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시민혁명과 신대륙/17세기의 유럽 문화

17세기의 유럽 문화〔槪說〕 편집

절대주의의 확립과 시민계급의 성장을 배경으로, 안정과 조화를 찾는 고전주의가 탄생함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이성(理性)의 그리스도교적 윤리에 기초를 둔 합리주의 또한 이 시대에 발달했다.

문학 편집

文學

프랑스에서는 루이 13세에서 루이 14세에 걸쳐서 고전주의 문학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삼단일(三單一)의 법칙’(하나의 극을 발단에서 종결까지 24시간에 끝내는 것)의 프랑스 고전 비극이 코르네유(1606

1684)의 「르 시드」(1636)에 의하여 확립되었고, 라신(1639

1699)의 「앙드로 마크」 「브리타니퀴스」 등으로 완성되었다. 고전 희극은 몰리에르(1622

1673)의 「타르튀프」 「인간 혐오자(人間嫌惡者)」 「여학사의 무리」로 대표된다. 영국에서는 퓨리턴 문학이 17세기 전기(前期)를 장식하는데, 밀턴의 「실락원」(1667)과 버니언(1628

1688)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이 있다. 왕정복고 이후에 고전주의 문학이 형성되어 시인 드라이든(1631

1700)이나 포프(1688

1744)가 출현하였다.

미술 편집

美術

17세기의 미술은 바로크 양식으로 대표된다. 바로크 미술의 결정이라고 할 만한 것은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포상(1593

1665)과 클로드 로랑(1600

1682)이 이 시대의 프랑스 회화를 대표한다. 에스파냐에서는 베네치아파(派)의 기법이 독자적인 화풍을 낳고, 엘 그레코(1541?

1614), 벨라스케스(1599

1660)에 의하여 에스파냐의 회화가 확립되고 무릴료(1618/17

1682)는 그 절정기를 만들어냈다. 플랑드르 화파(畵派)에서는 루벤스(1577

1640)가 웅대한 구상과 현란(絢爛)한 색채로 삶의 환희와 풍만한 육체를 그렸다. 네덜란드 화파의 최대 화가 렘브란트(1606

1669)는 서민 생활을 소재로 독특한 명암의 수법으로 인간애를 표현했다.

철학과 과학 편집

哲學-科學

합리주의 사상과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과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데카르트의 연역론(演繹論)의 영향은 컸으며, 스피노자(1632

1677)의 범신론(汎神論), 라이프니츠(1646

1716)의 단자론(單子論) 등이 탄생했으며, 파스칼(1623

1662)은 합리주의를 비판했다. 영국에서는 뉴턴(1643

1727)이 천체운동에서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바로크식 건축 편집

-式建築

바로크(Baroque)식 건축은 17세기부터 18세기 초에 걸쳐서의 자유분방하고 불규칙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건축 양식이다. 연대적으로는 1580년부터 1715년경까지의 서유럽 미술 양식이다. 절대왕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 궁전이 그 전형이다. 복잡한 곡선과 유동적인 공간, 호화스런 장식 등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대표적 건축가로서는 이탈리아의 베르니니·보르미니, 프랑스의 프랑수아 망사르 르보 등을 들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편집

-宮殿

루이 14세가 축조(築造)한 바로크식 궁전. 루이 13세가 파리 남서쪽에 있는 베르사유(Versailles)의 숲속에 수렵을 위하여 작은 성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루이 14세는 프롱드 난으로 파리를 혐오하여 베르사유에 큰 궁전을 짓고 살 생각이었다. 이 공사는 1661년에 시작되어 대건축가 르보가 착수하고 망사르가 이어받았다. 정원은 르노트르가, 호화로운 장식은 르 브륑이 담당하여 1681년에 대체로 완성되었다.

밀턴 편집

John Milton (1608

1674)

영국의 시인. 런던의 부유한 공증인·금융업자 집안에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문을 닦은 뒤 청교도적 혁신 사상을 품고, 졸업 후 고전 연구에 종사했다. 이탈리아 여행 후 정정(政情)이 불안한 조국에 돌아와, 퓨리턴 혁명으로부터 1660년의 왕정복고까지 「자유를 위한 팜플렛」의 작가로서 1643년 이혼론, 1644년 자유출판론을 저술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정당화하고 만년에 대서사시 「실락원」을 남겼다.

