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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족의 중앙아시아 지배〔槪說〕
편집돌궐의 쇠퇴를 기화로 카를루크와 연합하여 자립한 위구르는 철륵족의 9부(九姓鐵勒)를 통합하고 돌궐에 대신하여 막북(漠北)의 패자가 되었으며(744), 8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몽골 고원 전역을 제압하는 전성기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832년경 이후 내분이 빈발하여 마침내 840년 북쪽 키르기스의 침입을 초래하여 나라는 멸망했다. 멸망한 후 위구르국(國) 사람은 거의 사방으로 분산되고 그 주력은 남하하여 오르도스 북쪽 변경에 가까이 왔지만 당나라에게 토벌을 당하여 힘을 잃고 만다. 서쪽으로 망명한 자 중 일부는 하서(河西) 방면에 이동하여 한때 동투르키스탄에 진출한 토번(吐蕃)에 예속되었으나 오대(五代)부터 송(宋)대까지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왕국을 형성하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 감주 위구르라 불리었으며, 1028년 서하(西夏)에 병합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톈산(天山) 방면으로 이주한 자는 비시발리크를 점거하고 계속해서 고창(高昌, Turfan)을 병합하고 근처에 더욱 세력을 확대시켜 톈산 산맥의 남북으로 뻗어 간 일대 왕국을 건설했다. 중국에서는 이 왕국을 서주 위구르 또는 화주 위구르라 부르고 있다. 또 이리 방면의 카를루크에 들어간 자들은 10세기 후반부터 카를루크에 대신한 카라한 왕조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11세기 초에는 동투르키스탄의 서반부와 서투르키스탄을 지배하여 위세를 떨쳤다. 특히 남쪽의 오아시스 지대로 정치문화의 중심을 옮긴 것은 이 지방의 투르크화를 촉진시키고 또 이슬람교의 도입에 의해 동쪽에 접해 있는 화주 위구르 왕국에서 번성했던 투르크·불교문화에 대한 투르크·이슬람화를 촉진시킨 것은 문화사상 주목된다.
위구르
편집Uighur
회골(回?)·회흘(回紇)·위흘(韋紇)·원흘(袁紇) 등으로 쓰이는 투르크계 민족. 수(隋)대에서 철륵(鐵勒)의 일부로 동돌궐에 복속했지만 744년 철륵제 부족을 통합하여 북몽골에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840년을 기준으로 하여 통일기와 사산기(四散期:西方移動)로 나누어지는데, 전기의 약 1세기 동안이 전성기며 당(唐)과는 대체로 교역 친선의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협력한 후부터는 당에 대한 위세가 증대화하여 공주(公主)를 강제로 요구하고 세사(歲賜)를 요구하였으며 당의 문화를 흡수했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은 그들 자신들의 성격을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역사에도 일대 전환기를 그어, 그때까지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투르키스탄의 투르크화가 그것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이란·투르크(터키) 양 인종의 혼혈에 의한 신민족이 구성되었다. 또 마니교(敎)를 주로 하고, 불교도 처음부터 믿었던 그들은 이슬람의 동점(東漸)으로 인하여 이슬람 교도화하고, 여기에 극히 복합적인 특수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카라한 왕조
편집-王朝 Karakhan (940?
1132)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왕조. 카라칸, 일리크칸 왕조라고도 한다.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940년에 카를루크의 수도를 점령한 위구르 부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시조인 보그라칸은 남쪽의 카슈가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960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은 유명하다. 4대째 일리크칸은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으며(998), 파미르 서쪽의 오아시스 지대로 진출하여 왕조의 영역을 결정하였고, 그 곳의 투르키스탄(터키인의 지방)화의 관철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그 통일이 약하고 각 지방 정권간의 항쟁이 격렬했으므로 1047년에는 파미르를 경계로 하여 동서가 분열 대립했다. 특히 서부는 가즈니 왕조에게 압박받고, 11세기 말에는 셀주크에 속했다. 한편 1132년 카라키타이(西遼)는 동카라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서쪽 셀주크의 종주권을 빼앗았으며, 이로써 카라한 왕조의 역사적 역할은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