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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종교〔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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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종교는 주관적 경험의 종교, 신중심적 실존의 종교, 비종교적 종교, 또는 봉사의 종교, 그리고 내일과 희망의 종교로 종합될 수 있다.

주관적 경험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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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종교는 주관적 '경험'의 종교이다. 현대의 종교 사상은 17세기, 18세기의 유신론적 합리주의 종교를 깨뜨리고 '경험' 위에 종교를 세운 인간의 주관적 종교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합리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오던 계몽주의의 유신론적 기독교를 깨뜨린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과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이해였다. 칸트는 하느님을 합리적인 영역으로부터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만들어 종교를 이론이성의 세계로부터 도덕이성의 종교로 제한했다. 그러나 결국 종교는 인간의 이성한계(물론 도덕이성) 안에, 다시 말해서 인간학과 윤리의 한계 안에 제한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종교 문제는 사변의 문제가 아니고 윤리적 의식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의 독자성은 없어지고 종교가 도덕으로 환원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지성인들과 낭만주의자들에게 종교는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의 멸시자들에 대해 칸트의 윤리로서의 종교를 거부하고 종교의 독자적인 '종교적 아프리오리'를 인간의 근본적인 영역으로 보고 '인간의 자의식으로서의 감정, 곧 경건'을 종교의 본질로 보며,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지는 '경건한 감정'의 종교라 주장하고 나온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였다. 신앙은 경건한 감정이다. 종교의 문제는 합리주의적이며 사변적인 지식이나 도덕적 의식이 아니라 '경건'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의식, 다시 말해 인간의 내부에서 경험되는 본질적인 종교경험이다. 이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혁신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100여 년 동안 19세기의 종교를 지배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하려 했던 그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경건한 감정이나 윤리적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인간과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 은총의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철저한 신 중심적이었는 데 대해서 19세기의 종교는 철저한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종교는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다"라고 비꼬았을 때 이것은 19세기의 종교에 대해서는 살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다. 인간학의 범주 안에서 강조된 종교가 관념론의 철학과 진화론의 사상과 결부되어 19세기는 낙관주의적 진화론적 종교를 낳았다.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문화와 종교적 노력에 의해서 이 땅위에 이룩되어 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참된 인간실존의 재발견, 하느님 중심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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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19세기 종교의 낙관주의적인 꿈을 깨뜨렸다. 역사와 인간의 현실에서 '악'의 권세를 인정했다. 인간의 실존을 불안, 절망, 죽음의 그늘 속에 던져진 불확실한 존재로 보고 참된 인간의 의미를 묻게 된 것이다. 역사의 '순간' 속에 들어온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옛날의 비참한 인간실존의 운명은 종말을 맞고 새로운 인간실존으로 탄생된다. 역사는 이 결단의 장소이고 신앙은 이 결단이다. 종교는 역사 속에 일어난 이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을 듣고 "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삶의 참된 의미가 있다. K. 바르트, P. 틸리히, R. 불트만, F. 고가르텐, 이들은 20세기 절망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의 메시지를 전해줌으로써 참된 인간실존을 찾아주고 새로운 존재론의 희망을 주려 했던 20세기 종교 혁신의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봉사 형태로서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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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세계의 문화적 기후는 한번 더 변혁을 경험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급속도로 발전된 기술과학의 성취는 고도로 성취된 산업사회, 도시사회를 만들었다. 16세기에서 시작한 소위 '세속화' 과정은 이제 성숙해졌다. '성숙한 시대', '어른이 된 시대'가 그것이다.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기능적이며 실증적이고 실용적이다. 도시적 사고방식의 이름들이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종교'의 필요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무신론의 시대', '무종교의 시대'는 그 특징이다. 과학기술과 문화의 혜택 속에서 초월적인 존재나 '하느님'의 전제가 하등 일상생활 속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피히테로부터 포이어바흐 그리고 마르크스를 거쳐서 드디어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오늘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 없는 무신론을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무신론'을 전제로 할 때 이런 시대에 대답하고 나온 것이 '비종교적 기독교'이다. 이것은 1944년 나치스 히틀러에 항거하다가 감옥에서 처형을 당한 한 젊은 신학자 D. 본회퍼가 옥중에서 예언했던 환상이었다. 성숙한 현대인들에 대해서 종교는 초월이나 무한이나 하늘에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삶 한가운데서 타자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종의 모습, 이 '봉사'의 종교만이 무신의 시대에 필요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와 희망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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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무신론 형태의 또 하나의 세계적인 도전은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이다. 단순히 현실과 역사의 고통을 떠나 개인의 영적 세계 속에서 경건과 경험을 즐기는 개인주의적·도피주의적 종교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주의의 공격을 면할 수 없다. 종교는 강력한 역사에의 참여와 역사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과 약속을 주어야 한다. 여기서 역사참여와 희망의 종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역사의 모든 악에 대한 항거이며, 부활은 그 승리의 보증이다. 이 역사는 지금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하느님은 이 역사의 종말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써 영원한 심판을 하실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유물변증법적인 운동에 의해, 그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투쟁과 전쟁에 의해서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마르크스 주의의 유토피아 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착각이다. 오늘의 종교는 이 유토피아 주의의 착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역사의 미래를 지시함으로써 인류에게 내일의 '희망'을 주려고 한다.

따라서 종교는 이 세계와 역사를 무신론자들의 권세에 맡겨버리고 이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는 날 동안 가난한 자들이 해방되고 하느님의 의(義)의 지배가 넓혀지기 위해서, 가능한 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희망 속에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한다. 이것은 최근에 J. 몰트만을 중심으로 한 희망의 신학, 미래의 신학, 정치신학의 방향이다.

<朴 鳳 琅>

신토마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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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Thomas 主義

19세기 중엽부터 가톨릭 신학 및 철학 내부에 신스콜라 철학이라고 불리는 스콜라 철학의 부흥이 일어나 하나의 학문의 흐름을 형성하였는데 신토마스주의는 그 중핵적인 사조이다.

