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노르만인의 활동

노르만인의 활동〔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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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0세기의 유럽은 동쪽의 마자르, 남쪽의 사라센, 북쪽의 노르만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으며, 특히 노르만인은 유럽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보통 소(小)부족으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중부 스웨덴 우프란드 지방의 스베아족, 요트란드 지방의 요타르족, 남스웨덴 스코네 지방의 데인족은 옛날부터 강한 통합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베아족과 요타르족은 후에 스웨덴을 형성하고, 데인족은 오늘날의 덴마크를 구성하고 있는 유틀란드 반도와 제란드섬에 진출하여 덴마크를 형성하였으며, 피욜드에 할거하고 있던 노르 여러 부족은 노르웨이 왕국으로 통일된다.이미 7, 8세기부터 노르웨이인은 서쪽 패로즈 제도(현재 덴마크 영토), 셰틀랜드, 오쿠니 제도(현재 영국 영토) 등으로, 스웨덴인은 동발트해 연안 지방으로 약간씩 진출하고 있었지만, 8세기 말 이후 용골(龍骨)이 달리고 40

80인을 태울 수 있는 배를 개량·완성함과 동시에 서유럽 여러 나라를 침략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1세기까지를 북구에서는 바이킹 시대라고 한다.처음에는 여름 한 철만 배를 타고 연안·하구 지방을 습격하여 약탈하고는 물러가던 그들이 점차 템스강·루아르강 등의 하구에 있는 섬에서 월동(越冬)하게 되고, 9세기 후반에는 대규모화되어서 내륙 지방에 근거지를 만들어, 잉글랜드나 프랑스에서는 일부 지방을 노르만화하기도 했다. 특히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반은 프랑스화한 노르만인은 11세기 후반에 잉글랜드, 남이탈리아(兩 시칠리아 왕국)를 정복하여 각기 노르만 왕조를 세워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인은 주로 동쪽으로 향하여 볼가강·드네프르강을 지나 아라비아·비잔틴 세계와 접촉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궁정 친위대로 고용되어 와랴그라 불리었다. 노르웨이인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식민지화했으며, 아메리카 대륙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침략 및 약탈을 하고, 공조(貢租)를 요구하는 한편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 그들에 대처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세력이 발전하여 지방 분권적인 봉건제의 확립에도 기여하게 됐다. 노르만의 활동(제2의 민족 이동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다) 원인에 대해서 충분한 과학적 학설은 아직 없지만 인구과잉설이 지배적이다.

노르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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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Normans

