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아메리카 합중국의 성립
아메리카 합중국의 성립〔槪說〕
편집7년전쟁이 종결되자, 종래의 식민지와 영국 본국과의 유대에도 변화가 생기고, 식민지 경제의 발달은 전후 영국 본토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지배에 대한 반발을 낳았다. 영국 본국은 7년전쟁에 지출한 막대한 전비를 식민지에 부담시키려고 중상주의 정책의 강화를 기도하여, 일련의 과세·규제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본국의 식민지 정책은 실제로는 식민지 경제에 지나친 피해를 미친 것은 아니었으나,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식민지 주민에게는 불만과 반감을 야기시켰다. 1765년의 버지니아 결의, 1768년의 매사추세츠 회장(回狀) 등에 나타나 있듯이 식민지 의회(植民地議會)의 승인을 강조하여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최초 북부의 무역업자에서 시작된 반항 운동은 자영농민·기술자·농원주로 확대되었다. 1773년 보스턴 차(茶) 사건을 계기로 본국은 소위 ‘견딜 수 없는 제법(諸法)’에 의해서 보스턴 시민에 대해 징벌적 태도로 임했다.
더욱이 퀘벡법(Quebec Act)의 제정은 식민지인 전체에 중대한 충격을 주어, 1774년 대륙회의는 본국 정부의 완화를 요청했는데, 급진파의 움직임은 활발해져 렉싱턴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파에는 대상인·농원주 등의 온건파와, 밀무역상인·자영농·기술자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있어, 차차 후자가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하였고, 독립선언으로부터 연합규약에 의한 국가연합으로 이끌어갔다. 혁명이 최종 단계에 들어가자 보수파에 지도권이 옮겨지고, 헌법 제정에 의한 연방 정부의 수립을 보았다.
13식민지
편집-植民地
1607년부터 1732년까지에 성립된 북아메리카 동해안의 영국 식민지. 대별하면 (1) 총독 및 참의원이 식민지 주민에 의해서 선거되는 자치식민지, (2) 영주(領主)에 의해서 임명되는 영주식민지, (3) 국왕에 의해서 임명되는 왕령식민지의 3종이 있다. 13식민지란 버지니아(1607년 성립), 매사추세츠(1629), 뉴햄프셔(1629), 로드아일랜드(1639), 코네티컷(1662), 뉴욕(1664), 펜실베이니아(1681), 뉴저지, 델라웨어, 메릴랜드, 남·북 캐롤라이나, 1732년 성립된 조지아로 형성되어 있다.
삼각무역
편집三角貿易
무역의 한 형태로 특히 18세기 영령(英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상인에 의해 행해진 무역이다. 지리적으로 3점을 연결하는 무역이었기 때문에 삼각무역이라 했다. (1) 아메리카 식민지(곡물·육류·목재 등)→남(南)유럽(포도주·과일 등)→영국(가공품) (2) 아메리카→서인도(사탕·당밀 등)→영국 (3) 서인도(西印度)→아메리카(럼주(酒)에 가공)→아프리카 서해안(흑인 노예)의 3방법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이들을 포함하는 모든 제국(帝國)내의 무역을 항해조례의 규제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이 이 조례에 따라 행해졌다. 그러나 대(對)서인도 제도 무역은 대부분 영국령(領)에서 행해지지 않았고,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령에서 밀수의 형태로 행해졌다. 더욱이 상기(上記) 3방법 중에서 (3)의 방법이 무역 수지상의 적자를 보전(補塡)했고, 유통과정에서의 최고 이윤의 착취를 겨냥했던 북부의 상업 자본가에게는 가장 매력 있는 무역방법이 되었다. 따라서 삼각무역은 이 (3)의 무역과 동일시(同一視)될 때가 많았으며, 노예제와 미국 상업자본의 신장(伸張)에 커다란 의의를 가졌다. 영국 정부가 1733년에 당밀조례(糖蜜條例)를 발표한 것은 이같은 밀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메리카 북부 식민지에서는 이행되지 않았다. 그후 1763년 영국 정부의 정책전환으로 1764년 설탕조례(雪糖條例)가 공포되자, 식민지 삼각무역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뒤에 미국 독립혁명의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당밀조례
편집糖蜜條例 Molasses Act
영국의 식민지규제입법(植民地規制立法).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북부 식민지에서는 서인도 제도에 어류(魚類) 및 재목을 수출하고 럼주(酒)의 원료인 당밀(糖蜜)을 수입하는 것이 중요한 무역이었다. 1717년경부터 서인도 제도의 영국령(領) 식민지의 설탕 생산자는 지력(地力)의 감퇴 및 본국 정부의 자유무역 정책에 의하여 번영하기 시작한 프랑스령(領) 식민지의 설탕 생산자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당밀 생산자는 본국 정부와 의회를 움직여 1733년 12월에 당밀조례(糖蜜條例)를 발포(發布)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율 관세로 미국 식민지 무역업자와 노예주(奴隸主)들은 크게 반발하고, 남부 식민지에서는 얼마간 이행되었으나, 북부에서는 밀수로 이에 대항하였다.
