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제2기 문명/오리엔트 세계의 성립
오리엔트 세계의 성립〔槪說〕
편집아마루나 시대의 외교 관계 성립에 따라 오리엔트는 한동안 이집트를 중심으로 평화시대를 맞이했다.그러나 아람인의 시리아 침입, 필리스티네인의 팔레스티나 침입, 해상민족의 침입에 의한 히타이트 멸망, 미탄니의 멸망, 카시트의 멸망에 의하여 오리엔트엔 정치적 공백시대가 찾아왔다.이집트는 해상민족을 격퇴시켰으나, 제20왕조가 멸망된 후, 왕조 말기라고 할 수 있는 쇠퇴의 시대에 접어든다. 제21왕조는 타니스를 중심으로 하(下)이집트만을 영유하고, 제22-24왕조에 가서는 원래 이집트의 용병(傭兵)이었던 리비아인이 파라오가 되고 제25왕조는 누비아 출신의 에티오피아인이 왕이 되었다.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군사 국가 아시리아가 점점 대두하여 때때로 바빌로니아를 그 세력하에 두고, 북쪽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우라르투를 쳐버리고, 나중에는 시리아 북부 아람인의 소국가를 병합하여,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영토에 임하여, 레니키아인의 도시국가나 이스라엘 왕국, 유대 왕국에 위협을 가하였다.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아시리아는 제국시대에 들어가, 우라르투를 일시 복종시켜 다마스쿠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다시 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도시는 아시리아에 조공하였고, 다시 이집트는 기원전 670년 아시리아에 점령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란, 소아시아를 제외한 오리엔트 지방은 아시리아에 통일되었다.그러나 아시리아의 패권도 기원전 626년 신바빌로니아의 독립 이후 점차 흔들려 이란에서 새로이 일어난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의 동맹군에 의하여 수도를 빼앗겼다(전612).이렇게 해서 오리엔트는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이집트(사이스 왕조)의 네 나라로 분할되었다. 메디아와 리디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는 서로 동맹을 맺어, 한동안 오리엔트 강국 사이의 전쟁은 중지되었다. 이동안에 신바빌로니아는 유대왕국을 멸망시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여러 나라를 눌러 그 세력을 자랑하였다.기원전 550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가(家)의 키루스 2세가 주군(主君)인 메디아를 넘어뜨리고, 이어서 리디아를 치고,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전538)시켜,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병합하기에 이르자 전 오리엔트가 이에 통일을 이룩했다.
오리엔트
편집Orient
지리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이 발생했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변의 이란, 시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시아를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그 지역은 확대되었다가 다시 축소되기도 했다. 아시리아의 이집트 병합에 따라 오리엔트가 일체화되고, 후의 페르시아 제국(帝國)의 전 오리엔트 통일에의 길을 열었다.
아시리아 제국
편집-帝國
기원전 300년경부터 셈계의 아카드인들은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져 언어·풍습 등이 셈화(化)되었다. 그 중심세력인 아수르는 기원전 2500년경 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이때 수메르인의 침입에 강건하게 대항하는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유리한 지리(地利)를 이용, 바빌로니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보석·목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였고 점차 군사국가로서 발달하였다. 기원전 13세기에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다.그후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TiglatpileserⅠ, 전 1114
전 1076)는 아시리아의 국내를 통일하고, 북쪽의 나일리, 북시리아 등을 정복했다. 그 후 아시리아는 한동안 쇠퇴했으나 아슈르나시르팔 2세(AssuransirpalⅡ, 전 883
전 859), 샬마네세르 3세(Shalma- neserⅢ, 전 858
전 824) 시대에 시리아를 정복, 우라르투에 반격을 가하였다.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전 746
전728) 시대로부터 제국시대(帝國時代)로 들어갔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쳐버리고 우라르투를 정복, 아람 왕국을 멸망시켰고(전 732),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공략에 성공했다. 쿠데타에 의해 새로 왕조를 세운 사르곤 2세(SargonⅡ, 전 722
전 705)는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전 721), 센나케리브(Sennakhe-rib, 전 705
전 681)는 팔레스티나에 원정을 하고, 에사르하돈(Esarhaddon, 전 681
전 669)은 마침내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이집트를 점령했다. 이에 오리엔트의 주요부(主要部)는 아시리아 밑에 통일되었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전 668
전 626)은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속된 모든 땅을 평정했다. 아시리아의 군대는 전차병, 궁병(弓兵), 보병으로 되어 있으며 철제 무기를 써서 각지를 정복했다.피정복민은 사살되거나 강제 이민을 당하거나 했는데, 그러나 조공(朝貢)에 의해 소국가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방 통치를 위하여 주(州)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처럼 강대하던 국가도 아슈르바니팔 왕의 사후(死後) 내분을 틈타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했고, 수도 니네베는 두 나라의 연합군의 약탈과 파괴로 폐허가 되었다. 아시리아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하였는데,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과 축성에 능하였다. 석조(石造)와 부조(浮彫) 등의 작품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사냥이나 전투 등의 잔인한 행위 등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역대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고, 특히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의 원정장면을 다룬 부조로서 「우라이 강변의 싸움」을 남겼고,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지어 각종 역사적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현대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있다.
