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폴리스의 발전과 그리스의 민주화
아테네의 사회
편집-社會
아테네는 도리아인의 이주에 따른 민족이동 때 그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원의 그리스(이오니아)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어 내려왔다. 스파르타와는 달리 미케네 시대부터 존재한 아티카 지방의 중심지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13세기경 아테네 왕 테세우스에 의해 아티카가 통일되고 폴리스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폴리스의 형성과 더불어 집주가 형성되었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집주(集住:시노이키스모스)는 정치 권력을 아테네에 집중시켰으나, 지방의 전통이나 특수성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아테네도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토지 소유자에 의한 귀족 정치가 확립되었다. 이 귀족정 폴리스의 관리로서 아르콘(archon:집정관)이 정치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종신관(終身官)이었다가, 이후 10년 임기에서 1년 임기로 바뀌었다. 기원전 7세기 이후 아테네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평민의 상승과 몰락을 야기시켜 귀족과 평민간의 불화가 심해져 드라콘의 성문법 제정, 솔론의 개혁,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개혁 등으로 양자간의 조정을 꾀하였고, 또한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스파르타의 사회
편집-社會 정식 국명은 라케다이몬(Lakedaimon). 스파르타인(Spartiatai)·페리오코이(periokoi)·포로(heilotai)의 세 신분이 있었다. ‘포로’는 도리아인 침입시의 피정복 선주민 아케아인(人) 및 그 후(기원전 8세기 말 제1차 메세니아 전쟁) 정복된 서쪽 변경의 메세니아인들로서 가혹한 학대로 유명한 노예(奴隸). 앞 2신분이 정복자인 도리아인(人)들의 두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 2신분으로 라케다이몬 국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정치권능을 갖는 완전한 시민은 스파르타인뿐. 페리오코이(주변 부락민)는 신분으로는 자유롭고 땅의 소유도 허용되었지만, 종군의 의무만 있을 뿐 참정권이 없는, 격이 떨어지는 열등 시민이었다.수적으로는 적은 정복자가 자신들보다 수십 배(여러 설이 있음)나 되는 노예들을 제압하고 지배와 수탈을 유지해 가려고 하는 것이므로 보통 수단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스파르타에서는 이상하게 무력만이 발전하여 오늘날도 ‘스파르타식(式)’이라는 용어가 남을 정도로 특이한 사회(물론 너무 과장된 것이지만)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허약한 갓난애를 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소년들은 부모를 떠나 성인(成人)이 될 때까지 전쟁기술 훈련을 위해 합숙생활을 보낸다. 결혼 후도 30세까지는 병영에서의 집단생활이 강요되었다. 스파르타인은 모두 전사(戰士:호모이오이)로서 매일 무장하고 ‘왕의 막사’에 모여 각자 지참한 공동식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를 위해서는 모든 사생활을 희생하도록 요구되며, 질실강건(質實剛健)하고 상무(尙武)정신으로 과묵하며 학예를 천히 여기고, 비겁·문약함을 몹시 싫어했다. 수공업 생산은 페리오이코이에게 시켰지만 경제 발전을 두려워하여 일부러 무겁고 불편한 철화폐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두려워하여 엄중히 쇄국했다. 유능한 노예(헬롯)를 남몰래 없애버리는 크리프티아(은밀한 암살) 제도 등이 있었다.전해오는 이런 이상한, 아고게 체제(전 6 전 5세기)는 모두 노예 제압을 위해 생긴 것이다. 이름이 쟁쟁한 스파르타 육군은 실은 외국과 싸우기보다는 먼저 자국 내의 헬롯(helot)들과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던 군대였다(헬롯의 진압을 위해서는 외국 군대「아테네」의 출동조차 구하였다「제3차 메세니아 전쟁」). 아니 헬롯만이 라케다이몬의 국내에 공주(共住)하는 적(敵)의 집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관(에프로이:시민 중에서 5인 선출 왕정을 감독)들은 매년 취임 선서할 때 함께 헬롯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었다. 헬롯에 대한 이와 같은 격렬한 적대적 관계는 그들의 무서운 반란 끝에 발생한 것이다(반란도 메세니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제2차:전 7세기 중엽경. 제3차:전 464/8년 「대지진의 혼란 중에서 봉기하여 공포와 처참함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진압한 후 항상 전투 태세의 무장국가――항상 긴장한 상태――가 성립된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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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
스파르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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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족 |
이오니아인 |
도리안인 |
위 치 |
해안 |
내륙 |
산 업 |
해상 교역 |
농업 중심 |
기 질 |
자유·진취·개방 |
보수·폐쇄 |
정 치 |
민주주의 |
군국주의 |
군 대 |
해군 |
육군 |
노 예 |
개인 소유 |
국가 소유 |
동 맹 권 |
델로스 동맹 |
펠로폰네소스 동맹 |
드라콘
편집Dracon
기원전 7세기 말의 그리스 아테네의 성문법 공포자. 이 성문법은 형벌에 있어 사소한 일에도 사형을 가하는 일이 많아 ‘피로 쓰여진 책’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후 솔론법에 의해 형법을 제외한 나머지는 폐지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그의 법은, 가혹한 처벌로 후세에 유명하다. 그는 모살(謀殺)과 과실에 의한 살인을 구별하였으며, 4세기까지 이 조항은 계승되었다.
