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근세의 사상/계몽시대의 사상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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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時代-思想 '계몽시대'라 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빛(光)에 의해서 세상의 암우(暗愚)를 바로잡으려고 한, 17, 18세기 사상 운동의 시기를 뜻한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장미빛으로 개화(開花)된 이 운동은 정치나 경제·사회·종교·사상 등에 있어서의 전근대적인 어둠에 이성의 빛을 비추었다. 전근대적인 어둠이란 전근대적이며 봉건적·종교적인 권위·특권·부정·압제(壓制)·인습(因習)·전통·편견·미신(迷信) 등이다. 계몽(어둠에 빛을 비추어 밝고 현명하게 하는 일)의 사상가는, 이성을 척도로 하여 이 어둠을 비판하고 심판했다. 거기서는 종교도 자연관(自然觀)도, 사회도 국가도, 모든 것이 용서 없이 비판되었다. 이제까지의 사회 형태라든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불리한 것으로서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이성에 의해서 생각해 낸 것이 모든 인간 행위나 사회 형태의 기준으로서 요구되었다. 이성에 입각한 영원한 진리, 영원한 정의가 종래의 암우(暗愚)와 대치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일체가 신의 권위에 입각한 중세(中世)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인간의 두뇌의 사고(理性)에 입각하게 한다는 역전(逆轉)이었다. 이성적 정신의 열광(熱狂)이 세계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먼저 정치에 관해서는 계약론(契約論)이 주장되었다. 인간은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자연권(自然權)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입각해서 자유이며, 평등이다. 생존과 재산 소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계약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했을 경우,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견지에서 계몽사상가들은 왕권(王權)이나 낡은 제도나 압제나 불평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공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서 근대적인 여러 혁명에 이론적 지주(支柱)를 제공했다. 그들 계몽사상가들은, 사람은 노동(勞動)에 의해서 비로소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로써 한편에서는 전근대적 착취를 비난하고, 또 한편에서는 흥륭(興隆)하는 자본주의적 사유(私有)를 옹호했다. 종교에 있어서는 이성의 입장에서 이신론(理神論), 자연종교, 이성종교, 나아가 무신론(無神論) 등이 나타나서 신앙의 자유, 종교적 관용(寬容), 교권(敎權)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요구되었다. 도덕에 관해서는 한편으로 순수한 이성에 따르는 것을 선(善)이라고 보는 이성주의가,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행복을 제1의로 하는 행복론(幸福論)이 주장되었다. 또한 인식론에서는 감각적 소여(所與)를 오성(悟性) 내지 자아가 종합하는 데에서 진리가 성립한다는 감성(感性)·오성론,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내지 감각론, 나아가서 유물론 등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계몽사상을 급속도로 발전해 온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시민의식과 과학 내지 기술의 진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계몽 운동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에서 시작되어(로크, 흄, 스미스 등), 프랑스에 가서(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백과전서파 등), 독일로 파급되어 갔다(라이프니츠, 볼프, 칸트 등).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의 계몽운동은 하층(下層)으로부터 상층으로의 상승(上昇)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근대혁명의 이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에서 뒤떨어진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하층에서의 상승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계몽사상은 머리 속에서만의 자유나 평등이나 인권 존중에 그쳐야 했다. 독일의 계몽사상을 계몽된 전제군주(專制君主)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개혁'에 독일의 근대화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성에 입각한 모든 사람의 자유나 평등이나 인격 존중이나 사회권 보장 등은, 실질적으로는 발흥(勃興)하는 부르주아 시민계급을 위한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 계몽사상의 한계가 있다. 계몽사상은 후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남과 동시에 스스로의 무력(無力)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독일의 계몽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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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啓蒙哲學

17세기 말부터 독일의 철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신학(神學)과 그의 종이었던 스콜라의 형이상학에 대신해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철학에 나타났다. 이것은 시민계급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 활동의 고조(高潮)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이와 같은 시기는 대략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가 할레 대학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690년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이 간행된 178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 시대의 주요한 철학자들로서는, 신학과 철학의 융화를 꾀한 철학자인 라이프니츠를 과도기(過渡期)의 사람으로 하고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수학적인 방법으로 인식론을 완성시키려고 한 치른하우스(치른하우젠) (1651-1708), 영국 경험론을 독일에 소개하고 법학(法學)의 영역에서 업적을 남긴 토마지우스(1655-1728), 계몽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형식 합리성을 기초로 형이상학의 개조(改造)를 시도하고, 칸트 철학을 준비한 볼프, 스피노자주의의 입장에서 정통 루터 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유물론적 경향의 범신론(汎神論)을 주장하여 헤르더나 괴테에게 강력한 영향을 남긴 에데르만(1698-1767), 독일 계몽의 최대 사상가 레싱 등이 있다.

당시의 독일은 봉건 제후(諸侯) 지배하의 소방 분립(小邦分立) 상태에 있었고, 봉건권력과 손을 잡은 루터 주의 신학이 자유로운 언론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계몽사상은 신학과 종교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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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0)독일의 철학자. 수학·자연과학·법학·언어학·역사학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도덕 철학 교수의 아들로서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조숙한 천재로서, 혼자 힘으로 방대한 서적을 익히고, '말에는 명석함을 사상(事象)에는 유효성을' 찾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15세로 라이프치히 대학 법과에 입학, 1666년에 졸업. 마인츠의 법전(法典) 수정 작업을 한 다음, 1672년 외교 사절로 파리에 가서, 1676년까지(한 시기는 런던) 체재했다.

이 사이 특히 수학을 연구, 미적분학(微積分學)의 기본 정리(定理)를 발견하고, 위치해석(位置解析)의 새 방법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 1676년,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초청되어, 하노버의 궁중 고문관 겸 도서관장이 되어 이 곳에 거처를 정했다. 요한 프리드리히의 후계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이 프로이센 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베를린과도 관련을 가지고, 그의 제안에 따라 1700년 설립된 베를린 학사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전 학문을 집성(集成)하는 백과학(百科學)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여 광범한 연구 활동을 실시하고, 보편적 기호법(記號法), 보편 언어 등의 형성에 노력하였으며, 또한 기사(技師)로서도 계산기(計算器), 회중시계(懷中時計), 압축공기(壓縮空氣)에 의한 동력(動力)의 강화 등 많은 업적을 남기는 한편, 사회적·정치적으로도 활약을 계속하여 각지에서 여러가지 영예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는 궁정과의 관계가 소원(疎遠)해졌기 때문에, 각 방면에서 냉대(冷待)를 받았고, 통풍(通風)이 악화하여 하노버에서 급사했다.

이와 같이 다채로운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남긴 연구는 방대한 양에 달하지만, 분망한 생활 탓인지 그러한 연구는 서간(書簡)이나 메모 등의 형태로 나타낸 것이 많다. 철학만을 보더라도 생전에 공간(公刊)된 것은 <변신론(辯神論)>(1710)뿐이며, 사후 출판된 것 가운데서도 그의 사상 전모를 전하는 정리된 저작은 별로 없었는데, 그의 철학의 최대 특징은 그 이전의 여러 가지 사상적 대립을 모두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조화시킨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데카르트적 물체관(物體觀)과 가생디류(流)의 원자론, 기계관(機械觀)과 목적관, 섭리와 자유, 경험론과 이성론, 나아가서 근세사상과 스콜라 사상의 조화까지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예정조화(豫定調和)' 사상이야말로 라이프니츠 철학의 기조(基調)를 이룬 가장 단적인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단자론> <형이상학 서설> <인간오성신론(人間悟性新論)> 등이 있다.

단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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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子論 (1714)

1710년 공간된 <변신론(辨神論)>이 기연(機緣)이 되어, 라이프니츠는 니코라 레몬이라는 사람과 교신(交信)을 시작하고, 이 사람을 위해서 1714년 자기의 철학 체계에 대한 요약을 썼다. 그것은 90의 소절(小節)로 된 20페이지 미만의 극히 짧은,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을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전하는 충실한 작품이었는데, 레몬에게는 보내지지 않고 발표도 되지 않은 채 유고(遺稿)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본을 기초로 하여 1720년에 독일어역(譯), 이듬해인 1721년에 라틴어역이 출판된 다음 100년 이상 지나서 1840년에야 겨우 원문이 에이르트만(1851-1921)의 손으로 공간되었다. '단자론'이란 제목은 에이르트만에 의해서 붙여진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서의 실체(實體)는 절대적으로 단순하고 불가분(不可分), 더욱이 작용력을 가지고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실체가 '단자(모나드)'이다. 단자의 본성은 표상(表象)인데, 표상의 선명도에 의해서 대략 세 가지 단계가 구별된다. 최저의 것은 혼돈된 표상을 이루는 물질단자로 '소단자(素單子)'라고 불린다. 여기에 대해서 표상이 의식적으로 기억을 수반하는 것이 '영혼단자', 나아가서 영혼이 자각적으로 보편자(普遍者)를 인식하면 '정신(精神)'이다.

이와 같은 각 단계에 속하는 무수한 단자간에 실적 인과관계(實的因果關係)는 없고("단자는 창(窓)을 갖지 않는다"), 각 단자는 자기의 단일성을 상하는 일 없이 다양한 세계(즉 單子群)를 자기 내부에 전개한다. 이와 같이 '창'이 없는 단자가 독립적·내적(內的)으로 행하는 표상 사이에는 통일과 조화가 있는데, 그것은 단자의 내적 발전 자체, 신이 미리 정한 법칙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예정 조화').

또한 이와 같은 조화는 단자의 표상간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신체와 혼, 능동인(能動因)과 목적인(目的因), 자연의 물리적 영역과 은총(恩寵)의 도덕적 영역간에도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보편적 조화와 질서에 젖은 현실 세계는 신에 의해서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으로서 선택된 것이라는 점이다.

형이상학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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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而上學序說 (1686?)

