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민족운동〔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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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취임한 커튼 총독의 통치 아래서 영국의 인도지배는 한층 강화되었다. 은본위제(銀本位制)에서 금환(金煥)본위제로의 전환은 아메리카·독립제국주의의 흥륭(興隆)으로 시장이 좁아지고 있던 영국 금융자본(金融資本)의 인도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한 인도 민중의 반항은 1905년 벵골 분할법 반대투쟁으로 폭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 투쟁을 조직, 지도한 것은 틸라크 등 의회파(議會派) 내의 급진파(急進派)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종래 영국에 대해 협조적이었던 회의파(會議派)도 자치 획득 투쟁(自治獲得鬪爭)을 지도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친영적(親英的)인 인도 이슬람교도 연맹도 성립되지만, 영국은 1909년의 몰리·민토개혁으로 인도인의 입법기관에의 부분적 참가를 인정했다. 이로써 반영(反英) 운동의 완화와 힌두·이슬람의 대립조장(對立助長)을 꾀했다.

스와라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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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動 스와라지(Swaraj) 운동은 국민회의파가 지도했던 자치획득 운동인데,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운동과 병칭(倂稱)된다. 1906년의 회의파 캘커타 대회에서 영국 상품 배척, 스와라지·스와데시 민족교육을 채택, 자치획득 운동이 전개된다. 1929년, 회의파 라호르 대회에서는 프르나, 스와라지(완전자치, 독립)를 최고의 목표로 내걸게 되었다.

벵골 분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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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割法 커튼 총독이 발포(發布)한 것(1905). 벵골(Bengal) 주(州)를 벵골과 동(東)벵골·아샘의 2주로 분할하고 지조(地租)의 증징(增徵), 영국자본으로 차 재배 확대와 더불어 힌두·이슬람 양교도의 분리, 즉 독립 운동의 분단을 노린 것이다. 분할법 반대 운동은 벵골에서부터 전국에 파급되어 영국 상품 배척운동이 되고, 다시 회의파 지도의 반영(反英) 투쟁이 되었으며, 1911년에 폐지되었다.

국민회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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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會議派 1885년 창립한 인도 국민회의(회의파)는 영국에 대하여 협조적이었으나 1905년 벵골 분할 반대 투쟁 등 민중 투쟁의 고양(高揚)에 호응하여 틸라크 등 급진파의 활약으로, 1906년에는 스와라지·스와데시를 강령으로 하고 이후 반영(反英) 투쟁을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07년에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지만 급진파의 투쟁은 그대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