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중국의 춘추시대
중국의 춘추시대〔槪說〕
편집주나라가 낙읍(洛邑)에 동천(東遷)하고 나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이지만, 그 전반기를 춘추시대(전 770
전 403)라 하고 후반기를 전국시대(전 403
전 221)라 한다. 주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벌써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 가까이나 되던 국가는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춘추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전 651),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전 632)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전 597)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초의 장(莊)왕은 주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춘추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의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춘추시대, 전국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관된 역사적 시점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된다.
춘추시대
편집春秋時代
주의 동천(전 770) 이후 중국 통일(전 221)까지를 춘추전국시대라 부르고 그 전반기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와의 경계는 춘추시대에 열국의 강국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의 집정하에 있던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3국의 분립이 성공한 기원전 453년으로 올려 잡는 설도 있다. 이 시대를 춘추라고 부르는 것은 공자가 썼다는 노국의 연대기(年代記) 『춘추』에서 연유하여 이름지어졌다. 춘추의 기록 기간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의미하고 있으나, 역사적 의미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별하는 것으로 하극상(下剋上)의 경향을 들 수 있는데,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하극상의 경향이 많아 예의 질서가 붕괴되고 여러 나라의 상쟁(相爭)이 격화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유교적 견지에서 얘기한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주대 봉건제로부터 진의 중국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양자를 통일적으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춘추시대 말기의 정세
편집春秋時代 末期-政世
춘추시대의 말기가 되자 북의 진, 남의 초가 그 권세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중의 하나로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에 오(吳)와 월(越)의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발흥하게 된다.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춘추시대의 후반이 되면 우선 오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의 진(晋)은 초(楚)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다.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고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하게 했다. 그 결과, 오와 월 사이에서는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고 있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된다. 그 결과, 오왕 부차(夫差)는 패하여 자살하고, 오는 멸망한다. 승리를 한 월왕 구천(句踐)은 세력을 북방으로 진출시켜 산둥(山東)이나 허난성(河南省) 남동부의 여러 나라를 그 산하(傘下)에 거두어 들이고, 한때 도읍을 낭야(琅邪)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오 역시 왕 부차가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진(晋)과 회맹(會盟)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 두 나라의 땅은 일찍이 기원전 4000년경에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은(殷)으로부터 서주시대에 걸쳐서는 거의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잊혀져버린 지역이었다. 춘추(春秋)의 후반이 되어 갑작스럽게 이 두 나라가 출현하여, 한때는 진이나 초를 능가하는 형세를 나타내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오의 영역을 병합한 월도 역시 얼마 안 가서 쇠망해버렸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한편, 북의 진의 내부에는 나라가 분열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범(范), 중행(中行), 지(知), 조(趙), 위(魏), 한(韓) 등, 6귀족의 발호(跋扈) 때문이다. 진의 공족(公族)이 아닌 범, 중행 등의 귀족은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로이 주위의 토지를 손에 넣어 자기의 세력을 증대시켜 오히려 진의 공족 출신 귀족을 누르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진 나라에는 행정 조직 등도 거의 없어서, 이들 6대 귀족에 의하여 정치가 행해지게 된다. 진후(晋侯)의 지위는 오히려 실제적인 힘이 없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은 6귀족 중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문공(文公) 이래 북부 제후(諸侯)의 중심이면서도 국내적으로는 분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6귀족은 진후를 정치로부터 배제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세력을 다투어,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 등 2가(家)가 다른 4가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지는 분할되었다. 또한 기원전 453년에는 한, 위, 조 등 3씨가 가장 강대해진 지씨(知氏)를 공략하여 사실상 진을 3등분하여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귀족이 제후를 억누르고 그 나라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노(魯)나 제(齊)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춘추시대 후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국제적인 외교도 기원전 546년의 송(宋)의 화평회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모두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다. 한, 위, 조 등 3씨는 기원전 403년에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53년 이래 독립국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춘추시대를 통하여 유력한 대국으로서 제후를 통제해 온 진이 사실상 멸망한 이 해를 고비로 하여 그 전을 춘추시대, 그후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회맹
편집會盟
제후 혹은 그 사신이 유력자를 중심으로 서로 만나서 맹약하는 것. 회(會)라 함은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여 모이는 회합이며, 맹(盟)이라 함은 소의 왼쪽 귀를 잘라서 그 피로 조약서를 쓰고 회합한 제후가 피를 마시는 의식을 말한다. 이 회맹의 맹주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회맹의 성격은 초기에는 패자가 주 왕실에 위임이 되어, 국제 친선·가족 도덕 등 중원 사회의 질서 유지에 목적이 있었지만, 차차 강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수(攻守)동맹으로 변화해 갔다.