라이프니츠의 주저(主著). 37절로 된 비교적 짧은 것으로, 1686년 초(또는 1685년 말)에 쓰여졌는데, 발견되지 않는 채 묻혀 있다가 1846년에 발견, 공간(公刊)되었다.

이 저작은 그 당시까지의 라이프니츠 사상의 집약임과 동시에 이후의 그의 사상 발전의 초석(礎石)이었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첫번째에 관해서 말한다면 4년간의 파리 체재에서 얻은 수확이 완전히 소화되어 데카르트, 스피노자를 비판적으로 뛰어넘으려고 하는 라이프니츠 독자적인 입장이 제시되었고, 또한 그의 단면적인 활동의 기반이 세계상(像)으로서 명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에 관해서 말한다면, 하나는 이후의 그의 사상 발전은 이 저작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 진전되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예컨대 '단자' 등의 유명한 말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밑받침하는 중요한 생각들이 여기서 거의 정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먼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신은 모든 우두머리 중의 최량(最良)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것을 최선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항상 규칙적이며, 기적(奇蹟)이라고 하는 것도 일반적 질서에는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最善說). 또한 이와 같은 신의 작용을 피조물(被造物)의 작용과 구별하려는 목적에서 설명되는 '개체적 실체'라는 것은 독립된 불가분의 것으로서 각각 자기의 방법에 따른 전 우주의 표출(表出)을 본성으로 하는 '신의 거울 또는 전 우주의 거울'이다(단자론).

따라서 우주는 말하자면 실체의 수(數)만큼 존재하는 것이 되는데, 그런 무수한 표출 사이에는 신에 의해서 사전에 세워진 조화(調和)가 유지되고 있다(예정조화설). 또한 모든 실체의 본성에는 혼적(魂的)인 것이 포함되는데, 물체나 동물의 혼과 지성(知性)을 구비한 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최후의 것만이 자기를 파악하고, 이것에 의해서 신을 왕(王)으로 하는 우주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들도 분명히 '연속적 법칙' 단자의 단계적 구별과 관련되는 생각이다.

인간오성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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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悟性新論 (1704)

존 로크의 주저인 <인간오성론>(1690)의 축조적(逐條的) 비판을 통해서 라이프니츠가 자기의 인식설(認識說)을 전개한 책. 1704년에 완성했으나 이 해 로크가 죽었기 때문에 출판을 보류했는데, 60년 후인 1765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로크의 사상을 대변(代辯)하는 필라레테스, 라이프니츠의 분신(分身) 테오필스라는 두 사람의 대화로 의론(議論)을 진행시키고 있다.

라이프니츠도 로크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이성적 관념에는 감각적 관념이 선행(先行)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생득관념적(生得觀念的)인 것으로 인정한 것이 된다. 또한 '단자는 창을 갖지 않는 '이상, 감각적 관념일지라도 다른 것에서 주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며, 혼돈(混沌)된 표상으로서 마음에 내재(內在)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득관념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로크설에 따르는 필라레테스의 마음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테오필스는 생략삼단논법(省略三段論法)이나 상기(想起)의 예를 들어서, 자각의 결여와 생득적이라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인간정신은, 로크가 말하듯이 '백지(白紙)'가 아니라, 오히려 결이 있는 대리석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즉 예컨대 다른 것보다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예시(豫示)하는 결이 있으면, 그들은 헤라클레스의 상(像)에 대해서 보다 많은 소질을 가지며 헤라클레스는 어느 의미에서 돌에 생득적인 것과 같이, 우리들의 정신에는 모든 관념이나 진리가 경향(傾向), 소질로서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크가 이용한 "지난날 감각 속에 없었던 것은 지성 속에도 없다"라는 스콜라 경험주의자의 명제(命題)는 라이프니츠에 의해서도 승인된다. 그러나 "지성 그 자체는 별개로 하고"라는 말을 첨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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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Christian von. Wolff(1679-1754)

독일 계몽기의 철학자.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브로츨라프에서 출생. 예나·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

라이프니츠의 추천으로 할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 대학 용어였던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로 강의를 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병사(兵士)의 탈주(脫走)의 예정조화(豫定調和)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1723년 추방 처분을 받았으나, 후에 복직, 독일에 처음으로 학파를 형성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볼프는 독창적 사상가라기보다 오히려 체계가(體系家)이며, 철학용어를 안출(案出)해 냈고, 여러가지 분류를 통해 사상의 형식편에서 엄밀하게 논리적·합리적으로 정비해 나가는 것을 가르친 점에 공적이 있다.

예컨대 모든 인식은 철학적·역사적·수학적 가운데 어느 하나이며, 제1의 것은 사물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제2의 것은 그것을 현실화하여 증명하며, 그리고 제3의 것은 양의 결정에 속한다고 한다. 또 이 분류와 함께, 학문을 합리적 이론학과 합리적 실천학으로 대별한 분류가 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전자에는 존재론·합리적 우주론·합리적 심리학·자연신학이, 그리고 후자에는 실천철학·자연법학·윤리학·정치학·가정(家政)학이 속한다고 되어 있다.

볼프는 각 방면에 걸쳐서 이상하리만큼 많이 저술했으며, 더욱이 형식의 정비와 합리성을 지향(指向)하는 볼프답게 독일 문장의 저작은 모두가 <…에 관한 이성적 사상>이라는 표제(標題)를 가지고 있다.

볼프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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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派

볼프는 학파를 형성한 최초의 독일 철학자였는데, 그의 생존중인 1737년에는 이미 107명 정도의 볼프 학도(學徒)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충실한 제자로서는 <볼프 학파 철학의 교정(敎程)>의 저자 튀미히(1697-1728)나, <아름다운 볼프 학파>를 쓴 포르마이(1711-1797)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볼프의 체계 자체에는 새로운 것을 첨가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은 볼프 철학의 적요(摘要)를 쓰는 일에 시종되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단 한 사람, 볼프에게서 등한시되어 있던 영역(美學)의 개척을 시도한 것이 바움가르텐이다.

바움가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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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Alexander Baumgarten (1714-1762)

독일의 철학자. 독일 미학(美學)의 창시자.

베를린에서 출생하여 1740년 이후 죽을 때까지 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 대학의 교수였다.

인식을 상급 인식(오성적 인식=悟性的認識)과 하급 인식(감성적 인식=感性的認識)으로 나누어, 전자의 학(學)을 논리학(論理學), 후자의 학을 에스테티카라고 했다. 에스테티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의 아스테시스(感覺)에서 그 자신이 조어(造語)한 것인데, 그의 경우에는 오늘날 보통 말하는 '미학'을 내용으로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미(美)를 감성적 지각의 완전성으로 간주한 것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바움가르텐의 미학 자체는

역시 이성주의적이며 미를 판명(判明)이 아닌 진리라고 보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반볼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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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Wolff派

볼프와 그의 학파는 엄격한 기하학적 방법에 입각한 형식주의에 의해 철학의 체계를 완성시켜 당시의 철학적 일반 교양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 학파의 무미건조한 분석이나 모든 것을 기하학적 증명으로 단정(斷定)하는 독단적 태도는,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낳게 했다. 안드레아스 뤼디거(1673-1731),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크루지우스(1715-1775),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1728-1777)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실질적인 내용을 갖는 인식이 경험을 기본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여 논리(論理)만을 고집하는 볼프의 입장을 수정하려고 했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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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홀트 에프라임) 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18세기 독일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극작가·문예평론가.

독일 동남부 작센령(領) 카멘츠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재학 시절부터 극작을 시도하고 후에 베를린에서 비평 활동을 했다. 1766년 독일 문예학의 선구적 노작(勞作) <라오콘> 제1부를 발표했다. 이어 이 해에 독일 고전 연극의 걸작 <민나폰 바른헬름>을 완성, 상연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한 계몽(啓蒙)의 베일 뒤에 숨은 군사적 전제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여, 당시의 프로이센을 '유럽에서 가장 노예적인 국가'라고 평하는 전투적인 계몽주의자였다. 그리고 반교권주의(反敎權主義), 반절대주의의 입장에 서는 재야(在野) 문필가로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769년 이후 죽을 때까지의 약 10년간은 한 소공국령(小公國領)의 지방도시 보르펜뷔테르에서 도서관 사서를 하면서 희곡 <에밀리아 갈로티>(1772), 루터파 정통주의와 호교론(護敎論)의 신학 논쟁을 다룬 저서 <반(反)게체>(1778),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하는 극시 <현자(賢者) 나탄>(1779), <인류의 교육>(1780) 등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시인 하이네는 레싱을 루터에 이은 독일의 두 번째 해방자(解放者)라 부르고, '독일 인민을 마음 속으로부터 분발시킨 사람', '시대의 산 비판자'라고 찬양하였다.

라오콘, 또는 회화와 문예와의 경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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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o­koon-繪畵-文藝-境界-(1776)

레싱의 주저 중 하나이며 미학사상의 고전적 명저로 지목되는 책이다.

3부로 계획했으나 완성을 본 것은 제1부뿐이며, 제2부·제3부는 초고(草稿)와 메모에만 그쳤다. 이 책은 헤르더·괴테·실러의 문예관, 미학관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한편, 후의 독일 문예학의 개척을 이룬 이론적 저작으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이 저작의 직접적인 사명은 회화와 문예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밝히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각 예술 분야는 거기에 고유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표현 방법과 내용 사이에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회화와 조각은 공간적·병존적(竝存的)인 대상(=물체)을 표현하는 데 알맞고, 문예는 시간적·계기적(繼起的)인 대상(=행위)을 표현하는 것에 특징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표제(表題)가 말하듯이 그리스 조각 '라오콘상(像)'의 분석을 계기로 하여, 풍부한 인례(引例)와 적확한 분석에 의해서 실시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완성된 작품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과정에 있어서의 작가의 사상성에 밀접하는 점에서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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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類-敎育 (1780)

만년의 레싱이 온 정력을 기울인 신학 논쟁은, 그의 사상적 발전의 정점(頂點)을 이루는 여러 논문으로 결실을 맺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인류의 교육>은 독일 계몽주의의 빛나는 성과를 나타내는 명저(名著)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은 100개의 짧은 절(節)로 된 소책자로서,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종교적 계시에 의한 교화(敎化)에서 이성과 인간성에만 따르는 인류의 자기 완성에의 발걸음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류의 도덕적 완성의 시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새로운 영원한 복음(福音)의 시대'의 도래(到來)를, 이 책에서 확신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레싱의 견해에 의하면 계시(啓示)와 이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신이 인류를 이성적 존재로 교육하기 위해서 취한 수단인 것이다. 개인의 생장(生長)이 유년기, 소년기, 성년기로 나누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세 가지 발전 단계를 경과한다.