아시리아의 수도
편집-首都
가장 오래된 수도는 티그리스 오른쪽 연안의 아슈르(Assur, Ashur). 고(古) 아시리아 시대에서 기원전 9세기까지 수도였고, 샬마네세르 3세 시대에 대대적으로 개수되었다.시(市)에는 주신(主神) 아슈르를 모시는 신전·성탑 등이 건립되었다. 기원전 13세기에 터쿨티니누르타 1세에 의해 수도 카르 투쿨티에누르타(KarTukultienurta)가 건설되었다.기원전 9세기에 사실상의 수도가 된 것은 티그리스의 왼쪽 연안의 군사도시 님루드(Nimrud)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샬마네세르 3세·에사르하돈의 궁전들이 세워졌다. 사르곤 2세는 두르 샤르루킨(DurSharrukin:사르곤의 성채)을 건설하고 두꺼운 벽에 둘러싸인 웅대하고 화려한 왕궁, 이에 부속되는 신전과 성탑을 세웠다. 도시의 대문은 거대한 석조(石彫)의 인면유익(人面有翼)을 한 웅우상(雄牛像)이 수호하였다.니므르드의 북쪽에 있는 니네베(Nineveh)는 최후의 수도였다. 센나케리브, 아슈르바니팔의 궁전과 이에 부속되는 도서관이 세워지고, 이 도서관에서 수만 매의 점토판 문서(粘土板文書)가 발견되었다.그중에는 역사·언어·종교·문학·과학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출토된 점토판 가운데 「길가메시 서사시」의 타블렛에는 창세기 홍수의 전설과 유사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우라르투 왕국
편집-王國 Urartu
반호(湖)를 중심으로 아르미니아 고원에 건국된 나라. 우라르투어(語)는 프루리어·아르미니아어와 유사하지만 설형문자를 이용하여 쓰여져 있다. 기원전 9세기 후반 토슈퍼를 수도로 사르두리쉬 1세(Sardurish Ⅰ)가 즉위하여, 아시리아와 항전을 하면서 영역을 확대했다. 아르기쉬티스 1세(Argishtis Ⅰ) 때 최성기에 이르렀고, 아시리아의 북쪽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으며, 킴메리인의 습격에 의해서 약체화된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게 패망되고(전 714), 다시 스키타이인·메디아인에 압박당해 기원전 6세기 말에 멸망되었다.
오리엔트 4국의 대립
편집-四國-對立
아시리아의 이집트 지배는 견고한 것은 아니었고, 아슈르바니팔의 말년에 와서 이집트는 독립하고 있었다.신바빌로니아의 발흥과 아시리아의 멸망에 의해 오리엔트 세계는 다음의 영역을 갖는 4국으로 분할되었다. 즉 메디아는 이란, 아시리아 구령(舊領)의 북부를 지배하고, 신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를 영유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지배권을 장악했으며, 리디아는 소아시아를 확보했고, 이집트는 아시아에서 손을 떼고 이집트만을 영유했다.
