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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기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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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e期-思想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에게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아테네는 그리스 전토의 폴리스군(群)을 규합하고 동맹을 맺어 맹주국이 되었다. 신구세력의 격렬한 분쟁 속에서 특히 페리클레스가 실현한 적절한 민주정치는 아테네 시민의 활동을 정치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충분히 신장시켰다.

이 시기에 그때까지 동과 서의 식민 도시에서 발생·발전한 학문과 사상이 일시에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그 전수(傳授)를 담당한 자는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자연철학자와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도 페리클레스에 심취하여 튜리오이(남이탈리아)의 식민활동에 참가하다가 아테네에서 <역사>를 저술하였고, 아낙사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초청을 받아 아테네에서 30년간을 체재, 과학자로서 활동하면서 합리사상(合理思想)을 고취하는 한편 아르케실라오스와 에우리피데스를 가르쳤다.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잡을 무렵(전 443) 젊은 소크라테스는 불타는 지식욕으로 인하여 아낙사고라스의 서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르케실라오스와 오랫동안 친교를 맺었으며, 유명한 소피스트들과 대담할 기회도 있었다. 아브데라에 있던 프로타고라스는 몇 차례나 아테네를 방문하여 페리클레스와 알게 되었고, 범(汎)헬레네스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 도시인 튜리오이의 헌법 제정을 위촉(전 444)받았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와 사귀게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 유용한 지도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교사라 칭하여 당시 많은 청년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인간 중심의 상대주의적 지식론은 혁명적이었으며 계몽적이고 실질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레온티노이의 사절로서, 아테네에 와서(전 427) 그 호화로운 변론으로 아테네의 청년들을 매혹하였고, 그리하여 이소크라테스(전 436-전 338)와 아가톤(전 446?-?) 및 아이스키네스(전 390?-전 330 이후)를 배출시켰다. 그는 변론술을 엠페도클레스에게 배웠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회의적 니힐리즘을 역설하였다.

아테네 태생의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새로운 지식의 영향으로 소피스트화(化)하여 진취적·비판적으로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아테네 사람은 외래의 것에 대하여 매우 포용적(包容的)이기는하였으나 종교심은 대단히 보수적이었고, 설혹 그것이 정치적인의도로 더욱 촉진되었다고 해도 여하튼 아낙사고라스나 프로타고라스를 불경죄로 추방하였고, 심지어 애국자인 소크라테스까지도 불경한 소피스트의 일당으로 몰아 옥사케 하였다. 그 소피스트들의 언론기술도 아류(亞流)로 되면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빠져 플라톤의 격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 음미의 철학적인 사색과 활동에 전념하던 만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패배로 종결을 보았다. 이 전쟁을 그 때에 추방당한 몸이면서도 처음부터(전 431) 계획적으로 자료를 모아 냉정하게 관찰하여 온 투키디데스(전 471?-전 400)는 <전사(戰史)>를 저술하여 그와 같은 보수당의 키몬을 추방한 페리클레스의 탁월성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도 30인 참주(僭主) 등의 이상행위(異常行爲)를 거쳐 폴리스로서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소(小)소크라테스파는 각국으로 흩어져 갔고, 그들의 철학은 논리 연구나 단순한 처세술로 변해버렸다.

한편 스승의 옥사를 당하여 아테네의 정치에 등을 돌린 플라톤은 이상국가(理想國家) 건설의 꿈을 서쪽에 있는 시칠리아에 걸면서 아테네에는 학원(아카데미아)을 세웠다. 이 학원은 이소크라테스의 학교에 대항해, 아테네 그 자체가 페리클레스에 의하여 그리스 전체에 대한 학교(파이데우시스)라고 불리는 데에 대신하여 진정한 학문의 전당으로서 천년에 가까운 역사(후 529 폐쇄)의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 동안 북방 마케도니아 제국의 세력이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에 미치게 된다. 여기에 대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케도니아로부터 아테네로 와서 아카데미아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와(전 335) 리케이온을 설치하여 실증적·과학적 제학(諸學)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전 323) 이듬해에 그의 철학적 활동도 끝났다. 아테네에서의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의 투사였던 데모스테네스와 신기하게도 생몰(生歿)의 해를 같이하였다.

순수한 아테네 사람으로 폴리스 재건을 뜻하여 이데아의 철학을 설파하던 플라톤과, 아테네 사람은 아니었으나 플라토니스트로 출발하여 폴리스를 근거로 하면서 거기에서 나와 독자적인 실체(實體)의 체계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고전기(古典期)를 대표하고 동시에 후세 철학의 2대 조류의 시조가 된 이 2대 거두(巨頭)가 사라짐과 동시에 폴리스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아테네에는 아카데미아파와 페리파토스파, 그리고 아테네 사람인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적인 학원과 이방인 제논을 시조로 하는 같은 유물론적인 스토아파의 병존이 시작되었다.

