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프랑스 집권 국가의 성립

프랑스 집권 국가의 성립〔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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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왕조의 집권 정책은 루이 6세(1081

1137, 재위 1108

1137)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봉건제적(封建制的)’ 정책을 취해서 왕권 신장을 꾀했다. 필리프 2세 오규스트는 영국 왕 존으로부터 프랑스 국내의 봉지(封地)를 몰수하고, 노르망디, 브레타뉴, 앙주를 왕령(王領)에 추가시키고, 부빈의 싸움(1214)에서 존과 독일 황제 오토 4세에 승리했다. 알비조아 십자군 때는 남프랑스의 툴루즈를 지배 아래 넣었다.프랑스에서는 “봉주(封主) 없는 토지 없다”, 국왕은 “일체의 봉주에 우선되는 무조건적 봉주”라는 봉건법적 원칙이 관철되어 집권적 봉건 왕정이 형성된다. 이것을 유지한 관료제는 필리프 2세부터 루이 9세의 치세에 걸쳐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최고 법정 파루루먼 및 회계원이 있고, 시민 계급 출신의 법조가(法曹家)가 활약했다. 지방 행정은 국왕이 임명하는 유급 관료인 바이이(Baillis), 세네샬(Snchal) 및 하급 관리인 프레보(Prvot, 청부제 관리)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왕권의 확대는 교황과의 충돌을 초래했다. 필리프 4세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 승려과세권(僧侶課稅權)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3부회를 소집하였으며(1302), 다음해 교황을 아나니에서 습격하여 분사(憤死)시켰다. 그의 통치에서는 법조가적 정치 고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집권 체제는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절대 왕정의 성립에는 백년전쟁이라는 전환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루이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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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Louis Ⅸ(1214

1270, 재위 1226

1270)

성왕(聖王).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며,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여 치세도 법―정의의 실현을 도모하는 등 명군(名君)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내정면에서는 템플 기사단에게 재정을 담당시키고, 왕실 법정에 전문 법조가를 등용하여 명실 상부한 전프랑스의 공소법정(控訴法廷)다운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법정결투(法廷決鬪)를 폐지하고, 문서와 증언을 판결의 증거로 하는 등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문화사업에도 깊은 배려(配慮)가 있어, 파리로 하여금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제7회 십자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고, 1270년 재차 아프리카에 나갔으나 튀니지의 진중에서 병몰하였다.

제7회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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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回十字軍

인노센트 4세는 1245년의 리용 종교회의에서 제7회 십자군의 권청(勸請)을 행했다. 이 십자군은 1244년 호라즘 군(軍)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과 1247년의 아스칼론 함락, 그리고 안티오키아 후령(侯領)에 밀어닥친 몽골의 위협 등 프랑크 시리아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한 것이었다. 정의와 중용(中庸)을 추구한 성왕(聖王) 루이 9세는 이를 받아들여 1248년에 이집트로 향해 출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다미에타를 점거했다. 이에 아유브 왕조의 술탄 앗사리프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맞바꾸자고 제의했으나 그는 이를 물리치고 친히 카이로 진격을 개시했다. 제5회 십자군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사실 이 거사는 예상에 어긋나 이집트군의 포위와 유행병의 만연(蔓延) 때문에 부득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아유브 왕조는 1250년 투르크인 용병(傭兵)에 의해서 무너지고, 새로이 마물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고액의 몸값을 치르고 루이 9세가 석방된 것은 이 마물루크 왕조 아래에서였다. 그 뒤 그는 시리아로 향하여 1250년부터 1254년에 걸쳐서 그 곳에 머물렀다. 그 사이 연안 여러 도시의 방위망을 강화하고, 반(反)마물루크 왕조 통일 전선의 결성을 호소했다. 그가 프란체스코회(會)의 수도사를 몽골 제국(帝國)의 몽케칸(汗)에게 파견한 것도 이러한 노선에 따른 일이었다.

제8회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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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回十字軍

1265년 루이 9세는 샤를 당주의 시칠리아 왕관(王冠) 수락을 승인했다. 물론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개입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그로서는 반드시 이에 전면적으로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5년 후인 1270년 루이 9세는 프랑크 시리아의 나머지 거점(據點)을 차례로 공략하고 있던 마물루크 왕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제8회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시칠리아 왕으로서 북부 아프리카 문제에 큰 관심을 품고 있던 샤를 당주의 제언(提言)을 받아들여, 튀니지로 방향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루이 9세도 같은 해에 마침내 그곳에서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필리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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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Philippe Ⅳ (1268

1314, 재위 1285

1314)

미왕(美王). 필리프 3세의 아들. 결혼에 의해 나바라 왕을 겸하고 부르주아지 내지 소(小)귀족 계급 출신의 법률가를 중용하여, 왕권의 강화에 노력하였다.1294년부터 1303년까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1302년부터 1304년까지는 플랑드르와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대외전쟁 수행에 필요한 경비마련을 위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했다.특히 교황청과의 투쟁이 격심하였는데, 교회 과세문제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분쟁을 일으키자,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3부회(三部會)를 파리의 노트르담에 소집(1302), 교황을 굴복시켰으며, 프랑스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세우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놓고 그 지배하에 두었다(1309). 또한 행정·사업·재정의 제도를 정비했는데, 왕실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증액, 통화의 개악(改惡)을 행하였으며, 부유한 유대인을 박해했고, 또한 루이 9세 이래의 유일한 재정 담당자였던 템플 기사단을 해산시켜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1312).

3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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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富會 EtatsGnreaux

필리프 4세가 1302년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서 성직자·귀족·시민의 대표들을 집합시켜 국민회의를 개최한 데서 비롯된 프랑스 신분제(身分制) 의회이다. 국왕의 과세 제안에 협찬하는 기관에 그쳤고,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다. 1355년 ‘3부회’란 명칭을 얻었다. 지방에는 ‘지방 3부회’를 설치했다.

백년전쟁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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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年戰爭

1328년 카페 왕조 단절.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 즉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데서 발단되었다고 하는데, 원인은 더 뿌리가 깊으며, 프랑스 국내의 영국 왕 지행권(知行權)을 둘러산 싸움, 플랑드르를 둘러싼 경제적 이해의 대립이었다(1337

1453). 이 싸움을 통해서 영국·프랑스 양국에서는 국민 의식의 형성, 봉건 귀족 세력의 쇠퇴, 용병(傭兵)에 의한 상비군의 설치, 관료제의 정비 등 절대 왕정에의 전환이 이루어져 갔다.

필리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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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Philippe Ⅵ (1293∼1350, 재위 1328∼1350)

프랑스 왕. 발루아 백(伯) 샤를의 아들이며, 필리프 4세의 조카. 종형(從兄) 샤를 4세의 뒤를 이어 발루아 왕조를 창시했다. 플랑드르에 왕권을 뻗쳤으며,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의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났는데, 슬로이스 앞바다(1337), 크레시(1346), 칼레시(1347)에서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만년에 흑사병이 맹위를 떨쳐 국토는 크게 황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