제1단계는 구약성서에서 신의 교육 방법을 엿볼 수 있는 유대교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인류는 아직 유년기의 조잡성(粗雜性)과 비이성(非理性) 속에 있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상벌(賞罰)을 통해서 도덕적 행위가 가르쳐진다. 제2단계는 신약성서의 계시에 따르는 그리스도교의 시대이다. 여기서 인류는 사후의 정복(淨福)의 약속이라는 정신적 상벌에 의해서 도덕적 행위가 훈련된다. 이 소년기를 거쳐서, 레싱이 성년기라고 생각한 것은 계몽의 원리가 관철되는 시기, 즉 인류가 이성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시기이다.

거기서는 선행(善行)을 상벌이라고 하는 공리적(功利的) 동기에 의해서 권장하는 종교적 계시는 이제 불필요하며, 선은 선이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은 헤르더·칸트·헤겔 등의 역사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헤르더의 <인류사의 철학 구상>은 직접 이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영국의 계몽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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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啓蒙哲學

넓은 의미로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17세기 초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18세기 말의 애덤 스미스, 벤담에 이르는 경험론의 철학과 거의 같다고 해석되는데, 좁은 뜻으로는 존 로크에서 스미스까지의 18세기 철학을 총칭한다.

그 가운데서 신학적으로는 이성의 우위(優位)를 설명하고 후에 무신론으로 경사(傾斜)를 보인 이신론(理神論)의 흐름(앤서니 콜린즈, 존 톨랜드,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이 있고 도덕철학으로서는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모랄센스를 강조하는 도덕감학파(道德感學派)(샤프츠버리)와 유물론에의 경향을 가진 공리주의(데이비드 하틀리, 조셉 프리스틀리, 버너드 맨더빌)가 대립되어 있으며, 인식론으로서는 경험과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흄)이 나타났다. 흄은 회의론(懷疑論)에 빠졌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대세(大勢)는 도덕감을 강조하든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하든간에 밝은 낙관론(樂觀論)과 인간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사상과 같은 사회 비판은 없고, 온건하고 현상(現狀) 긍정적이며, 이 점에 영국 계몽사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단지 샤프츠버리에서 프랜시스 허치슨을 거쳐서 존 밀러나 애덤 퍼거슨에 이어지는 소위 스코틀랜드 역사학파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 비판이 나타났고, 18세기 말에는 차츰 첨예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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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Thomas Hobbes (1588-1679)

영국의 퓨리턴 혁명 시대의 정치학자·철학자.

국교회(國敎會) 목사의 차남으로서 맘즈버리 근교의 웨스트퍼트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 졸업 후, 남작(男爵) 윌리엄 캐벤디시의 장남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어 연구를 계속했다. 그 사이 세 차례 유럽 대륙을 여행하여, 프랑스의 유물론자 가생디나 데카르트와 알게 되고, 피렌체로 가 갈릴레이를 방문했다고 한다.

혁명이 시작되자 프랑스에 망명하여, 1651년 크롬웰의 혁명정부에 귀순했다. 그 후는 평생 연구 생활에 여생을 바쳤다. 그는 일생 동안에 <인간론> <물체론> <시민론>의 3부작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주저(主著) <리바이어던>(1651)은 정치학의 고전 중 고전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을 지키는 것(자기 보존)이라고 하고, 자기 보존을 위해서 각자 계약을 맺고 공통의 권력을 설정하며(국가의 탄생), 주권자를 선출하고, 그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는 때때로 절대군주의 옹호자라고 불렸는데, 그에게 있어서 주권자는 군주이거나 크롬웰이거나 무방했으며, 단지 각자의 생명을 지켜 주는 정부와 국가인가 아닌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나 주권의 설립을 자유·평등한 개개인의 자발적인 동의(同意)에서 이끌어 내어, 국가나 주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자기 보존에 두는 생각은 후의 로크나 루소, 라스키 등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첫째로 하는 근대적 국가관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 원리는 유물론이었기 때문에 1660년의 왕정복고(王政復古) 후, 홉스 주의라고 배척되어 벤담 주의적 급진주의자가 나타나는 19세기 전반까지 그의 사상이 지닌 민주주의적 성격은 무시되었다.

리바이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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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

홉스의 주저. 본서는 퓨리턴 혁명이라는 비참한 정치 상황을 한시바삐 종결시켜서, 국내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며 쓰여졌다. 홉스는 그 때까지의 영국에서는 일국에 있어서의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國王)과 의회(議會)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그것이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주권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라바이어던>이란, 성서에 나오는 괴수(怪獸)의 이름으로, 국가는 신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최강의 것이라는 뜻에서 이 이름을 붙였다.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국가나 정부를 갖지 않았던 자연 상태에 있어서는 모두 자유·평등이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을 해도 좋은 ―― 사람을 죽여도 무방한 ―― 자연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자연권을 행사하면, 거기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생명의 위험에 직면한다.

그래서 마음 속에 있는 이성(理性)의 소리에 의해서, 생명이나 평화를 지키라는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서 누구나 가진 자연권을 버리고, 계약(사회계약)을 맺고, 그 대표자로서 주권자를 선정하여, 그의 명령=법률에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주권자에게는 모두들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는 때때로 절대군주의 옹호자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홉스는 주권자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했으나 그는 절대군주와 같이, 주권자가 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드는 법률이 생명이나 평화를 지킬 것을 명하는 자연법에 위배되면 그 법률은 무효라고 말하며, 또한 자연권을 버린다고 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주권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은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상태가 되는 자연상태로의 복귀를 저지하는 목적을 위해서 부여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의 이와 같은 정치이념은 국왕의 권력을 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하고, 백성의 절대적 복종만을 요구하는 반동적 신권설(神權說)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의 국가 설립에 이르는 이론적 방법은 후의 로크, 루소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열핵병기(熱核兵器)에 의한 전쟁의 위험성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오늘날 홉스의 절대평화론과 인간의 자기보존을 지상(至上)의 것으로 하는 사상이 재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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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Platon 學派

17세기 중엽,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탄생된 관념론 철학의 그룹.

주요 학자로는 랠프 커드워드, 벤자민 위치코트, 헨리 모어 등이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홉스로 대표되는 유물론(唯物論) 철학에 반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퓨리터니즘의 과격한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반대했다.

따라서 인식론이나 도덕론에서는 경험론이나 쾌락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강조하며,이기심보다도 질서와 조화를 주장하였고, 종교적으로는 교의(敎義)를 중시하지 않고 이성(理性)을 존중하는 광의주의(廣義主義)의 입장을 취했다.

이 학파는 점차 명상적(冥想的) 경향이 강해져서 신비주의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철학사상으로는 별로 중시되지 않지만, 도덕철학으로서는 18세기에 나타나는 소위 도덕감학파(道德感學派)의 선구(先驅)를 이루며, 종교적으로는 이신론(理神論)에 연결되는 것으로서, 존 로크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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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John Locke (1632-1704)

영국의 철학자·정치 사상가.

잉글랜드 서남부의 서머셋주에서 출생,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잠시 동안 동대학에서 교직에 있었으나 당시의 야당 지도자 샤프트스버리 백작의 지우(知遇)를 얻고, 그의 비서가 되었다가 정치무대에 말려들어서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명예혁명(名譽革命)에 의해서 스튜어트 왕조가 쓰러진 후에 귀국하여 윌리엄 3세의 신정부(新政府)에 참여하여 학술 활동 외에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의 저작(著作)은 극히 광범위한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서 <자연법론>(草稿, 집필은 1660년대 초기)이 있으며, 거기서 이미 경험론의 입장이 제시되어 후에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에서 전개되었다. 이 입장은, 인간의 지식은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천성적(天性的)으로 '백지(白紙)'이며, 지식은 감각과 경험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부여된다는 주장으로, 이 인식론은 흄을 거쳐서 칸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정치사상에서는 <통치론(統治論)>(1690)을 저술하여 로버트 필머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비판하고 사회계약(社會契約)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인민 주권을 주장했다. 이 밖에 경제론, 종교론, 교육론 등이 있으며, 의학(醫學)에 관한 노트도 남아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간오성론> <통치론> 등이 있다.

인간오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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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悟性論 (1690)

로크의 주저. 로크는 젊었을 때부터 도덕이나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해 나가는 동안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는 문제에 봉착하여, 1671년 친구와의 토론 가운데서 인식론의 초고(草稿)를 집필했다. 그 후 프랑스의 철학에서도 영향을 받아, 이 초고를 더욱 전개시켜 체계화한 것이 이 책이다.