통화조례
편집通貨條例 Colonial Currency Act
영국 식민지에 있어서의 중상정책을 추진시키기 위한 입법 중의 하나.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통화가치의 하락(下落)을 방지하기 위해 1764년 9월 1일 이후 각 식민지의 지폐발행을 금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7년전쟁 중에 발행했던 각 식민지의 신용권(信用券)의 증발을 정리 제한하는 한편, 본국인의 식민지와의 상거래에 유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전부터 수입 초과로 경화(硬貨)의 부족에 고통받고 있던 식민지인, 특히 부채자(負債者)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식민지인의 반영(反英) 중상주의 전선의 결집(結集)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다.
설탕조례
편집雪糖條例 Sugar Act
1764년에 영국 본토가 7년전쟁 후 13식민지에 대해서 발표한 관세징수와 밀무역(密貿易) 취체에 관한 법. 본국은 식민지전쟁 후 재정난이 생겼기 때문에, 전비와 신영토 방위유지비의 일부를 식민지에 부담시키려고, 1733년의 당밀조례(糖蜜條例)를 수정하여 세율을 반감하고 징수의 강화를 기도했으나, 북부 밀무역업자의 반항을 초래했다.
인지조례
편집印紙條例 Stamp Act
7년전쟁 후의 영국의 대(對) 식민지 입법. 인디언의 반란 및 프랑스의 보복에 대비하여 북아메리카에 1만의 군대를 주둔시킬 비용의 일부를 식민지로부터 충당하려고 입법했다. 이는 법률상·상업상의 증서나 증권류·주류판매 허가증·책자·신문·광고·달력·트럼프·골패 등에 반 페니∼10파운드의 인지를 붙이려는 규정이다. 이는 관세통제(關稅統制)와는 달리 내국과세(內國課稅)이며, 또 국고 세입을 위한 대책이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1765년 2∼3월에 양원(兩院)을 통과하여 10월에 실시되었으나, 반 년 후에 철폐되었다. 또한 이는 식민지 전체의 대영(對英) 반발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입법이다.
차조례
편집茶條例 Tea Act
영국의 식민지무역규제법(植民地貿易規制法). 1767년의 타운젠트 조례(條例)는 영국 해군력을 배경으로 식민지 무역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식민지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1770년에 철폐되었다. 그러나 차세(茶稅)만은 남겨져 본국 의회가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에 의한 차무역의 독점을 규정하여 영국 의회에서 확인한 것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무역업자(貿易業者)와 상인(商人)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1773년 세모(歲暮)에는 보스턴 차사건(茶事件)을 일으켜 혁명적 풍조(風潮)를 격화시켰다.
보스턴 차 사건
편집-事件 Boston Tea Party
1773년, 차 조례에 반대하는 보스턴의 급진분자가 영국의 차 운반선을 습격한 사건. 급진론자 새뮤얼 애덤, 존 핸코크 등이 지도하는 급진파가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동인도회사의 차 상자 342개를 바다 속에 집어던졌다. 이 사건은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본국은 이듬해 보스턴항 폐쇄법, 매사추세츠의 행정·사법에 관한 제한법 등, 소위 일련의 ‘견딜 수 없는 제법’을 강요했다.
페인
편집Thomas Paine (1737
1809)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 활약한 영국의 계몽사상가. 프랭클린의 초청을 받고 1774년 미국에 이주하여, 1776년 1월에 『상식(Common Sense)』이라는 팜플렛을 발행, 영국의 정체(正體)를 파헤치고 독립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유리하다고 호소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독립에의 방향으로 옮기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륙회의
편집大陸會議 Continental Congress
1774년, 1775년 두 번에 걸쳐서 개최되고, 본국의 징벌적 제법(諸法)에 항의하여 대책을 협의한 식민지회의. 13식민지의 대표로 구성되는 외교회의(外交會議)의 성격을 지녔고, 각 대표는 자기의 식민지 정부로부터의 훈령(訓令)을 가지고 출석하였다.