데카르트 편집

Ren

Descartes (1596

1650)

프랑스의 철학자. 예수회(耶蘇會) 학원에서 배우고, 파리에 나가 수학 연구에 종사했다. 그 후 30년전쟁에 종군 중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 1629년 이후는 네덜란드에 이주(移住). 수학적인 증명법을 통하여 학문과 인간의 법칙을 추구한 『방법서설(方法敍說)』을 1637년에 저술하고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을 밝혔다. 그는 다시 『성찰록(省察錄)』에서 일체의 지식을 의심함으로써 확실한 지식을 확립할 수 있다고 하고,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命題)에 도달했다. 그는 이러한 인간 이성에 의해서, 신의 존재까지도 증명했다. 데카르트는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아버지라 하여 근대 과학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 『철학원리』·『정념론(情念論)』 등의 저작이 있다.

로크 편집

John Locke (1632

1704)

영국의 철학자·정치학자. 젠트리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을 배우고 다시 의학을 배운 다음, 샤프츠베리경(卿)의 시의(侍醫)겸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1682년 샤프츠베리경이 찰스 2세에 대한 무력 저항에 실패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자, 로크도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명예혁명 후 귀국하고 영국 사상계에서 활약했다.

근대 시민 정치에서 ‘자유’의 관념을 발전시켜 입법부의 권력 이외의 어떠한 구속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의 자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사회 계약에 의한 국가를 삼권분립에 의해 규정하고, 인민 혁명권에 근거하여 명예혁명을 이론적으로 변호했다. 주된 저서로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1690)·『시민정부이론(市民政府二論)』(1690)이 있다.

삼권분립 편집

三權分立 Separation of Three Powers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의 3권으로 나누어 각각 별개의 기관에 그 권력을 분립·행사시킴으로써 서로 권력을 견제하게 하여 전체적인 권력의 행사를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제도상의 원리를 말한다. 로크의 ‘정부이론(政府二論)’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3권분립 이론의 고전적 저작들이며, 둘 다 절대주의적 전제군주정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 원리가 모범적으로 실현된 것으로는 영국의 헌정(憲政)이 있으나, 이 원리를 더욱 철저하게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는 미국과 프랑스, 바이마르 공화국시대의 독일 등이 있다.

그로티우스 편집

Hugo Grotius (1583

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 15세 때 프랑스 왕 앙리 4세를 알현(謁見)하여 「네덜란드의 기적」으로서 경탄을 받았다.

1601년경부터 국제법에 관심을 가져 1609년 「자유로운 해안」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1607년 이후 정치·외교 문제에 종사했으나 정치 분쟁에 말려들어 종신형을 받았으며, 그 후 파리에서 30년전쟁의 참화(慘禍)가 동기가 되어 「전쟁과 평화의 법」(1625)을 발표, 자연법에서 정의의 법을 국제간의 관계에도 적용하여 국제법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1634년 스웨덴 국왕을 섬겨 파리 주재(駐在) 스웨덴 대사(大使)로 임명되었고, 이후 문학(文學)·신학(神學) 등의 연구에 몰두하다가 1645년 사직하였다. 주요한 저서로는 『해양 자유론(1609)』, 『네덜란드 법학(1631)』, 『포획법론(捕獲法論)(1868)』 등이 있다.

홉스 편집

Thomas Hobbes (1588

1679)

영국의 정치사상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를 통하여 유럽 대륙의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베이컨의 비서가 되었으나, 퓨리턴 혁명에 말려들어 왕당파의 정치이론가라 하여 의회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에 망명하여 찰스 2세의 교사가 되었으며, 「시민론」을 쓰고, 다시 1651년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자연 상태는 만인 대 만인(萬人對萬人)의 투쟁 상태로 변한다고 하고, 사람들은 사회 계약에 의해서 자연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권을 인정하면서도 절대주권을 주장하는 이중적 정치 이론이었다. 이 주장은 여러 가지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절대왕제의 옹호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