내용은 4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제1권에서 지식이나 관념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제2권에서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서 생긴다고 했으며, 제3권에서는 언어의 문제, 제4권에서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로크는 당시의 사람들이 종교나 도덕 문제에 대해서 대립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생기는가를 추구하고, 관념이나 언어나 지식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를 밝히게 되면 모든 사람이 찬동하는 보편적 명제(命題)가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지식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관념의 결합이며, 이 결합을 이룩하는 것은 이성의 직관능력(直觀能力)이다. 사람들 사이에 선천적인 신념이나 인식의 대립이라는 것은 없고, 관념이나 언어의 의미를 명백히 하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보편타당한 인식이 얻어질 것이라고 로크는 주장한다. 도덕론에 관해서는 쾌락과 고통이 선악(善惡)의 규준(規準)이라는 쾌락주의가 설명되고 있는데, 동시에 신의 상벌이나 세론(世論)의 상찬(賞讚)·비난이라는 규준도 고찰되어 있어서 쾌락주의에 투철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로크의 인식론은 흄을 거쳐서 칸트에 영향을 주었고, 또한 그 쾌락주의는 벤담에 연결된다. 그러나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홉스의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 '일보 후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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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治論 (1690)

로크의 정치사상을 나타내는 저작(著作). 로크는 상당히 젊을 때부터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시기는 불확실하다. 후기 스튜어트 왕조의 반동화(反動化)가 진행되어, 필머(1589-1653)의 <페이트리아카>(1680)가 간행되어서 왕권신수설이 다시 유행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로크는 그 비판을 기도하여 1688년의 명예혁명을 지지하고 여기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려고 간행한 것이 이 책이다.

내용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제1부에서는 필머의 왕권신수설이 비판되고 있다. 제2부는 정치권력의 기원·목적·한계에 관한 로크 자신의 적극적 견해를 저술한 것으로서, 정치 권력이 발생하는 이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생명·자유·재산이라는 자연권을 가진다는 것, 이 자연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든다는 것, 따라서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탁받고 있는 데 불과하며, 최고의 권력은 항상 인민에게 있다는 것, 정부가 이 위탁에 위배되었을 때 인민은 정부를 바꾸는 '저항권(抵抗權)'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로크 사상의 골자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재산권(財産權)의 발생에 관해서는 노동이 소유를 낳는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이 기술되었고, 또한 다수결원리(多數決原理)의 기초 이론과, 권력의 난용(亂用)을 방지하기 위한 권력 분립(權力分立) 이론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 로크의 사상은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원형(原型)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이 미친 영향은 극히 크며,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등에 로크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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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George Berkeley (1685-1753)

18세기 초 영국의 철학자·성직자(聖職者).

아일랜드에서 출생,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의 철학은 로크에서 흄에 이르는 경험론(經驗論)의 발전사 속에 자리를 잡고, 또한 인식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출발점은 당시의 새로운 유물주의적인 이성론(理性論)이나 기계론(機械論)의 비판, 그리스도교의 옹호였다. 즉 그는 로크의 철학에서 발생한 유물론적 경향에 반대하여, 절대적 유심론(唯心論)을 수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인식론은 그 과정에서 구축되었다. 인간 지식의 대상은 모두 관념이라고 하면서도 관념에서 독립된 물체를 암묵적(暗默的)으로 인정하고 있던 로크에 비해 버클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성(存在性)은 알려지는 데에 있다고 하여, 지식의 유심론적인 통일 원리를 수립했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지각(知覺)되는 일이다"라는 유명한 말에 제시되어 있다. 그에게는 관념 이외에 물질적 실체는 없던 것이며, 그것은 오직 자아(自我), 정신 및 그 근원으로서의 신에게 돌아가게 된다.

1724년 성직(聖職)에 취임한 버클리는 미국에 대한 포교와 인디언 교화(敎化)를 위한 대학을 버뮤다에 설립하려다가 실패, 그 후는 저작과 성직에 전념하여, 1733년 남아일랜드의 클로인의 주교(主敎)가 되었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퇴폐를 종교심의 결여 때문이라고 역설하였으며(<앨시프론> 1732), 나아가서 신플라톤 주의적인 신비주의 사상을 주장했다(<사이아리스> 1744). 1752년 옥스퍼드로 은퇴해 살다가 다음해에 병사했다.

그의 사상은 로크의 경험론을 유심론의 방향으로 진행시킨 것인데, 이것은 경험론의 한 측면의 발전으로서 반드시 일탈(逸脫)은 아니다. 따라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사상가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인지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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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知-原理(1710)

<시각신론(視覺新論)>의 뒤를 이은 버클리의 주저(主著). 이것을 쉽게 해설한 <삼대화(三對話)>와 함께 주저 3부작을 이루고 있다. <인지의 원리>는 서론과 제1부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에서 유심론적 경험론을 설명하고, 후년의 신플라톤 주의적인 신의 형이상학의 싹도 보이고 있다. 흄의 경험론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데이비드) David Hume (1711-1776)

18세기 영국 최대의 철학자·정치가·경제사상가·수필가.

에든버러 근교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26세 때 주저 <인성론(人性論)>의 대강(大綱)을 완성, 1739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출판했으나 아무 반향(反響)도 없었다.

그후 <정치론집>(1752), 그 밖의 에세이에 의해서 문명을 높였고, 그 사이에 <인성론>의 주장을 부드럽게 하여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1749), <도덕원리론(道德原理論)>(1751) 등을 내놓았다. 1763년 외교관 비서로서 파리에 부임하여,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과 교류하였는데, 그 때의 루소와의 교우와 이반(離反)은 유명하다. 명성과 함께 부(富)를 얻은 만년(晩年)은 평온 무사하게 지냈다.

흄은 뉴턴의 자연탐구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 정신의 기초적 사실을 분석하고, 거기에 의해서 '인성(人性)의 원리'를 밝히고, 여러 과학을 체계화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심적 현상의 모든 것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제1요소는 로크와 같은 '관념'이었다. 그런데 로크는 암묵(暗默) 가운데 물심(物心)의 2원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흄은 그 전제를 버리고, 관념의 원천은 단지 하나 인상(Impression)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식의 기원이 인상에서 오는 관념 이외에 없다고 한다면, 경험과학의 기초인 인과(因果)의 관념은 원인과 결과가 사실상 결합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낯익었다는 것, 즉 습관에 따른 확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 객관성을 상실해 버린다.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도 결국 '관념의 묶음'에 환원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지식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개연적(蓋然的)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 과학의 체계'를 건설하려고 했던 흄은 로크의 경험론을 철저화함으로써 오히려 파국적(破局的)인 회의론을 낳았다. 칸트는 흄의 이 결론으로 독단(獨斷)의 꿈에서 깨어나 근본적으로 시점을 바꾸어 근대 인식론을 대성(大成)시켰던 것이었다.

도덕에 관해서 본다면, 흄은 이것을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동정(同情:Sympathy)을 도덕의 심리적인 기초로 했다. 본래 주관적인 도덕 감정은 제3자의 동감에 의해서 객관적 타당성, 사회성을 얻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 설은 공리주의적 도덕론의 선구가 되었다.

경제·정치의 문제에서는, 흄은 상공업을 중시하여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무역론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스미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정치이론가로서는 종래의 자연법적 계약설을 취하지 않고, 실증주의적 입장에 서서 국가의 기원을 논하고 현실의 국가가 정복과 힘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열성적인 토리 당원(黨員), 보수주의자 흄의 휘그적·로크적 계약설에 대한 비판을 나타내는 것이다.

흄의 영향은 이와 같이 극히 다방면에 미치고 있다. 칸트의 인식론에 미친 영향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스미스의 경제학설, 공리주의의 도덕론, 나아가서 버크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사상도 흄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사상사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로서의 흄의 사상이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인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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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性論 (1739-1740)

흄 자신이 "인쇄기에서 사산(死産)했다"라고 한 주저. 로크의 <인간오성론>, 버클리의 <인지의 원리>와 함께 영국 경험론 철학의 기본적인 3부작을 이루며 총결산이 되기도 한 저작이다. 서론 및 오성론(悟性論)·정념론(情念論)·도덕론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부제 <실험적 논구(論究) 방법을 정신상의 여러 문제에 도입하는 하나의 기도(企圖)>의 의미가 설명된다. 그것은 뉴턴의 자연탐구 정신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는 일이었다.

제1편 오성론에 있어서는, 정신의 지적인 측면으로서의 오성을 고찰하여 관념을 인상(印象)에 귀속시켜 인과율(因果律)의 객관성으로 부정하고, 또한 모든 지식을 개연적(蓋然的)인 것이라고 한다. 제2편 정념론은 인간 정신의 다른 측면인 정념을 다루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성보다도 정념이라고 주장한다. 제3편 도덕론에서는 덕(德)과 악덕, 정(正)과 부정의 문제를 도덕감설(道德感說)의 입장에서 구명하고, 다시 사회·정치 문제를 논했다.

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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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神論

계몽 사상에 있어서의 자연 종교. 신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또 우주의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일종의 유신론(有神論)이지만, 한편에서는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신의 존재나 우주의 법칙을 이성으로 알 수가 있다고 간주했다.

17세기에 퓨리터니즘이 인간을 초월한 신의 계시(啓示)를 제창한 것에 대해서, 로크는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이나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에서, 이신론의 입장에서 계시와 이성과의 일치로서 자연 종교를 인정했다.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의 관념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는 있으나, 이신론은 영국에서는 하버트(1583-1648)에서 시작되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되었다.

자연 감정에 의한 우주의 합리적 질서를 구상한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1671-1713)을 비롯하여 톨랜드(1670-1722)나 볼링브로크(1678-1751) 등이 대표적인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도덕철학 (도덕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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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哲學(道德學派)

18세기 영국의 철학상의 1파. 공리주의에 반대하고, 인간 내부에는 도덕감(道德感:모랄 센스)이 천성적으로 구비되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도덕적 기초이며 또한 사회질서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중심 인물은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인데, 선구적으로는 17세기의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 및 리차드 컴벌랜드(1631-1718)에서 나타났고, 샤프츠버리 이후에 프랜시스 허치슨, 조지프 버틀러 등이 이를 계승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도 완전히 일치되어 있던 것은 아니고, 이신론이나 공리주의에 대한 입장도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나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점은, 홉스적 유물론이 사회 질서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반대하여 질서의 근거를 인간의 선천적인 감각 또는 원리에서 구했다는 점에 있다. 이 시기에는 공리주의와 대립되었으나, 스미스와 벤담 단계에서는 공리주의의 흐름에 흡수된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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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Adam Smith (1723-1790)

영국의 경제학자.

