 부분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통하여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도 정부에서 실시하였던 경제개발 계획. 1955년에 끝난 제1차 5개년 계획에는 식량과 농업 부문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고, 1956년부터 시작한 제2차 계획에서는 농업과 중공업 부문에 치중하여 국영공업(國營工業)을 육성,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인도적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사기업(私企業)보다도 공기업(公企業)을 우위에 두는 네루의 사회주의적 경제계획에 대해서 보수파와 국제자본가층은 비판을 가했으나 그는 사회주의화의 구호를 중단하지 않고 농업에 있어서 협동조합의 전국적 조직화, 토지 보유의 최고 한도 설정 등을 추진하였다. 1961년부터 제3차 계획을 추진중에 네루가 서거하였으나 65년에 제3차 계획은 완성하였다. 1966년 제4차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중공과 파키스탄과의 전쟁 이래 국방비 증대에서 오는 재정 적자와 외국 원조의 감소 경향, 만성적 농업위기로 인하여 이 계획은 3년간 동결되었다. 1969년의 제4차 계획에 이어 1974년 국가개발평의회에서 제5차 계획을 수립, 1978년 종료되었다. 간디 여사 집권 후 제6차 5개년 계획, 1992년부터 제8차 5개년 계획으로 국제경쟁력 강화에 힘썼다.
인도·중국 분쟁
편집印度·中國紛爭
1959년 3월 인도로 망명해온 달라이 라마(Dalai Lama)에 대하여 네루는 호의를 보이고 티베트 사건에 대한 깊은 동정을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중국과 인도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여 1962년 10월 국경문제로 히말라야의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후 양국은 계속 긴장관계에 있다가 1967년 9월 다시 티베트 국경에서 대규모 충돌사건이 발생하였다. 1971년 12월의 인도·파키스탄 분쟁에서 중국이 파키스탄 편을 들어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으나 1976년 4월 인도가 돌연 1961년 인·중 국경분쟁 이래 부재해온 북경주재 인도대사를 임명하고 중국 또한 그에 대응조치를 취함에 따라 15년 만에 양국관계는 일단 정상화되었다. 1988년 간디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리펑(李鵬) 총리와 국경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상호노력키로 합의하였다.
파키스탄
편집Islamic Republic of Pakistan
1906년 결성된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제창, 1947년 8월 인도와 분리하여 영연방 내의 자치국이 되었으며, 1956년 3월 신헌법을 제정하여 회교도 공화국이 되었다. 1958년 10월 아유브 칸 육군사령관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아유브 칸은 10년에 걸쳐 독재를 한 끝에 학생과 경찰간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1969년 3월 전권(全權)을 야햐 칸 육군사령관에게 이양하고 물러났다. 야햐 칸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곧 계엄령을 선포, 사태를 일단 수습한 다음 1970년 1월부터 정당(政黨)활동을 인정,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건국 이래 정치·경제 등 각 방면에서 ‘서파키스탄 우선’에 불만을 가졌던 동파키스탄 주민은 자치권의 대폭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운 아와미 연맹을 지지, 아와미 연맹은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무지부르 라만 총재는 국방·외교를 제외하고 조세·무역·외국원조 등에 관한 전권(全權)을 동파키스탄에 이양하라는 등 6개항을 요구, 5천8백만밖에 안되는 서파키스탄이 7천2백만이나 되는 동파키스탄에 비해 외국원조액의 70%, 수입의 70%, 중앙관료의 85%, 군(軍)의 90%를 독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71년 3월 중앙정부군이 출동, 라만 당수를 체포하고 아와미 연맹을 불법화했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하고 국명(國名)을 방글라데시(Bangla Desh)로 명명, 철저한 항전(抗戰)을 지령함으로써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칸 대통령은 6월, 4개월 내의 민정이양(民政移讓)을 선언하고 정치활동금지법을 폐지하는 등 수습에 나섰으나 12월 인도와의 전면전에서 패전하고 하야(下野)하였으며,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을 하게 되었다. 1971년에 취임한 알리 부토 대통령은 내전 뒤처리와 기간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 등 국가 재건에 노력했으나 1975년 이후 독재·탄압정치를 강행했다. 1977년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지아울 하크가 1978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집권 후 독재체제를 유지해 오던 지아 대통령이 1988년 사망하자 반정부활동을 하던 베나지르 부토가 집권했다. 방글라데시와 1976년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93년 10월 총선 후 부토 내각이 집권했으나 1996년 11월 부패와 경제정책 실패로 부토 총리가 해임되었다. 1997년 2월 3일 실시된 총선에서 나와즈 샤리프 전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동맹(PML)이 압승, 1당이 됐다. 8월 샤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임명하자 샤리프총리는 의회 인사권 침해라고 반발, 이에 대해 샤 대법원장은 사법부 모독이라며 총리를 기소했고 샤리프 총리는 다수당임을 이용, 사법부모독법 개정안 상하원 통과, 1997년 12월 파루크 레가리 대통령은 정정불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여 제9대 대통령으로 모하마드 라피크 타라르 전대법관이 당선되었다.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샤리프 총리는 축출되고 무샤라프가 새 총리로 전권을 장악하여 부정축재관리들을 숙청하였다.
스리랑카
편집Republic of Sri Lanka
1948년 2월 독립한 이래 지주·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대(對)영국 협조를 주장하는 통일국민당과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인민통일전선이 대립하여 발전하였다. 1956년의 선거에서 인민통일전선이 대승하여 반다라나이케가 정권을 장악하고 농지개혁과 항만·버스의 국영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던중 1959년 암살당하였다. 1965년에는 통일국민당이 정권을 잡고서 보수온건 정책을 추진,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원조를 얻었다.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한 반다라나이케의 부인이 좌익연립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1977년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의 자야와르데네가 집권해 반다라나이케 정부는 붕괴되었다. 1983·1984년 두 해에 걸쳐 타밀족과 싱할리족간에 인종분규가 일어나 1987년 타밀 과격단체가 독자적인 민간정부를 선포했다. 이에 정부는 강경하게 대처했으나 1987년 말에 그들의 제한적 자치를 허용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인도·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프레마다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폭탄테러로 사망, 1994년 8월 총선에서 쿠마라퉁가를 총리로 한 소수내각이 출범, 17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또한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타밀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우선과제로 추진했다.
방글라데시
편집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파키스탄은 인종·언어·생활양식 등 모두가 서파키스탄과 달랐으며, 경제적 차별을 받아 일종의 식민지적 존재에 불과하여 항상 파키스탄 중앙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아와미 연맹의 무지부르 라만 당수는 1966년에 동파키스탄의 자치권을 촉구하였다. 아와미 연맹은 1970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대폭적인 자치를 요구하였다. 1971년 3월 동·서 파키스탄은 내전에 돌입하였으며, 인도는 동파키스탄을 적극 지원, 동년 12월 파키스탄의 항복을 받았고, 동파키스탄은 국호를 방글라데시로 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1972년 헌법을 제정, 1975년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하여 초대대통령으로 라만이 취임하였다. 1975년 이래 10여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나 정세가 불안하여, 1990년 에르샤드 대통령이 사임하자, 1991년 민족주의당은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었다. 1991년 실시된 조기총선에서 지아가 총리에 취임, 1996년 총선에서는 아와미연맹의 하시나 와제드 총리가 신임총리에 취임하였다.2001년 지아 총리가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