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원수정 로마의 발전
원수정 로마의 발전〔槪說〕
편집아우구스투스가 후임 원수의 지명권을 가지고 인척인 티베리우스를 지명한 이후 그의 가계(家系)에서 4대에 걸쳐 원수가 나왔다(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본래 원수는 실력자로서 반드시 특정의 가계에 한정되지 않는데, 사실상의 전제 지배자는 왕조를 형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능한 네로가 죽은 후 69년에 4인의 원수가 난립하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승리하여 그의 둘째 아들이 뒤를 이었다(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부터 5대는 생전에 유력자를 양자로 맞아들이는 관습에 따랐다(五賢帝). 이리하여 원수가 교체하는 동안, 원수의 권력은 점차로 강화되어 공직자는 국가 관료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원수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국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공화정기(共和政期)처럼 속주(屬州)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속주로 이룩되는 제국을 전체로 하여 통치하는 방침에서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져, 각지에 로마풍의 도시가 세워지고 제국의 일체화(一體化)가 진전되었다.이 제국을 동쪽의 파르티아와 서쪽의 게르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도 원수가 군사적·정치적으로 그 지배력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편집-王朝
아우구스투스는 내정으로는 보수적이고, 대외적으로는 소극적이었다. 원로원 의원급의 특권을 인정하여 기사급(騎士級)을 실무면에 활약시켜, 제각기 신분을 고정했다. 민회(民會)는 존속했으나 형식뿐이었다.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와의 결전을 피하고 완충 지대에 보호국을 두었으나 서방의 게르만인에게 군대를 동원했다. 게르만은 인구가 증가되어 토지를 구하여 이주하여 왔다. 그것은 이미 정착하여 로마의 질서에 따르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므로, 무력을 쫓아버려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방침은 다음의 티베리우스(재위 14
37)에게 충실하게 이어졌다. 티베리우스는 유능했으나, 만년에 시기심이 높아 반역죄의 선고를 남발하여 악평이 많은 가운데 죽었다. 다음의 칼리굴라(재위 37
41)는 정신이상자여서 원수로서는 무능했기 때문에 근위군(近衛軍)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편집Augustus (전 63∼후 14, 재위 전 30∼후 14)로마의 초대 황제. 아버지는 원로원(元老院) 의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어머니 앗티아(Attia)는 카이사르(Caesar)의 누이동생 줄리아(Julia)의 딸이다. 기원전 48년경 카이사르의 비호에 의해 제사관부(祭司官部)에 들어가, 기원전 46년에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수행, 기원전 45년 공로에 의해 귀족이 되고, 다음 해에 카이사르의 기사장(騎士長)의 한 사람이 되어 그 무력 독재를 보필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횡사하자 그 유지에 따라 그의 사자(嗣子)가 되었고,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라고 칭했다. 그리하여 안토니우스(Antonius)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옛 부하의 강력한 군대의 지지하에 통령(統領)이 되어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재현하고, 브루투스(Brutus), 카시우스(Cassius) 등 공화론자들을 토벌했다. 한편 이집트 왕국이 모반하여 안토니우스가 반로마적 책모를 꾀하고,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이를 계기로 하여 그리스 동방적 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자, 그는 악티온의 해전(海戰)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뒤, 기원전 30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마에 개선하였다. 이에 그는 10년간의 제권(帝權)을 부여받아 초기의 군주정치의 공화적 변형(變形)인 프린키파투스를 창시하고, 삼두정치를 해체하여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공인에 따라 공화국 제일의 시민으로서 평화와 번영을 꾀했다. 로마시의 왕관을 받아 호민관(護民官)이 된 그는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존호(尊號)를 받고, 또한 제사장(祭司長)에도 임명되어 문무제권(文武諸權)을 장악, 제정(帝政)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정책은 내외 모두 평화주의로 일관하고, 집권적 관료정치 확립, 학문, 예술 장려, 토목, 건축의 실시 등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時代)를 출현케 했다. 그러나 25년간 갈리아, 게르만, 파르티아 등의 침구(侵寇)에 고심했으며 최후의 5년간은 정녕(靜寧)했다. 기원후 12년 제3회째의 조세부과조사(租稅賦課調査)에 즈음하여 마루티우스의 언덕에 모인 대중 앞에서, 구시대(舊時代)를 보내고 신시대(新時代)를 맞이하는 엄숙한 의식(儀式)을 거행하고, 모든 범사를 티베리우스(C. Tiberius)에게 위탁(委託)하였다. 그는 실로 카이사르 이래의 천하 통일과 평화의 확립자로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화를 유지하며 발달시켜, 고대 세계의 동향을 결정한 위대한 황제였다.
