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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성립〔槪說〕 편집

기원전 4년경, 유대인 요셉의아들로 태어난 예수(Jesus Christus)는 민족신앙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신의 절대적 사랑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 예수 자신은 유대교 각파에 대한 격렬한 비판 때문에 십자가형(刑)에 처해졌지만, 그의 가르침을 믿고 그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초월한 신생 그리스도교를 자각하여 로마제국에 복음을 넓혀갔다.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지배자의 ‘박해(迫害)’가 시작된다. 박해의 이유가 반드시 같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힘에 의한 지배’와 ‘사랑의 지배’의 사상적 대결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보급은 고대인의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혁시키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철저한 인인애(隣人愛)를 특색으로 하는데, 격렬한 정의감으로 지탱되어 있다. 예루살렘 신전에서 완력으로 상인을 내쫓는 따위의 격렬성이 없어지고 교회조직에 안주할 때 그리스도교의 퇴폐가 시작된다.

예수의 배경 편집

-背景

예수가 살던 1세기 전반의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직할령과 헤롯왕의 아들들이 지배하는 변경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앙도 이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친(親)로마적인 사도가이(사두개)파(-派 祭司), 계율을 중히 여기는 반(反)로마적인 파리사이(바리새)파(-派 農民), 구세주의 세계지배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는 열심당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또한 세속에서 아주 떨어져 사는 신앙종단(애세네파의 쿰란 교단 등)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이들 그룹이(모두는 아니지만) 결속하여, 몇 번이나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정치와는 관련이 없다(“신의 것은 신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의 반역 정신에서 생긴 점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 편집

예수는 정의와 진실에 의한 신의 지배를 굳게 믿고, 신의 나라가 임박하고 있는 지금 바르게 생활하라고 부르짖었다. 그것은 계율(할례·기도 등)을 형식적으로 엄수하는 것이 아니고, 신과 직접 계율의 정신을 관통시키는 일이다. 부정(不正)에 대한 신의 재판은 엄격하지만 회개하는 자를 대하는 사랑은 더욱 크다.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예수는 유대인의 업신여김받던 자들(범죄자·창부·지세 청부인 등)에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르쳤으며, 타국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것은 적일지라도 사랑하는, 철저히 이웃 사람을 사랑하는 가르침이며 폐쇄적으로 신앙 단체에만 한정하지 않고, 널리 사람들에게 개방해야 할 복음이었다.

예수의 처형 편집

-處刑

알기 쉽고 힘찬 예수의 말이 사람들을 매혹시킴에 따라 반대의 소리도 높아 갔으며, 이윽고 배반자도 나왔다. 예수가 예루살렘 신전에서 ‘채찍을 들고’ 상인을 내몰았을 때, 사도가이파(사두개파, 祭司)는 특권의 침해, 수입의 감소를 두려워했다. 계율엄수를 위선이라고 비판받은 파리사이(바리새)파(派)는 격노했다. 그리하여 열심당(젤로타이)은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세의 국가가 아니고, 또한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Messiah, 救世主)가 아닌 것에 실망했다. 사람들이 예수로부터 멀어진 기회를 틈타서 사도가이파·파리사이파는 예수의 제자 유다를 매수하여 고발시켰다. 유대의 최고 평의회(平議會)는 독신죄(瀆神罪)에 의한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위임했다(유대인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다). 빌라도는 로마 지배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는 예수를 조사하여 본 결과 실은 종교 문제의 분쟁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지만, 사도가이파에게 선동된 민중 데모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교외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스도인의 자각 편집

-人-自覺

예수가 죽은 후, 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결속하여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형제 자매라 부르고 기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서로 도왔다. 지도자는 예수의 사도 12인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 밖에 또 교단의 사무를 담당하는 7인 위원(七人委員)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7인 위원의 스테파노(스데반)가 율법의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쫓겨남으로써 비로소 유대교와 다른 그리스도교를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바울 편집

Paulus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에는 각지의 유대인에게 유대 교회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르쳤는데,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타국인에게 전도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최대의 공헌자가 바울이었다. 바울은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르는 각 지역에 전후 3회의 전도여행(10년)을 하였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스스로 대속(大贖)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민족·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가 동포라고 가르쳤다. 신에게 선택된 민족(유대인)의 우월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종교로서 로마제국 내에 뻗어 갔다. 한편 유대 본토에는, 예수를 모세의 재래(再來)라고 생각하는 민족종교적 그리스도교(야고보·시몬 등)가 있었지만 점차 쇠퇴해 갔다.