명칭 그대로 중세 최고의 스콜라 철학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시 연구하여 그의 사상을 현대철학의 여러 문제에 적응시켜 새로운 타당성(妥當性)을 갖게 하려는 철학 운동이다.

토마스의 사상은 신학·철학·윤리학·정치학·법학 등 각분야를 전체적으로 종합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한 매우 스케일이 큰 것이며, 그 논리의 정합성(整合性)과 통찰의 깊이는 결코 계몽주의 이후의 근대철학에 의해서 쉽게 무시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지적인 풍요성과 힘을 갖고 있다. 신토마스 주의는 이를 근대의 지적·현실적 문제들에 적용하여 근대철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데 반하여 중세적·스콜라적 사유(思惟)의 유산이 얼마나 우월한가를 보여주려 하였다.

이것은 중세적 사유의 부흥이므로 역사연구에 의한 사상의 본질 구명이 앞서야 한다. 이 방면에서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은 프랑스에서는 에치엔 질송(1884-1978)이며 독일에서는 마르틴 그라프만(1875-1949)이었다. 철학이나 법학이나 정치학 방면에 있어서 신토마스 주의의 지도자는 프랑스의 자크 마리탱, 에스파냐의 도노소 코르테스이다.

특히 제1차 대전을 전후해서 가톨릭 교회가 활발해지고 또 근대문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퍼짐에 따라서 문화의 여러 문제에 대한 신토마스 주의의 견해는 새로운 사회적 타당성을 갖게 되고, 또한 마리탱이 철학·과학만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생활의 전반적인 문제를 토마스의 원리로부터 해결하려고 한 시도는 세계적인 반응을 얻었다.

신토마스 주의는 토마스의 부흥이기는 하지만 토마스의 사상에 철학적으로 새로운 것을 부가하였거나 발전시킨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또 제1차대전 후의 '근대의 종말'이라는 의식이 강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사회체제의 변화는 더욱더 근대화를 추진해 가는 시대에 있어서 신토마스 주의가 중세사회를 기반으로 한 토마스 사상의 부흥인 한 그 타당성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사회철학과는 법철학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마리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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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 신토마스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고 처음에는 실증주의에 이끌렸으나 후에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에서 벗어나고 블로아(1846-1917)에 의해 가톨릭을 믿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배우고 여기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였다. 파리 가톨릭 학원 교수(1914),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1945-48)를 거쳐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고등학술연구소원(1948)이 되었다.

그는 토마스의 입장에 서서 스승 베르그송을 포함하여 근대철학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근대사상의 결함은 인간이 신의 지위를 참칭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주저 <근대사상의 선구자> <스콜라 철학 서론> 등.

근대사상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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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思想-先驅者 (1925)

근대사상의 선구자인 루터, 데카르트, 루소 등의 세 사람이 근대사상에 미친 영향과 거기에 내포된 문제성을 그 정신성의 근저로부터 분석 비판한 책.

이 책에는 음·양으로 마리탱의 신토마스 주의(네오토미즘)의 입장이 전제되어 있고, 토마스에 의해 아름답게 성취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이 세 사람의 개혁자, 곧 종교개혁자 루터, 철학의 개혁자인 데카르트, 도덕의 개혁자인 루소에 의해 분해되고 왜곡되었음을 밝히며 근대사상의 원류를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루터에 있어서 '자아의 출현'을 발견하는 저자는 루터 종교의 핵심에는 감각주의가 있다고 보고, 은총을 감각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펠라기우스 주의라 단정짓고, 그에게 있어서 신 중심에서 자아 중심으로의 전향이 일어났다고 비판한다. 또한 루터에 있어서 '인격'의 관념이 대두된 것은 '인격'과 '개인'의 혼동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인간의 사유를 중세 스콜라 학자가 말하는 천사적인 사유처럼 오해하여, 천사적 인식의 3대 특징인 '직관 양식'과 '선천적 기원'과 '사물에 대한 독립성'을 인간의 인식에 귀착시킨 결과 인간에게 알맞은 인식의 성격을 상실하여 혼미에 빠뜨렸다고 하고, 그의 문제성은 자유 주체에서의 '천사의 수육(受肉)'에 있다고 비판한다.

루소는 루터가 복음의 레벨에서 수행한 개혁을 자연적 도덕의 범위에서 수행했다면서 '자연의 성자'라고 본다. 그의 사상은 예술적인 감수성이나 지성과 현실에 대한 이성적 통제력의 결여라는 분열병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변증법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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辨證法神學

제1차대전 후의 독일이나 스위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운동을 총칭하는 개념.

구미뿐만 아니라 세계 신학의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깊고 광범한 영향을 미친 신학이다. 처음에는 '위기신학(危機神學)'이라 불렸는데, 대표적 신학자 바르트는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자칭한다. 바르트의 <로마서>에 의해 당당한 출발을 하고 스위스에서는 브루너와 투르나이젠, 독일에서는 고가르텐, 틸리히(1886-1965), 불트만 등이 이 신학운동에 참가하였다. 종래의 신학이 역사학이나 심리학에 빠져 있었음에 대하여 신학적 사유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키에르케고르적 변증법을 취함으로써 회복하였다. 그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태도는 종교개혁자적이며, 신앙과 깊이 결합되어 신의 계시를 주체적으로 직접 대한다는 태도이며 신학이다. 따라서 근대적 리버럴리즘을 넘어서 결국 종교개혁 시대의 오르토독시(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여 네오오르토독시(신정통주의)라고도 불린다.

변증법신학은 철학에서의 실존주의와 매우 가까운 점이 있으며 그 관계는 다양하지만 깊다. 바르트는 실존주의와 자기의 방향을 구별하지만 부루너는 접근하고, 불트만은 하이데거와 결합되어 있다. 변증법신학은 반나치 투쟁을 계기로 내적인 분열을 일으킨다. 바르트는 완고한 반나치의 입장을 자기의 신학적 입장과 동일시하고, 고가르텐과 헤어졌다. 그리고 브루너와 '신의 상(像, 이마고 데이)'을 둘러싼 자연신학 논쟁 때문에 분열하고, 틸리히는 미국에 건너가 독자적인 존재론적 신학(存在論的神學)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신학을 동일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학은 19세기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서나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여러 신조나 종교개혁가의 사상에 포함된 신이나 그리스도나 구제에 대한 여러 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신조나 교리의 현대에 대한 타당성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 경향을 대표한 사람은 라인홀드 니버이다.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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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arth (1886-1968)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변증법신학 운동의 최대 지도자.

