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금의 발흥과 남송

금의 발흥과 남송〔槪說〕 편집

북송말(北宋末) 신법당(新法黨)과 구법당(舊法黨)이 정권 쟁탈전을 하는 동안에 동북 중국(만주)의 발해의 옛 땅에 여진족이 대두하고 있었다. 현재의 하얼빈의 우수리 강 지류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완안부(完顔部)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부족통일에 착수하여 1115년 금(金) 나라를 세웠다.금은 바야흐로 쇠퇴하기 시작한 요의 압력을 물리치고 남하를 개시하였다. 이에 송측은 전쟁을 좋하하는 환관 동관(童貫)을 중심으로 금과 동맹하여 요를 협격하여 숙원의 북방 영토 연운(燕雲) 16주를 되찾고 아울러 자기들의 영예를 빛내려고 기도(企圖)하였다. 1120년 송과 금 사이에 밀약이 맺어졌으나 마침 그 때 화석강(花石綱)을 중심으로 한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던 강남지방에서 커다란 민중반란이 일어났다. 북방으로 향해야 할 동관의 군대는 먼저 남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1년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진압시켰다. 그러나 다시 북방으로 향한 동관군은 빈사(瀕死)의 요군조차도 쳐부수지 못했고, 이에 금의 정예부대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요나라 안을 석권하여 1125년 마침내 이를 멸망시켰다.송은 금과의 밀약을 자주 이행하지 않고 요의 일족과 결탁하여 금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금군(金軍)은 성난 파도처럼 중국에 침입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카이펑에 육박하였다.휘종은 자기 스스로를 고죄(告罪)하는 성명을 내고 아우인 흠종(欽宗)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그의 손으로 채경(蔡京)의 유죄, 동관의 처형 등이 행하여지고 금과의 외교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금의 공격은 그치지 않아 1126년 국도 카이펑(開封)은 함락되고 엄청난 금은 재보와, 송의 왕실에 관련된 자 3천 명이 북방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정강(靖康)의 변(變)’이다. 극도의 영화를 누린 휘종은 찬바람 휘몰아치는 북방땅 만주를 전전하다고 오국성(五國城)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흠종 또한 송측의 사정도 얽히어 두 번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가 없게 되었다.송의 관료·무장(武將)은 황실에서 단 한 사람 남은 강왕(康王)을 고종(高宗)이라 하여 남송(南宋)을 세웠다. 금으로부터 여러 번 거듭되는 침입에 대하여 각지에서 의군(義軍)이 일어나고 한세충(韓世忠)·유광세(劉光世) 등의 무장도 분전했으므로, 금은 침입을 단념하고 허난(河南) 중심에 괴뢰(傀儡) 국가를 세우고 물러갔다. 그 사이에 남송은 항저우(杭州)를 도읍으로 정하고 각지 군도(群盜)를 치고 농민의 폭동을 진압하여 국내 체제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금의 내정(內情)에 밝은 진회(秦檜)가 등용되니 무장들을 배제하고 금과의 관계를 현상유지하려 했다. 이리하여 남송 성립 후 15년만에 화이허(淮河)를 경계로 하여 남송·금의 화평이 성립되고 주전파(主戰派) 악비(岳飛)는 살해당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금의 해량왕(海亮王)이 중국 통일을 목표로 하여 남하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재차 강화(講和)가 맺어져 양국은 금의 세종(世宗)·남송의 효종(孝宗) 치하에 안정기(安定期)를 맞이했다.남송에서는 강남(江南), 특히 양쯔강 하류 유역의 개발이 한층 진척되어 우전(玗田)·호전(湖田) 등 수리전(水利田)의 간척(干拓), 도작(稻作) 품종의 개량, 보리심기에 따른 이작(裏作)의 보급 등 생산력의 발달을 보여 도시가 번영하였고, 서민 문예도 발달했다. 그러나 금과의 긴장 관계는 북송의 경우처럼 군사비의 증대를 가져와 그 부족을 불환지폐(不換紙幣)로 보충한 것이 경제계를 혼란시켰고, 토지겸병(土地兼倂)을 촉진시켰다. 한편 금에서도 세종(世宗)은 외정(外征)을 중지하고 내정(內政)에 노력했으나 연약해 가는 여진인(女眞人)을 후대했으므로 한인(漢人)의 반항이 점차 심해졌다. 거기에다 몽골의 침입이 있어 금은 1234년 멸망했다. 남송도 재정 재건이 되지 않고 몽골의 침입에 의하여 1279년 멸망, 중국은 처음으로 전지역에 걸쳐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여진족 편집