박해 편집

迫害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내에 전파됨에 따라 지배자의 박해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제국의 통치에 전념하고 전통적인 다신교(多神敎)로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려고 하는 원수가 심한 박해를 했다. 최초의 박해자로서 악명 높은 네로는 이 때에 베드로(Petrus), 바울(Paulus)이 순교(殉敎)했다는 전설 때문에 유명해진 것 같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이 범죄라고 박해한 것은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며 조직적인 대박해를 실행한 것은 데키우스(3세기 중반경), 아우렐리아누스(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이단과 호교가 편집

異端-護敎家

박해와 함께 큰 위협이 된 것은 그리스도교도 내부의 분파(分派, 異端)였다. 2세기에 열광적으로 개혁을 부르짖은 몬타누스 운동이나, 세계는 (지고신「至高神」이 아니고) 불완전한 조물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악(惡)이 충만하므로 그노시스(神的靈智)에 의해 악으로부터 도망치는 수 밖에 없다는 그노시스파가 세력을 얻었다. 이것에 대해 유스티누스(Justinus) 등의 호교가(護敎家)는 정통적 신앙을 주장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 대해 유익하다는 것을 지배자에게 진정까지 했다. 그리스 철학에 통달한 호교가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이론적 무장을 한 후, 다음 3세기에는 오리게네스,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누스 등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신학(神學)이 형성된다. 『구약성서』의 창조신과 『신약성서』의 구제신(救濟神)은 동일하고 진실한 인간 예수는 신그리스도라는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설(에이레나이오스의 說)이 나왔지만 한편 교회 이외에는 구제받을 수 없다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소리도 높았다(키프리아누스). 교부의 활동기는 일반신자와 성직자의 구별, 후자의 계급적 분류, 각 지역 교회의 격차, 의례(儀禮)의 정비가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중 중요한 것이 경전의 편찬으로, 예수의 언행록이나 사도의 편지를 중심으로 『신약성서』가 만들어졌다. 단, 처음에 교회에 따라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었고 경전(經典, 카논)이 확정된 것은 4세기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전 편집

-敎-發展

유대인은 로마의 압정(壓政)에 대해 저항을 되풀이했으나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공략당하자 유대인의 국가는 소멸되고, 유대인은 이산(離散)하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교는 사도(使徒) 바울에 의해 로마제국에 포교(布敎)되고 있었으며, 2세기 반경부터는 『신약성서(新約聖書)』의 모든 문서가 씌어졌다.로마제국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이 정통(正統)의 교리로 확립된 뒤 국교(國敎)로 채용되어, 유럽문명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이란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唐)시대의 중국으로 전해져 경교(景敎)로 불렸는데, 중국사회에 대한 영향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렇듯 팔레스티나에 정착한 이스라엘인 가운데에서 유일신(唯一神) 여호와의 신앙이 생겨나고 그것이 유대교가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는 단순히 팔레스티나에만 머물지는 않고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이집트, 아나톨리아, 아라비아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리스, 로마와도 관련되는 역사 가운데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그야말로 서아시아의 역사의 산물(産物)이었다. 특히 최후의 심판이나 천사, 천국과 지옥, 악마, 부활 등의 중요한 사상에서는 이란 민족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의 종교의 기본적인 특색을 이루는 유일절대(唯一絶對)의 신에 대한 엄격한 신앙은, 후에 같은 셈민족인 아라비아인이 창출(創出)한 이슬람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그것이 오히려 이란 민족속에 독특한 논리로써 받아들여지고 침투되어 널리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