자아펜빌의 목사(1911)를 거쳐 괴팅겐(1921), 뮌스터(1925), 본(1930) 등 각 대학의 교수로 근무했으나 나치스에 저항했기 때문에 면직되고(1935), 그 후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 대학 교수가 되었다.

자아펜빌에서 목사로 있을 무렵인 제1차대전 직후, <로마서>(1919-1922)를 출판하여 하르나크나 트뢸치로 대표되는 독일 근대신학과는 매우 성격이 다른 참신하고 강렬한 신학의 방향을 내세워 신학사에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 독일에서의 교수 시절에 그는 나치스의 강대한 국가권력에 대한 신학 투쟁의 선두에 서서 바르멘 선언의 작성자가 되었다.

고가르텐이나 브루너 등과 대립한 후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인 길을 갔으며, 바젤에서 방대한 <교회교의학(敎會敎義學)> 저술에 착수하였다. 1959년까지 12권이 출판되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무엇보다도 깊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천재적 집중력과 구성력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를 장구한 교회의 신학적 전통 계승과 대화에 의해서 독자적인 성서해석(神學的釋義)에 의해서 해명, 서술한 것이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필적하는 현대 프로테스탄트의 최고 신학자이다.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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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書 (초판 1919, 개정 재판 1922)

카를 바르트의 초기 명저.

바르트는 스위스의 자아펜빌에서 목사로 근무하고 있을 무렵에 이 책을 써서 제1차대전의 위기에 휩싸여 있던 유럽 사회에서 출판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제1판의 출판에 의해 스위스로부터는 브루너, 독일로부터는 고가르텐 등의 공명자들을 얻었고, 다시 제2판에서 근본적인 개정을 하여 제1차대전 후의 유럽 사상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에 의해 변증법신학 운동이 야기되었다.

바르트는 처음에는 종교사회주의자였으나 이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실천이 아니라 성서의 해명에 노력을 집중시켰다. 성서의 주석을 통해서 복음 자체의 힘을 끌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제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質的辨證法)을 결정적으로 채택, 이에 의해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신앙사상을 해명하였다.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별', 신앙은 '공동(空洞)'이며 '수학적 점(點)'이라는 특징 있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책에 의해 첫째 성서해석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근대신학의 역사적 해석에 대해 신학적 해석이 확립되고, 둘째 성서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신앙적 실존(信仰的實存)이 확립됨으로써 신학사상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이 책은 근대신학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바르트의 그 후의 신학적 노력에 있어서 기초적인 신앙 사상을 확립한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회교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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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會敎義學 (1932-1953)

카를 바르트의 주저.

미완이지만 전체의 구상은 제1권 하느님의 말씀론, 제2권 신론(神論), 제3권 창조론, 제4권 화해론(和解論), 제5권 구속론(救贖論)으로 되어 있고, 각권이 몇 개의 분책으로 되어 1962년까지 제4권 제3분책이 출판됨으로써 합계 12책되었다. 얇은 것이 480페이지, 두꺼운 것은 1000페이지라는 큰 책이란 점에서 한 개인의 저술로서는 이 방면의 예외적인 대작이다.

<교회교의학> 저술에 앞서 <그리스도 교의학 초안>을 냈으나(1927), 이 책에는 아직도 실존철학적 요소가 섞여 있다고 하여 폐간하고 실존철학적 혼합이 없는 순수한 신학적 기획으로서 1932년 <교회교의학>으로 개제하여 이 책을 출판하였다. 이 두 교의학의 중간에 그의 독특한 안셀무스 연구가 나왔으며, 그는 안셀무스를 모범으로 하여 순수한 신학적 사유 방법을 수립하였다. 그의 신학 태도의 특징은 '그리스도론적 집중'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체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조직하고 해명(解明)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 교리의 전체를 취급한다. 근대에 있어서 경시되기 쉬웠던 교의학을 압도적인 방식으로 재건하고 교리사(敎理史)와의 면밀한 대비에 의해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에 타당하는 참신한 해석을 곳곳에서 전개하고 있다. 계통으로서는 개혁파에 속하지만 예정설(豫定說)이라는 점에서는 정통적 칼뱅 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각권 끝에는 윤리학이 있는데 윤리학을 교의학에 포함시킨 점도 독특한 것이다.

브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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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Brunner (1889-1966)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변증법신학의 지도자.

취리히의 북동쪽 빈타츠르에서 태어났다. 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오프스탈덴의 목사(1916-24), 그 사이에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 유학(1919-20), 귀국 후 취리히 대학의 사강사(1922), 교수(1924), 미국의 프리스턴 신학교 객원교수(1938), 대전 후 일본 국제그리스도교 대학 교수(1953-55)가 되었다. 특히 무교회(無敎會)에 관심을 갖고, 무교회와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바르트와 함께 초기의 변증법신학 운동을 추진하고 근대신학의 초극을 꾀하여 슐라이어마허를 날카롭게 비판한 <신비주의와 언어>를 출판했다(1924). 그러나 1934년 <자연과 은총>이 출판되면서 '신(神)의 상(이마고·데이)'을 둘러싸고 이른바 '결합점'이 인간에게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자연신학 논쟁이 바르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져, 두 사람은 그 후부터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부버와 더불어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는 개념의 발견자이며, 이 개념을 갖고 그리스도교 신학을 수립하려 하였다. 그의 <교의학> 3권은 이러한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위기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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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機-神學 (1929)

브루너가 1928년에 미국의 신학교와 대학에서 한 강연을 기초로 쓴 책.