스코틀랜드 동부의 커칼디에서 출생. 글래스고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1751년부터 글래스고 대학의 논리학 교수를 지냈다. 1764년 동 대학을 퇴직하고 버클 공작의 가정교사로서 프랑스를 여행했고, 이 여행 중에 주저 <국부론(國富論)>의 집필을 시작했다. 귀국 후에는 고향인 커칼디로 은퇴하고, 연구에 전념하여 <국부론>을 완성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의 관세위원(關稅委員)에 임명되었고, 또한 1787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총장에 선출되었다.

스미스의 저작 중에서 그의 생전에 간행된 것은 <도덕정조론(道德情操論)>(1759)과 <국부론>(1776)의 두 가지밖에 없으나, 그의 사후에 스미스의 초고(草稿) 등을 바탕으로 간행된 것으로는 <철학논문집> <글래스고 대학 강의> <국부론 초고> <수사학(修辭學)·미문학(美文學) 강의>가 있다. 이러한 저작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국부론>으로서, 거기서 스미스는 그 이전의 경제학설을 비판하면서, 분업(分業)에 따른 생산력의 발전이 상품 경제에 도달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에 의해 상품 교환의 법칙을 밝히고, 자본·노동·토지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성을 제시했으며, 나아가서 자본 축적의 법칙을 추구하여 처음으로 자본주의 경제 법칙의 과학적 해명에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부론>은 경제학의 최초의 체계이며,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정책적으로는 자유방임의 경제정책 제창자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미스의 사상 체계는 결코 협의의 경제학의 내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글래스고 대학 강의>는 정치·법률·국방의 문제를 논했고, 또한 <도덕정조론>은 시민사회를 내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도덕 문제를 다루어, 인간이 이기심에 의해 행동하면서 공감(共感)의 원리 때문에 시민사회의 질서를 낳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스미스의 저작은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영향은 지극히 크다.

도덕정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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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情操論 (1759)

애덤 스미스가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을 때의 저작.

내용은 7부로 나누어졌고, 제1부에서는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를, 제2부에서 제6부까지는 상찬(賞讚)과 처벌의 근거, 의무의 감각, 미(美)와 효용에 관해서, 관습과 유행에 관해서, 미덕에 관해서 논했으며, 제7부에서 종래의 도덕철학의 여러 학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여기서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인 행위의 규준(規準)이라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에서의 질서의 원리였다. 스미스는 그것을 '공감(共感)'의 원리로서 전개시키고 있다. 즉 자기의 행동이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자기를 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기 행동을 시인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사회적인 행위의 규준이 된다고 스미스는 생각한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기심의 철학을 주장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질서를 파괴하는 따위의 방종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객관적인 행위 규준 때문이었던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자기를 본다는 것을 스미스는 '내재(內在)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다는 식으로도 말하는데, 행위의 규준을 이와 같이 사회적인 장(場)에 두고 생각한다는 점에 영국 경험론의 도덕철학의 커다란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국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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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富論 (1776)

애덤 스미스의 주저. 경제학의 최대 고전 가운데 하나.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강의하면서 <도덕정조론>을 저술했는데, 시민사회(市民社會)의 구조를 더욱 구명하기 위해서 법학 및 경제학 체계를 구상하여 여행 중에 프랑스의 경제학자와 교우하면서 이 구상을 성숙시키고, 귀국 후 10년에 걸쳐서 <국부론> 저술에 임했다. 이것이 출판되자 대단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수년 동안에 각국어로 번역되어 문자 그대로 경제학의 불멸의 고전이 되었다.

<국부론>의 내용은 5편으로 나누어졌고, 제1편은 노동 생산력의 증대 원인, 제2편에서는 자본 축적의 원칙, 제3편에서는 경제발전의 여러 단계, 제4편에선 중농주의(重農主義)와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비판, 제5편에선 재정 문제가 논해지고 있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의 최대 공적은 자본주의 사회를 상품 생산의 구조로서 다룬 점에 있으며, 자유 경쟁에 의한 자본의 축적과 분업(分業)의 발전이 생산력을 상승시켜 모든 사람의 복지를 증대시킨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된 주장이었다.

이론적으로 스미스는 아직 몇 가지 혼란이 있고, 특히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투하(投下) 노동량이냐 지배(支配) 노동량이냐, 생산적 노동이란 무엇인가, 화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점은 애매하나, 이러한 혼란을 통해서 오히려 자본가·노동자·지주라는 3계급의 관계가 명백해져서 잉여가치 생산과 그의 착취(搾取)에 관해서도 시사(示唆)를 남겼다.

나아가서 분업이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도 인간을 기형화(畸形化)한다는 문제나,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여 미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방향도 <국부론>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 후의 경제학은 모두 이 서적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상식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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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land 常識學派

영국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파국적인 회의론을 낳아 객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사상가의 한 무리가 18세기의 스코틀랜드에 출현했다. 이것이 토머스 리드로 대표되는 상식학파이다. 그들은 인류 공통의 의식과 모순되는 흄의 철학을 비판하고, 지식의 기초를 상식에서 찾았다.

즉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밑바닥에는 근원이 되는 판단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건전한 상식의 직관(直觀)능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칸트의 인식비판(認識批判)에 통하는 바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탐구되지 못했다.

이 파의 유력한 사상가로 토머스 리드, 비티(1735-1803), 오즈월드( ?-1793), 스튜어트(1753-1828), 토머스 브라운(1778-1820), 해밀턴(1788-1856) 등이 있다.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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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Thomas Reid (1710-1796)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애버딘 대학에서 배우고, 후에 교수가 되었다. 1764년 애덤 스미스의 후임으로 글래스고 대학으로 옮겨가서 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 해 주저 <상식의 원리에 입각한 인간 정신의 연구>를 발표하여 상식의 철학을 주창함으로써 흄의 파괴적 회의론에 반대하는 사상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진리란 증명의 필요가 없는 직접적인 자명(自明)한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며, 그 원리는 우리들의 의식의 근원에 있는 직관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에 의한 지식을 상식이라고 하면서 인간 지식이나 도덕의 보편성·객관성을 논증(論證)하려 했다. 이 사상은 흄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영국에 널리 영향을 주었고, 또한 루아이에 코랄(1763-1845), 주프루아(1796-1842) 등에 의해서 프랑스에도 전해졌다.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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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nd Burke (1729-1796)

영국의 정치가·정치사상가.

더블린의 법률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65년부터 1794년까지 하원의원. 또한 휘그 당수(黨首)인 로킹암경(卿)의 사설비서. 1770년 <현대의 불만의 원인에 관한 고찰>을 집필하여 의회의 확립·정당 정치의 원칙(王權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했다. 그의 의회에서의 연설은 미국 식민지 의회의 청원(請願)을 지지한 것으로서, 페인과 함께 미국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는 반대하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제 고찰>(1790)을 집필하여 프랑스 혁명의 기본 원리인 인간의 자유·평등을 주장하는 자연권·자연법 사상을 비판했다. 각국의 보수주의자는 모두 이 자연법 사상을 비판했기 때문에, 버크는 근대 최초의 보수주의자의 원조(元祖)라고 불렸다.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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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Thomas Paine (1737-1809)

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을 맹렬히 지지한 민주주의적 사상가.

영국 노퍽주 셋워드에서 출생, 선원(船員)·콜세트 제조직공을 거쳐 수세관리(收稅官吏)가 되었다. 1772년 수세관리의 임금 인상 운동을 지지하여 이 무렵부터 정치에 눈뜨게 되었다. 운동 실패 후, 벤저민 프랭클린의 주선으로 도미(渡美)하여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지(誌)의 편집기자를 거쳐 편집장이 되었다.

1776년 <코먼 센스>를 집필, 당시 독립을 주저하던 식민지인을 독립으로 내딛게 하여, 그의 명성을 미국과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프랑스로 건너가서, 라파예트 등과 만나 프랑스 혁명에 호응하고, 영국의 민주화를 추진시키려고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제 고찰>을 비판하여 자연권(自然權)의 입장에서 <인간의 권리>(1791-92)를 집필했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의 박해를 받아 프랑스로 피신, 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1809년에 사망했다.

코먼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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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Sense (1776)

페인의 주저. 미국 독립전쟁 시기의 성전(聖典)이라고 불린다. 식민지인이 렉싱턴의 싸움(1775)에서 승리한 다음에도 의연히 자치의 확대를 주장하고 독립에의 결단을 주저하고 있을 때, 이제 독립은 상식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이 출현했던 것이다. 식민지인이 독립을 주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영국 국왕과 그 민주적 정치 제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독립하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에 있었다.