女眞族

10세기 이후 만주 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여진이란 이름은 발해(渤海)의 멸망 후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발해 구(舊) 영토내에 살던 말갈(靺鞨)의 후신으로 요(遼)가 발해국을 멸하자 많은 부족으로 분산하여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대(唐代)에 유명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요대(遼代)에는 한국과의 국경, 두만강 유역에서 함경남북도에 걸친 지방으로 이동하여 요와 고려에 조공하여 흑수여진(黑水女眞)·동(東)여진이라 불렸다. 이들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하고, 지린성(吉林省) 남부의 여진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였다. 이들은 수렵·농경 생활을 하며 요에 양마(良馬)·사금(砂金)을 주는 대신 무기·농기구를 받아들였다. 12세기에 이르러 생여진(生女眞) 완안부(完顔部)의 아골타(阿骨打)는 여진을 통일하여, 금(金)나라를 세웠으며, 금은 그 뒤 송(宋)을 공격하여 화북지방을 영유(領有)하였다.

아골타 편집

阿骨打 (1068

1123, 재위 1115

1123)

금의 초대 황제·태조. 처음은 생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 추장이었으나 요가 공물(貢物)을 요구하고 그 사자(使者)가 횡포를 부리므로 생여진족을 통일한 다음 요에 반항해 군사를 일으켜 숙여진·발해인까지도 지배 아래 넣고 1115년 건국하여 대금(大金)이라 호칭했다. 이어서 송과 동맹, 요를 공격, 요의 수도 연경(燕京, 北京)을 함락, 다시 도망하는 요의 황제 천조제(天祚帝)를 추격하려다가 병이 나서 쓰러졌다. 그는 중앙관제(中央官制), 군사적인 지방 행정 구획(猛安·謀克의 제도)을 여진의 독특한 방법으로 조직하고, 또한 여진문자(女眞文字)를 제정하여 민족의 통일 발전을 촉진했다.