점차 대두되고 있던 변증법신학 추종자의 한 사람이 그의 강연을 영어로 쓴 책으로서, 영어권 세계에 변증법신학을 소개하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이 책 때문에 변증법신학이 일명 '위기신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책에는 분열 이전의 변증법신학의 공통된 입장이 대변되고 있으며,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인간중심주의·이성중심주의가 냉혹하게 비판되고 '계시'의 입장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브루너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 있으며, 저자 스스로 "이 책의 강연의 관심은 사회윤리 문제에 있다"고 언명한다. 사회의 여러 문제의 근저에는 그 시대의 인간이해에 있다는 것에 착안하고 이 인간이해는 결국 신앙문제에 귀착되는 것임을 간파하여 이를 계시의 입장에 선 새로운 신학에 의해 재건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현대의 가장 필요한 과제는 서양세계가 그 거대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진실한 생의 이해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브루너는 근대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를 비판하고 또한 이에 의해 근대 그리스도교 자체가 왜곡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참된 성서적 신앙에 입각한 서양문화 재건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낙관적인 진보적 사상을 매섭게 비판하여, 니부어 등의 미국 근대문화 비판의 선구가 되었다.

고가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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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Gogarten (1887-1967)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튀링겐의 시테르첸도르프(1917) 및 도른도르프의 목사(1925)를 거쳐 브로츨라프 대학 교수(1935), 괴팅겐 대학 교수(1935년 이후)가 되었다.

트뢸치의 역사주의에 반항하여 바르트에 가까운 입장에서 문화나 역사 문제에 대한 신선한 해석을 꾀하여 근대신학 초극의 길을 열었다. 바르트와 함께 독일에 있어서의 변증법 신학운동의 추진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나 기타 변증법 신학자들이 개혁자 출신인 데 대하여 그는 루터파이다.

나치스에 대한 태도에서 바르트와 대립하여 양자는 완전히 분열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나치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독일 관념론(특히 피히테)이나 트뢸치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이제바흐(1880-1945)나 하이데거의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인간학을 수립한 데에 있다. 참된 역사는 자기가 참으로 현실적 타자인 신의 부름에 신앙적 복종으로써 응답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이리하여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상이 된다. 또 루터의 신앙의인(信仰義認) 사상을 역사적 세계까지 발전시켜, 그러한 신앙은 인간과 세계의 우상화를 방지하고 오히려 세속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한다고 보았다.

주저는 <나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다>(1926).

나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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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고가르텐의 초기 변증법신학의 입장을 밝힌 저작.

역사주의 신학에 대해 변증법신학의 입장으로부터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한 책이다. 부제로선 <신앙과 역사에 관한 한 연구>라는 한정이 붙어 있으나 근대신학의 오류의 근본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시간적 사건'을 '일반적 진리'로 전환시킨 데 있다고 보고, 그 결과 역사적 계시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역사의 신학 문제가 철학 문제로 되고 역사철학이 신학을 흡수해 버렸다는 문제성을 특히 트뢸치에서 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진실한 역사는 역사를 방관하는 자기가 역사 속에 흡수된다는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와 자기의 만남에서 생긴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신학에서는 결합되지 않았던 역사와 신앙의 내적 결합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새로운 관점이 가능하다고 하고, 제1부 '창조'에서 자기를 피조물이라고 보는 것이 근대적 자아중심주의적 주관주의를 극복하게 하며 인간을 타자와 역사 속에서 만나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제2부 '구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만남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이해하여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구제의 말씀에 책임지고 응답하는 것임을 말하고, 제3부 '성화(聖火)'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만남에서 현실 세계에 있는 타자의 독자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창조 질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현실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이성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되고 삼위일체적 신에의 신앙적 입장에 서야 한다. 이 점에 실존주의적 역사이해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하르나크(아돌프 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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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 von Harnack (1851-1930)교회사가(敎會史家)·신학자.

라이프치히, 기이젠, 마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대학 교수(1888). 5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연구, 교수, 저술을 통해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일 최대의 석학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영향은 신학계뿐만 아니라 독일 학계에 널리 영향을 미쳤고, 근대 독일 학문의 대표자였다. 신학적으로는 리츨(1822-1889)의 감화를 받아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고대·중세의 교리사(敎理史)에 대한 연구에 있다. 1874년의 그노시스주의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대표작 <교리사>(1권 1885, 2권 1887, 3권 1889)는 금자탑이다. 또 그는 원자료(原資料)에 입각한 과학적 역사연구의 수립을 위해 고대교회사의 사료 검토와 편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교리사>에서 펼친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교리에는 복음이 헬레니즘 세계에 들어가서 그 배경인 철학 사상과 결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하며, 또한 가톨릭 교회내에서의 교리 확립과 발전을 추적하여 종교개혁에 있어서 교리의 종말에 도달하고 복음의 본원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역사연구에 입각한 신학 사상은 1900년에 출판된 작은 책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나타나 있다.

그는 정치나 국가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1910년 카이젤 빌헬름 게젤샤프트의 총재가 되어 독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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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質(1900)

이 책은 독일의 근대 역사주의 신학의 태두인 하르나크의 방대한 학식의 결정이며,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빛나는 결실 중 하나이다.

원래는 1899년부터 1900년까지 베를린 대학 각 학부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으로, 출판 후 찬반양론을 일으켜 판을 거듭했고, 변증법 신학이 대두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계에 가장 광범한 영향을 준 책이다. 하르나크가 생존하고 있을 때 이미 영국, 프랑스, 일본,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에스파냐,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 폴란드 등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내용은 16강(講)으로 되어 있고 2부로 나누어졌는데, 제1부는 복음, 제2부는 역사상에서의 복음을 다루고 있으며, 전자에서는 예수와 원시그리스도교의 문제, 후자에서는 그리스도교사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제1부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교리'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며, 예수의 설교의 새로움은 순수하고 힘찬 '생명의 말씀'에 있다고 한다. 예수의 설교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① 하느님의 나라와 도래, ② 아버지인 하느님과 인간영혼의 무한한 가치, ③ 보다 뛰어난 의(義)와 사랑의 명령. 다음에 복음과 개개의 사상(이 세상, 가난, 법률, 노동, 하느님의 아들, 교리 등)과의 관련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교회사상의 복음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추적하고 있는데 사도 시대 가톨릭으로의 발전으로부터 그리스 가톨릭, 로마 가톨릭,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의 복음 이해의 변천을 서술하고 있다.