소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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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st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라는 나쁜 의미로 평가되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이기고,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의 이념하에서 국가를 건설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에 따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재의 교육을 표방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리하여 이오니아 지방과 이탈리아 지방에서 발전한 자유로운 지적 활동을 계승하여 그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편력하면서 기술적인 지식과 사회적인 지혜를 청년들 속에서 개발하려 했다. 그 최초이며 최대의 소피스트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이다. 전자는 개인을 위주로 한 지식의 상대성과 전진성을 강조하였고, 덕의 교사로서는 종래의 귀족적인 덕에 대신하여 욕지(辱知)와 정의와 우애를, 민중 일반이 가르침을 받아 공유(共有)해야 할 폴리스의 덕이라고 역설하였다. 비싼 수업료를 거두었기 때문에(이는 소피스트 일반에게 해당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먼저 직업인으로서 경멸을 받게 되었다. 고르기아스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허무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동시에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여 기만과 설득에 의하여 사람들을 시의적(時宜的)인 행동으로 유도해 가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긴장한 비극성을 아류(亞流)인 카리쿠레스와 프라시마코스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배덕적인 것으로 타락시켜 힘이 즉 정의라는 논법을 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케오스의 프로디코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변론의 공연(公演)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자연에서 출발하여 언어·지식을 전달한 문명의 인위적인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란 덕론(德論)이 유명하다.

백과전서적인 관심을 보였던 엘리스의 히피아스(전 5세기 후반)는 전반적인 지식 위에 웅변가와 정치가의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또 자연의 법과 인위의 법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수학을 교육의 중요 부분으로 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소피스트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교육의 촉진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인 소피스트가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에 열중함으로써 악명을 뒤집어쓰게 된 일은 프래그머티즘의 원류(源流)라고도 할 소피스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었다.

프로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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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 tagoras (전 490?-전 421?) 그리스의 대(大)소피스트. 아브데라 출신으로 동향의 데모크리토스보다 10세 이상 연장이다. 아테네에 와서 페리클레스의 지우(知遇)를 얻어 튜리오이 건설의 헌법 초안 작성을 위촉받기도(전 444) 하였고 또한 소크라테스와 대담도 하였다. 부유한 청년들에게 민주정치하의 폴리스에 유용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길을 깨우쳐 주는 덕의 교사라 칭하고 많은 액수의 수업료를 징수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아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개인의 감각을 근본으로 한 지식의 상대주의를 역설하였다. 다른 한편, 개인의 감각(경험)을 거듭 쌓음으로써 현명한 정도에 우열이 있으므로 공공단체는 그 우수한 것에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개인은 감각(자연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 공공적으로 뛰어난 지식을 지니도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의 또다른 주장인 "약한 언론을 강한 언론으로 한다"의 목표였다. F.C.S.시러는 프래그머틱한 휴머니즘의 시조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르기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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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gias (전 500/484-전 391/375?)

그리스의 대소피스트.

시칠리아섬에서 출생. 엠페도클레스의 제자. 기원전 427년에 사절로서 아테네에 왔다. 그의 유창한 웅변과 호화로운 문체는 커다란 영향을 끼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주요한 이름을 들어보면 이소크라테스(전 436-전 338), 크리티아스, 아르키비아데스(전 450?-전 404), 투키디데스 등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어도 전하지 못한다"라는 허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한편 언론이 감정에 주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였고, 또한 카이로스(시의적)한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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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 (전 470/469-전 399)

그리스의 철인·철학자. 아테네 사람으로 기원전 399년 2월 혹은 3월경에 아테네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0세 때의 일이다. 아내인 크산티페는 악처의 모델인 것처럼 전하여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원죄(寃罪)였다. 그때 도망을 쳤더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도망을 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죽임을 당하였을까.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매력, 그 특출한 인격, 기인성(奇人性) 등이 앞서 말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 중 하나로 '사명(死命)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을 깨우쳐 주는 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류사와 더불어 계속 살아가는 철인임에 틀림없다.

페르시아 전쟁 말기에 태어나서 만년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만났고 중년에는 세 번이나 종군한, 실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인간성이 궤멸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모랄도 국가가 있으므로 개인이 있는 것이며, 개인이 있고 후에 국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인생론도 논해졌고 자연철학은 지식을 부분적으로 잘라 판다고 말해졌던 소피스트의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학(人間學)으로 바뀌고 있었다. 페리클레스(전 495?-전 429)도 각광을 받아 어느 의미에서 아테네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조각사(彫刻師)의 아들로서 모친은 조산원인 듯하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다이몬(神靈)의 소리를 듣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아낙사고라스의 <자연에 대하여>였으나 거기에서 중대한 결점을 발견해 냈다. 즉, 그것은 자연의 현상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본질(무엇인가)을 묻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미흡하여 소피스트에게도 비판적이 되어 구하는 것 자체가 철학인 것 같은 그러한 길을 밟아 가게 되었다. 구하는 것은 진실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증하는 로고스, 관념(觀念)이며, 개념이 되었다. 이것들이 진리로 향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다시 그 동기가 있었다.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라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폴론의 말이 카이레폰에 의하여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 진의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자각하고 있는가 또는 없는가에 있다. 그것을 자각하면 할수록 사람은 지(知)를 사랑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발견이었다. 여기에 언제 어느 경우일지라도 지(知)를 진정으로 추구해 마지않는다고 하는 신념이 확립된다. 즉 '사명(死命)의 사상'이 성립한다. 그로부터 그는 자기를 말파리로 비유하고, 타락하는 아테네를 말에 비유한다든지 하여, 태만한 잠을 깨운다고 말하면서 무지(無知)의 지(知)의 음미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공명자와 반대자가 생겨났다. 특히 아이러니를 근거로 한 그의 언동은 때로 괴상하게도 여겨졌다. 청년을 타락시킨다든지, 새로운 신을 도입한다고 하는 구실을 반(反)소크라테스의 무리들에게 주었다. 그 가운데는 아니토스 등 소크라테스를 없애려고 노리던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그는 아테네 법정에 고소를 당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변명한다. 그러나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렸다. 가령 옳지 못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조국의 법에 비추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파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애석해 하는 가운데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으면서 태연하게 독배를 들었다. 그의 위대한 제자인 플라톤은 그 경위를 거의 완전하게 그리고 있다.