페인은 이 책에서 자연권의 입장에서 세계적으로 상찬(賞讚)되고 있는 영국의 정치 형태는 세습(世襲)군주와 비민선적(非民選的)인 귀족원(貴族院)의 존재로 인해 반드시 민주적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독립에 의해서 진정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당시의 미국 경제를 분석하여 독립 후에도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책은 익명으로 출판되었으며, 순식간에 50만 부(당시 미국의 인구는 300만)나 팔렸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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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主義

프랑스에서는 다만 '철학'이라고 불린다. 18세기 10년대, 가톨릭 신앙의 권위주의, 금욕이나 복종의 윤리에 반대하는 본능과 지성의 저항이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 아래 문학가 사이에 일어나서 1715년 이후가 되자 이성적(理性的) 비판으로 발전해 나갔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디드로는 앙시앵 레짐(舊制度) 사회에 고착(固着)하는 종교적 편견, 사회적 기성관념에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볼테르는 이신론(理神論), 종교적 관용(寬容)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며, 몽테스키외는 신랄한 사회·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이 기간, 데카르트의 이성(理性)은 정적(靜的)인 진리의 선험적(先驗的)인 보유자라는 성질에서 기능적(機能的)인 진리의 추구자(追求者)라는 성질로 변했으며, 한편에서는 영국에서 뉴턴 물리학의 경험주의, 로크의 감각론(感覺論) 등이 수입되어 이러한 요소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체계(體系)라기보다 모든 학문 연구를 매개(媒介)하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표되는 해는 프랑스 사회의 경제 번영, 경제 자유주의의 성장을 배경으로 계몽주의의 결전(決戰) 개시기라 불린다. 앙시앵 레짐 사회에 대한 자연법(自然法)이나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차츰 체계화되어, 1752년에는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결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철학자 가운데는 콩디약, 엘베시우스, 라 메트리 등과 같이 감각론, 이신론의 입장에서 유물론, 무신론(無神論)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도 나타났고, 한편 정치 비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과 같이 전체 사회질서에서 국가의 기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1770년경 이미 계몽주의는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1707-1790)의 정치적 활동의 영향 등에서 자극을 받아 사회·정치 변혁의 이론적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모루레(1727-1819)나 마블리(1709-1785) 등이 이 세대이며, 자연법을 하나의 구체적 목표로 하고 공동 소유의 사회를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철학은 전국의 개명적(開明的) 부르주아를 사로잡아 '생각하는 대중'을 조성(造成)하는 것으로써 실천적인 변혁의 사상이 되었다. 혁명의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이미 계몽주의에 원형(原型)으로서 내포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 정치적 역관계(力關係)를 계기로 전개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계몽주의의 인식론, 과학론, 역사론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계승되었고, 한편 보편적 이성(理性)에의 신뢰는 루아이에 코랄, 주프로와(1796-1842) 등에 계승되었다.

몽테스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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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 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18세기 전반 프랑스의 사상가·사회과학자.

프랑스 남서부의 도시 보르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15킬로 떨어진 라 브레드라는 마을에 있는 남작령(男爵領)의 성에서 시골 귀족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1세까지는 출생지에서 농민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후 5년간 파리 근처의 학교에 기숙하고, 다시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학을 배우고, 보르도 고등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법조계의 실무에 만족하지 못하여 철학이나 역사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1709년부터 4년간 파리에 체재하며 계몽사회의 선구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716년 백부의 죽음으로 몽테스키외 남작령과 보르도 고등법원장의 관직을 상속받았다. 1721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판한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서간체의 신랄하고 경묘(輕妙)한 필치로 프랑스 절대왕정하의 사회·정치·문명을 비판하여 호평을 얻었다. 몽테스키외의 주요한 과제는, 첫째 국내적으로 진행중이던 군주제의 전제화에 대항하여 정치적 및 시민적 자유를 실현시키는 문제이며, 둘째로는 국내의 제도·문물(文物)의 부패와 국제적으로는 영국의 세력 확장에 따르는 프랑스의 세력 후퇴에서 유래하는 위기 의식에서 과거의 여러 국민의 몰락·쇠퇴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일이었다.

1734년에 익명으로 간행한 <로마인 성쇠 원인론>은 제2의 과제에 대답하는 연구 성과로서 고대 로마제국 몰락의 원인을 고찰한 역사 연구로서 저명하다. 주저 <법의 정신>은 그의 사상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것인데, 거기에 제시되는 소위 '3권분립'의 이론은,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볼테르와 비견되는 18세기 전반의 프랑스 계몽사상가이며, 1755년 2월 파리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저서로는 <법의 정신>(후술 참조), <페르시아인의 편지>(1721), <로마인 성쇠 원인론>(1734) 등이 있다.

법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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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몽테스키외의 주저. 몽테스키외 자신이 집필 준비에 약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고 말하는 점으로 보아, 1728년부터 31년에 걸친 3년간의 해외 여행도 당시의 유럽 여러 나라의 사정을 실지로 견문함으로써 본서 집필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 된다.

그 후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세계 각국의 서적 1만 권을 읽고, 사료·법전집을 찾았으며, 수많은 해외 여행기를 독파하였다. 본서의 대상은 문자 그대로 세계사적이다. 전체는 31편으로 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론이 있다. 그러나 먼저(제1-8편) 군주제·공화제(민주제와 귀족제를 포함)·전제라는 3가지 정체(政體)의 유지와 부패의 문제가, 정체의 본성(누가 어떻게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는가)과 원리(각 정체에 바람직한 국민의 활동 원리)와의 관계에서 고찰되고, 이어(제9-13편) 외부에 대해서 방어와 공격에 의하여 수호되어야 할 국가는 국내에 있어서 정치적 자유를 실현해야 된다는 것이 설명되었으며, 나아가서(제14-19편) 정치적 자유가 부정된 상태가 고찰된다.

다음으로 정치적 자유와 함께 국가가 추구하여야 할 적극적인 목적으로서 국민의 번영과(제20-23편) 종교와의 관련에서 시민의 복리(제24-26편)가 검토된다. 끝으로(제27-31편) 9세기 말경까지의 군주제 생성사(生成史)가 봉건법(封建法)과의 관계에서 추구된다.

이상의 구성에서 엿볼 수 있듯이 본서의 중심 문제는 군주제나 공화제가 전제(專制)로 변질하는 것을 방지하여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점에 있다. 그럴 경우 어떤 정체의 다른 정체로의 변질이나 그 쇠퇴의 원인이 정체의 본성(本性)과 원리와의 모순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근세 유럽에서 가장 적합한 정체로서는 군주제가 고려되었고, 그것이 전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제도적 보장으로서 소위 '3권분립'이란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제2편 제6장 '영국의 헌제(憲制)에 대해서'). 그러나 그 대목을 주의해서 읽으면, 행정권은 거부권을 가지고 입법권을 제약하며, 입법권도 행정권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시(監視)의 권리를 가지며, 입법권은 특정의 경우 사법권을 제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3권의 분립은 완전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견제이다.

더욱이 행정권은 군주에, 입법권은 귀족에게, 사법권은 인민에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3권분립'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3가지 정치 세력의 상호제약이다. 이 상호제약 중에서 인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군주 없이 귀족 없고, 귀족 없이 군주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군주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방지하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귀족계급이다. 본서의 정치적 자유론은 근대 입헌군주제의 이론으로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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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taire (1694-1778)

본명은 아루에(프랑수아 마리) Francois Marie Arouet.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공증인의 아들로서 파리에서 출생. 루이 대왕교(大王校)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아 섭정(攝政)에 대한 풍자시(諷刺詩), 귀족과의 언쟁(言爭) 때문에 두 번 투옥되어 봉건적 신분제와 전제주의와의 불합리성을 체험했다. 후에 영국으로 망명. 32세부터 3년간의 이 망명 중에 영국의 의회정치를 비롯하여 민주주의적인 여러 제도·풍속·사상·문화와 접촉, 이 때의 견문은 귀국 후<영국 통신>(별명<철학서간>)(1734)으로서 발표되었다. 이 책은 영국과 대조시키면서 절대왕제하의 프랑스를 비판 풍자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국의 추궁을 받자 몸의 안전과 사상의 자유를 찾아 각지를 전전하다가 겨우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에 안주의 땅을 얻었다.

이 사이에도 그의 왕성한 저작 활동은 계속되어, <캉디드>(1759) 등 많은 소설, 희곡을 비롯하여 역사서적인 <루이 14세 시대>(1751), 역사론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1756)이 발표되었다. 특히 페르네에 안주한 후의 그의 계몽활동은 더욱 눈부셔서, 각국의 명사·지식인으로부터 '페르네의 장로(長老)'라고 칭송받으며 만족한 만년을 보냈다.

볼테르의 본령(本領)은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과 풍자, 광신(狂信)·불관용(不寬容)·사회적 편견에 대한 투쟁이며, 그의 종교 비판은 당시의 사상계에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철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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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學辭典 (1764) 볼테르의 철학적 에세이집으로서 그가 페르네에 안주한 후 쓰여진 비교적 만년의 작품.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 전반을 가리키며, 거기에 관해서 그가 견문하고 생각한 바를 알파벳순으로 항목을 나누어서 논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사전에 담긴 항목 수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증가하여, 생전의 최종판으로는 118에 달했다. 그리고 다루어진 범위도 넓어서, 종교·철학·정치·경제·자연과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있는데, 그 기조(基調)를 이루는 것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라 해도 좋다. 그것은 무신론자·광신·종교재판·은총(恩寵)·관용 등의 항목에서 직접 지적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종교적 편견의 타파에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역사·철학·과학·도덕에 관한 지식과 견해가 동원된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크며, 후에 무신론이나 유물론(唯物論)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또한 다른 항목, 예컨대 평등, 국가·정부, 전쟁, 법률, 지배자 등의 정치 항목에서는 인간의 평등성, 개인의 존엄, 권리의 불가침성, 평화주의가 강조되어 1789년의 '인권선언'을 예고하고 있으며, 물질, 목적, 궁극인(窮極因), 관념, 감각 등의 철학 항목에서는 과학적 실증주의가, 나아가서 경제 항목에서는 자유주의가 주장되고 있다.

콩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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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그르노블에서 출생, 리옹과 파리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운 다음 수도원장(修道院長)이 되었는데, 후에 수사직을 버리고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여 퐁트넬, 디드로, 루소와 교우가 되었다. 처녀작 <인식기원론(認識起源論)>(1746)에서 로크의 경험적 인식론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려 했으나 1754년에 공간(公刊)된 <감각론>에서는 그것을 철저화시켜서 인식의 원천을 감각으로 일원화하여 마음의 모든 기능을 외관(外官)의 감각에서 이끌어 내야 한다고 했다. 그의 학식은 볼테르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어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의 지지를 얻었는데, 그는 끝내 협력자가 되지는 않았다.

1768년에는 프랑스 학사원(學士院)에 들어갔다. 만년인 1776년에는 경제학의 저작 <상업과 정치>를 저술하여, 효용가치론에 입각하여 중농주의(重農主義)를 비판했다.