하르나크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사 전체를 관찰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추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의 이해에는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불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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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약성서학자·신학자.

비이펠슈테데에서 태어나 키센, 마르부르크 등의 대학교수를 역임. 신약학(新約學)에 있어서 디벨리우스(1883-1947)와 함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신약성서의 최초의 세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총칭)의 양식적 연구의 제창가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연구방법에 의해 태어난 것이 <예수>이다.

바르트의 지도 밑에 일어난 변증법적 신학 운동에 참가하여 신학적으로는 어떤 친근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신약성서의 역사적 연구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구와 변증법 신학 사이에 서서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에 의한 실재론적(實在論的) 해석을 제창했다. 이 방법론 때문에 하이데거 철학에 깊이 의존했다. 그래서 제2차대전 후의 독일 신학계에서 오래 계속된 커다란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 논쟁에는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도 참가하였다. <요한복음주해>(1941), <원시그리스도교>(1949) 등에 이어 <신약성서신학>(1953)에 의해 그의 입장에 서서 신약성서학을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다. 바르트는 신학에서 실존철학을 배제한 데 대해 불트만은 이를 방법론에 채택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명백히 나타났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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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1926)

불트만의 초기 명저.

불트만은 디벨리우스와 함께 공관복음서의 양식사적(樣式史的) 연구를 꾀하고 1925년 <공관복음서의 연구>를 발표했으며, 다음해에 그 연구성과에 입각하여 <예수>를 발표했다. 양식사적 연구는 공관복음서가 통상적인 의미의 예수전의 사료가 될 수 없고,

초대 교회의 선교(宣敎-케류그마)라는 것을 밝혔다.

그 결과 이 책에서는 엄밀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수의 '인격'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의 성격은 '말을 거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이에 대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근대주의적 휴머니스틱한 예수의 인격과 교훈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변증법 신학적인 종말론적·인격적 만남의 사상이 신약연구와 결부되었다. "예수의 설교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 시대사적 신화(時代史的神話)라는 외부적인 표현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신화에는 절박한 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기대가 있으나, 그것은 예수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인간이 그의 현재에 있어서조차 결단 가운데 서 있고 현재는 그에게 있어서 종말의 때를 의미한다고 하는 확신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최초의 실재론적 해석의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의 '인격'을 연구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루돌프·오토는 '예수가 없는 예수에 대한 책'이라고 비판하였다.

니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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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hold Niebuhr (1892-1971)

아메리카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독일 이민의 목사의 아들로서 미주리주 라이트시티에서 태어나 이든 신학교, 예일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디트로이트의 교회 목사(1915-1928), 그 후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조교수, 교수(1928-1960)가 되었다. 그는 현대 미국에 있어서의 성서적·종교개혁적 신앙의 부흥자로서 유럽의 바르트에 비견될 만한 존재이다. 그러나 조직신학(組織神學)보다는 사회윤리 방면에 관심을 갖고 신학계뿐 아니라 널리 미국의 정치·외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적 관심은 성서적 신앙에 포함되는 인간관이나 역사관이 근대적인 여러 사상보다 우월하여 오늘날의 인간이나 역사 문제의 해명과 해결에 타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의 신앙사상의 중핵에는 그 자신이 속하여 있는 루터파에 흐르는 루터적인 죄의식과 신앙의인(信仰義認)의 신앙이 있어서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인간이나 역사의 문제를 고찰하고, 이렇게 해서 수립된 사회윤리의 입장을 '그리스도교적 현실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복음의 깊은 이해나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라는 점에서 유럽의 변증법 신학자와 공통점이 있으나 그것을 교의학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인간·역사·사회의 분석이나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나 <신앙과 역사>, 또 초기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등은 모두 그의 관심이 인간과 역사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학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크다.

인간의 본성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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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本性-運命 (1941-1943)라인홀트 니부어의 주저.

1939년에 에든버러 대학에서 한 기포드 강연을 기초로 쓴 책이다. 예리한 통찰과 정묘한 논리와 박력있는 논술에 의해 이 책은 니부어를 일약 세계적인 신학자로 만들었다.

제1부는 인간론이며 10장으로 구분되었고, 비평의 목표는 주로 근대적 인간관에 놓여 있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그리스·로마적) 인간관과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의 애매한 혼합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으나 고전적 합리주의의 입장에 의해서도, 그 반대인 자연주의에 의해서도 인간 문제는 바르게 파악되지 못했고, 또한 근대자유주의적으로 개조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에 의해서도 바른 파악은 불가능하므로 성서적인 죄인으로서의 자기이해를 다시 한번 회복할 필요가 크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제2부는 역사론이며, 역시 10장으로 구분되었고, 근대적인 진보적 역사관이나 마르크스 주의에 유입되어 있는 왜곡된 성서적 역사관을 그 본원으로 되돌아가 명확하게 하는 한편 성서적 역사관을 갖고 현대 역사의 문제를 구명하였다. 잘못된 메시아 사상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에 계시된 모든 메시아 대망(待望)의 성취가 오히려 진실하게 현대 역사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을 준다는 것을 여러 사상과의 비판적 절충을 통해 밝히고, 또한 성서적 종말론에 새로운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이 책은 독특한 형태로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현대적 변증(辨證)이 되고 있다.

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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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Buber (1878-1965)

이스라엘의 종교철학자.

유대인 헤브루 고전학자 솔로몬 부버의 손자이다. 빈에서 태어나 빈, 취리히, 베를린 등지의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배웠다(1896-1900).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초빙되어 종교철학·윤리학을 강의했다(1923-1933). 나치스의 유태인 박해로 독일에서 피난하여(1923), 여러 나라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고, 1938년 부흥된 이스라엘 공화국의 헤부르 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가 되었다.