소소크라테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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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Socrates 學派

소크라테스는 죽은 후에 오히려 되살아난 철인이다. 그의 제자들은 누구 한 사람도 스승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진실을 추구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표(師表)를 살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이며 최고인 제자는 플라톤이었고 그 외의 제자들도 나름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것이 통틀어 소소크라테스 학파인데 여기에는 키니코스 학파(學派), 키레네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 등이 있다.

키니코스 학파는 안티스테네스가 열었는데,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와 테베의 크라테스(전 365경-전 285)가 속해 있었다. 그들이 주장한 바는 덕(德)이란 결국 무욕(無慾)의 행동이다. 만사에 무관심하여 오로지 자유스럽고 독립되어 자기 충족을 추구한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여 이 학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키니코스(Kynikos : 개와 같은)라 불리었다. 크라테스는 교양도 높은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부귀를 버리고 고귀한 신분의 재원(才媛) 히파르키아와 더불어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키레네 학파는 아리스티포스가 열었고 무신론자라고 불리던 테오도로스와 자살권유자란 별명이 있었던 헤케시아스가 있다. 덕이란 향락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하여 순간의 쾌락을 삶의 척도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도 싫증이 나서 자살을 인정하게도 되었다. 메가라 학파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열었으며 에우부리데스와 스틸폰이 속해 있는데 스틸폰은 변증의 재능과 궤변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가라 학파의 특색은 논쟁술이었다. 엘리스 학파는 파이돈이 엘리스에서 창설하였으나 후에 메네데모스가 에레토리아로 옮겼다. 때문에 엘리스 에레토리아 학파로 불리었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대화편(對話篇)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에우클레이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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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cleides (전 450?-전 380?)

그리스의 철학자.

메가라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엘레아 학파가 주장한 존재론과 소크라테스의 윤리 사상인 선과의 결합에 노력하였다. 필연적인 것만이 현실적이며 현실적이려고 하는 것만이 가능적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논쟁술에 뛰어났다.

아리스티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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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ippos (전 435?-전 350?)

그리스의 철학자.

북아프리카의 키레네 출신으로 향락가였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며 그것이 지고선(至高善)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식견과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다운 일면을 엿보이게 한다. 그가 창시한 키레네 학파에는 철학사상(哲學史上) 최초로 나타난 여성이라는 그의 딸 아테도 참가하였다. 교양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거지가 낫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안티스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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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sthenes (전 455?-전 365)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키아 사람을 모친으로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자루를 등에 메고는 거지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인간이란 자기 이외에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에 응해서 그 사람의 우열이 정해진다. 자기는 말(馬)은 볼 수 있으나 말 그것은 볼 수 없다고 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공격하였다. 그는 쾌락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미쳐버리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디오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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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페의) Diogenes (Sinope) (전 412?-전 323?)그리스의 철학자.

흑해 남해안의 소도시인 시노페 출신으로 전설이 많은 것으로유명하다. 코린트에서 사망.

기지에 넘친 기인(奇人)이었다. 맑은 날에는 태양 아래서 명상에 잠겼고, 비 오는 날이면 통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안티스테네스의 제자였는데 그가 다른 모든 제자를 파문시켰을 때에도 디오게네스만은 남겼다고 한다. 사람이란 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목매는 끈을 가져야 한다고도 하였다. 갖가지 고통과 노고를 견디어 어느 때에도 완전한 평정(平靜)으로 충족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거지와 같은 꼴로 무슨 일에나 자연스럽게 행동하여, 사람이 보고 웃으면 그는 조소와 야유를 퍼부을 따름이었다. 오늘날의 시니시즘은 습속과 일반적인 모랄을 무시한 이 학파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무관심의 관심'이 근본에 있었다고 하겠다.

크세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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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nophon (전 434?-전 355)

그리스의 역사가.

아테네에서 출생. 젊은 시절에는 미청년(美靑年)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어디에 가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나"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고 망설이던 그에게 "그렇다면 따라 오라. 그리고 배우라"고 하여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기원전 401년경 키로스의 원정에 참가하여 바빌론으로 갔는데, <아나바시스>는 그 때의 일을 쓴 것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때에는 키로스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직업군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원전 396년 스파르타 왕 아게시라오스를 섬겨 전 394년 아테네의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저술에만 전념하여 <향연(饗宴)> <변명> <그리스사(史)> 등을 썼다. 기원전 385년경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메모라빌리아)을 저술하였다. 철학자로서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맨 먼저 기록 공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메모라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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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回想錄 (Memoranbilia) (전 385?)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이다. 역사적인 소크라테스를 아는 데에 귀중한 문헌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적(史實的) 자료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그 중 크세노폰은 그가 본 그대로 소크라테스를 전하여 주고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들지 않은 점에서 플라톤보다 떨어진다.