티베리우스
편집Tiberius (전 42∼후 37, 재위 14∼37)
로마의 제2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게르만족 정벌에 종사하였으며, 12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지방의 군통치자(軍統治者)로 임명되고, 14년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로마 황제로 즉위, 치세(治世) 전반에는 정무(政務)에 힘써 국위를 떨쳤으나, 후에 총신(寵臣)을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고 로마를 떠나, 27년 카프리 섬에 은퇴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칼리굴라
편집Caligula (12∼41, 재위 37∼41)
로마의 제3대 황제. 티베리우스제의 생질.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어 존경을 받았으나, 중병을 앓고 난 뒤 황제에의 숭배를 강요하는 등 포악과 낭비를 일삼아 원성을 듣게 되고 과거의 선정도 흐려졌다. 그는 과대망상적이고 앞을 내다보지 않는 정치를 했고, 원로원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또 무분별하게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여, 티베리우스 황제가 이룩한 끈기 있는 재정 재건 사업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또한 칼리굴라의 최대의 실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원수정(元首政)을 폐기하고 헬레니즘 오리엔트 형의 군주정(君主政)을 확립하려 했던 데에 있었다. 이 시도는 당시로서는 아직 시기 상조여서 원로원이나 기사 그리고 시민계급 모두의 분노를 샀다. 이에 암살 음모가 시도되어 그는 41년에 근위 대장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클라우디우스
편집Claudius (전 10
후 54, 재위 41
54)
로마의 제4대 황제. 원로원이 공화정의 부활을 논하고 있을 때, 근위병은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원수로 선언하고, 원로원에 승인을 강요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종래의 보수정책을 변경, 속주민(屬州民)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지사(知事)의 착취를 견제하고, 또한 원수금고(元首金庫)의 관리에 해방 노예를 썼다. 제국 정책의 개시와 더불어 원수 전제화의 제1보로서 주목할 일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처에게 독살되고, 처의 의붓자식 네로(재위 54
68)가 근위군의 지지로 원수가 되었다.
네로
편집Nero (37∼68, 재위 54∼68)
로마의 제5대 황제.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둘째 아내인 소(小) 아그리피나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전 남편이 죽은 후 아그리피나는 숙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妃)가 되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54년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군의 추대를 받아 원수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하였다. 네로는 치세 초기 5년 동안은 철학자이자 네로의 가정교사인 세네카와 근위장관 브루스의 보좌를 받아 해방노예의 중용, 매관 매직의 폐단, 감세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지원하자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이어 59년에는 어머니와 비(妃) 옥타비아를 차례로 살해하였다. 네로의 폭군적 행동은 그 무렵 브루스가 죽고 세네카가 은퇴하자 극에 달하였다. 64년에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전가시켜 대학살을 감행하였고, 65년에는 원로원 의원 피소를 중심으로 음모가 발각되자 세네카, 루카누스를 포함한 고위 측근을 처형하였다. 68년 갈리아에 이어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원로원과 군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로마시를 탈출하였으나 추격이 심해 마침내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로마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계승의 조건과 절차가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제위를 계승하고 있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家)의 대(代)가 네로 황제를 마지막으로 하여 끊겼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네로는 폭군의 전형으로 중세에까지 전설로 이어졌다.
