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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 말기의 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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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말기부터 전개된 십자군의 원정은 로마 교황 세력의 절정기에 시작된 것이었는데 이미 월무스 협약 이래 교황권에 대한 세속 군주의 권력이 차차 독립·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십자군의 원정은 가톨릭 세력의 확대라는 본디의 목적 달성보다도 오히려 동방 무역의 발달이나 도시의 발달에서 볼 수 있는 경제적인 여러 변화를 야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도 13세기라는 세기는 문화적으로도 주목되는 시대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중세적인 문화의 결정기(結晶期)임과 동시에 전환에의 첫발을 내디딘 시대이기도 하다. 교권과 속권(俗權)의 병립(竝立) 상황이 생겼다는 것은 아울러 문화의 국민적 경향의 전개와 관련되고, 도시의 발달에 의한 시민의 성장은 도시 경제에 말미암은 문화의 발전을 촉구했다.서유럽 제국이 각 나라 국어(國語)에 의한 문학을 가지게 된 것은 13세기 이래의 일이었다. 같은 13세기에 중세의 미(美)를 대표하는 고딕 건축이 도시 문화를 장식하고 스콜라 철학의 대성자(大成者)라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도 나타났는데 그 후의 로저 베이컨이나 윌리엄 오컴 등은 중세 철학과 고별하고 근세 철학의 서막을 장식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동·서 양 칼리프국에서 이슬람 문화가 그리스도교국에 미친 영향은 큰데 철학·자연과학 부문에서 특히 현저하다. 그러나 사라센인에 의한 이슬람 문화의 융성도 13세기에는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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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quinas (1225?

1274)

이탈리아 출신의 신학자. 나폴리 왕국 내의 백작 집안에 태어나 근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회(修道會)에 들어가 일생을 신학 연구에 바쳤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받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에 도입하는 데 노력했다. 이성과 신앙, 자연과 초자연과의 조화를 구하고 나아가 당시의 정치나 법에 대해서 신의 ‘영원법(永遠法)’에 따른 ‘자연법’을 주창하고 농노제(農奴制)의 승인과 상업 행위, 특히 이자 획득 행위의 배척 등 그 이론은 널리 사회·경제 분야에 미쳤다. 주저(主著)에 『철학 대전』, 『신학대전』이 있다.

로저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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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Bacon (1214

1294)

영국의 자연과학자. 옥스퍼드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파리에서 실험과학을 연구, 영국에 가서도 이 방면의 연구에 몰두했다. 광학·천문·일력 등의 분야에 통하고, 서쪽으로 아시아에 도달하는 편이 지름길이라는 것 등을 밝혔다. 그는 그리스·로마·이슬람의 과학적 문헌에 통달하여 교양이 폭넓고 또한 사실인식 태도가 훌륭했다. 따라서 교회의 탄압도 가끔 받아 만년에는 14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생했다. 영국 경험론(經驗論)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윌리엄 오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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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of Ockham (1300?

1350?)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비판하고 실증적·직관적(直觀的)인 인식을 주장했다. 보편(普遍)은 단순한 명목에 불과하다는 유명론(唯名論, 名目論)을 주창하고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을 따로 구별했다. 신학상의 문제나 교황의 권위 비판 등으로 때때로 교황과 대립했다.

고딕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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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12세기 중엽부터 15세기에 걸쳐 전유럽에 보급된 건축 양식, 고딕(Gothic)이란 고트풍(風)이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리스·로마의 미술과 비교하여 낮잡아서 사용한 이름이다. 19세기 이후는 그러한 의미가 없어지고 중세 후기의 독자적인 건축 양식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천장의 궁륭 가구(穹隆架構) 양식은 다년간의 경험과 연구에 의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낳고, 천공(天空)에 치솟은 첨탑(尖塔)은 교회 건축에 어울리는 위광(威光)과 경건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벽화나 형형색색의 유리그림(스테인드 글라스)이 내부의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딕 양식은 이미 12세기에 시작되어 프랑스의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초기의 것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유명하다. 이것은 안정된 본채 위에 두 개의 탑을 올려놓아 정면에서 본 모습은 기하학적으로도 안정된 것이라 하며, 13세기 고딕 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서자 3층 구조가 채용되어 높은 창에 의한 채광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건축 전형으로 프랑스의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의 교회당, 독일의 쾰른 성당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쾰른의 경우는 두 개의 아름다운 첨탑과 넓고 높은 창이 특색으로 되어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북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웨스트민스터 성당(1245)이 유명하며 정치적으로도 유서깊은 건물이 있다.