솔론
편집Solon (전 638?∼전 559?)
그리스 아테네의 입법가, 정치가. 그리스 7현인 중의 한 사람. 귀족과 평민 사이의 투쟁을 조정하였으며 일체의 부채를 소멸시키고, 부채에 대한 인신 저당 노예 매매 등을 금지시켰으며 재산의 정도에 따라 시민을 4계급으로 구분, 참정권과 병역 의무를 규정하여 입헌적 민주 정치 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솔론의 개혁
편집-改革
기원전 7세기. 아테네에서는 농민의 비참함이 더욱 심해져서 참주(僭主) 성립에 최적의 상태로 되어 있었다. 방치해 두면 공동체 붕괴의 위험조차 있었다. 기원전 594년의 장관(아르콘)에 선출된 솔론(Solon, 전 640???전 560?)은 (1) '일체의 장부상의 부채 말소'라는 과감한 수단을 취하여
빈한한 농민을 일시에 구제하고, (2) 참주 방지책으로, 귀족·농민 그리고 새로이 성장하던 부유 상인층 등 3자간의 불만을 조정할 완전한 '국제개혁(國制改革)'을 단행했다. 따라서 '조정자(調停者)'라고 불린다. 군무를 부담하는 능력과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경제력(토지 소유 평가고「評價高」)에 따라 전 시민을 4계급으로 나누어 반대급부로 각 계급에 따라 참정권의 정도를 정했다(마찬가지로 시민군(軍) 조직의 로마「兵員會」가 역시 이 원리「재산고와 투표권」에 의한 것과 이것이 잘 대응된다). 이것을 '(재산)평가정치'(timocrayː현대라면 황금만능 정치?)라 한다. 이후 귀족과 농민의 신분 차이는 법제상 없어졌다. 그러므로 대국적으로 보아, 이 국제개혁을 신분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의 변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장보병시민단(제3급이 중심)이 성립된 일이며 여기서 가장 유리하게 된 쪽은 신흥 부유 상인층이다. 귀족이나 농민들은 오히려 불만이 많아졌으며, 이윽고 아테네는 다음 대에 들어 3파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다. 솔론의 여러 개혁 중에 유언법의 제정(적자가 없는 경우, 씨족단에 환부해야 되는 상속지를 유언으로 개인에게 유보한다)이나, 고발권(드라콘, Drokon:구법에서는 피해자의 씨족단밖에는 없었다「혈수, 血讐」)의 시민 전체로의 확장은 좁은 씨족적 사회에서 시민단 공동체로 탈피해 가는 폴리스(Polis)의 내면적 발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일부분으로서 흥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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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메딤노스(medimnos)는 곡물 양의 단위(약 52ℓ)
2. 아르콘(archon=장관)은 아테네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9명. 최고기(最古期)에는 종신제(終身制). 전 8세기 중엽(?)에는 10년 임기. 전 638년 이후부터 임기 1년. 단 국제개혁(國制改革)까지는 귀족 독점. 그 후 일반 시민에게도 개방되었다(전 458).
클레이스테네스
편집Kleisthenes
기원전 510년경의 아테네의 정치가. 아테네 민주제도의 창시자로서 참주(?主) 히피아스(Hippias)의 전제정치를 추방하고, 또 정적 이사고라스(Isagoras)를 물리쳐 민주정치의 기초를 굳게 하였다. 그는 왕을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해마다 한 번씩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인물의 이름을 적발하여 도자기 조각에 써서 정하여진 장소에 넣게 하고 그것이 6천 표에 달하였을 경우 그 인물을 나라 밖에 추방하는 도편(陶片)추방이라는 제도를 창안(創案)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개혁
편집-民主改革
구귀족과 농민들의 솔론 개혁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한 3파정쟁(구귀족들의 평야당, 신흥상인들의 해안당, 농민들의 산지당)의 결과, 농민들을 기반으로 이용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전 600-?