사이스 왕조
편집-王朝
이집트의 제26왕조(Sais 왕조)는 고왕국(古王國) 시대의 이집트를 모방하여 고대 이집트 왕조 최후의 번영을 맞이하였. 특히 사이스 왕조를 창립한 네코의 아들 프삼메티코스 1세는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였다.그의 아들 네코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와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였고, 네코 2세의 뒤를 이은 프삼메티코스 2세는 페니키아를 방문, 이집트 병사와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파견하여 쿠슈왕에 맞섰다.그 다음 왕인 아프리에스는 수르를 봉쇄, 이스라엘에 대한 비빌로니아의 종주권을 없애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다음 왕으로 선출된 아메스 2세는 이집트 자체의 번영을 유지하여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 대항하는 동맹에도 가입했다.그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이집트는 패망하여 페르시아 지배시대인 제27왕조가 시작된다.
신바빌로니아(칼데 아) 왕국
편집新-王國 기원전 626년 칼데아(Chaldea)인의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는 아시리아에서 독립했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지배하고(수도 바빌론), 메디아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켰다(전 612).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전 604 전 562)는 북시리아에 의한 아시리아의 잔당(殘黨)과 이집트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지배권을 잡았다. 신바빌로니아로에 반기를 든 유대왕국은 기원전 586년 두번째로 바빌로니아에 유수(幽囚)를 당하여 멸망했다. 이 왕의 시대에 신바빌로니아는 최성기에 달했다.그가 죽은 후 신관(神官)의 세력이 증가되어, 나보니도스(Nabonidos)가 왕이 되었다. 그는 월신(月神)의 제사를 바빌로니아에 보급시키려 함으로써 바빌론 신관(神官)의 반감을 사게 되어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패하여 신바빌로니아는 멸망했다.
바빌로니아의 과학
편집-科學
신(神)바빌로니아 시대에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수학이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다. 각지의 신전에는 태양·달·혹성·항성의 운행을 관찰하고 그의 식(蝕)을 관측·예측했다. 또 평방근(平方根)·입방근(立方根)의 표를 작성하고, 3평방의 정리(定理: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했다. 칼데마인의 라브 리마느는 일식·월식을 예언하고, 태양년(太陽年)을 계산했으며 일종의 ‘제로기호’를 이용했다. 이와 같은 실학들은 그리스인에게 전달되어 추상화되어 갔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편집-空中庭園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건설한 정원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벽돌로 둥근 천장을 만들어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리고 수목을 심었다. 계단 피라미드 모양으로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수목을 심어놓은 모양이 마치 삼림으로 덮인 작은 산처럼 보였고, 연못과 샘의 관수(灌水)를 위해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렸다고 전한다.
메디아 왕국
편집-王國
인도·유럽계의 기마(騎馬) 민족 메디아(Media)인이 기원전 8세기 말경 이란 고원에 세운 나라. 수도는 엑바타나(Ecbatana). 시조는 디오게스라고 한다.캭사레스(Kyaxares)는 신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고, 기원전 538년 개기일식(皆旣日蝕) 날 하리스 호숫가에서 리디아와 교전한 후 곧 화목했다. 그 아들 아스티아게스(Astiages) 시대에 아케메네스가(家)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당했다.
리디아 왕국
편집-王國
프리지아 왕국 멸망 후, 소아시아를 지배한 나라. 리디아(Lydia)인은 인도·유럽계 민족의 일파로 사르데스(Sardes)를 수도로 하였다. 시조는 기게스(Gyges)로 이 왕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의 주조화폐(鑄貨:금과 은의 합금. 엘렉트론화)가 발명되었으며 이것은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에 전해졌다. 아리아티스(Aryattis) 시대에는 메디아와 싸워 강화(講和)를 맺었다. 리디아는 사금(砂金)과 양모(羊毛)를 생산해 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에게해(海)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얻어 클로이소스 시대에는 부유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