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문명의 형성/에게 문명
에게 문명〔槪說〕
편집동방에서 오리엔트 세계의 역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즉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의 전성기를 이어가고, 이집트에서는 신왕국 시대가 시작될 무렵, 멀리는 서방의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한 좁은 세계에서도 높은 문명의 전성기가 전개되었다(전 1600?). 슐리만의 발굴로 기적적으로 발견된 이 문명을 편의상 에게 문명이라고 불러 왔지만, 그 후 다시 발굴이나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일괄해서 간단하게 에게 문명이라 총칭해서는 바르게 정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최초에는 이 작은 세계에서 출토되는 독특하고 불가사의한 문자를 전혀 독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구는 오로지 고고학과 고미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근년(1953년)에 겨우 이 문명 후반부인 미케네 문명의 문자만이 해득되기 시작하여, 에게 문명의 역사는 오늘날 고대사학계에서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최신 최대의 문제가 되었다. 에게 문명은 결코 그 이름 아래 총괄할 수 있는 간단한 문명이 아님은 총체적인 고고학적 관찰에서도 충분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미케네 문자의 독해에 의하여 이제야 완전히 입증되었다. 미케네 문자는 추측한 대로 그리스어였다. 여러 가지 고찰에 의한 결론을 알아보자.(1) 에게 문명은 단일체의 발전이 아니고, 그 속에 ‘미노아 문명’ 및 ‘미케네 문명’이라는 구성 요소가 전혀 다른,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잇따라 일어난 두 가지의 문명을 대표하고 있다. (2) 미노아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인종 계통 불명인 가칭 ‘소아시아계 지중해 인종’이었음에 반하여, 미케네 문명인들은 분명히 인도·유럽계의 그리스인들이었다. 전자는 예를 들어 말하면 크노소스 궁전(Knossos 宮殿)의 벽화에서 보는 인물상에서 확인된 육체적 여러 특징――키는 단구(短軀)이며, 피부색은 암백색(暗白色)이며 눈과 머리는 검정색――을 가진 소아시아·오리엔트 타입을 보이고 있음에 반하여, 후자는 키가 크고 백석(白晳)하여, 벽안의 유럽형인 것이 대조적이다. (3) 크노소스의 웅장한 왕궁 유적은 거대한 전제 지배 기구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 미노아 문명 사회의 성격은 오히려 오리엔트적이어서 미케네 문명의 작은 성채(城砦)의 세계와는 그 경관(景觀)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상과 같은 여러 관점에서 우리들은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을 ‘에게 문명’이라고 일괄해서 말하던 종래의 전통적 개괄에는 적지 않은 의문을 느낀다. 결론적으로 본장에서는 미노아 문명을 오리엔트사(史)의 일환으로 구성하고, 미케네 문명은 여기서 떼내어, 이것을 그리스사의 개막 제1장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물론, 미케네 문명은 많은 문화 요소를 선진 미노아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아 개화(開花)된 것이므로, 따라서 가령 순수하게 문화사적인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와 고(古) 키클라데스 문명(에게해 키클라데스 제도〔諸島〕)을 총괄하여, 보통 에게 문명이라 부름에도 관습적 편리성은 있을 것이다.
미노아 문명
편집-文明
그리스 신화의 미노아왕(王)에 연유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혹은 minos는 단지 ‘왕’이라는 일반명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농목(農牧)에 기초하여 일어난 전형적인 청동기 문명으로 중심은 크레타섬. 초기 미노아 기(期)라 불리는 이 문명의 가장 오래된 시대는 기원전 3000년대의 후반에 전개되었다. 당시의 크레타는 오리엔트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으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통일된 에게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도 금속 가공 기술이 전파되어 상업 교역을 증대시켜 크레타는 큰 번영을 이룩하였다. 슐리만의 뒤를 따라, 영국인 에반스(Arthur John Evans, 1851
1941)가 1899년 이후 이 지역 크노소스(Knossos)에서 대궁전 유적을 발굴했다. 건물은 넓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거실, 알현실, 앞뜰, 복도, 공방(工房), 창고 등이 다수 줄지어 있다. 이 건물은 건물에 장식을 시공한 무명 세공인의 높은 수준뿐 아니라, 수리(水利)설비와 위생시설에서 볼 수 있는 실용성과 참신성을 겸비했다. 궁전 근처에는 아마도 귀족의 것으로 여겨지는 호화로운 주거가 있고, 그 둘레에 크노소스를 비롯하여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발달되어 있던 것으로 추측한다.출토한 진흙판(泥板)에서 보는 줄 모양의 A문자군(文字群) 및 인장이라고 생각되는 석면(石面)의 기묘한 그림문자는 어느 쪽도 모두 해독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명의 연구는 아직 정확하게 고고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한계 안에서 판단한 것만으로도, 예를 들면 발굴된 궁전의 웅장 호화로운 궁전 구조에서 오리엔트적 전제 지배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며, 또 왕궁 벽화나 질그릇에 그린 무늬의 소재(素材), 바다에 서식하는 동물 등에서 그 해양 문명적인 성격이나 주민들의 바다에 밀접한 생활, 덧붙여 왕권의 해상 지배 등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오리엔트사의 일환(一環)을 구성하면서 위에 그 해양적 요소에 있어서, 또한 그 예술 기조(모티프)에 있어서 내륙적인 오리엔트 문명과는 전연 다른 독자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미궁과 신화
편집迷宮-神話
미노아왕의 왕비가 미끈한 황소를 사랑하고, 교접하여 낳은 한 인신우두(人身牛頭)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미노아의 소). 그의 먹이를 위하여 9년마다 7명씩의 남녀를 이 괴물이 숨겨진 미궁(迷宮)에 산 제물로, 아테네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실로‘미궁’(랜버린스)은 복잡한 작은 방들――실제는 노예가 쓰는 방이나, 일하는 방·창고 등이었을 것이다――이 현실로 발굴된 것은 커다란 경이였는데, 그리스 신화의 지엽 부분에는 미노아 세계에서 취재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 문화에 끼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말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리스 신화의 세계는 미케네 문명(文明)을 그 사이에 두고 미노아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종래와 같이 총괄적으로 선사(先史) 그리스라고 함은 오늘날에는 용납될 수 없으나 미케네 문명이 설립의 배경을 미노아 문명에 두고 있다는 것만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