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현대 세계의 새 질서/세계를 뒤흔든 세계대전/중국의 항일 민족통일전선과 중·일전쟁

중국의 항일 민족통일전선과 중·일전쟁[槪說] 편집

일본군은 1931년의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의하여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한 이래 1933년에는 러허성(熱河省)에 침입하고 1935년에는 더 나아가서 헤베이성(河北省)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이들 지역을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히 일본의 지배하에 두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영도하는 국민정부는 군벌세력과 공산군에 대한 공격에 전력을 기울여 일본에 대해서는 타협 정책을 취했다.

일본의 동북 침략은 본래 대소전략(對蘇戰略)의 중요한 일환이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중국을 둘러싼 국제 관계는 일본과 미국 및 영국의 대립, 특히 일본과 미국의 대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의 중국 독점 움직임에 대항하여 미국과 영국이 국민정부를 지지했던 일은 폐제개혁(幣制改革)의 성공이 적중되어 일시적으로는 국민정부의 중국 통일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래 일본 침략이 불러일으킨 강렬한 내셔널리즘을 국민정부는 자기에게 전적으로 집결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전쟁을 앞두고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당시 겨우 중국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앉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제휴하여 그들의 국가와 민족을 일본의 침략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으로 시작되는 전면적인 중·일전쟁(중국에서는 항일전쟁이라 한다)에서는 당시에 일본이 예상 밖으로 중국 국민의 완강한 저항을 만나, 일본은 수렁 속에 빠진 중·일전쟁의 해결 방법을 모험적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구하려 했다.

대장정 편집

大長征

국민정부군의 포위와 공격을 당한 화남의 근거지에서 산시(陜西)와 간쑤(甘肅)의 변경지대로의 이동을 말한다. 이동중에도 끊임없이 국민정부군의 습격을 당한다든지 또한 여러 가지 천재지변을 만난다. 그동안 마오쩌둥(毛澤東)이 당내의 지도권을 확립하고 소위 8·1선언이 나오게 된다.

마오쩌둥 편집

毛澤東(1893

1976)

중국공산당의 주석·사상가. 후난성(湖南省) 샹탄현(相潭縣)의 부농 가문에서 태어났다. 1918년 후난공립제일사범을 졸업, 베이징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는 가운데 리다자오(李大釗)의 영향을 받는다.

5·4운동에서 후난의 군벌축출운동을 지도하였고, 1920년 공산주의자가 되어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가하였다. 1925년 5·30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농민운동에 주목하여 이후 농민운동에 투신하고 19 27년 후난 농민운동 시찰보고서를 발표하여 적극적인 농민투쟁을 제안하였으나 당지도자 천두슈(陳獨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공분열(國共分裂) 후 추수폭동(秋收暴動)을지도하여 1928년 주더(朱德)군과 합류, 정강산(井岡山)에서 홍군(紅軍)을 창립하였다.이곳을 혁명근거지로삼아 농촌으로도시를포위한다는그의중국 혁명 이론을 세운 후 1935년대장정(大長征) 과정에서 열렸던 준의회의(遵義會議) 이후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협조와 지도하에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추진하였으며, 옌안(延安)을 중심으로 공산당의 세력을 부식하여 소위 항일 해방구(解放區)를 확대하여 중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 동안에 「실천론」 「모순론」 「신(新)민주주의론」 「문예강화(文藝講話)」 등을 발표하여 자기 나름의 공산혁명 이론을 확립하였다. 1949년 중공 정권을 수립, 주석(主席)이 되고, 소련의 원조 아래 중국 대륙 공산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9년 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劉小奇)에게 물려주었으나 중소논쟁(中蘇論爭)과 그가 지휘한 이른바 문화혁명(文化革命) 과정에서 숙청하였다.

