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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3국의 발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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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 스웨덴 귀족 구스타프 바사(1496

1560)는 덴마크에 대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켜 1523년 스웨덴의 독립을 완성했다. 이리하여 스웨덴 국왕이 된 구스타프 1세는 근대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17세기 초두에 즉위한 카를 9세(재위 1604

1611)는 스웨덴을 신교 국가로 통일했다. 그의 아들 구스타프 2세(구스타프 아돌프)는 국회와 협조하여 신헌법의 제정, 근대적 행정기구의 확립, 산업개발, 고등교육의 충실 등 의욕적인 개혁으로 국력 강화에 노력했다. 특히 해외 무역의 장려나 조선업(造船業) 등은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30년전쟁이 일어나자 독일로 진격하여 크게 활약했으나 1632년에 전사했다. 30년전쟁 후 1654년 크리스티나 여왕은 종제(從弟) 카를 10세(재위 1654

1660)에 양위(讓位), 바사 왕조(王朝)는 종언(終焉)을 고했는데, 이 왕조 때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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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크리스티안 4세는 귀족 세력을 누르고 크게 왕권을 신장했으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에서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음 왕 프레데리크 3세는 시민층과 제휴하여 귀족에 대항하고 절대왕제(絶對王制)를 확립했다.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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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동광(銅鑛)·철광(鐵鑛)·목재 수출 등으로 영국·네덜란드 상인의 진출과 한자 세력의 후퇴로 인하여 성장한 노르웨이 상인은 왕권과 결탁하여 절대주의 왕권을 조장시켰다.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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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1502년 덴마크의 지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덴마크의 지배권이 크리스티안 2세 때에 다시 회복됨에 따라 엄중한 탄압이 행해지고, 1520년 11월 많은 독립주의자가 참수되었다. 이 유혈 참사의 한 희생자의 아들인 구스타프 바사는 인질로 붙잡혀 있던 덴마크에서 도망쳐 나와서 새로이 국민들을 봉기시켰다.

1523년 6월 6일, 의회는 구스타프 바사를 스웨덴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의 치세 기간은 스웨덴에 루터주의가 처음으로 보급된 시기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그에 수반하여 막대한 교회재산이 몰수되었으므로, 그 이익에 참여하려는 귀족과 상인(商人)계급의 의향에도 합치되어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종교개혁을 국왕의 권력강화에 이용하려 한 구스타프는 1527년 국회의 루터주의를 국교로서 포고하도록 요청하였다. 그후 반대파의 운동도 있었으나, 아무튼 1544년의 국회까지에는 루터주의는 스웨덴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 국회는 그 때까지의 선거왕제(選擧王制)를 개정하여, 바사가(家)에 의한 세습왕제를 인정하였다.

구스타프 1세(구스타프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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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Gustav Ⅰ (1495∼1560, 재위 1523 ∼1560)

스웨덴 왕. 바사(Vasa) 왕조의 시조. 우프살라(Uppsala) 대학에서 배우고,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와의 싸움에 참가, 덴마크에 인질(人質)이 되었으나, 도피하여 달레카를리아(Dalecarlia)에 귀환했다. 이 지방의 농민을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했다. 스웨덴의 섭정을 성명(聲明)하고, 이어서 왕이 되었다. 재정적인 이유에서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루터의 교리를 채용하였다.

구스타프 2세(구스타프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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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Gustav Ⅱ (1594∼1632, 재위 1611 ∼1632)

스웨덴 왕. 구스타프 1세의 손자.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려졌다.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 어릴 때부터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다. 17세에 즉위, 부왕의 유지(遺志)를 계승하고, 발트해(Baltic Sea)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하는 정책에 정진(精進)했다. 발트해에 제해권(制海權)을 수립하려 하는 독일 황제의 기도(企圖)를 좌절케 하고,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에서 30년 전쟁에 참가, 황제편의 장수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물리치고, 레흐 강변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이어서 발렌슈타인과 뤼첸(L

tzen)에서 회전(會戰), 전투는 스웨덴군이 승리했으나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는 스웨덴의 무역을 개발하고, 풍부한 광산을 개척, 경제적으로 스웨덴을 번영케 했다. 그의 전술은 당시 획기적이었고, 그의 군대는 사기엄정(士氣嚴正)한 정예무비(精銳無比)였다. 그 전술은 화기(火器)의 파괴력과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를 계속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요소가 종합되어 획기적인 전술이 전개되었고, 싸움터에서는 항상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이 새로운 전술을 적군도 모방하게 되면서부터 우위를 차지했던 스웨덴군의 전투능력이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