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1848년의 유럽 혁명
1848년의 유럽 혁명〔槪說〕
편집빈 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와 전유럽적인 반항운동의 총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1848년의 유럽 혁명이다. 이 해는 기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달성된 자유·평등의 근대 시민 사상의 정착이고 둘째로 영국 산업혁명의 진전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의 급속한 발전이며, 셋째로 노동자 계급의 성립에 의한 사회주의의 광범한 전개 등이 원인이 되어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해였다. ‘광란의 해’ 1848년은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넣었고, 빈 보수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프랑스의 2월혁명이었다. 더구나 19세기의 프랑스는 모든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발전이었다. 즉 사회적·정치적 평등 이념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으로 구체화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 영국과 프랑스였고, 내셔널리즘을 지주로 하는 자유 통일의 방향을 명확히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 독일, 이탈리아 및 기타 후진국들이었다.
전자는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 계급의 권리 요구가 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봉건적 체제의 타파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저류를 이루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프랑스에서는 7월왕정하에서 정부를 좌우한 것은 대은행가나 대상인을 중심으로 한 대부르주아이며 신흥 중소 부르주아·노동자·농민의 입장은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진전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대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신흥 부르주아의 정치적인 불만과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적인 요구가 반(反)정부 운동이라는 귀결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 공화파와 사회주의의 혼합정권이 실현되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이미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 산업자본가층의 정치적 입장 확립으로 나타났고, 경제적으로도 자유주의 경제에서 제반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838년부터 1848년에 걸쳐 차티스트 운동이 전개되고, 노동자의 강력한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1848년에도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 실패가 영국 의회정치의 침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내용면에서 현저한 진보를 하여 왔다. 독일에서는 3월혁명이 일어나 시민혁명과 병행해서 국민적 통일 운동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서남 독일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3월혁명에서는 봉건적 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민주정치의 기초를 구축하는 면에서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연약한 산업 시민 계급이 노동자 등 혁명세력에 대한 공포에서 봉건세력과 타협하는 결과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적 독일 국가를 건설하는 구상도 보수화한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의 구세력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주의가 통일운동으로서 활발해졌고, 마치니 등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1848년 11월 로마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북이탈리아에서는 사르디니아의 통일운동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폴란드·헝가리·뵈멘·덴마크에서도 독립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2월혁명
편집二月革命
1848년 2월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유럽 제국에도 파급되어 빈 체제의 붕괴를 초래했다. 7월 왕정은 소수의 대지주·은행가·대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정부는 이들 계급과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나 7월왕정하에서 프랑스 산업혁명은 급속도로 진전되어 신흥 산업자본가층이 대두했으나 그들은 정치적 발언권은 갖지 못했다. 따라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의 공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야기시킨 바 있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등귀는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의 도산에 의한 실업 증대 등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7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24일 왕이 퇴위하고, 부르주아 공화파와 사회주의자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마련됨으로써 제2공화제가 성립되었다. 이 혁명은 노동자·학생·소시민 등의 대중과 사회주의자의 지도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루이 블랑의 제안에 따라 임시정부는 노동자의 권리선언과 국립 공장의 설립을 발표하였으며 또한 보통선거 제도도 실시되었다.
삼월전기
편집三月前期
독일 3월혁명에 앞서, 1815년 독일연방(獨逸聯邦) 성립부터 1848년의 혁명 발발까지를 가리킴. 빈 회의 후 메테르니히의 반동정책(反動政策)에 의해 독일은 39개의 영방(領邦)으로 분할되고, 각 영방에서는 절대주의적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또한 이를 반대하여 통일과 자유를 표방하던 부르셴샤프트 등의 운동에 대해서는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처럼 심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농민해방과 관세동맹(關稅同盟) 성립을 계기로 농·공업의 자본주의화는 진전되고, 그 결과 1840년대에는 라인 주(州)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産業) 부르주아지와 정권을 독점하는 동부(東部) 융커 귀족층(貴族層), 초기(初期) 자본주의가 취한 가혹한 노동제도하에서 고생하던 노동자 및 영락수공업자(零落手工業者)와 부르주아지간에 각각 대립이 생겼다. 이에 따라 혁명전야(革命前夜)에는 민주적 대의제도(代議制度)·헌법 제정·독일 통일을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의 청원운동(請願運動)과 슐레지엔 직조공(織造工) 폭동 등과 같은 기아폭동(飢餓暴動)이 격심해져 혁명에의 소지(素地)가 마련되었다.
