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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의 북아시아·화북 진출〔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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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은 몽골어 계통의 유목 민족으로 4세기 이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많은 부족으로 나누어져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측천무후(則天武后) 때부터 차츰 독립의 기운이 높아져서 부족집단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독립의 기도는 실패하여 부족이 해체 이산했다.9세기경 당이 쇠퇴하자 8개 부족을 중심으로 연합체가 조직되어, 일종의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이중에서 부족장 회의에 의해서 가한(可汗:盟主)이 선출되고 부족집단을 지배했다.10세기 초 당 말엽에 질랄부(迭剌部)의 족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가한이 되어 다른 부족장을 누르고 독재권을 장악하여 그 때까지의 부족제도를 해체하고 전제적인 유목 왕국을 건설하였다(916). 그는 몽골 고원에 원정했으며 돌궐(突厥)·위구르·탕구트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또 오랜 적대 관계였던 만주 동부의 발해국을 멸망시켰다(926). 이리하여 배후의 지역을 튼튼히 한 아보기는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중국 진출을 실행하려던 차에 사망했다. 아보기(太祖)의 뒤를 이은 둘째 아들 덕광(德光, 太宗)은 한결같이 중국 경략에 힘을 쏟았다. 당시 중국은 5대 왕조의 하나인 후당 시대였지만 태종은 후당의 장군 석경당과 연합하여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 결과 석경당은 새로 후진을 일으켰고 거란은 그 대가로 허베이, 산시의 일부인 연운(燕雲) 16주를 할양받았다. 그 후 태종은 후진의 예절이 충분하지 않다는 구실로 수도 대량(大梁:現在의 河南省 開封)을 함락, 후진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대요(大遼)라고 고쳤다(946). 그러나 중국 전토의 지배에는 실패하였으며, 후에 연운 16주의 선까지 후퇴했다.

거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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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族

몽골어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키타이(Kitai), 또는 복수형인 키탄(kit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거란(契丹)이라는 2자는 음역(音譯)이라고 생각된다. 4세기 이래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하면서 돌궐, 위구르, 중국(北魏·隋·唐 등)을 전전하면서 부족의 결성을 성취했다. 10세기에 인접한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중국 북변에 진출하였으며 대거란국(후에 중국식으로 요(遼)로 개명)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야루트(耶律氏) 집단과 샤르무트(審密氏) 집단의 두 개 씨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차츰 붕괴하여 공통의 이해관계로 결합되는 지연집단으로 변했다. 후에 거란족의 활약은 인접 여러 부족에 침투하였고, 투르크나 몽골족간에는 키타이의 이름이 중국과 중국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야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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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阿保機 (872

926)

요국(遼國:契丹國)의 건설자. 요의 태조라 불린다. 거란족의 야루트(耶律氏) 집단인 질랄부(迭剌部) 출신. 부족장 회의에서 가한으로 추대되었지만 전례를 깨뜨리고 세 번 그 지위에 올랐으며, 거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황제라 칭했다(916). 일찍부터 남방 경략에 뜻을 두고 중국 북방 변경에 침입하여 많은 중국인을 붙잡아 거란 내지로 데리고 가서 유능한 자를 등용하여 실력을 쌓았다. 건국한 후 몽골 고원의 여러 부족(돌궐, 위구르, 탕구트)을 정복하고, 또 동쪽의 발해국(渤海國)을 멸망시키고 그 곳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으며, 개선하는 도중 병사했다. 그는 자주 남정(南征)하여 중국인을 데려와서 농경에 종사시킴으로써 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하고 또한 한(漢) 문화의 섭취에 힘쓰는 한편으로, 거란문자의 제작 등 요의 독자적인 문화를 높이기도 하였다.

발해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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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滅亡

요(遼)의 태조(耶律阿保機)는 중국 진출의 제1단계로 먼저 서정(西征)을 행하고, 계속해서 발해 원정에 착수했다. 당시 발해국은 제15대 대인선의 시대였는데 귀족이나 관료간에 정쟁이 있어서 정정이 불안했다. 태조는 이 허점을 틈타서 공격하여 순식간에 수도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극동의 성국(盛國)이라고 선전되어 왔던 발해는 15대 227년으로 멸망했다. 태조는 발해의 영토를 직할 영토로 하기를 피하고 새로 동단국(東丹國)이라 하여 장자인 배(倍)를 국왕으로 임명하고, 거란인과 발해인으로 통치하게 하였다. 이것은 유목민인 거란이 삼림지대의 통치에는 소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후에 동단국은 요의 2대 황제 태종의 명령으로 요동인 랴오양(遼陽)에 옮겨지고 국왕인 배는 중국(후당)으로 망명했다.

정복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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征服王朝

중국과 항상 관계를 가지고 역사를 전개하여 온 북방 이민족(異民族)의 세계에 있어서도 10세기는 하나의 획기적인 시대였다. 공격, 약탈을 중시하여 급격하게 팽창하고, 중국문화에 접하면 또 급격하게 허물어져 버리는 흉노(匈奴)나 돌궐(突厥) 등의 형태는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근거지를 북방에 두고 자기들과 한민족(漢民族)을 구별하여 통치하기도 하고, 문자(文字)를 만들어 독립의식을 명확하게 하는 등 정복왕조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이민족 국가가 성립하여, 그만큼 중국에 대한 영향도 심각해졌다.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그리고 몽골족의 원(元) 등이 그것이다.당의 멸망과 때를 같이해 만주(滿洲) 남서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밑에 통일된 거란족의 요는 동란중의 중원(中原)에도 침입하여 정치에 간섭하고, 특히 후진(後晋) 왕조의 건국에 참견하여 현재의 베이징(北京)에서 산시성(山西省) 일대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 거란이 후원하는 북한(北漢)을 쳐부수고 전국 통일을 이룩한 송의 태종(太宗)은 여세를 몰아 북방 영토를 회복하려고 거란에 결전을 걸었다. 그러나 영주(英主) 성종(聖宗) 밑에서 상승기에 있으며 송군의 약점인 기마전술을 구사하는 거란에게 몇 차례에 걸친 혹심한 타격을 입은 채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운 1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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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雲-州

중국 5대의 후진 건국자 석경당이 후당을 멸망시킬 때 원조를 받은 거란(契丹:遼)에 대해 그 보수로 할양해 준(937) 지방. 현재의 베이징(北京)·다퉁(大同)을 중심으로 한 유(幽)·계(?)·탁(?)·단(檀)·순(順)·영(瀛)·막(莫)·신(新)·규(?)·유(儒)·무(武)·울(蔚)(以上 河北省), 운(雲)·환·응(應)·삭(朔)(以上 山西省)의 16주로, 요는 유주를 남경, 운주를 서경이라 하고 이 지방을 통치했다. 중국의 후주 및 송에서 여러 번 이 지방을 탈환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세기에 송은 만주족의 금(金)과 연합하여 겨우 일부를 회복했지만 오히려 금에게 멸망당해, 그 지방은 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27). 이 지방에 있던 교양 있는 한인(漢人)은 요·금을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