'나와 너'의 관계를 기조로 한 인격주의적 철학은 실존주의와 함께 제1차대전 후의 유럽, 미국의 그리스도교적 신학이나 철학, 또한 정신의학계에까지 넓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로젠츠바이크(1886-1929)와 함께 구약성서의 새로운 독일어역을 시도하기도 하고, 하시디즘(신비주의적 유대교의 운동)에 깊이 참여하여 추진자가 되었으며, 유대교의 현대적 우위를 명백히 하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잡지 <유대인>(1916-24) 및 <피조물>(1926- )을 편집, 발행.

나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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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마르틴 부버의 원숙한 사상을 보여주는 명저.

그 문체는 철학적 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 '근원어(根源語)'를 명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세계는 인간이 취하는 이중적 태도에 따라 인간에게 이중의 것이 된다. 인간의 태도는 인간이 말하는 근원어의 이중성 때문에 이중적인 것이 된다. 근원어는 단독어가 아니라 상관어이다. 하나의 근원어는 '나-너'의 상관어이다. 다른 근원어는 '나-그것'의 상관어이다." 여기에 부버의 근본사상이 나타나 있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이다. 전자는 인격의 세계이고 후자는 물적·대상적 세계이다. '나'라고 하는 동일한 말도 전자에 있어서는 '인격'이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개아(個我)'이다. 그는 현대의 병환은 '그것'의 세계가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하고 '나-너'의 인격성 세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그것' 관계에서의 '나'가 '나-너' 관계의 '나'로 전환됨으로써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너' 관계는 '영원한 당신'과의 만남에 의해 완성된다. '영원한 당신'은 절대로 '그것'으로 타락하지 않는 절대로 순수한 '너'이며, 이러한 '영원한 당신'과의 결합에 의해서만 인격적 '나'는 유지되는 것이다.

부버의 이 책은 바르트, 하이데거의 저서와 함께 1920년대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사신론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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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神論 神學

이른바 '신의 죽음'의 신학으로 불리는 최근의 영·미 신학에서의 한 흐름은 넓은 의미에서 바르트 신학과 직접 결부되어 나타난 현대적 신학운동이다. 대표자인 D.본회퍼(1906-1945)는 바르트에게서 배운 젊은 신학자였는데 나치스에 의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만년에 그는 다가올 새로운 시대와 그리스도교의 장래에 대해 생각했다. 신에게의 자기향상(自己向上)이라고 하는 제(諸) 종교의 오만과 그리스도교의 독자적인 하느님의 말씀(특수계시)이라는 바르트의 사상은 본회퍼에게는 말하자면 종래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 무기가 되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그리스도교는 교회까지 포함하여 이 세속화(世俗化)한 시대에는 이미 성스러운 존재를 보지(保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태는 결코 비관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그리스도교 사명의 중대한 기로(岐路)에 와 있음을 인식케 한다. 일찍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이 세계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던 성속(聖俗)의 관념으로 본다면 전혀 상식 밖의 것으로 비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롭고 성스러운 것의 관념을 당시의 세속 한가운데에서 '성(聖)'을 발견함으로써 실현하려고 했다. 현대 기술문명이 가져다 준 근대인의 세속화 방향 가운데에서는 교회가 지난날의 의미를 확보할 수 없지만, 이 기술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성스러운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신학 및 그리스도교 윤리의 임무이다. 본회퍼의 이와 같은 생각은 충분히 명료하지 못한 점도 많지만 그 사상은 F.고가르텐, G.에이벨링크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영향을 받아 현대에 큰 충격을 준 사람은 J.로빈슨일 것이다. 그의 주저(主著) <신에게의 성실>(1963) 가운데에는 현대의 종교적 위치가 잘 제시되어 있다. 그는 틸리히, 브루너, 불트만의 영향까지도 받아 신(神)의 관념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 이 생각은 종교학자의 객관적인 기술(記述)과는 다른 현대에서의 퍼스펙티브라는 의미에서 어떤 절실함으로써 독자에게 호소한다. 즉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자연적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던 시대는 신의 표상(表象)이라면 주로 천상(天上)이라든가 고소(高所)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는 자연적 세계관에서 고저(高低)라고 하는 규준을 빼앗아버리고 인간이 신을 생각할 때의 주요한 상징은 beyondness, 즉 '피안적(彼岸的)인 것'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지구에 묶여 있지 않는 우주시대의 현대에서는 이 개념도 이젠 신의 초월성을 의미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종래의 신의 관념은 버려져야만 한다." 여기에 로빈슨이 제창하는 새로운 신은 틸리히의 '존재 그 자체의 근저'와 본회퍼의 '내적(內的)의 한가운데에서의 피안성(彼岸性)'과의 구성으로서의 성스러운 것, 즉 신의 이념이었다. 그는 이 세속화한 시대에 있어서는 교회 내부에서도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이 성직자인 자신으로서도 곤란해졌다고 고백한다. 그는 런던 어느 지구(地區)의 교회 주교란 지위에 있었던만큼 이 교회의 무력(無力)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그 사상의 약간 아마추어다운 측면을 보완하여 크나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신론 신학과 알타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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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神論神學-