내용은 전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 최초의 2장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고, 그 뒷부분은 착하고 아름다운 소크라테스의 인격을 사모하는 기념탑이라 하겠다. 제4권은 전부가 교육론으로서 제3권과 중복되어 있다. 계속해서 집필한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기록한 듯하다.

4권으로 나누어 장과 절을 매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이다(메모라빌리아라는 라틴어 제목은 16세기에 붙여진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아폼네모네우마타라 불리었다. 뜻은 모두가 '회상록'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은 지(知)라고 하는 근본 원리가 실천에 알맞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우인(友人)의 가치는 절대적이어서 모든 재보를 능가한다는 우인론(友人論)을 말하고 있다. 효(孝)와 형제애(兄弟愛) 등과 신·법의 문제, '불문(不文)의 법' 등도 언급했다.

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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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ppocrates (전 460?-전 376?)

그리스의 의학자.

코스섬 출신으로 그의 가계(家系)는 의술의 신인 아스크레피오스에까지 소급한다고 전해진다. 80세 내지 90세 이상 장수하다가 테살리아에서 죽은 듯하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몇몇 전기(傳記)가 남아 있으나 정확한 생애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고 저작의 진위도 잘 알 수 없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다만 어느 전기를 보나 그는 여기저기로 여행하였다고 씌어져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에 관한 저작은 거의 남겨져 있지 않으나 의학만은 예외였다.

기원전 5-4세기의 것은 <히포크라테스 집전(集典)>이란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의학은 철학과 같이 생겨났다. 히포크라테스 의술의 특징은 미신·마술과의 싸움이기도 했으며, 철학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경험에서 출발하여 경험에 의하여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의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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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 (전 427-전 347)

그리스의 철학자.

타르게리온의 달(5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부친 아리스톤의 선조는 코로도스왕, 모친 페리크치오네의 선조는 솔론의 친구인 드로피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말하자면 명문 출신이었다.

젊어서는 시작(詩作)에 열중했고 비극의 창작을 시도했으나 20세경에 만년(晩年)의 소크라테스에게 사사받자 자작시를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28세 때에 경애하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죄상(罪狀)으로 사형을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평생을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오로지 저작에만 전념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40세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고 불리는 아카데미아 창설까지를 그의 편력시대라고 한다. 그동안 그는 메가라, 이집트, 키레네,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 해외 여행을 하는 한편 많은 대화편을 썼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이온>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히피아스> <에우티프론> <메논> <리시스> 등이 그것으로, 이것들을 그의 초기 작품이라 한다.

이 작품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전면적으로 계승하여 타고난 재질과 철학적 재능으로써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부각하였다고 하겠다.

시칠리아 여행 후 플라톤은 아테네 북서쪽 교외에 교육과 연구를 겸한 학원 아카데미아를 창설하고 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는 학원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지어다"라고 써 붙였다. 이것은 신은 항상 기하학을 익히고 있다는 플라톤의 신념을 표시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수학적 추진력과 결부시키려 했던 그의 의욕을 표현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간 그의 60세까지를 아카데미아의 교사시대라고 칭하며 그는 <파이돈> <향연> <국가>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메네크세노스> <에우티데모스>를 발표하였다. 이것을 중기 작품이라하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보통 이데아론이라 불린다.

그런데 그의 이데아론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 점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 실마리로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정확하게 긋는다 해도 전자현미경으로 본다면 정확한 것이 못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삼각형의 이데아이며 직선의 이데아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고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想起說). 소크라테스는 아직껏 도덕에 관한 인식을 성립시키는 근거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이 이데아였다고 하겠다.

플라톤은 60세경부터 80세경까지 사이에 시칠리아의 독재자 디오니시오스 2세와 조카인 디온(전 448?-전 354/전 353)의 초청으로 철인정치(哲人政治)의 꿈을 안고 두 번이나 시칠리아로 건너갔으나 결과는 실패, 디오니시오스 2세는 디온에게 추방당하였고 디온은 암살당해 버렸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만년은 결코 평온하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이드로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법률> 등 만년기의 대화편을 많이 발표했다.

그는 기원전 347년 80세를 일기로 일설에 의하면 집필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서구 사상의 밑바닥에 플라토니즘이 되어 흘러오고 있다. 에머슨이 "철학의 역사는 플라토니즘의 역사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이다. 이데알리즘(理想主義)이란 언어도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장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한 근본 조건인 절대로 빗나갈 수 없는 선의 이데아를 목표로 현실을 높이고 노력하는 태도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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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辨明

플라톤의 4복음서(<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중의 하나로 그의 초기 대화편(對話篇)이다.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다. 즉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神託)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좇는다고 생각하여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斷)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러할수록 진지(眞知)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아테네의 제군,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애지(愛知)에 대한 각오가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하여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제군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 경우를 만나느냐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書)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심혈을 기울여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같은 세대의 사람이나 후세에 전해 주려고 한 불후의 명저이다.