플라비우스 왕조
편집-王朝
네로 황제의 죽음과 갈바의 황제 선언으로 야기된 혼란은 황제가 로마 원로원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속주의 주둔군단에 의해 지명되었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된 주둔군단은 원로원이나 근위병과 대립하게 되었다.68년 갈바(재위 68∼69)는 자기의 병사들에 의해, 이어서 근위병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로 들어가 임명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엄격한 그의 태도가 화근이 되어, 사방에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노령의 갈바 황제는 그의 공동 황제로 리키니우스를 지명했는데, 이것이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오토는 갈바 황제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있으면서 처음부터 그를 지지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후계자로 선택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무시당했다는 것을 안 오토는 약속된 증여금 미불을 구실로 근위병을 선동하여, 황제의 반대 세력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다. 69년, 근위병은 갈바 황제와 리키니우스를 살해하고 오토(재위 69)를 황제로 추대했다.그 사이 라인 강 유역의 주둔병이 반기를 들고 그들의 사령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를 황제에 추대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서부 속주의 군대로부터도 지지를 받아 로마에 진군했다. 이에 오토 황제는 크레모나 근처의 베드리아쿰에서 대결했으나 패하여 자살했다. 그 결과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재위 69)는 원로원으로부터 즉각적으로 황제 인준을 받았다. 마침 이 무렵, 동방 주둔군은 유대와의 전쟁에 종군중이던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는 곧 시리아 총독과 이집트 총독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앞서 오토를 지지했던 다뉴브 강 유역의 주둔군도 사령관의 한 사람인 프리무스의 조언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를 추대했다. 프리무스는 이탈리아에 건너가 비텔리우스 군을 격파하고 69년 12월에 로마를 점령했다. 이 때에 비텔리우스 황제는 살해되고, 무력화한 원로원은 예에 따라 즉각적으로 새 황제에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를 승인했다. 이것은 특정한 가계(家系)의 사람이 근위군의 지지로 원수가 되는 선례를 깨뜨림과 동시에, 원수 정치란 군사력(속주군의)이 뛰어난 자의 권력 정치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출신지인 에스파냐 전체의 시민에게 라틴 시민권(로마 시민권보다 격이 낮은 시민권)을 주고, 또 갈리아, 에스파냐 출신자를 원로원에 들여보냈다. 로마에 도착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문란해진 재정을 바로잡으며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행정을 정비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우선 그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노력하여 국내 평화의 확립에 성공했다.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 티투스가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고 70년에는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이듬해 서방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처음에 프리무스가 비텔리우스 파의 전투 부대를 제압하고 있던 기회를 틈타 일어난 것인데, 그 후 갈리아의 독립제국(獨立帝國)을 창설하려는 시도로까지 발전된 것이었다.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또다시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라인 강 국경의 군대배치를 변경했으며, 근위병의 충성을 확보해 놓기 위해 티투스를 근위장관으로 임명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재위 89
81)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재위 81
96)가 아버지의 방침을 추진했다. 스스로 다뉴브강과 라인강에 가서 방벽을 쌓고 아그리콜라에 브리타니아를 원정시켰다. 원로원에 비판을 금지시키고 탄압을 가하여 원수의 우위(優位)를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편집Vespasianus (9∼79, 재위 69∼79)
로마의 황제. 아프리카의 총독, 유대의 분봉왕을 거쳐 네로 황제가 사망한 뒤 내란을 수습하고 부하 군부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그는 군율을 회복하고 바다비아인, 고트인의 반란을 평정하고 유대인의 반란을 정벌, 멸망시켰으며 카피톨 언덕의 여러 건축을 재건했다. 또 재정을 정비하고 콜로세움 등 공공 토목 사업을 일으켜 로마의 번영에 크게 공헌했다.