주더 편집

朱德(1886

1976)

중국의 군사 지도자. 쓰촨성(四川省) 출신이다. 청년 시절에 쑨원(孫文)의 ‘중국혁명동맹회’에 참가하고 신해혁명(辛亥革命) 때 군인으로 활약했으며, 그후 쓰촨성에서 한 소군벌(小軍閥)이 된다. 1922년에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건너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 북벌전쟁(北伐戰爭)에도 참가하였고,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난창폭동(南昌暴動)을 지휘한다.

1928년 징강산(井岡山)에서 마오쩌둥과 협력, 공산당의 홍군(紅軍)을 창설하였으며, 홍군의 최고 지도자로서 항일전쟁을 거쳐 한국전쟁에는 중공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북괴의 남침을 도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오쩌둥의 추종자였으나 1969년 국방상 자리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숙청당하였다.

시안사변 편집

西安事變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양후청(楊虎城) 등이 장제스(蔣介石)를 시안(西安)에 감금하고 내전의 정지와 거국 항일을 요구한 사건.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하여 국민정부는 내전에 전력을 기울이고, 일본의 침입에 대해서는 타협 후퇴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산시성(陜西省) 북부의 공산당 지구를 공격하고 있던 장쉐량의 구(舊)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에는 내전 정지와 일치 항일의 요구가 강하여 내전의 국지적(局地的) 휴전상태까지 있게 되었다.

장제스가 독전(督戰)을 위해서 시안에 온 것을 기회로 장·양 등은 내전의 즉시 정지, 애국운동의 자유, 각당각파가 참가할 수 있도록 국민정부를 개조할 것 등 8항목의 요구를 제시했으나, 거부당하여 마침내 장제스를 감금했다. 저우언라이(周思來)·쑹쯔원(宋子文)의 조정을 얻어 장제스는 원칙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인정하고 25일 석방되었다. 이 결과,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 항일(抗日)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 편집

第二次國共合作

중국의 2대 정당인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에 대해 일치단결하여 싸우기 위한 통일전선. 일본이 1931년의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화베이(華北)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에서는 1936년 12월 시안사건(西安事件)이 일어났고, 그 결과 국민당은 내전정지(內戰停止)와 대일항전(對日抗戰)을 결의하게 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 직후, 루산(廬山)에서 장제스(蔣介石)·마오쩌둥(毛澤東) 회담이 열렸고, 이어 중국은 소비에트 지구의 해소, 공산군의 개편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위해 국민당과의 융화책(融和策)을 취하였으며, 국민당은 9월 22일 정식으로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종말을 선포하여 합작이 실현되었다. 이리하여 홍군(紅軍)은 제8로(第八路)로 개편되어 국민정부로부터 군비·군수품을 받아 방비구역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대일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당의 세력확장을 꾀하여 도리어 충돌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대일(對日)전쟁을 미국에 맡긴 형태로서 국·공의 반목은 격화되어 이 내전은 전후(戰後)로 계속 이어졌다.

항일 민족통일전선 편집

抗日民族統一戰線

만주사변 이래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저항하고자 하는 모든 중국의 국민이 각자의 주의·주장·계층·계급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점에 일치단결하여 저항하려고 했던 정책이다. 1934년부터 개시한 대장정 중에 발표된 소위 8·1선언에서 이 정책이 최초로 구체화하였다. 베이징(北京)과 기타 도시에 있어서 학생과 민중의 반일운동, 시안사변을 거쳐 중·일전쟁 개시 직후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형태로 전국적으로 결성되었다. 이것으로 중국은 8년간의 중·일전쟁을 치러 나갈 수가 있었다.

루거우차오 사건 편집

蘆溝橋事件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 사건.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소도시인데, 여기에 쑹저위안(宋哲元)의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해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연습중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이 되자, 이를 양국이 공동 조사할 것을 중국측에 요구했으나, 중국측은 이에 불응했다. 이에 일본군은 중국군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중국군을 불법적으로 공격하여,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다음 날인 8일에는 루거우차오를 점령하였다. 7월 11일에는 중국측의 양보로 현지(現地) 협정을 맺어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으나, 일본군대의 증파와 일본정부의 강경한 태도로 전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