금 왕조 편집

金王朝

여진족이 만주(滿洲)·화북(華北) 지방에 세웠던 왕조(王朝). 본래 여진족은 요(遼)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얼마 후 북만주(北滿洲) 하얼빈 동남의 아청(阿城) 부근에 있던 생여진(生女眞)의 완안부(完顔部) 세력이 커지게 되자, 그 추장(酋長) 아골타(阿骨打)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요(遼)에 반기(叛起)를 들고 일어나, 1115년 제위(帝位)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금(金)이라 칭하였다. 금이라고 한 것은 완안부(完顔部)의 고지(故地)인 아십(阿什)이 여진어(女眞語)로 황금(黃金)을 의미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한다.아골타, 즉 태조(太祖)는 다시 요(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를 함락하고, 송(宋)의 요청을 들어 요(遼)의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 및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를 공략, 다음 태종은 1125년 요의 천조제(天祚帝)를 잡아 이를 완전히 멸(滅)하였다. 금(金)과 송(宋)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중국 북부의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둘러싸고 그 영유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금군은 대거 남하하여 1127년 송(宋)의 국도인 변경(?京)을 함락시키고, 송(宋)의 휘종(徽宗)·흠종(欽宗)의 부자(父子) 2제(帝)를 비롯하여 황족정신(皇族廷臣)을 포로로 하고, 화북의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금은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에 앞서서 먼저 유예(劉豫)에게 제(齊)라는 괴뢰국가(傀儡國家)를 세우게 했으나, 이어 금의 희종(熙宗)이 위(位)에 오르자 이를 폐하고, 1142년 남송(南宋)과 화의(和議)를 맺었다. 동은 화이허 강으로부터 서는 산시의 대산관(大散關)에 이르는 국경선을 정하고, 송(宋)으로부터 은견세공(銀絹歲貢)을 받게 하였다. 여진인(女眞人)은 태조(太祖) 때에, 그 이전부터 있었던 군사제도(軍事制度)를 정비하여 맹안(猛安)·모극(謀克)이라고 하는 군사 겸 행정조직(行政組織)을 편성했으며, 희종(熙宗)은 여진인을 그들의 조직 그대로 하여 화북지방으로 이주(移住)시키게 하였고 다음의 해릉왕(海陵王)은 도읍을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에서 연경(燕京)으로 옮겼다.이렇게 중국식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나, 그 시책이 옳지 못하여 폭동이 일어나 왕은 살해되고, 1161년에 세종(世宗)이 즉위하였다. 그는 안으로 정치·경제 및 문화의 전반에 걸쳐 훌륭한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밖으로는 평화의 유지를 위해 진력하였으므로, 그의 재위 29년간은 가장 안정된 시대였다. 또한 그는 여진인의 한화(漢化)와 곤궁화(困窮化)를 염려하여 그 보호구제를 꾀함과 동시에, 근본적 대책으로 여진어(女眞語)나 여진문자(女眞文字)의 장려 등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그러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음의 장종(章宗) 이후에는 여진인과 한인(漢人)의 대립이 격화하여 한인의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여진화의 한화(漢化)와 곤궁화(困窮化)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고, 정부 재정(財政)도 궁핍하여 교초(交?)를 남발하게 되자, 경제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칭기즈칸의 중국 북부 진격으로 1214년 선종(宣宗)은 서울을 다시 변경(?京)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고, 다음 해에 연경(燕京)을 공략당하고, 이어 1234년 몽골군(蒙古軍)의 공격에 의해 변경이 함락되자, 금(金)은 10대 120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전진교 편집

全眞敎

금대(金代)에 일어난 도교의 일파. 개조(開祖)는 왕철로서 그는 48세 때 종남산(終南山) 유장촌(劉蔣村)에서 4년간 수업한 뒤, 산둥성(山東省) 영해(寧海)로 와서 금련당(金蓮堂)을 세우고 포교하였다. 마단양(馬丹陽)·구장춘(丘長春)·유장생(劉長生)·담장진(譚長眞) 등 제자를 얻어, 1167년 신종교 수립을 선언하였다.이 교의 가르침은 성명(性命)의 탐구가 그 목적이며, 그 방법으로 계율의 엄수와 특히 수행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도교의 도덕경·유교의 효경·불교의 반야심경을 아울러 쓰며 이 3교를 조화한 데에 그 특색이 있다.개조의 사후, 구장춘이 2대 교주가 됨에 따라 교세는 점차 확대되어 화북의 도교를 지배하게 되었다. 원조(元朝) 치하에서는 도교와 불교의 대립이 격화되어, 헌종(憲宗)·세조(世祖) 때 가서는 격심한 토론이 전개되다가, 1280년 전진교의 패배로 대타격을 받았다. 그 뒤 일부 지역에서는 다시 교세를 만회하였으나, 종전과 같은 세력을 떨치지는 못하고, 다만 화북지방에 있어서 도교의 한 분파로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다.

정강의 변 편집

靖康-變

북송의 휘종·흠종 등이 금에 의해 북방으로 끌려간 사건(1127). 금과 동맹하여 요를 칠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송은 금의 분노를 사서 1126년 수도 카이펑(開封)은 금의 군사에 포위되고 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공물을 요구받았다. 송이 그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금은 이 해 그믐께 재차 카이펑을 포위하고, 또다시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하여 송은 저항했으나 패했으므로 조정(朝廷)에는 화평파(和平派)가 대두했다. 이로 말미암아 금은 아주 손쉽게 카이펑성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1127년 휘종·흠종 등 종실 3천 명을 공물 대신 볼모로 북에 끌고 감으로써 북송은 멸망했다.