오패
편집五覇
춘추시대에 위세를 떨친 다섯 회맹의 패자. 제의 환공, 진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부차, 월왕 구천(勾踐)을 가리킨다. 또 오·월 대신 송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을 넣는 설도 있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5의 수는 5행 사상(木·火·土·金·水의 다섯 원소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하는 사상)에 의한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의 환공
편집齊-桓公 (?
전 643, 재위 전 685
전 643)춘추 5패 중의 한 사람. 이름은 소백(小白). 제는 전설로는 주를 도와 은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태공망 여상(呂尙)으로, 산둥성 임치(臨淄)에 영지를 받아, 기원전 7세기에 환공이 왕이 되자 부강하게 되었다.환공은 이복형 규(糾)와 싸워 즉위하고 재상으로 관중(管仲)을 등용했다. 관중의 헌책에 의해 어업·제염업·양잠업 등의 경제 정책을 장려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기원전 679년 제후(諸侯)와 견(甄)에서 회맹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기원전 651년 규구(葵丘)의 회에서 패업을 자랑했지만, 후에 신하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사후 내란에 의해 두 달 동안이나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의 문공
편집晋-文公 (?∼전 628, 재위 전 636∼전 628)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晋) 나라의 제24대 공(公). 문공은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당하여 19년 동안 있다가 의형(義兄)인 진(秦) 나라 목공(穆公)에 의하여 62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나라의 공이 되자 많은 현신(賢臣)을 얻어 먼저 주(周) 나라의 양왕(襄王)을 도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도록 하였고 잇달아 송의 청으로 인하여 초나라의 군세를 격파시켰다(전 632). 제(齊) 나라의 환공(桓公)과 아울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왕위에 오른 지 3년만에 죽었다.
초의 장왕
편집楚-莊王(?∼전 591, 재위 전 614∼전 591)
춘추시대의 5패(五覇)의 한 사람. 초(楚)나라 목왕의 아들로서 진(晋)나라 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오왕 부차
편집吳王夫差 (?
전 473, 재위 전 495
473)부차의 아버지 합려(闔廬)는 초의 망명 신하 오자서(伍子胥)를 기용하여 기원전 506년 초의 서울 영(?)을 함락시켰는데, 월의 윤상(允常)의 침입에 의해 이후 오·월의 다툼이 시작됐다. 합려는 윤상의 사후 월을 공격했지만, 월왕 구천에 의해 참패당하고 그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서약시켰다. 부차는 구천을 기원전 494년 회계(會稽)에서 격파하고 남방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북상하여 기원전 482년 진(晉)을 맹주로 하는 중원 여러 나라를 누르고 패자가 되었다. 강남 세력의 중원 진출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지만, 그 사이 월왕 구천은 오의 수도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기원전 473년에 부차는 구천에게 대패하여 자살하고 오나라는 월에 병합되었다.
월왕 구천
편집越王勾踐 (?
전 465, 재위 전 496
전 465)춘추시대 최후의 패자. 오왕 합려는 월에 침입했지만 구천은 그를 격파했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하고 기원전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구천은 북상하여 산둥의 서주에 제후를 모이게 하여 패자가 되었다. 오·월의 싸움은 이 고사를 말한다.
『시경』
편집詩經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 주의 강왕(康王, 전 7세기) 때부터 춘추시대 중엽(전 2세기)까지의 시 305편이 담겨 있다. 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와 함께 유교경전인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내용은 크게 풍(風)·아(雅)·송(頌)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 아는 공식연회에서 쓰이는 의식가(儀式歌), 송은 조상에 대한 송가나 구복(求福)을 테마로 제사에서 쓰이는 악시(樂詩)를 말한다. 현실 정치 풍자와 학정을 원망하는 시 등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가치도 높아 사료(史料)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