D. 본회퍼 외에도 '사신론' 신학의 대표자로서는 판 브레인, T.J.J. 알타이저, W. 해밀턴, G. 바하니안 등을 들 수 있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주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본회퍼처럼 현대라고 하는 시대를, 한편으로는 세속화하여 성스러운 것을 상실한 시대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이것이 오히려 보호자로서의 초월적인 신은 이제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어른이 되어 버린 현대 시대정신의 특질이라고 한다. 판 브레인은 영미(英美) 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아 바르트의 '하느님의 말씀' 신학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바르트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계시로서 성서에 제시된 객관적인 실증성(實證性)을 지니는 사실이 된다. 과학자가 객관적인 사상(事象)과 관련되듯이 신학자는 하느님의 말씀의 역사적 실증성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판 브레인은 신이란 개념은(분석철학적인 의미에서) 그것에 경험적 대응자(對應者)가 없고 그 진리성을 검증(檢證)하는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 한 의미가 충족될 수 없다. 말하자면 실증성이 없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초월적인 아버지인 신은 무의미하나 예수의 역사적 존재는 오늘날의 세속적인 우리에게도 뜻깊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간 예수로서이다. 예수가 제시한 인간의 모범으로서의 존재, 그의 인인애(隣人愛)의 산 가르침에서 현대인을 위한 세속적인 복음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알타이저에게서는 헤겔의 종교철학과 불교와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의(敎義)를 그의 철학에 발전시키고 있다. 헤겔에 의하면 '아버지의 나라'는 그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신의 세계창조 이전 단계에서 절대자(絶對者)가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영원의 로고스의 영역이다. 알타이저는 이 생각을 엘리아데의 원초적 존재론이나 틸리히의 존재 자체의 개념에 해당시킨다. 역사적 세계를 초월하고 역사적 시간을 탈각하여 태초의 영겁회귀(永劫回歸) 세계로 돌아가려는 엘리아데의 원초적 존재론의 방향은 신비주의와 동양의 종교(특히 禪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공통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이 현세에 대한 철저한 부정(否定)이 있는데 그 부정의 방향은 역사적 시간을 원초(原初)로 소급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 그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은 신의 자기부정으로서 '아들의 나라'의 엄숙성에 머문다는 데에 있다.

신의 자기부정은 역사의 시간을 일관하여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부정의 극치는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이다. 헤겔도 '아들의 나라'를 해명할 때에 예수의 의미를 인간의 유한적 정신이 자기부정을 통해 절대정신(絶對精神)에 이르는 부정의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의 전형'이라고 한다. 알타이저의 경우는, 이 부정은 신의 계시(자기부정)의 궁극으로서 예수의 죽음을 배움으로써 그리스도교도는 이 세계의 부정은 역사의 시간에 따라 관찰할 수가 있다. 헤겔에서는 '아들의 나라'는 '성령의 나라'로 승화되고 부정은 긍정으로 유화(宥和)된다. 그러나 알타이저의 경우 '아버지의 나라'나 '성령의 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에 따른다는 것, 그의 죽음에 따른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영(靈)의 나라도 알타이저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속도시와 희망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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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俗都市-希望-神學'사신론' 신학과 같은 정신적 상황을 대표하면서도 약간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H. 콕스의 '세속도시'이다. 콕스 역시 현대의 세속화를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생각하여 이 시대를 그리스도교가 성인(成人)이 된 시대로서 환영하고 있음은 본회퍼나 그 밖의 사신론 신학자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관(神觀)의 발전은 불트만이나 로빈슨처럼 자연적 세계관의 변천으로서 기초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제약에 의한다고 한다. 현대의 세속도시에서는 이미 종래의 신성 개념은 통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찍이 유효했던 부버의 이른바 '나-그대'의 관계가 여기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도시에서는 '그대'로서 대하는 이웃사람이나 이 '나-그대' 관계의 대극(對極)인 그대로서의 신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광대한 도시 가운데에서 무명성(無名性)으로 환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명성은 부버가 '나-그대'의 관계와 대비시킨 '나-그것'의 관계도 아니다. 무명이긴 하나 새로운 형태의 '그대'의 존재양식이 거기에는 예고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신을 발견하는 원리가 될 것이다. 콕스의 이와 같은 세속도시 사상은 E. 브로호의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다.

브로호는 헤겔 철학이 절대자를 주관과 객관의 종합이라고 하는 생각을 계승하여 이를 헤겔과 마찬가지로 동적(動的)인 운동과정으로서 생각한다. 헤겔에게 이 종합은 역사의 세계에서 전개되며, 이성의 자기발전으로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세계역사 가운데에서 성취되고 있었다. 그러나 브로호는 교화 같은 과거에 있어서의 전개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주관·객관 관계는 미래에서 현재로, 장래에 오는 유토피아로서의 사회적·객관적인 희망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자(有限者)로서, 설사 아무리 바람직한 희망을 미래에 둔다 해도 그것이 먼 장래의 일이라면 그의 마음을 고무시킬 수 없다. 유한자인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재 만날 수 있을 때뿐인 것이다. 실존철학의 '죽음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장래라는 현재가 아니라(브로호는 불안으로서 분명해지는 하이데거의 인간 구조는 불안 그 자체가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것인 이상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해결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작용해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희망은 어떻게 하여 사회적·객관적인 현실과 상응할 수 있는 것일까. 브로호에 의하면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일반적 측면과의 조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종교적 원리라고 한다. 즉 주관적·객관적 정신의 통일로서의 '절대정신(예술·종교·철학)'이라는 헤겔적 관념은 헤겔처럼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방향을 가는 것이 아니라 브로호에게 있어서는 장래로부터 현재로라고 하는 반대 방향에서 재인식되고 있다. 콕스는 그와 같은 미래의 장래성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른바 '사신론 신학'에서의 무신론 문제를 어떤 의미에서 초극하려 한다. 신을 다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희망의 신학'은 오직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한 관계라는 의미에서 무신론적으로 울릴는지 모른지만, 그러나 신을, 본래 미래로부터 온다(예수의 재림)는 식으로 파악한다면 이와 같은 브로호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에 가장 잘 합치된다고 하겠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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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神論-無神論-彼岸

위와 같은 현대 신학사상(神學思想)의 경향을 한 시대 전인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등 석학(碩學)의 신학사상 체계에 비하면 현저하게 약체이며, 그 장래에 대한 유효성이라는 점에서도 바르트 신학 등과 같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생명 긴 존재는 아닐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학을 통해 현대의 신 관념의 문제점이 명료해진다.