맹안·모극제 편집

猛安·謀克制

원래 여진인의 군대 조직이었으나 금의 태조 아골타에 의하여 행정 조직에까지 확대된 군사적 행정 단위. 3백 호(戶)를 1모극으로 하고 10모극을 1맹안으로 조직하여 조세 징수 기타 행정상의 단위로 하고, 군사적으로는 1모극에서 약 1백 명씩, 즉 1맹안에서 1천 명을 징병한다. 모극·맹안이란 각각 ‘족장(族長)’·‘천(千)’을 의미하는 여진어의 음역(音譯)이라 한다. 금 초기에는 전토에 걸쳐 실시되었으나 화북을 지배하고부터는 한인·발해인에 대해서는 중국풍의 주현(州縣)제도를 채용했는데, 이 제도는 오직 여진인·거란인에게만 적용되었다. 이것은 건국 이전부터의 여진족의 군대조직을 그대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행정조직으로 대체시킨 제도로서, 수효로 보아 압도적으로 많은 한민족(漢民族) 등을 지배하고 여진족의 우위(優位)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따라서 여진인은 군인으로서 한인에 대해 횡포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 후에 금은 갖가지 여진인 우대책(優待策)을 써서 다른 민족과 차별하였기 때문에 한인의 반항을 증대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세종 편집

世宗 (1123

1189, 재위 1161

1189)

금나라의 5대 황제, 태조 아골타의 손자에 해당한다. 제4대 해량왕(海亮王)이 강남에 가서 남송과 싸우고 있는 동안 해량왕에 반대하는 그룹에 옹립되어 황제가 되었다.그가 즉위했을 때는 타민족을 정복했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순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종은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임해 거란인의 반항을 진압, 재정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송과 강화(講和)를 맺고 경비를 절약했다. 그러나 중국 문화에 침식되어 연약해져 가던 여진인에 대하여 각종 우대책(優待策)을 실시한 것이 한인의 반감을 초래하여 금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남송 편집

南宋

조광윤(趙匡胤)이 시작한 송실(宋室)은 1127년 정강의 변(靖康-變) 때 남쪽으로 피하여 재흥한다. 그 이후를 남송이라 한다. 항저우(杭州)를 수도로 하고 금에게 빼앗긴 화북 지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곳곳에 의군(義軍)이 결성되었으나 조정(朝廷)은 화평파에게 독점되었다.부득이 강남(江南)에 머물게 된 남송은 강남 개발에 힘을 기울인 결과 우전(玗田)·호전(湖田)의 간척(干拓)·맥작(麥作) 보급 등으로 인하여 생산력이 높아지고 상업이 번성하여 도시는 번영하고 사상·문학도 개화(開花)했다.그러나 금과의 긴장 관계는 점차 재정을 압박, 지폐가 남발되어 물가가 앙등하고 반란도 끊임없이 일어나서 1279년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고종 편집

高宗 (1107

1187, 재위 1127

1162)

남송 제1대 황제. 휘종의 아들. 정강의 변 때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황실로서는 홀로 난을 모면하고 황제로 옹립되었다.금의 강남 침입에 대해서 방어전을 폈으나 적극적으로 화북을 회복하려 하지 않고, 진회(秦檜) 등의 화평론을 채용하여 악비(岳飛)·장준(張浚)의 주전론(主戰論)을 물리치고 금과 화해를 맺어, 화이허(淮河)를 경계로 하고 금에게 신국(臣國)으로서 세공을 바쳤다. 그러나 금과의 관계는 군사비의 증대를 가져왔고 재정을 재건할 필요에서 토지 측량을 행하여 세역의 불균형을 없애고 화이난(淮南)의 황전(荒田)을 개척, 둔전·영전(營田)으로 하고, 다시 화폐 세수목(稅收目)을 신설하는 등 영토가 반감된 남송을 유지하려 했다.