제1회는 1774년 9∼10월에 열려 식민지의 자유와 자치(自治)의 회복을 목적으로 했으며, 권리의 선언·반포 및 대륙연합(大陸聯合)의 결성이 주요한 사업이었다. 제2회는 1775년 5월에 열렸는데, 당초에는 식민지의 자치 회복을 목적으로 우선 무력행동선언(武力行動宣言)을 발표, 6월에 워싱턴을 식민지군(軍)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며, 7월에 「평화의 청원」을 국왕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의 태도가 경화(硬貨)되자, 1775년말부터 이듬해까지 독립의 주장이 급진파(急進派) 사이에 강력하게 일어났고, 이어서 급진파의 지도에 의해서 1776년 7월 2일 독립선언(獨立宣言)을 가결, 이후 독립달성에의 통일 지도체로서 각 식민지를 지도하였다.
제2회 대륙회의는 1781년까지 존속하였고, 연합규약(聯合規約) 발효 후에는 연합의회(聯合議會)로 되었다.
독립혁명
편집獨立革命 American Revolution
1775년 보스턴 교외의 콩고드에서 급진파와 영국군이 충돌하여 전쟁의 불씨가 터졌다. ‘견딜 수 없는 제법’에 항의하여, 대륙회의는 전체 식민지인의 결속을 호소함과 동시에, 급진파는 본국 상품의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1775년 4월, 렉싱턴에서 식민지군과 본국군이 교전을 개시, 이것이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페인의 『상식』에 의한 세론을 배경으로 1776년 독립선언이 공포되어, 독립을 위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공언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무기·탄약·식량의 부족 등으로 고전했는데, 워싱턴의 훌륭한 지도로 1777년 사라토가에서 승리, 1778년 프랑스와의 동맹, 1780년에는 유럽 제국의 중립동맹 등으로 전국은 호전되었고, 1781년 요크타운의 싸움에서 대세를 결정했다.
독립선언
편집獨立宣言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년 미국 13개주가 독립하는 이유와 이념을 선언한 것. 제2회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대표 리처드 헨리 리(R. H. Lee)가 독립결의안을 제출하여, 5명의 기초위원에 위임되었다. 선언안(案)은 주로 제퍼슨이 기초(起草)하고, 플랭클린 등의 교열(校閱)을 거쳐서 1776년 7월 1일에 대륙회의(大陸會議)에서 가결, 4일에 ‘13주(州) 식민지의 만장일치의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그 내용은 (1) 로크의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에 입각한 총론적(總論的) 부분 (2) 조지 3세의 탄핵(식민지에 대한 27가지 조목의 학정을 열거) (3) 13식민지가 자유 독립의 국가임을 공언하고, 장래에 어떤 국가형태를 취할 것인가를 시사했다. 또한 독립선언은 전쟁수행상 외국의 지원(支援)을 얻기 위한 대외적 동기에서 발포되었지만, 동시에 독립에 반대 또는 소극적(消極的)인 보수파(保守派)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급진파(急進派)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무장중립동맹
편집武裝中立同盟 Armed Neutrality
1780년 영국의 중립국 선박 포획·임검에 대항하여 체결된 유럽 제국의 동맹. 독립전쟁 중,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
1796)의 제창으로 유럽 제국이 동맹하여 자유로운 항행과 전시 금제품 이외의 무역을 주장하면서 미국을 도왔기 때문에, 1781년에는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대패했다.
제퍼슨
편집Thomas Jefferson (1743
1826)
‘독립선언’의 기초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재직 1801
1809). 버지니아 서부의 소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를 개업했다. 1769년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독립혁명에 참가하였고, 1775년 대륙회의의 버지니아 대표, 1779년 주지사로서 활약하였다. 독립선언의 기초자로서 불멸의 이름을 남겼으며 민주화(民主化)의 공헌에도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합중국 헌법에 권리장전(權利章典)을 추가할 것을 주장했다.
1785년 주(駐) 프랑스 공사, 1790년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상공업자·금융업자를 대표한 연방당의 수령인 재무장관 해밀턴과 충돌하여 1793년 사임하였다. 이후 남부의 플랜터, 서부의 소농민, 도시의 장인(匠人) 세력을 조직하여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대통령이 되었다. 상공업보다 농업에 중점을 두었고, 루이지애나를 매수하였으며, 영국·프랑스 항쟁 사이에서 ‘평화적 강제’책에 의하여 중립유지에 힘썼으나 실패하였다. 퇴임 후 후임자 매디슨, 먼로의 조언자가 되고, 버지니아 대학 창립에 노력하였다.