전 527)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으며, 아테네에도 이후부터 반세기 동안의 참주정치가 시작되었다. 유능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선정(善政) 3년간은 참주정치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아테네 사회의 진보적 전진의 시대였는데, 반면 그 아들 힙피아스의 치세는 말년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폭정화했다. 마침내 기원전 510년, 참주정치는 타도되고 그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그에 대신하여 참주(tyrannos) 타도에 힘을 기울여 왔던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의 헌책(獻策)과 실행에 의해 유명한 민주개혁이 시작되었다. 개혁의 근본은 국제(공동체 구성)의 완전한 민주적 개조이다. 여기에는 데모스(demos)의 설정과 그에 따르는 신(新)부족제 구성이 근본이 되었다. 먼저, 아티카 전역에 공동체 구성의 기본 단위로서 자치제의 '데모스'를 설정하고(처음 100 정도, 후에는 200 이상으로 증가), 전 시민을 그 소속 씨족을 고려하지 않고 개혁 시점에서의 현주지(現住地)에 따라 그 데모스에 편입, 그 후의 동태에 구애되지 않고 이 구적(區籍)을 시민 원적(原籍)으로서 상속시켰다. 그에 따라 시민 개인의 호칭도 종래의 파트로니코미콘(아버지의 이름에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름)을 그만두고 데모테미콘(구적을 표시하는 이름)으로 개정했다. 그렇다고 하여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이것은, 솔론 개혁 후까지 남아 있던 씨족제적 구습과 신분의식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 아티카 전역을 시역(市域)·해안·내륙의 3군(群)으로 나누어――옛날 3당파적 구분과 일치되어 있는 것에 유의――그들을 다시 10구분하여, 3군에서 각각 1구분씩을 추첨으로 무차별 조합시켜 계 10조(組)를 만든다. 이 10조가 즉 새로 구성된 부족이다. 부족이라고 이름은 붙어 있으나, 이것은 씨족적 요소나 신분적, 계급적 요소와도 관계없고, 또 지역적 요소에 있어서도 전체를 기계적·평균적으로 포괄하여 편차를 없앤 완전 무차별 무성격의 10부족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입법·행정·군사 각 기관의 집행 조직이나 중무장병 시민군 기초 단위로서 기능이 주어졌다.입법에 있어서는 옛 부족 원리에 따르는 솔론 이래의 평의회(西百人會)가 폐지되었으며, 대신 일체의 표결권은 시민 전체의 '집회'(민회)만이 담당한다(직접민주제). 새 평의회는 새로 구분한 부족마다 각각 그에 따르는 '데모스'의 시민 수에 비례하여――아마 사상 최고(最古)의 비례대표제(Beloch)이리라――추첨 선출되는 50인씩의 부족 대표 의원으로 이루어졌으며(五百人會), 그 부족별 당번 순서도 각 기(期)의 의장과 서기도 모두 추첨이라는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무성격적인 것이나 그래도 여기에 민회의 의안 준비와 예비심 이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결정 기관은 민회뿐이었다. 추첨주의는 기원전 5세기 중엽 이후의 민주정치 확대기가 되면 모든 행정관직의 선임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신설된 각 부족 선출의 장군직(strategos職, 10人)은 예외적인 민회에 의한 투표 선거제였다. 그러므로 이 직종은 무한히 중임이 허용된 것을 계기로 후에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에서 예를 볼 수 있듯이 '장관'을 능가하여 사실상 최고의 관직으로 되어 갔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국제 대개조(國制大改造)가 기원전 6세기 말이라는 시기에 완수된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실은 그로부터 근 10년을 지내지 못하여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20년 후에는 아테네 근방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국정개혁은 실로 '중장보병(重裝步兵) 민주정치' 국가의 건설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스파르타의 상호평등(동등자:homoioi) 전사(戰士) 공동체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대사업이 대(對) 페르시아 전쟁 직전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아테네의 행운이었다. 마라톤의 승리(전 490)는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註) 법적, 정치적 권리에 있어서 '시민'이라고 할 때는 항상 시민권 보유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성년 남자에 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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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라키스모스 (도편 추방제도)
편집-(陶片追放制度) Ostrakismos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미 구상되어 있던 솔론의 사업을 더욱 발전시켜 여러 가지 개혁을 완성시켰다. 참주정치나 과두정치 같은 반동의 위험으로부터 민주정치를 수호하기 위해,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 추방), 즉 너무도 세력이 강해 국가에 위험한 인물 내지 야심가 등을 미연에 정계에서 제거하기 위해 생명·재산은 보전――단 세습(世襲)의 지분지(持分地)뿐이었던 것 같으며, 테미스토클레스 추방(전 471) 때 동산(動産)은 몰수되고, 경매되었음――하지만 10년간 국외에 퇴거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종이가 없었으므로 도자기의 조각에 써서 탄핵 투표한다. 문맹(文盲)은 의외로 적었던 것 같다. 참주 방지책으로서 클레이스테네스가 제정했다고 전해지지만 최초의 실시가 기원전 487년으로 20년이나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만들었다는 설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남용이 심해져서 무명인사도 탄핵을 받아 명백히 정쟁의 도구로 악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해가 크므로 결국 기원전 417년을 최후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