이슬람과 중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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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文化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던 유럽의 중세 문화에 비해서 이슬람 문화는 미술을 제외하고는 종교적 제약을 별로 받지 않았다. 특히 자연과학이나 철학 분야에서 이슬람 문화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중세 이후의 유럽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철학의 아베로에스나 아비켄나의 저서는 영국의 로저 베이컨 등에 의해서 유럽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리에서는 이븐 쥬바일·이븐 바투타 등의 여행기가 동방 소개에 공헌하였다. 수학에서는 인도의 영향도 받아서 숫자·십진법·삼각법·고차방정식 등 많은 성과가 있고 후와리즈미의 대수학(代數學)에 관한 저서는 유럽 여러 대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의학에서는 아비켄나의 『의학 대전』이 유럽 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약과 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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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藥-銃砲

소위 흑색 화약(黑色火藥)은 중국의 남송(南宋)이 금(金)의 군대와 싸웠을 때에 사용된 벽력포(霹靂砲)에서 최초로 실용화되었다. 화약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몽골인의 유럽 침입 때, 즉 13세기 전반이었다. 그 후 1330년에 독일의 벨트루트 슈발츠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약을 제조하였다. 백년전쟁의 초기에는 영국군이 이미 20문의 대포를 사용하였고 1360년대에는 소총의 선구(先驅)인 수포(手砲)가 생겼으며, 1424년에는 화승총(火繩銃)이 발명되었다. 화약·총포의 사용은 전술의 대전환을 가져왔고 기사의 몰락, 제국(諸國)의 집권화, 식민지 진출 등을 촉진하였다.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 포르투갈인의 인도 진출 등은 총포 사용이 효과를 올린 사례이다.

나침반의 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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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針盤-改良

중국에서는 물에 자침(磁針)을 띄워서 방향을 알아내는 방법이 이미 11세기경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아라비아인에 이용되어서 나침반의 전신이 되어 지중해·인도양의 항해에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을 다시 개량, 실용화한 것은 13세기 이탈리아 아마루피의 후라비오 조야라고 한다. 나침반의 개량은 해도(海圖)·지도 기타 항해 기술의 개량과 더불어 훗날 지리상의 발견에 크게 공헌했다.

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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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o Polo (1254

1324)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사람. 상인·여행가. 부친 니코로 폴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는 무역 상인으로 중국에 이르러 세조(世祖)를 알현하고 귀국. 1271년 당시 17세의 마르코를 데리고 다시 동방 여행에 나섰다. 육로로 대도에 이르고(1275), 재원(在元) 17년 세조의 후대를 받아 정무에 참여함과 동시에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 일 한(汗)에 시집가는 공주와 동행하여 해로로 페르시아에 도착, 1295년 귀국했다. 그 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교전에 참가, 패하여 투옥되었다. 옥중의 여행담이 루스티켈로에 의해서 정리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다. 이것은 주로 몽골의 역사와 주민에 관한 견문을 기술(記述)한 것인데 지팡(Zipang:일본)에 관한 기술도 포함, 문예부흥기에 있어서의 유럽의 동방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源泉)이 되었다.

『동방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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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見聞錄

베네치아의 상인이며 여행가였던 마르코 폴로가 1260년 이래 두 번에 걸쳐 중국의 원조(元朝)를 방문, 약 28년간의 중국 체재 기간 중의 견문을 정리한 기록이다. 귀국한 뒤, 때마침 일어난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사로잡힌 몸이 된 마르코폴로가 옥중(獄中)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같은 감방의 수인(囚人)에게 구술하여 받아쓰도록 한 이야기가 바로 『동방견문록』이었다.쿠빌라이에게 후한 대우를 받으며 원 제국의 관원(官員)이 되기도 한 마르크 폴로는 윈난(雲南) 방면의 대여행을 비롯하여 오랜 체재 기간중 중국 대륙의 주요한 지방을 거의 빠짐없이 방문했고, 그것을 『동방견문록』에 상세히 기록했다.중앙아시아·중국·남해·서아시아 등 각지의 사정이 기록돼 있는데, 중앙아시아의 기록과 같이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은 대단히 정확하나 대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들이어서 정확한 기술이라 하기 어렵다.

토스카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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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canelli (1397

1482)

피렌체의 천문학자. 그는 해도(海圖)를 제작하고 동방견문록에 나타난 지팡구(日本)의 위치를 경도(經度)로 환산하여 지팡구에 가자면 동쪽으로 도는 것보다 서쪽으로 도는 편이 가깝다는 것을 콜럼버스에게 연락했다. 이 경도의 환산·계산은 분명히 잘못이었으나 이 주장이 콜럼버스의 서항(西航)을 결의케 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