티투스
편집Titus (39∼81, 재위 79∼81)
유대인의 반란을 진정. 개선문, 콜로세움, 욕장 등을 건조. 그의 짧은 치세는 이상적인 행복의 시대를 길이 기억하도록 하여 인류의 총아(寵兒)로 경모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편집Domitianus (51∼96, 재위 81∼96)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로 형 티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원수 정치를 진정한 절대 전제 군주정치로 전환시켰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원로원을 대신하여 원수 자문회의 지위를 높이는 한편 종신 감찰관으로서 원로원을 철저히 감시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신적(神的) 영예가 부여되기를 원하여 주(主)인 동시에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사법 행정과 속주 총독의 행동도 철저하게 감독했다. 아울러 기사가 점점 더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행정 기구의 효율을 높였다.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및 다뉴브강(江) 유역의 다키아인을 정복하는 등 외정(外征)에도 치적을 올렸다. 그는 또 전통적인 관습과 재래 종교를 철저히 보호하는 태도를 취했다. 외래신(外來神)의 숭배, 특히 동방의 종교에 반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의 치세 때 호의적이고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리스도교도와도 충돌했다. 그의 원로원 멸시와 전제 군주적인 태도는 원로원 귀족들에게서 점점 더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맞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사형(死刑)과 재산 몰수로 보복했다. 이후 두 차례의 귀족 음모로 인해 의심이 심해져 신하들을 모반(謀反)죄로 학살하여 이에 불안을 금치 못한 황비 도미티아가 근위장관과 결탁해 암살하였다. 그는 그의 야심과 독재적 성격이 화근이 되어 역사상 극악 무도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이어진 플라비우스 왕조는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경제적인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또 원수 정치로부터 절대 전제 군주정의 확립, 그리고 속주민(屬州民)과 로마·이탈리아인과의 평등화에도 크게 박차를 가했다.
오현제
편집五賢帝
도미티아누스가 처(妻)에게 살해되자, 원로원은 66세의 원로원 의원 네르바(재위 96
98)를 원수로 지명했다. 네르바는 원로원의 정치적 발언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 다툼을 방지했다. 이후 원수를 원로원이 보좌하는 형식으로 원수정의 최성기가 실현된다(2세기). 네르바 이하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5명의 뛰어난 원수가 잇달아 통치했다.
네르바
편집Nerva (30∼98, 재위 96∼98)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법학자. 5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 나르니아에서 출생. 2회 통령을 지내고,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된 후, 원로원의 추대(推戴)로 고령에 즉위. 이탈리아에서 자녀가 많은 시민에게 토지를 주고, 부유한 집의 자녀교육을 위해 국가기관을 설치하는 등 민생(民生)을 안정케 했다. 또한 우편제도의 비용을 국가부담으로 하고, 로마시의 곡물분배제, 수도(水道)의 정비 등을 행했다. 관후하고 정의감이 강했으나 행정, 특히 군정의 경험이 없어, 97년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전권(全權)을 위임, 이후 원수의 지위 계승법의 선례(先例)를 열었다.
트라야누스
편집Trajanus (52
117, 재위 98
117)
로마의 황제. 5현제(五賢帝)의 한 사람. 스페인 출생. 군사를 이끄는 수단이 뛰어나 게르마니아 및 동방에서 공을 세웠다. 트라야누스의 공세는 다키아 정복에서 시작하여 사하라 사막의 가장자리까지 진출하여 동방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키고, 페르시아만에 다다르는 장대한 것이었다. 다키아는 로마화(化)되어 지금도 루마니아란 이름을 남긴다. 또한 나바타이국을 속주 아라비아로 한 사실로 인하여 홍해·아라비아 방면과의 교역이 발달했다. 제국 최대 판도를 현출시켰고 치적을 잘하여 도서관, 극장, 욕장, 수도 광장을 만들고 백성을 사랑하여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보호하였다. 아담쿠리시에 있는 개선 기둥은 황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최선의 원수(元首)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편집Hadrianus (76
138, 재위 117
138)