크리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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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중 하나로 <변명>에 이어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일을 이틀 앞둔 날 노우(老友)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 감옥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교환되는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가 이 작품의 내용이다.

크리톤은 온갖 이유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령 자기의 행동이 정의이고 국법이 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에 의해서 개정하든지 아니면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하여 조국과 국법에 대하여 부정(不正)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국이란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도 존엄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 노여움에 대해서는 오직 마음이 풀어지도록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의 보호 아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맞아들여 우리를 낳았다. 조국이 인종(忍從)을 명하는 경우에 그것이 구타든 투옥이든 묵종(默從)해야만 한다. 도망을 치거나 맡은 자리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 이상으로 나쁜 짓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히려 크리톤이 권하는 탈옥에 대하여 꾸짖는 것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면서도 평시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정의의 사람 소크라테스를 선명하게 묘사하는 한편, 국법과 개인의 정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불행한 모순을 문제로서 제출하였다고도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해결은 그의 '국가'일 것이다.

프로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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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이 글은 소피스트로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덕(德)에 관한 대화이다. 덕이란 무엇이며 과연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음미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경건·용기·정의·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덕이, 그것들이 정말로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덕의 본질을 문답 형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만약 이러한 여러 덕의 본질이 지식임을 안다면 덕은 가르쳐진다고 해도 좋으며, 덕은 지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편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이 지식이라는 점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용기·절제 등 여러 덕이 마치 얼굴 가운데서 코나 눈이나 입처럼 각각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태도를 갖지만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사려가 깊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덕이 황금의 일부분처럼 동일하다고 한다면 용기·절제·경건 등등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결론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은 지식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암시가 전체를 통하여 풍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여, 정의(定義)에 마음을 쏟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그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식이라 해도 좋다.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머리에서 생각만 하는 이론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면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체득적(體得的) 지식이라 하겠다.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덕이며 사람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어 간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지(知)는 덕(德)"이며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윤리가 이 대화편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파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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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소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 이 작품부터라고 하며 이는 영혼의 불사론(不死論)이다.

파이돈(전 417?- ? )은 소크라테스의 애제자로서 소크라테 최후의 날의 상황을 친구인 에케크라테에게 들려 준다. 소크라테스는 해질 무렵인 사형집행 때까지 주로 시미아스와 케베스라는 두 사람의 피타고라스 학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태연자약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른 바가 없었다. 한편 그 대화를 듣는 편이었던 제자들은 "방금 웃으며 떠드는가 하면 곧 눈물을 흘린다"라는 식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육체라는 침침한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이므로 진리를 좀처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知)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는 살아 있을 때부터 육체를 정화하여 영혼의 감옥이라 할 만한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즉 살면서 죽음을 행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었을 때 육체는 없어지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서 플라톤은 영혼의 불사(不死)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데아의 생각을 끌어낸다.

이데아는 우리가 현실의 개체를 현실의 개체로 인정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이데아의 원인설이 영혼 불사론의 제1전제가 된다. 그런데 눈(雪)은 눈으로서 눈의 이데아가 현실적인 눈의 원인인 동시에 눈의 이데아는 그것과 본질적인 관계에 있는 냉(冷)의 이데아도 받아들여 그것과 반대 관계인 열(熱)의 이데아를 배척한다. 뜨거운 눈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2전제이다. 그런데 혼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욱이 현실의 생명은 생명의 이데아가 원인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눈이 냉(冷)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열(熱)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죽음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에 불사인 것이다. 이것이 이데아 원인설에 의한 불사의 증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여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는가. 거기에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정의에의 확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윤리적 근거로서 이데아를 안출하여 <파이돈>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태연한 죽음의 근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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饗宴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파이돈>에 이어 써졌다고 추측된다. 이 글은 말하자면 플라톤의 <연애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의 비극 작가인 아가톤이 비극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는데, 축하연이 그의 저택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 파이드로스, 아리스토파네스, 소크라테스, 아르키비아데스 등 약 8명이 등장, 연회에서 각자가 에로스(사랑) 찬미의 연설을 하게 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안드로기노스족(남녀가 등과 등을 마주 대어 일체가 되어 있는 인간의 조상)론(論)을 교묘하게 인용해 가면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으로 유도한다. 소크라테스는 옛날 현녀(賢女) 디오티마에게서 배웠던 일을 그녀와의 대화 형식으로 연설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임신을 하고 있어 낳기를 바란다. 그 뜻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도 죽기 싫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의 대상은 추(醜) 속이 아니라 미(美) 속인 것이다. 이 미에의 생산욕, 이것이 에로스(사랑)이다.

사랑의 첫 단계는 육체의 미 속에 낳는 것이고 그것은 육체에서의 불사(不死)를 구하는 일이며, 아기라고 하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 다음에 정신의 미 속에 낳는 것을 추구하게 되며 또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육체의 미 따위는 근소한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정신의 미라고 하는 대양(大洋)을 향하며, 아름답고 장대한 언론이나 사상을 낳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영역, 영원히 존재하여 생성 소멸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만 다른 면에서는 추악스러운 일도 없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다는 것도 아닌, 항상 불변하여 단일한 에이도스(姿)를 갖는 미 자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 자체를 보면서 그와 더불어 있으며 거기에서 사람은 참다운 덕을 낳고 불멸하면서도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에로스는 처음에는 육체의 미, 다음에는 정신의 미, 그리고 최후에는 미 자체의 세계로 사람들을 높여 불사(不死)하는 보물을 얻게 하는 조력자였다. 그러한 에로스를 찬미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에이도스라든가 미 자체라는 언어로 표현된다.