스칸디나비아 반도, 덴마크를 원주지로 하는 게르만인의 일파(一派). 노르만이란 북방인(北方人)의 뜻으로, 이 밖에 바이킹, 데인인(人) 바랴그인(人) 등의 별칭이 있다. 게르만의 대이동 때에 원주지에 머물러, 어업·농경·목축 또는 해상 약탈에 종사했는데, 8세기경 본국에 있어서의 통일적 왕권의 형성에 따라,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은 소수장(小首長)들은 인구증가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 범위는 전 유럽에 미쳐, 제2차 민족이동이라고 부를 만한 양상을 보였다. 이동 경로는 대체로 삼분(三分)된다. 덴마크계(系)는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 동·서프랑크, 잉글랜드를 덮쳐, 그 수장 롤로는 911년 샤를 3세로부터 노르망디(센 강 하류) 지역을 봉토(封土)를 받았고, 후에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는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에 노르만 왕가를 열었다. 노르웨이계는 셰틀랜드 제도(諸島), 오크니제도를 거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에 이르러 일부는 1000년경 북아메리카에 도달하였다. 스웨덴계는 러시아에 상륙, 수장 류리크 밑에서 노브고로트 공국을 건설했다(862). 또 프랑크를 엄습한 그들의 일부는 지중해로 진출 양(兩)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이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정착과 더불어 점차 평화적 상업에 종사하게 되어, 상업의 부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정주지(定住地)에서 원주민(原住民)과 융합·동화하여 유럽 중세 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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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ings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유럽은 몇 가지의 새로운 침입을 당하여 대규모의 혼란과 공포의 상황을 드러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봉건사회는 성숙해갔다. 그러한 침입들 중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역사적 영향도 컸던 것은 노르만인, 즉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의 침입이었다.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통틀어 일컬어진 이 침입자들은 발트해와 북해(北海)의 연안 전역에 2세기에 걸쳐 산발적인 침입을 되풀이한 후, 9세기 초두에 강대한 확장운동을 전개했다.바이킹의 확장은 해적과도 같은 침략, 조직화된 군사원정, 이민(移民)과 식민지화, 상업적 사업, 항해의 군사적 원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감행되었다.바이킹이 침공에 성공한 주요한 수단은 배였다. 바이킹은 자신의 배가 다른 배로 오해당하지 않도록 독창적인 예술적 양식을 고안해냈다. 이 점은 고고학상(考古學上)의 발굴이나 고문서(古文書)에 의해서 확인되어 있다.바이킹은 여러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우선 노르웨이인은 영국 제도(諸島)를 비롯하여 페로우즈 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아메리카 북동 연안에까지 도달해서 대서양에까지 대담하게 도전했다. 또한 덴마크인은 북해(北海)를 횡단하여 영국제도 이외에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서지중해로 향했다. 이에 반하여 스웨덴인은 발트해에서 활동하다가 하천이나 호수의 교통망을 이용하여 흑해(黑海)에 도달할 만큼 러시아에 매우 깊숙이 침입하여 비잔틴 제국이나 바그다드의 회교(回敎:敎主)국과 관계를 맺었다.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만(灣)·강구(江口) 또는 시장을 의미하는 Vik와 아들을 의미하는 접미어 -ing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노르망디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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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國

9세기 전반 프랑스는 노르만인의 침입과 약탈에 의하여 845년에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의 주요 도시가 습격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동프랑크와 북프랑스는 덴마크인, 남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지중해는 노르웨이인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의 여러 왕은 단결해서 이들과 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내전(內戰)에 노르만인을 용병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한층 용이하게 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이후 노르만인의 수장(首長)들은 프랑크의 봉토를 받아서 가신(家臣)으로 되는 경향이 강하였다.노르만의 침구(侵寇)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프랑스 왕 샤를 3세가 911년 노르만의 추장(酋長) 롤로에게 센 강 하류 지대를 양여하여 노르망디 공(公)에 봉(封)하자, 다수의 노르만인이 이 지방으로 이주(移住)하여 영지를 확장하고, 특수지역(特殊地域)을 만들어 실질적인 독립국을 만들었다. 그 후 앙주가(家)에 반대하여 카페 왕가를 원조함으로써 강대해지고, 1066년 윌리엄 1세는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의 노르만 왕가를 열었다. 그의 사후, 장남 로베르가 노르망디 공(公)이 되고, 차남인 윌리엄(2세)이 영국 왕이 되어 양쪽 지방은 분리되었으나, 헨리 1세 때 재차 병합되어 1106년 이후 약 1세기 동안 노르망디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1204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루앙을 공략하여, 1259년 루이 9세 때 프랑스 왕국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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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o (?

932?)

북유럽에서는 곤개·로르부라 불리며 덴마크인 또는 노르웨이인이라고도 한다. 초대(初代) 노르망디 공(公). 노르웨이 바이킹의 수령으로 890년 노르만의 대군을 이끌고 센 강구(江口)로 침입하여 이윽고 그 하류 일대를 점령하고 다시 파리를 포위(892), 내륙 깊숙이 론까지 침략을 꾀하였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911년 센 하류(下流)의 점령지역을 봉토(封土)로 주었다. 그는 초대(初代) 노르망디 공 로베르 1세로서 프랑스 왕의 충실한 봉신(封臣)이 되었으며, 영토의 통치에도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노르만인의 다른 수령들의 경우와는 달라서, 그가 받은 봉토는 원래 노르만인이 지배하고 있던 토지였으므로 거기에는 프랑스 국왕의 신하는 없었으며, 롤로는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세습적인 공령(公領)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의 6대째 자손이 정복왕 윌리엄 1세이다.