프랭클린
편집Benjamin Franklin (1706
1790)
미국의 정치가·과학자. 독립혁명기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서 제2회 대륙회의에서 활약하였으며, ‘독립선언’ 기초위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1729년말 인쇄업을 경영, 1731년 조합 도서관을 계획하여 도서관 발달의 선구가 되었고, 다음 해에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출판, 그의 상식적이고도 재치있는 경구(驚句)로 일약 유명해졌다.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여 1749년에는 피뢰침을 만들어 영국 왕립협회회원(王立協會會員)이 되었다. 7년전쟁의 위기가 절박해지자,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기초하였으며, 전쟁이 벌어지자 의용병의 대장이 되었다. 또한 전후 본국과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펜실베이니아 대표로서 재차 도영(渡英)하여 인지조례의 철폐에 성공하는 등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보였다. 처음에 그는 본국과의 화해를 확신하였으나, 차차 급진화(急進化)하여 귀국 후에는 제2회 대륙회의 대표, 1776년에는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제퍼슨을 도왔다.
전쟁중에는 주(駐)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부임하여 미·프 공수 동맹 체결에 성공하였다. 1785년 3차로 귀국하여 펜실베이니아 행정장관, 1787년에는 연방헌법협의회의 동주(同州) 대표가 되어 만장일치의 헌법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주내(自州內)의 급진헌법을 옹호하여 급진주의자로서의 면목 또한 잃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자유주의자이며, 공리주의자이고, 전형적인 미국사람이었다.
워싱턴
편집George Washington (1732
1799)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재직 1789
1797). 버지니아의 부유한 농원주 출신. 제1회·제2회 대륙회의에 참가하였고, 독립혁명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최초에는 기습작전으로 본국군을 격파했으나, 그 후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궁핍과 기아에 잘 견디어, 드디어 영국군을 타파했다. 1789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 재정을 해밀턴에, 외교를 제퍼슨에 담당시켜 국내 정비와 중립 외교에 의해 합중국의 기초와 지위를 굳혔다.
해밀턴
편집Alexander Hamilton (1757∼1804)
미국의 정치가. 영령(英領) 서인도의 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사실상의 고아가 되어 전원생활을 하다가 재능을 인정받아 백모(伯母)의 주선으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후 독립운동에 참가, 군에 복무하였고 워싱턴에게 인정받아 그의 참모가 되어 정치역량을 발휘하였다.
그후 뉴욕 정계에 기반을 얻어 변호사로서 성공하는 한편,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서 합중국 헌법을 기초하려는 운동을 추진했고, 그 기초 완료 후에는 비준을 얻기 위해 J 매디슨과 함께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를 저술했다.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 재무장관이 되어 공채대책(公債對策)·합중국은행 창설·산업보호정책 등으로 경제 건설에 공헌하는 한편, 상공업자·공채보유자(公債保有者)를 정부의 지주(支柱)로 삼기 위해 이들과 연방당을 조직했다.
1795년 사임 후에는 서부 농민·남부의 플랜터·도시 장인(匠人)을 배경으로 하는 애덤스 대통령과 싸워 자당(自黨)을 양분시켜 1800년 민주 공화당에 정권을 내놓게 되는 결과를 빚었다. 1804년 공사(公私)간의 숙적(宿敵)이었던 버와 결투하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파리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Paris
1783년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조약. 1782년 영국과 미국 사이에 조인되어, 이듬해 비준되었다. 여기에 의해 미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고, 그 국경은 북으로는 5대호와 세인트로렌스강, 남쪽은 조지아의 남쪽 경계 및 북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강으로 정해졌다.
또한 미국인에게는 뉴펀들랜드에 있어서의 어업권 및 미시시피강의 항해권이 인정되었다.
합중국 헌법의 제정
편집合衆國憲法-制定1787년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각 지방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연합 규약 개정의 명목으로 헌법제정회의를 개최했다. 제임스 메디슨에 의한 버지니아안(案)은 각 주정부에 우선한 중앙정부와 인구비례에 의한 2원제를 골자로 한 데 대해서, 각 주(州)의 주권(主權)을 전제로 하는 뉴저지안(案)은 각 주의 대표 동수로 형성되는 1원제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결국 두 안의 타협에 의해서 상원은 동수의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의한 의원 수로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적어도 9개 주가 비준하면 합중국 헌법은 발효하게 되어 1787년부터 1790년까지에 전체 주가 비준하였으며 ‘타협의 결속’이라고 불리는 헌법에 의한 연방국가가 성립되었다. 간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최고재판소의 규정 등 삼권분립의 원칙이 일관되어 있다. 1791년 기본적 인권 조항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