최후로 아르키비아데스가 애지(愛知)에 살고 있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신의 미 속에서 생산하고 미 자체를 직감하는 진정 사랑의 구현자라고 소크라테스를 찬미한다. 여기서 찬미하는 아르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자신이라고 하여도 좋다. 결국 플라톤의 에로스는 이데아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된다. 이것이 참된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극적인 구성과 교묘한 수사(修辭) 그리고 깊은 진리를 칭송한 이 명저(名著)는 세계의 문헌 가운데 최대의 빛을 발하고 있다.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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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법률>에 버금가는 대작이다. <파이돈> <항연> 등에서 제시한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어떻게 하면 참다운 정의(正義)를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 <국가>의 내용이다.

그는 정의의 본질을 생각함에 있어 그 방법으로 먼저 사상 위에서 국가를 성립시키고, 어떠한 국가가 정의의 덕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런 연후에 그 국가에서 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의의 덕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살기 위하여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4-5인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갖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국가가 형성되면 국내의 통치나 외적의 방어에 종사하는 계급이 생겨난다. 그 결과 국가는 세 계급으로 성립된다. 맨 아래에 서민 계급으로서 농공상인, 그 위에 수비(守備) 계급으로서 군인, 최고의 자리에 통치자로서 철인(哲人)이 있어 국가통치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통치자는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계급에 각자가 목표하는 여러 덕이 있어야 한다. 서민계급에는 절제의 덕, 군인 계급에는 용기의 덕, 통치자의 그것은 지혜의 덕이며, 각각의 계급이 제각기 덕을 보존하여 자기 일을 실천할 때에 국가 전체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이 국가에서는 서민 계급은 사유 재산도 가정생활도 할 수 있으나 다른 두 계급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고 국법에 의하여 우생학적인 결혼이 이루어지며, 출생하는 아이도 출생과 동시에 모친의 품에서 떨어져 공동 육아소에 보내져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 아이들 가운데서 우수한 자는 교육을 더 받아 국가통치 계급에 들어간다. 이러한 세 계급의 덕은 개인의 정신 속에서도 발견될 수가 있어서 서민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정욕적(情欲的) 부분, 군인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기개적(氣槪的) 부분, 통치자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이성적(理性的) 부분이라 하여 그는 각각 절제·용기·지혜의 덕을 목표로 두었다. 이 세 부분이 영혼 중에서 이성적 부분을 통치자로 하여 지배·복종의 관계를 조화적으로 유지할 때에 사람은 정의의 덕을 지닐 수가 있고, 이러한 국가 밑에서 처음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플라톤 윤리학의 골자가 된다고 하겠다.

플라톤에게 이와 같은 국가적 윤리학을 쓰게 한 계기는 먼저 소크라테스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고 하겠다. 한 개인의 영혼이 정의의 덕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을지라도 국가가 그것을 실현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에는 시대적으로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를 지나 개인의 쾌락에서 규준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의 대두와 폴리스 유대의 이완(弛緩)에 대한 우려를 들 수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폴리스는 의연한 부모보다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국가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이데아로서 현실의 국가가 여기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모범이었다. 그러나 시대정신은 그 후에 이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고아카데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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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Academia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전후 약 1,000년간 존속하는데, 특히 플라톤으로부터 크란토르까지를 고아카데미아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죽고(전 347) 조카인 스페우시포스(전 400?-전 339)가 2대째 학두(學頭)가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의 디온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도 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만년의 사상에는 영향을 받았다. 1과 다(多)로써 이루어지는 수학적인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과 이성이나 영(靈)이나 감각적인 여러 물체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말하자면 삽화적(揷話的)으로 이어져 맞춘 그의 자연관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맹렬하게 비평하였다. 그리하여 수학화한 아카데미아에 만족하지 않은 채 그 곳을 떠났던 것이다.

노쇠한 스페우시포스는 8년 후에 학두 자리를 칼케돈 출신인 크세노크라테스(전 396-전 313?)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람도 피타고라스파, 특히 필로라오스에게 관심을 보여 수학을 철학의 예비로 삼았다. 철학을 자연학·윤리학·논리학으로 3분하였고 수학적인 것을 이데아와 동일시하였다. 불멸의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수(數)여서 우주를 위에서 아래까지 꿰뚫는다고 하였다. 약 20년간 학두 자리에 있었던 그의 고결하고 자주적인 성격을 필리포스 2세도 크게 존경하였다. 아카데미아에는 벌써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전 408?-전 355?)도 참가하여 플라톤을 위시하여 학료(學僚)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학자·천문학자·의사·법제가(法制家)를 겸하고 있던 그는 이데아의 초월성을 비판하고 내재성을 설파하여 쾌락을 최고선(最高善)이라 하였다.

