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교황권의 쇠미
교황권의 쇠미〔槪說〕
편집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에 걸쳐서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세기’가 찾아왔다. 그레고리우스 7세(그레고리 7세)·우르바누스 2세(우르반 2세)와 같은 유명한 교황을 배출한 다음 이 시대에는 이노센트 3세(인노켄티우스 3세)가 영국 국왕 존을 굴복시킨 것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반도와 북유럽 제국의 군주를 누르고 교황권의 우월을 확립했다. 제4회 십자군·알비조아 십자군의 파견, 라테란 종교회의(1215)의 개최 등, 이 교황의 시대는 극성기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경부터 사태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크게는 십자군의 성과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서 신앙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교황의 세속 군주(世俗君主:프랑스의 앙주家 등)에의 예속이 시작되어서 교황의 지위가 세속 군주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다. 또한 이미 숙정(肅正)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 매매는 속권(俗權)의 개입에 의해서 계속되었다.이같은 상황은 단순히 교회 내부의 부패에 의할 뿐만 아니라 봉건 사회의 해체와 병행하여 진행되던 유럽의 근세적(近世的)인 중앙 집권 국가 형성이라는 사정도 반영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로마 교회에는 ‘아나니 사건’,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교회의 ‘대분열’ 등 비운과 고통에 찬 여러 사건이 연이어 야기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개혁의 선구적 운동으로서의 위클리프를 비롯한 일련의 교회 비판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한편 콘스탄츠, 바젤 등에서는 개혁을 위한 종교회의에 따라서 로마 교회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보니파키우스 8세(보니페이스 8세)
편집-世 Bonifacius Ⅷ (1235?
1303, 재위 1294 1303) 로마 교황(敎皇). 헝가리, 폴란드, 시칠리아 등의 군주(君主)를 처분하거나 영토의 부여, 왕위의 승인 등에 의해 크게 교황권을 신장시키고 1302년에는 교황 지상권(至上權)에 의해서 유럽 군주를 복종시키는 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 해 3부회(三部會)를 열어 교황에 대항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1303년에 아나니에서 잡혔으며 나중에 분사(憤死)했다.
아나니 사건
편집-事件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회와 수도원에 대한 과세, 재화의 국외 반출 금지령(1296)에 의해서 국내의 교회·수도원 재산의 교황청에의 유출을 막고, 나아가 사교(司敎) 체포 사건까지도 유발시켰다. 여기에 대해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회칙(回勅)을 발표하여 항의했다. 그러나 3부회(1302)를 소집하여 교황에 대항하는 세론을 굳힌 국왕은 1303년에 아나니(Anagni)의 교황 저택을 습격시켜 교황을 감금했다. 이 사건 후 교황권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아비뇽의 유수
편집-幽囚
아나니 사건 후 프랑스인의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남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에 옮겨짐으로써 이후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에 귀환할 때까지 교황청은 아비뇽에 옮겨져 있었다. 이것을 고대의 바빌론 유수에 연유해서 ‘아비뇽의 유수’(1309
1377)라 부른다.
교회의 대분열
편집敎會-大分裂 시스마(Schisma)라고도 한다. ‘아비뇽의 유수’ 이후 1377년에 교황은 로마로 돌아왔는데 그 후 로마의 올바누스 6세에 대해서 프랑스인파(派)에서 아비뇽에 클레멘스 7세가 대립,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 대립을 대분열(1378
1417)이라고 부른다. 후에 콘스탄츠의 종교회의에 의해서 겨우 분열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현저하게 손상시켰다.
위클리프의 개혁 운동
편집-改革運動
존 위클리프(1320?∼1384)가 추진한 개혁의 움직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로서, 교황권의 쇠퇴를 우려하여 성직자의 타락을 고발하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성서로부터 계시(啓示)를 받고, 순박한 신앙심 가운데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성서의 영어번역을 추진했다.처음 얼마 동안 위클리프는 왕가(王家)의 지지를 받아 각지에 순회 설교사를 파견하여 교설(敎說)의 보급에 진력했다. 위클리프의 설교는 설교사를 통하여 민중 사이에 침투해 갔고 그 자신이 의도했는지의 여부는 어떻든간에 그 설교는 당시의 불안정한 영국 사회를 자극시켰다. 반란은 1381년에 발발하여 런던을 포함하는 도시와 농촌이 반도(叛徒)에 의해서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제2막(幕)은 리처드 2세와 캔터베리 대사교의 명에 의한 피비린내나는 반동이었다. 위클리프와 제자들은 옥스퍼드로부터 추방되고 그의 교의(敎義)는 단죄(斷罪)되었다. 위클리프는 그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지(遺志)는 추종자들에게 이어져 그들은 여전히 설교를 계속하였고, 성찬(聖餐)과 고백 및 성자숭경(聖者崇敬) 등의 의식을 거부했다. 이후 위클리프의 후계자들은 종교적으로는 정통파로부터 더욱 이탈해가고, 윤리적·사회적으로는 부유(富裕)와 전쟁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의 사상은 보헤미아의 후스, 독일의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