3월혁명
편집三月革命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시민혁명. 파리의 2월혁명은 독일에 중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켜 1848년 3월 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독일 통일회의 준비를 결정했다. 그러나 3월 13일에는 빈에서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실각했다. 18일에 일어난 베를린 시가전으로 국왕이 양보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이 성립되었다. 내각은 제헌의회의 준비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했다.
빈 혁명
편집-革命
184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빈에 혁명이 발생, 군중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여 궁전까지도 포위했다. 황제는 시민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궁정 반대파의 사직 요구에 굴복, 런던으로 망명했다. 시민의 무력 봉기에 직면하여 시민적 자유의 원칙이 승인되었다. 또한 헝가리와 뵈멘에서도 마자르인이나 슬라브인의 자치정부가 결성되었다.
베를린 혁명
편집-革命
베를린에서는 1848년 3월 5일 시민의 폭동이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 소집, 헌법 발포의 청원이 결의되었다. 14일,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어 긴장이 극도에 달했고, 18일에는 검열 폐지, 통일헌법에 관한 칙령이 나왔다. 그러나 왕궁 앞으로 모인 군중에 대한 군대의 발포는 전시가에 걸친 시가전을 유발, 왕은 군대를 철퇴시키고 왕 자신이 통일의 선두에 설 것을 약속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편집-國民議會
1848년 5월 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성(聖) 바울 교회당에서 열린 최초의 국민의회이다. 의원은 약 600명으로 자유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다. 국민의회에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 전독일인에게 자유·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를 승인했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제(世襲皇帝制)에 바탕을 둔 독일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2원제를 규정했다. 오랜 의론이 거듭된 결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小)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1849년 3월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왕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그에게 거부당하였다.
뵈멘 크로마티아의 반란
편집-叛亂
2월혁명은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체코인의 민족주의를 자극, 1848년 3월 프라하에서 봉건제의 폐지와 시민 자유의 요구를 결의했던 민족 평등의 원칙에 따른 연방제를 요구하는 청원이 제기되었다. 4월에 들어 의회제와 헌법 선언이 있었고, 5월에는 자치권 획득에 성공했으나 6월에 급진파들이 군대와 충돌함으로써 뵈멘 정부와 슬라브 민족회의는 해산되어 버렸다.
헝가리 혁명
편집-革命
2월혁명은 헝가리(Hungary)에서는 코슈트가 지도하는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헝가리의 완전한 자치권을 요구하고 근대 국가에의 개혁법(3월법)을 성립시켰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헝가리인 독립 내각의 성립을 인정, 1848년 3월 말 보차니를 수반으로 하는 책임내각이 성립하였다.
나아가서 4월에는 ‘3월법’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일원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타민족의 반감을 초래하여 황제가 미는 크로아티아(Croatia)인의 반격과 오스트리아 정부의 공격을 유발하여, 1849년 헝가리는 이에 굴복했다.
이탈리아 혁명
편집-革命
이탈리아의 자유 통일 운동은 2월혁명에 의해 더한층 왕성해져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시민을 ‘밀라노의 5일’ 폭동으로 유도했다. 이것을 계기로 전이탈리아가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과 통일의 전쟁에 총궐기했다. 혁명세력은 사르디니아 왕 가를로 알베르토(재위 1831
1949)를 앞세우고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으나 참패하였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또다시 장군 라데츠키의 군정 통치하에 들어갔고, 다른 한편 청년 이탈리아당을 지도하여 건설한 로마 공화국도 프랑스군에 의해 붕괴되어 오스트리아의 보수적 지배가 부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