노르만인의 러시아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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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侵入

스웨덴계(系)의 바이킹은 주로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간 노르만인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공조(貢租)를 요구하고 용병이 되었지만, 이들의 경우 특히 중요한 것은 상업 활동이다. 드네프르를 따라 내려가서 키예프, 나아가 흑해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과 또 볼가강을 따라 카스피해에 이르렀으며, 하자르인이나 아라비아인과 통상 관계를 맺었다. 한편 슬라브 국가를 형성할 때에는 사령관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류리크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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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說

11세기에 만들어진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북유럽에서 루시족이 류리크(Ryurik, ?

879)라는 수장에 인솔되어 북러시아(노브고로트 지방)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그의 사후 일족인 오레그가 남하하여 키예프를 점령하고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현재의 러시아가 러시아(루시의 땅)라고 불리게 된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기원은 스웨덴계 바이킹 활동의 결과라는 의견이 오랫동안 서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지였다는 노브고로트, 키예프의 양도시에는 스칸디나비아인이 정주한 흔적이 없으며, 또 이 연대기를 제외하고는 류리크라는 인물의 실재가 증명되지 않는다.

데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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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Danes

덴마크계의 바이킹은, 잉글랜드에서는 데인인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8세기 말부터 잉글랜드를 습격하여 850년에는 캔터베리와 런던을 약탈했다. 그들은 차츰 하구(河口)에 있는 섬이나 하천 유역에서 월동(越冬)하게 되고 런던을 점령하여 9세기 후반에는 중부 잉글랜드에 자기들의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데인로, Danelaw)을 만들고, 1061년 그들의 왕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라 데인 왕조(王朝)를 이룩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앵글로색슨 왕조(王朝)가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정치·군사·상업 등 여러 방면에 그들이 잉글랜드에 미친 영향은 크다.

데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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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elaw

데인인(人)의 잉글랜드 이주(移住) 당시, 그들 자신의 법률(法律)·관습(慣習)을 이식(移植)하여 정주(定住)한 지방을 말한다. 요크로부터 템스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동머시아 및 이스트앵글리아가 데인인이 밀집해 정주(定住)하던 곳으로 데인인의 법(法)·습관(習慣)이 가장 순수하게 유지된 지역이다. 노르만의 정복 후까지도 데인인적 사회 관습을 유지하고 스칸디나비아적 농경제도를 행했으며, 일반적으로 봉건제가 약하고 자유 농민이 많았다. 재판도 당사자의 영주(領主)와 관계없이 당사자 개인 본위로 행해졌는데, 동(東)머시아에는 대평의회(大評議會)라고 하는 치안유지기관과 특수한 데인인적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웨이인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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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活躍

노르웨이인은 일찍부터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 침입, 아일랜드인의 내부 분열 상태를 틈타 더블린을 중심으로 9세기에는 아일랜드를 지배했다. 노르웨이인은 여기서는 로그랑이라 불리고, 아이리시해(海)의 만섬(島)은 1405년까지 노르웨이 영토였다.

아이슬란드 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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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

노르웨이인은 9세기 중엽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9세기 말 노르웨이 통일 이후에 독립을 원하는 소부족장들이 속속 이주하여 아이슬란드 식민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린란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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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見

10세기 말 아이슬란드의 에릭은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식민했다. 그러나 15세기경 아마 기후 변화 때문인지 모두 사멸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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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陸-發見

에릭의 아들 레이브는 빈란드(Vinland)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북아메리카주 뉴잉글랜드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민은 원주민에게 타도되었다.

북유럽 3국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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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三國-統一

바이킹 시대에는 동시에 북유럽 3국의 각 나라들이, 종래 소부족 할거 상태에서 통일로 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스웨덴은 각 지역의 반(半)독립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11세기에는 대개 통일 왕권이 성립했다. 덴마크에서는 9세기 초에 벌써 유틀란드의 데인왕(王), 고드프레드왕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통일 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1세기 이후부터이다. 노르웨이에서는 9세기 말 하랄 미발왕(美髮王)이 독립, 부족장의 연합에 승리하여 전국토를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