대영토를 인계받은 하드리아누스 때부터는 현지인의 병사를 방위 기지에 배치하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속주의 구별을 폐하고, 제국 통치를 위한 행정 조직(元首의 秘書團 형식으로)을 정비하고, 법률을 원수의 명령(칙령)으로 공포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방침을 충실하게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
161)는, 후계자로(하드리아누스의 유지에 따라) 루치우스 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명, 두 사람의 공동 통치가 실현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편집Antonius Pius (86∼161, 재위 138∼161)5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서 온화한 성격에 취미는 단순 소박했으며, 전통을 존중하여 고대(古代)를 예배하는 데 충실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원로원 의원·아시아 총독 등을 지내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임을 얻어 그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황제의 자리를 물려 받아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유명한 장성을 쌓았다. 학예를 널리 장려하고 스토아 철학에 능했다. 안토니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전체를 통해 오로지 이탈리아 문제해결에만 전념했다. 원로원과도 관계를 회복하여 4인의 이탈리아 집정관을 폐지함으로써 원로원을 안심시켰다. 이같은 안토니누스 황제의 정치는 그 일부가 전 황제와 모순되는 점도 있었으나, 사실상 중앙 집권화의 경향을 계승하고 있었다. 특히 제국의 평화와 안전 확보에 부심했던 안토니누스 황제는 사회 문제를 중시했다. 즉, 법률의 공평한 적용을 촉구하고 구제 사업을 확충하는 동시에 현명한 재정 관리를 실시함으로써 초기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소망과는 달리 그는 속주에서의 난국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편집Marcus Aurelius (121
180, 재위 161
180)
스페인 명족(名族) 출신. 하드리아누스의 근친(近親). 후기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 로마에서 출생. 최고의 교육을 받고, 138년 루치우스 베루스(Lucius Verus:130∼169)와 함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養子)가 된 후 그의 딸 파우스티나(小)와 결혼, 146년부터 피우스 황제와 공치(共治)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 베루스와도 공치하고 169년 그가 죽은 뒤 독재했다. 당시 제국의 변경(邊境)은 외적의 침입이 빈번했는데, 166년 게르만족은 마르코만니 및 쿠아디에 침입, 이 전란은 그의 치세 중 계속되었다. 175년 시리아의 로마군 지휘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175)의 반란을 진압하고, 176년 로마에 개선. 177년 게르만 제족이 다시 판노니아를 침입했기 때문에 178년 마르코만니를 정복하여 국경을 확보하고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 그가 진(陣) 중의 촌가(寸暇)를 이용하여 기록한 자성록(自省錄) 12편은 로마 제정기(帝政期)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문헌 중 하나로 에픽테투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래(古來)의 필독서로 되어 있다. 그는 관인(寬仁)하고 백성을 사랑했으나, 정책상 기독교를 박해했다. 다년의 원정, 시여(施與)는 국고를 궁핍케 하고 더욱이 페스트의 유행은 국력을 피폐케 했다. 방탕한 자식(子息) 콤모두스를 관례(貫例)를 어겨가면서 후계자로 한 것도 그의 실책 중 하나이다. 콤모두스(재위 180
192)는 전형적인 폭군이었으며 자기 욕망과 민중의 인기를 얻기에 급급하다가 근위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원수정기의 로마 사회
편집元首政期-社會
1, 2세기를 통하여 특히 제국 서반부에 도시가 발달했다. 옛날부터 소(小)집단 부락이나 군사기지에 로마인·현지인이 모여, 주민의 신분에 따라 식민시·자치시로 이름이 붙은 도시는 로마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멀리는 중국에 이르는 실크 로드와 홍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남해 항로를 주로 시리아 상인이 이용했다. 국내에서는 이집트의 곡물, 시리아의 염료, 브리타니아의 철, 에스파냐에서 광산물이 왕래하였다. 1세기의 이탈리아는 공업의 중심이었지만, 2세기에는 갈리아, 에스파냐가 이에 대신하였다. 기술 수준이 낮아서 노예를 이동시키면 바로 공업이 성해지기 때문이다. 대토지 소유는 공화정 말기 이후의 대규모 토지 분배·식민시 건설에도 불구하고 진척되었다. 단 노예를 부리는 대농장 경영은 피폐해지고, 자유인이나 해방노예를 소작인으로 하는 방식이 보급되었다. 해방노예는 옛주인을 보호자로 받들었지만 아들들의 대에는 자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