악비 편집

岳飛 (1103

1141)

남송 초기의 무장. 무관 출신이었는데 무술뿐 아니라 학문적 소양도 갖추어 금과의 싸움에서 좋은 전적을 올리고, 또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차차 두각을 나타냈다. 젊은 나이로 선배 여러 무장들과 나란히 무장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군율(軍律)을 엄격히 하였기 때문에 부하들뿐 아니라 일반 민중으로부터도 신뢰를 받고, 그가 거느린 군단(岳家軍)은 하나의 큰 세력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다른 무장들에겐 질투의 대상이었고 무관(武官)을 천시하던 중앙 정부의 문관(文官)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진회의 화평론에는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에 끝내 원죄(寃罪)를 쓰고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까지도 민족의 영웅으로서 칭송을 받고 있다.

진회 편집

秦檜 (1090

1155)

남송의 첫 재상. 정강의 변(靖康-變)으로 북으로 끌려갔으나 금의 한 장군과 화평의 밀약(密約)을 맺어 남송으로 돌아왔다. 그의 ‘북은 북으로 남은 남으로’라고 하는 화평론은 처음 큰 반대를 받았으나 고종 이하 중앙 관료들 중에는 현상 유지의 고식적 수단을 취하는 자들이 많아 점차 중시되었다. 그는 북송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아 철저하게 무장을 탄압하고 권한을 빼앗아 저항하는 악비를 원죄로 몰아 죽이고, 금과 화의(和議)를 맺었다. 그 후 재상으로서 고종의 신임을 받아 그 권한을 가지고 아들을 과거(科擧)의 수석으로 하는 등 정치를 농간했다.

가사도 편집

賈似道 (1213∼1275)

남송(南宋) 말의 재상(宰相). 대주(臺州)의 사람. 자(字)는 사헌(師憲). 호는 추학(秋壑), 또는 반한노인(半閑老人). 누이가 이종(理宗)의 귀비(貴妃)로 26세에 진사(進士)가 되었다.양회제치대사(兩淮制置大使)로 올랐을 때 몽골 헌종(憲宗)의 침공이 있어 쿠빌라이가 악주(鄂州)를 포위하고 호남강서(湖南江西)로 침입하였으나, 사도는 그 방어에 공이 있어 진중(陣中)에서 우승상(右丞相)을 받았다. 몽골군이 내란으로 물러가자 사도는 재상이 되어 이종(理宗)·탁종(度宗)·공제(恭帝) 3대에 걸쳐 16년간 조정의 전권을 잡았다. 몽골이 다시 남정(南征)을 시작함에 사도는 이를 방어했으나, 실패하여 유배당하였다가 무신(武臣) 정호신(鄭虎臣)에게 피살되고 이듬해 송은 망하였다. 그는 정권을 잡은 동안 토지의 측량을 행하고, 저장(浙江)지방의 민전(民田)을 매수하여 공전(公田)으로 삼아 고율(高率)의 조(租)를 취하는 등 군량을 확보하였다.또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회자(會子)를 정리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또한 서화(書畵)·고기물(古器物)의 수장가로도 알려져 있다.

효종 편집

孝宗 (1127

1194, 재위 1162

1189)

남송 제2대 황제. 즉위하자 곧 주전파(主戰派) 장준(張浚)을 기용하여 화북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했으므로 다시금 금(金)과 화의를 맺어 종래의 관계를 약간 개선하여 세공(歲貢)을 감할 수 있었다. 그의 치세로 양쯔강 델타 지대의 개발은 비약적으로 진척되어서,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의 도시는 비상하게 활기가 넘쳐 구란(勾欄, 劇場)에서는 서민 문예가 꽃을 피웠다. 또 유학(儒學)에서도 주희(朱熹)·육상산(陸象山)이 나타났고, 시(詩)에서는 육유(陸遊)·범성대(范成大)·양만리(楊萬里) 등이 나와 영토 반감(領土半減)을 한탄하는 한편, 농촌 생활을 자세하게 노래했다. 이리하여 그의 치세 아래 남송의 극성기(極盛期)를 맞아 금의 세종과 나란히 칭송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