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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와 대리〔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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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詔-大理

토번(吐蕃)은 토욕혼(吐谷渾)을 합하여 당의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빼앗았고 서투르키스탄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으며, 마침내 8세기에 이르러 극성기를 맞이했다. 4대 왕 치데추쿠찬은 금성공주(金城公主)를 맞이하여 당과 화평했지만 다음 왕 치손데첸은 당나라에 안사의 대동란의 일어나자 대거 하서(河西) 지방에 침입하여 일시 장안을 점령했다(763). 그 후도 당과 토번은 하서나 쓰촨 방면에서 전투를 계속했지만 위구르와 남조가 당과 손을 잡은 결과 고립 상태가 되었다. 8대 왕 치추크데첸은 병약해서 국세가 진작되지 못했고, 마지막 왕 다르마는 극단적인 배불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암살당했으며(841) 토번 왕조는 멸망했다.

토번왕국의 쇠퇴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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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藩王國-衰退-滅亡

치손데첸왕이 죽은 후에 티베트는 왕가내부의 불화와 국경에서 끊임없이 계속된 아랍인 또는 중국인과의 충돌, 그리고 귀족과 본 교도의 반격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때 제8대 치추크데첸 왕은 821년에 당과 화평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이 조약의 내용을 두 나라 말로 새긴 석비가 티베트 수도 라사에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치손데첸 왕이 정복한 땅의 대부분이 티베트 영토로 확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치추크데첸 왕은 귀족출신인 본교도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그들은 불교가 국왕으로부터 받은 지나친 우대와 불교승려가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치추크데첸 왕에 이어 그 동생인 다르마가 제9대 국왕이 되었다. 이 새로운 왕은 귀족계급에게 영합하기 위해서인지 잔인한 불교탄압을 전개했기 때문에 한 승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 후로 왕조의 권위가 붕괴되고 오래된 가문의 씨족(氏族)들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서로 싸웠으며, 불교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어 841년에 멸망하였다.대외적으로 티베트는 당으로부터 이전에 빼앗은 영토와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왕은 구게와 라다크(서부 티베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라다크 땅에서 이 왕조는 17세기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번회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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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蕃會盟

약 2세기간 서로 싸워온 당과 토번은 마침내 8대왕 치추크데첸과 목종(穆宗) 사이에 화평 조약을 맺었다. 831년에는 장안에서, 이듬해에는 라사에서 만났는데, 이 때의 내력이나 내용이 번(蕃)·한(漢) 양국 문자로 석비(石碑)에 새겨져서 라사의 조칸 사원 앞에 세워져 현존한 이는 고대 티베트사(史)나 당시 티베트어·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유명하다.

당번회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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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蕃會盟碑

티베트 수도 라사의 중앙 조칸 사원 입구 옆에 현존하는 비. 당과 토번(吐蕃:티베트) 사이에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 전투 상태가 단속(斷續)되었으나, 목종(穆宗) 때에 토번은 국제적으로 고립하게 되어 겨우 양국 세력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목종과 토번 왕 치추크데첸과의 사이에 화평협정의 뜻으로 이른바 장경(長慶)의 회맹(會盟)이 행해졌다. 821년 장안(長安)에서, 이듬해엔 라사에서 회맹이 행해져 양국의 관리가 이에 참가하였다. 회맹비는 823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11.3ft, 서면(西面)은 한번(漢蕃) 양문으로 맹문(盟文)의 내용, 뒤쪽 동면(東面)은 전부 티베트 글로 당번(唐蕃) 교섭사와 회맹의 상태, 날짜 등이 명기되어 있다. 북면에는 회맹에 참가한 티베트 측 관리의 관성명(官姓名), 남면에는 마찬가지로 당나라 측의 그것이 한번 양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당시의 티베트어, 중국어의 음운(音韻)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되어 있다.

남조의 멸망과 대리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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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詔-滅亡-大理-建國남조는 대리·곤명(昆明)의 비옥한 2대 분지의 농업 생산을 토대로 하고 미얀마 루트(Burma Route)에 의한 교역의 이(利)를 차지하여 당의 제도를 배웠으며, 유교나 중국 불교를 받아들여서 일대 왕국으로 발전했다. 또

9세기에는 성도부(成都府)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공격, 함락시켰으므로 당 왕조는 이를 막는 데 고심했다. 이윽고 국내 절도사(節度使)가 실력을 갖게 되고, 부하인 백만계(白蠻系, 白族) 부장이 대두하였다. 맨 먼저 왕의 측근인 한인계 정씨(鄭氏)가 왕권을 빼앗고(902), 남조 왕통은 13대에 이르러 멸망했으며, 그 후 왕권은 또다시 백만계 부장인 조씨(趙氏)로부터 양씨(楊氏)에게 옮겨졌다. 대리국은 남조국의 후신으로 단자평(段子平)이 양씨를 타도하고 건국했다(937). 왕족 단씨는 대리 지방의 백만계 부장이며 남조 역대의 중신이었다. 대리국은 남조 문화를 계승하였고,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백만 문화를 개화시켰다. 송나라와는 거의 교섭이 없었으며 국내는 태평세대가 계속되었는데, 점차 권신 고씨(高氏)가 대두하여 일시 왕위를 빼앗겨 중단되었으나 얼마 후 부흥되어 후리국(後理國)이라 부르고, 송대의 약 3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몽골의 쿠빌라이에 의해서 멸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