감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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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

콩디약의 주저로서, 감각론적 인식론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이다. 콩디약은 로크의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을 참고로 하면서 로크에게 아직 남아 있던 2원론적 형이상학을 극복하면서 그것을 감각론의 방향으로 더욱 철저화시키려고 했다.

본서에서 콩디약은 인식의 기원을 외적 지각(감각)과 내적 지각(반성)에서 찾는 로크의 2원론을 버리고 내적 지각의 내용도 외적 지각에서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주의나 기억이나 상상 등, 일체의 심적 작용도 '변형된 감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한 개의 대리석 입상(立像)을 상정(想定)한다. 그리고 그것에 먼저 후각(嗅覺)을 부여하는 일로 출발하여, 다음에는 청각, 미각, 시각, 촉각을 부여하고, 거기에 따라서 주의, 기억, 상상, 판단, 욕망, 의지 등이 생긴다는 것을 논증(論證)하려 한다. 그러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컨대 주의(注意)는 지각(知覺) 내부의 강도가 강한 것에 향해지는 것으로서 일어나며, 기억은 감각기관에서 뇌(腦)로 전달된 자극이 남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 콩디약의 <감각론>은 엘베시우스에 의해서 공리주의의 도덕론으로 결합되었고, 또한 카바니스, 데스튀트드 트라시 등의 관념학에 계승되었다.

백과전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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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科全書派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프랑스의 <백과전서>(1751-81)에 집필하고, 그 간행에 협력한 계몽사상가들을 말한다. 두 사람의 편집자 외에 볼테르, 그림, 케네, 조쿨, 튀르고, 뒤클로, 돌바크, 폴보네, 마르몽텔, 루소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백과전서>의 주임 편집자 디드로가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간행을 완성시킬 수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상가들의 협력에 의해서이며, 말하자면 디드로를 중심으로 한 폭넓은 사상의 통일 전선이었다. <백과전서>가 기획되고 간행된 때는 혁명 전의 구제도(舊制度) 시대이며, <백과전서>는 그 아래에서 당시의 선진적인 학문 및 기술을 집대성하여 보급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간행과 집필에 협력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점은 전제주의의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며,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이다.

이리하여 백과전서파는 이성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회질서의 실현을 목표로 <백과전서> 속에서는 이를 위한 원리를 제공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러나 그들이 이성의 실현을 위해서 생각한 것은 결코 혁명이 아니라, 계몽적 전제(專制)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백과전서파가 가진 하나의 제약(制約)인데, 선진적인 사상·학문·기술의 계몽과,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보급은 혁명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겠다.

디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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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Denis Diderot (1713-1784)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중 한 사람.

파리 동남방의 랑그르에서 출생했다. 파리로 나와 철학·문학·자연학을 배운 후 문필 생활로 들어가 루소, 콩디약과 알게 되었다. 1746년에 최초의 저작 <철학적 사색(哲學的思索)>을 출판했으나 발매 금지. 1749년에는 <맹인서간(盲人書簡)>을 무서명(無署名)으로 간행했으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후 그는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백과전서>의 간행에 힘쓴 결과 제1권을 1751년에 간행했다. 그 후 두 번에 걸쳐서 판매 금지, 간행 금지의 탄압을 받았으나 1772년에 드디어 전권을 간행했다.

그의 일생은 거의 이 대사업에 소비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사이에도 그는 철학·문학·연극에 관한 저술을 계속하여 <자연의 해석에 관한 사색>(1754), <달랑베르의 꿈>, <부갱빌 항해기 보유(補遺)>(1772),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1773)를 발표했다. 그의 사상의 출발점은 회의(懷疑) 사상이며, 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이신론(理神論)에서 차츰 무신론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맹인서간>에서 엿볼 수 있는데, 한편 이 책에서 그는 유물론(唯物論)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유물론은 기계론적(機械論的) 유물론을 넘어서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에 가까워져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중심인물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의 최후의 말은 "철학에의 제1보는 불신(不信)이다"라 한다.

라모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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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집필, 79년까지 몇 번 가필)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디드로의 대화 형식으로 된 소설. 이 작품은 그의 사후 20년이 지나서 괴테 번역의 독일어판으로 비로소 공간(公刊)되었고, 1821년 반대로 번역되어 최초의 프랑스어판이 나왔다는 보기 드문 운명을 거쳤다. 그의 자필 원고에 의한 결정판이 나온 것은 1891년의 일이다.

18세기 풍자문학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나'와 '그' 두 사람의 대화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18세기의 대작곡가인 라모의 불초한 조카로서 돌팔이 음악가이다. 사교계의 유력자에게 몰려드는 기생자(寄生者)의 한 사람으로서 시시한 생활을 해왔던 '조카'가, 후원자의 비위를 건드려서 길바닥으로 쫓겨나와 회한(悔恨)과 자조(自嘲)에 빠졌을 때에 '나'와 만난다. 그리하여 표현력이 풍부한 몸짓과 팬터마임으로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자신이 연출하면서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천재, 교육, 사교계, 악당(惡黨), 음악 등에 관한 것인데 '그'는 신랄한 야유와 경구(警句)와 역설(逆說)을 섞으면서 이것들에 대한 깊은 관찰과 통찰(洞察)을 '나'에게 이야기한다. 그 예리함과 정확성은 철학과 진리를 설명하는 '나'를 당황하게 할 정도이나, '그' 자신은 '철학자'의 무력함을 조소(嘲笑)할 뿐이다.

헤겔은 '그'로 상징되는 사회 의식 속에 의식의 분열과 발전의 예를 발견하여 이를 높이 평가했는데, 마르크스가 이 작품을 상찬(賞讚)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달랑베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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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

디드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화> <달랑베르의 꿈> <대화의 계속> 등 3부작 중 하나이다. <자연 해석에 관한 사색>(1754)과 함께 그의 자연철학을 전개시킨 중요한 저작. 전저(前著)에서는 물질과 정신의 2원론을 부정했으며, 디드로는 본서에서 이를 더욱 철저히 하여 당시의 생물학, 생리학, 해부학 연구를 흡수하면서 유물론적인 견해를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뿐이며 이 물질은 영원한 자기 운동을 한다. 또한 모든 물질은 감성을 갖추고 있으며, 정지적(靜止的) 감성과 능동적 감성이 각각 무생물과 생물에 부여되고 있는데, 양자는 결코 불연속이 아니다. 또한 종래의 광물, 식물, 동물의 구별도 절대적이 아니라 상호간에 서로 이행(移行)하는 것이다.

디드로가 본서에서 전개한 것은 철저한 유물론으로, 그는 인간에 특유한 기억, 의지, 판단 등에 관해서도 그 근거를 물질의 기능에서 찾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달랑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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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알랑베르)

(장 르 롱) 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로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중 한 사람.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파리의 성(聖) 장 르롱 교회 앞에 버려졌던 것을 가난한 유리 직공의 아내가 데려다가 양육했다. 처음에 그는 법학과 의학을 배웠으나 후에 수학에 강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여 25세 때 <역학론(力學論)>을 저술했다. 이는 해석역학의 기초를 이룬 뛰어난 업적으로서, 그는 이것으로써 제1급 수학자와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

1747년에는 디드로의 권유로 <백과전서>의 편집에 협력하였으며, 자신도 1751년에 나온 제1권에 <서설>을 써서 뛰어난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그것은 모든 영역의 인간 지식에 대한 내적 연관을 나타내려 한 것이며, 여기서 과학의 분류가 시도되었다. 철학적으로는 감각론적 인식론의 입장을 취하고, 또한 종교적으로는 유물론자만큼 반종교적은 아니나 신의 존재에 수많은 회의를 표명했다.

돌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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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올바크) Paul Henri Thiry d'Holbach (1723-1789)

18세기의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독일의 부유한 상인 집에 태어나 후에 프랑스로 귀화. 부친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학문을 애호하여 파리의 자기 집을 살롱으로 삼아 유명한 철학자나 문학가를 초대했다. 주로 백과전서파 사람들이 모였는데 디드로, 엘베시우스, 콩디약 등이 늘 찾아왔으며, 달랑베르·루소도 자주 출입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러한 사람들의 사상적 영향을 강하게 받아 주저인 <자연의 체계>는 디드로와의 합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특히 디드로의 유물론, 콩디약의 감각론, 엘베시우스의 이기주의의 영향은 확실하다.

주요 저서로는 <자연의 체계>(후술 참조), <폭로된 기독교>(1756),

<종교의 관용에 관하여>(1769), <사회의 체계>(1773) 등이 있다.

자연의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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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

돌바크의 주저. 유물론과 무신론을 체계화한 이 책은 박해를 예상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바꿔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본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자연과 그 법칙, 인간, 영혼과 그 기능, 불사의 교의(敎義), 행복'이라는 제목으로서 주로 그의 물질관, 자연관, 인간론, 정치론이 전개되고 있다.

<신성(神性), 그 존재의 증명, 그 속성…>이라는 제목의 제2부는 거의 종교론이다.

돌바크에게 자연이란 힘과 운동을 지니는 물질의 집합이며, 따라서 스스로의 내부에 원동력을 갖는 것이므로 거기에 초자연적인 힘을 상정(想定)할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연을 물질성에 의하여 포착했으며, 정신현상에 관해서도 그것을 감각기관과 신경을 통하여 뇌수에 전달된 외계의 자극으로써 생겨난 것이라 하여 유물론적인 감각론을 확립시켰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인간론으로 옮겨 인간의 행동 동기를 이해관계에서 찾았으나 그것은 개인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론으로서는 최대다수의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제2부에서 그는 부패한 교회 제도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은총, 기적 등 신학상의 원리에까지 비판을 가하여 철저한 무신론을 전개시켰다.

이른바 프랑스 유물론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본서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라 메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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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n Offroy de La Mettrie (1709-1751)18세기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론 철학자.