이 시기의 수학과 천문학과 종교적 감정을 결부시킨 경향은 <에피노미스>의 저자라 하는 오프스의 필리포스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 기(期) 학원의 경향은 윤리학으로 옮겨갔다. 크세노크라테스에 의하여 철학에 들어서게 된 4대째의 학두 폴레몬(전 314-전 276)은 방종한 생활을 벗어버리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되어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을 윤리 원칙으로 하였다. 폴레몬에 이어 학두가 된 크라테스에 관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두 사람의 우정은 같은 묘에 합장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동료인 크란톨(전 340-전 290)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주석(註釋)을 처음으로 써서 세계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슬픔에 대하여>는 후세에 많은 <위안(慰安)의 서>의 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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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

s (전 384-전 322)

그리스의 대철학자.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이오니아의 식민도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전 367)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는 체계로서 일괄적으로 포착하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오늘날 여러 학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생애의 단계에 알맞게 사상 발전사적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씌어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僭主)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유디머스 윤리학>(미완),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차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群)과 마케도니아 제국(帝國)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융합책(東西融合策)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20세)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聖域)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體育所)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修辭學)(辯論術),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전술한 바와 같이 외부 일반을 위한 대화편이나 연구 메모, 수집 자료집이나 강의 초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외부를 위한 것은 당대에 빨리 유포되었고 또 단편(斷片)만을 남기고 없어져버렸다. 현재 베커판(版)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 가운데 위서(僞書)로 간주되는 것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다. <범주론(範疇論)> <명제론(命題論)> <분석론 전후서>-<자연학> <천체론(天體論)> <생성소멸론(生成消滅論)> <기상론(氣象論)> <데 아니마> <자연학 소론집(小論集)>-<동물지(動物誌)> <동물부분론(部分論)> <동물의 운동> <동물의 보행> <동물발생론>-<형이상학>-<니코마코스 윤리학> <대도덕론(大道德論)> <유디머스 윤리학> <정치학>-<수사학> <시학(詩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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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두기 강의록이라고 하는데, 기초 부분은 아카데미아 시기로 소급될 것이다. 비극과 희극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듯하지만 희극을 다루었을 제2부는 현존하는 책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포이에시스(詩作)는 그 종류를 통틀어 모두 미메시스(모방)라고 하였다. 이 점은 플라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실에서 멀어져가는 외관물(外觀物)이라 하여 댄스와 음악과 같은 화사한 것이나 서사시나 비극 등 시작품은 덕(德)의 형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이상국가(理想國家) 건설의 교육 계획에서 배제하였다. 아울러 사회나 인생에 쓸모가 있다고 하는 변호가 있으면 그것을 용인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플라톤의 말을 받아들여 특히 비극의 본질을 구명하면서 시작(詩作)이 인생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해답하려 하였다.

이 목적에서 그는 리듬이나 멜로디 등 시의 형식면에는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실질면인 모방과 효과를 주로 논하였으며, 특히 작품으로서의 시보다도 시의 제작 내지는 기술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인 모방을 시작의 영역에서 발전적·단계적으로 추구하고, 드라마적인 모방을 완성한 최고 단계로 포착하여, 성실하고 고귀한 즉 선량한 행위의 모방인 비극이야말로 진정 그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비극은 상당한 길이로써 완결된 중대 행위의 모방이다. 그 가운데에는 리듬과 음악적인 언어가 있으며, 등장인물은 연민(憐憫)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의 카타르시스(淨化)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정의(定義)에서 그는 비극은 정념(情念)의 정화(淨化)를 이룩하는 점에서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 정화가 실은 이미 무대 위에서 모방되는 행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복잡한 행위의 구성, 사건의 연쇄, 미토스(줄거리)의 구성 속에서 특히 파리페티아(急轉)와 아나그노리시스(認知) 등이 정화와 관계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 가령 문벌의 사나이인 오이디푸스왕 등의 육친 살해, 기타 욕되고 무서운 행위는 무지(無知)에서 오는 실책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 때문에 부당한 불행 속으로 빠져 가련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지를 인지하는 행위 가운데 이미 오욕(汚辱)의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영웅에 대하여 관람하는 사람편에 공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비극의 구성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이어서 그 속에서의 연민과 공포의 감정도 쾌감으로서 이미 정화되어 있다. 요컨대 비극 속의 행위를 보고 얻을 수 있는 정화는 지적 정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사상이나 언어의 표현이나 무대화(舞臺化)도, 인물의 성격적 일관성이나 행위나 줄거리의 필연성 등도 모두 비극적 행위에 연결되어 있다. 시작이 역사보다 철학적이며, 서사시보다 비극이 발전적으로 뛰어났다는 것, 비극의 전형(典型)을 소포클레스에서 찾은 것은 그의 독자적 행위관, 특히 형이상학적인 에네르게이아(現實態)관에 기인하고 있다.