바르트 신학은 절대초월의 신을 강조하여 이상주의의 내재적인 신 관념을 비판, 종교는 인간이 신에 도달하려는 공허한 시도(試圖)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은 그 내재의 입장을 제거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장대한 신학 체계도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신의 죽음의 신학'이 인간예수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 예수상(像)이 지난날의 자유신학자와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죽음의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오히려 바르트의 초월적인 신까지도 더욱 초월하여 피안(彼岸)의 피안이 된 것 같은 세속의 한가운데에서 성(聖)을 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현상과 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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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想-現狀-將來그리스도교 신학의 과제는 앞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서의 신의 계시를 긍극적인 진리로 승인하는 입장에서 신에 관해 설명된 것을 꾸준히 음미하고 새로운 해석을 꾀하는 것이겠는데, 거기에는 신에게서 주어진 계시라고 하는 초월적인 측면과 그것을 되풀이하며 새로이 해석해 나간다고 하는 내재적인 측면을 지닌다. 여기에서 신학(神學)은 줄곧 이 양자의 올바른 총합을 요구해 왔던 것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오늘날의 현상(現狀)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역사신학 분야에 관해서 말한다면 구제사적(救濟史的)인 역사 이해가 실제로는 신학 전체를 감싸는 듯한 형태로 새로운 의미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점이 관심을 모은다. 1961년에 케이제만이 그리스도교 신학 발생의 기반을 후기 유대교로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체'라고 주장함으로써 독자적인 역사 이해와 거기에 따르는 열광적 경향을 지닌 묵시문학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가 극력 배제하려고 했던 것인만큼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특히 현대적인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성서의 강조, 묵시문학의 복권(復權), 미래적 종말론(未來的終末論)의 재흥(再興), 부활(復活)의 강조, 역사적 세계의 회복, 헤겔 철학의 영향 같은 특색을 지닌 '역사의 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하는 학파가 구약학자(舊約學者) 게르하르트 폰 라아트의 영향 아래, 조직신학자 볼하르트판 넨 베르크를 중심으로 하여 1960년대 초기에 형성되었다. 또한 강력하게 미래적 종말론을 주장한 율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4)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반드시 상호간의 연관성을 지니며 발생했던 것만은 아니나, 초월적인 신의 작용을 역사화(歷史化)하려는 공통된 동기를 지닌다고 하겠다.

조직신학 분야에 관해 말한다면 해석학의 문제가 관심을 끌고 있다. 1941년에 제창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은 고대적 세계상(世界像)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되어 온 신약성서의 선교(宣敎) 사신(私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해석학적 과제를 제기했던 것인데, 에른스트 훅스, 에이베링크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 해석학적 신학을 형성하려 하고 있다. 불트만이 초기 하이데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데 대해 훅스나 에이베링크는 후기 하이데거와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서서 역시 후기 하이데거와 관련을 지니며 해석학적 방향을 탐구하는 사람으로는 하인리히 오토 등이 있다. 헬베르트 브라운은, 그리스도론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변수(變數)이며 인간론은 그 가운데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라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실존 이해의 반영으로 간주하여 비신학화(非神學化)하는 방향을 취하는데, 이러한 방향은 미국에서의 토마스 알타이저, 윌리엄 해밀턴 등 사신론 신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구명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신학 상황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지니는 사람은 제2차대전 중 히틀러에게 항거하여 순교(殉敎)의 죽음을 택한 디트리히 본회퍼이며, 성인화(成人化)한 세계라는 형태로 포착되는 세속화론(世俗化論), 그리스도교의 비종교적 해석, 세상을 위한 교회라고 하는 교회론 등 그의 생각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관심을 끄는 세속화론을 전개한 사람으로는 그 밖에도 독일에서는 고가르텐, D. 제네, 미국에서는 하베이 콕스 등이 있는데, 제각기 복음을 새로이 해석한다는 동기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윤리 면에 관해 말한다면, 전통적인 원칙윤리에 대해 폴 레이만, 조셉 프레처 등은 상황윤리(狀況倫理)를 논하고 있다.

또한 실천신학 분야일 경우, 세계에 대해 행해지고 있는 '신의 전도(傳道)' 신학이 주목된다. 여기서 해석이란 참여하는 행위와 불가분의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가톨릭 신학의 현상(現狀)을 보면 이미 1950년대에 Y. 콩가르, H. 드 뤼베크, J. 다니엘루 등 프랑스의 신학자가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있었는데, 특히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제2바티칸 공회의(公會議)이다. 여기서 전례(典禮)가 혁신되고 여행하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모습이 확인되고 신도사도직(信徒使徒職)이 정해지며, 현대세계에서의 교회의 사명이 검토되고 에큐메니즘이 크게 전진하기 위한 출발점이 갖추어졌다. 이 공회의를 실현시킨 교황 요하네스 23세는 그 목표를 '현대화의 적응'이라는 말로 되풀이하여 표현한다. 제2바티칸 공회의가 노력한 것은 바로 이 현대화(現代化)라고 하겠다. 이러한 방향성 가운데서 K. 라너는 객관주의적인 스콜라학의 숲으로부터 인간론적(人間論的) 방향을 지닌 신학을 도출(導出)했으며 <세상의 신학>(1968)의 저자 J. 메츠는 정치적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종합화·역사화·해석·세속화·참여·현대화 등의 용어로 불리는 현대 신학사상의 기본적 지향성(志向性)은 명백하다. 혹은 이것들을 토착화(土着化)라는 말로 부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특정 민족·문화 가운데에 복음을 토착화시킨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널리 그침없이 변화하는 현대 세계에의 토착화를 지향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현대세계 가운데에서 초점(焦點)으로 부각되는 것은 '인간의 문제'이며 교회는 오늘날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불문하고 계시의 빛 아래 이 인간의 문제와 대결해 나가는 사명을 자각해 왔다. 또한 그 공통의 사명을 위해 교파(敎派)를 초월하여 일치 단결해 나가야만 한다는 에큐메니컬한 과제에 한층 더 진지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신학 역시 이 과제를 담당하면서 교회 역사 가운데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개발을 탐구함과 동시에 인간의 문제라고 하는 공통 목적을 위해 신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도 협력할 가능성, 또는 다른 종교와도 협력할 가능성까지 검토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