브르타뉴 해안의 생 말로에서 포목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는 부친의 희망에 따라 신학을 배웠으나 중도에 의학으로 바꿔 랭스의 대학에서 배웠다. 후에 라이든으로 가서 임상 의학 교수법의 창시자인 부르하베에게 사사. 1735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스승의 학설을 보급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다가 얼마 후 파리에 나와 근위연대의 군의(軍醫)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1745년에 그는 헤이그에서 <영혼의 자연지(自然誌)>(후에 <영혼론>)를 출판했으나 당시 파리의 대학과 의사계를 상대로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분서(焚書)당하는 비운을 체험하고 실의 속에 라이든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인간기계론>을 저술했다.

그러나 이 책도 얼마 후에는 다시 종교계의 증오를 사게 되어, 그는 프로이센으로 피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 들어가 대왕의 전임강사로서 죽을 때까지의 몇 해 동안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인간기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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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機械論(1748)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 라 메트리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

그의 라이든 망명 중에 저술된 것으로서 초판은 서명 없이 겨우 6-8부밖에 인쇄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1748년의 베를린판이라고 한다. 출판 시초부터 종교계의 격렬한 증오와 비난을 받았다.

이 책에서 라 메트리는 전저(前著) <영혼론>에서 전개한 영혼의 유물론적 해석을 더욱 발전시켰다. 우선 인간의 영혼에 관한 철학자들의 학설을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크게 나눈 뒤, 이 책에서 그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육체의 여러 기관(器官)에 의존하는 것이며 인간의 내부에서 생각하는 부분에 불과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는 경험과 관찰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로 생리학의 도움을 얻어 풍부한 자료를 정리하여 논증에 힘썼다.

그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는 없으며 다만 뇌조직의 우월에 의하여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가장 우수한 뇌수를 지닌 동물인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 의하면 동물은 영혼이 없는 기계이나, 영혼이란 뇌의 물질적 조직 자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경험을 쌓은 기계라야 한다. 그리고 뇌는 이 기계 전체의 '태엽'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철저한 유물론 사상과 기계론으로 프랑스 유물론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되었다.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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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10일 만에 모친이 사망하고 10세 때 부친이 가출하는 등 육친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소년 시대를 보냈다. 16세가 되자 제네바에서 떠나 방랑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동안에 바렌 부인과 알게 되어 1740년까지 부인과의 공동생활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행복한 시기이기도 했으나 이윽고 부인과의 사이도 싸늘해졌으며, 한때 리옹에서 가정교사를 지낸 후 1742년에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는 살롱에 출입하며 평가를 받으려 했으나 내성적인 그는 살롱의 분위기에 익숙해지지 못했으며, 또한 디드로나 달랑베르 등 백과전서파와도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에 자기를 적응시키려고 한 노력이 실패하자 루소는 마침내 이와 반대로 오히려 사회를 공격하고 비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 당선 논문인 <학술예술론>(1750)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학문예술의 발전이 인간의 미덕을 상실케 하고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 비판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로써 일약 유명해진 그의 사회 비판은 이후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인간불평등기원론>, <정치경제론>(1775) 등의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후자는 <백과전서>의 한 항목으로서 쓴 것이나 이 무렵부터 백과전서파와의 견해 차이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며, 여성 문제도 얽히고 해서 그는 파리의 살롱 생활에서 은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완성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쓴 것이 곧 <사회계약론>과 <에밀>이다.

이 가운데서 전자는 그의 정치사상의 도달점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후자는 당시 상당히 많이 읽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루소의 이름을 전 유럽에 떨쳤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에 대한 비판과 박해도 시작되었으며, 이에 답하여 그는 <산으로부터의 편지>(1764)를 쓰기도 했으나 자기 자신은 또 다시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한때는 상피에르섬에서 안정된 생활을 보내거나 흄의 초대로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결국 1770년에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남기려는 의도로 <고백>(1782-89 발표)을 집필했다. 이것은 그의 자서전이며 자기 분석의 저술이기도 했다. 그 후 은퇴를 하려는 경향은 더욱 짙어졌으며, 1776년 이후에는 자기 내부에의 폐쇄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때의 심경을 쓴 것이 <고독한 산보자의 꿈>(1777-78)이다. 1778년에 그는 조용히 맑은 심경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루소의 정치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는 중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인간불평등기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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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不平等起源論 (1755)

루소의 대표적 저술. 1753년에 디종의 아카데미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으로 시인되는가>라는 현상 논문을 모집하자 루소는 이 논문을 써서 응모했으나 낙선, 2년 후에 제네바 공화국에의 긴 헌사(獻辭)와 많은 주석을 달아 출판되었다.

루소의 이론적 저술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의 하나로서, <사회계약론>과 직접 결부되는 내용을 지닌다. 본문은 2부로 나뉘며, 제1부는 자연 상태의 서술, 제2부는 사회 상태의 형성과 그 아래에서의 불평등한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은 고립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자기 보존의 본능밖에 없는 자연인이다. 자연인이 지니는 감정은 순수한 자연 감정이며 자기 보존의 욕망인 자기애도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자연 상태 아래에서는 불평등이란 추호도 없으며, 자연인은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집단생활에서 이익을 발견하게 되며 원시적 생활은 파괴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최초의 사회에서는 이미 퇴폐의 징후를 볼 수 있으나 아직은 아주 타락하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의 청년기이며 루소가 가장 행복한 시기로 보는 황금시대이다. 농업과 야금(冶金)의 발달은 그러나 사유 재산을 낳고 불평등과 빈곤을 증대시키며, 지배와 복종을 확대시키고 폭력이 횡행토록 한다.

그리고 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맺고 국가의 설립을 인정한다. 그것은 허위의 사회계약이나, 그것으로써 국가 권력이 승인되고 사유(私有)를 지키며, 불평등을 영속케 하는 법이 확정된다.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는 것이 합법적인 권력의 자의적인 권력에의 이행이며 이어 전제주의의 출현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불평등은 최고 단계에 이른다. 이번에는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일단 상실한 자연 상태를 다른 기초 위에 회복토록 하는 사명을 환기시킨다.

최후 전제주의 단계가, 루소가 현실로 본 프랑스 절대왕제의 사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거기서부터의 자연 상태의 회복에 관해서 이 저술은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론>의 문제인 것이다.

사회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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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契約論 (1762)

역시 루소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 1755년 무렵부터 백과전서파와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 루소가 파리의 살롱 생활에서 은퇴할 생각으로 그 이전에 완성시킨 것이 이 <사회계약론>이며, <에밀>과 같은 해에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은 당시에 반드시 이해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루소는 백과전서파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박해마저 받아 실의와 불행의 만년을 초래했다.

<사회계약론>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다를 바가 없으나 전자에는 새로운 사회의 적극적인 구상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후자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체는 4편으로 나뉘는데 이론적인 기본은 '일반의지'론과 '사회계약'론의 둘이다.

'일반의지'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의지를 말한다. 루소는 사회 상태에서 그것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그는 그것을 국민의 의지 속에서 발견한다. 국민의 일반의지야말로 주권의 기초이며 법이나 정부도 거기서 나온다. 이 국민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이며 그르친다는 예외도 없고, 타인에게 양도나 분할도 못한다. 따라서 주권 또한 절대적이다.

이 루소의 주권론은 가장 철저한 국민주권론이며, 더구나 그는 거기서 국민주권의 절대성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따라서 루소가 구상한 국가는 의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직접민주제의 국가이다.

국민의 일반의지에 바탕을 둔 국가를 형성하는 수속을 제시한 것이 '사회계약'론이다.

각 개인은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면서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의 약속을 하고 국가를 형성한다. 이 약속이 사회계약이다. 그것은 주권자인 개개인 상호간의 약속이며, 지배자에 대한 국민의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론>은 국민주권을 주장하고 혁명 내지 저항권을 정당화하는 혁명적인 고전이었다.

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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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e (1762)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에 의거한 국가의 형성을 논했던 루소가 정치적 과제에 대하여 새로운 인간 주체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 <에밀>이다. 부제 '교육에 관해서'가 제시하듯이 이것은 루소의 교육론이나 전통적인 교육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금서로서 박해를 받았다.

<에밀>은 에밀이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이상적인 교육자가 전담하여 교육을 시킨다는 이야기이다. 에밀은 전원의 자연 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자라 자연인으로서 교육을 받는다. 루소는 오로지 교육을 받는 자에게만 주목하여, 어린이의 심신 발달에 따라 각 시기에 적응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논했으며, 어린이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단계를 다섯으로 구분하여 각 단계를 <에밀>의 5편으로 나누었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각각 감각적인 생활, 공리적인 생활, 도덕적인 생활의 시기이며, 거기에 적합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루소는 교육의 종류에 관해서 자연의 교육, 사물의 교육, 인간의 교육이라는 세 가지를 생각하나 이 가운데서 기본이 되는 것은 자연의 교육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인의 교육으로서 적합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렇게 해서 인간은 사회에 의해 타락하는 일이 없는 자연인으로서 교육되어야 한다고 논했던 것이다.

콩도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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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Jean An­toine Nicolas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프랑스의 수학자·정치가.

처음에는 수학을 연구하여 과학 아카데미의 상임서기,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튀르고의 친구가 되어 사회와 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입법의회, 국민공회의 의원이 되고 국민교육제도 확립에 힘을 기울였으며, 1793년에 지롱드 헌법 초안의 기초자가 되었으나 이는 의회에서 부결되고 마침내는 고발까지 당하여 파리의 한구석에 숨어 있으면서 <인간정신 진보의 역사적 개관>(1973)을 집필했다.

그 후 거리에서 체포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 책은 계몽주의 역사철학의 집약으로서 놀라운 낙관주의로 인류의 무한한 완성을 지향하는 진보의 발자취를 더듬은 것이며, 인간 지식의 발전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를 10기로 구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