호라티우스의 <시학(詩學)>과 더불어 때로는 혼합되면서 르네상스 이후 근세 유럽의 문예비평이나 극작에 끼친 영향은 큰데, 그것은 이 책에 들어 있는 시의 실례(實例)나 시작의 일반 규칙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철저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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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而上學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전전(全典)에서 <자연학>의 뒤(Meta)에 놓인 위치로 해서 <자연학의 뒤의 서(書)>라고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의 것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신학)라 하여,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14권으로 된 본서는 그 과제를 다룬 논문의 집성(集成)이며, 처음부터 체계적 순서를 따라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각권 내용의 불일치에 주목하여 거기에 플라토니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적 철학에의 사상적인 발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에겔의 연구(1923) 이래, 각각의 논문 집필 시기에 대해서 사상 발전사적으로 추정하려는 시도가 오늘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몇몇 논문군(群)으로 분류된다. 1권은 아소스 체재 중의 철학사적 고찰, 이어서 3권은 철학 난문집(難問集), 나아가서 4권·6권이 계속되어 제1 철학의 대상인 존재로서의 존재와 존재의 다의성(多義性), 제1 철학은 보편학(普遍學)이냐 또는 신학(神學)이냐가 문제된다. 7권·8권·9권은 학두기의 실체론, 10권은 1과 다(多)의 문제, 12권은 8장을 제외하고는 초기의 신학론, 13권과 14권은 수(數)와 이데아 내지 이데아 수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13권 1-9장이 그 뒤를 받아 같은 주제가 거론된다.

아리스토텔레스 가문에는 조부대대(祖父代代)로 의가(醫家)의 경험적·실증적인 정신의 혈통이 흘러 그것이 동력이 되어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서 큰일을 하게 했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토니즘의 정신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형이상학의 내용 규정에 있어서도 플라톤 주의로부터 실증경험주의(實證經驗主義)에로 직선적으로 사상이 발전하였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경험 형이상학이라고나 칭할 수 있는 것은 1권에서도 엿보인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알고자 한다. 그 증거로서 감각의 애호가 간취된다. 그 뜻은 결국 감각은 그 효용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이미 감각하는 것만으로써도 애호되기 때문이므로"라고 말한다. 이 생래적(生來的)인 지식욕이 감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경험으로, 나아가 기술과 학문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발생적으로 포착하여 "경험자보다도 기술자 편이, 또한 직공보다는 동량(棟樑)의 편이, 그리하여 제작적인 지(知)보다도 관조적·이론적인 지의 편이 한층 더 많은 지혜를 가진다"고 설파한다.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學),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最高善)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畏敬)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質料, 始動, 形相, 目的)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形相)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했으며, 종장을 "많은 통치자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하나의 통치자야말로 바람직하다"고 결론을 맺으면서 만년에 당시의 천문학적 산정(算定)에 의한 천체 운동의 수에 맞추어 다수의 부동의 동자를 도입한 8장이 병존(倂存)하는 것은 그의 제1 철학의 복잡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데아의 내재화 노력은 존재를 실체로 좁히고 감각물을 실체로 보아 그 본질을 아토몬 에이도스(最低의 種)에 있어서 정의하려고 한 7권과, 더욱이 그러한 실체를 가능성(質料)과 현실성(形相)의 결합으로서 동적으로 포착하려고 한 8권에 선명하여, 자연의 개별적 구체성과 동성(動性) 속에 이데아로서 파고들려 하는 날카로우면서도 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색에 경탄할 만한 것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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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machos 倫理學

학두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초고. 전 10권.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전 300)했으므로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다. 대체로 원리론(1권-3권 5장)과 현상론(3권 6장-10권)으로 되어 있다.

먼저 윤리학은 정치학에 직결되고 그것과 일체로 되어 있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들의 행위는 모두 그 어떤 선(善)을 희구하는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가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선의 실현보다도 국가적 선의 실현이 궁극적이고 신적(神的)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때문에 모든 선을 연구하는 윤리학도 통수(統帥)나 가정(家政)이나 변론이란 제학(諸學)과 더불어 정치가에게 결부되는 것이어서, 이 사실은 10권의 종장(終章)에서 명백해진다.

선 내지 최고선은 행복이 되므로 행복의 문제가 1권 4장 이하에서 다루어지고 다시 10권에서 결론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행복은 결국 영혼의 덕(德)을 따른 유동(流動)에 불과하므로 영혼의 두 부분―아로곤(無理的)·로곤(有理的)―에 입각한 두 개의 덕, 즉 윤리적 덕과 지성적 덕을 논하게 된다. 2권에서 5권에 걸쳐 에티케 아레테(윤리적 德)에 관한 일반론과 각론이 전개되고 다시 6권에서 지성적 덕이 논구(論究)된다.

윤리적 덕은 에토스(습관)에 의하여 생기는, 즉 쾌고(快苦)를 수반하는 행위의 습관화에 따른 것이다. 덕이란 이(理)에 의하여 결정된 중용(中庸)에서 성립되는 행위 선택의 상태라고 규정된다. 중용이란 두 개의 악(超過와 不足)의 중간을 일컫는다. 덕을 로고스(比)적으로 본다면 중간이지만 '최고선'이라든가 '좋음'에서 본다면 정점(頂點)인 것이다.

요컨대 덕이란 파토스도 능력도 아닌 성격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중용에 있는 것이다. 갖가지 덕의 표(表)를 갖가지 중용으로 들고 있는 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지극히 현실적·구체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5권 전체를 충당한 중용으로서의 정의론에도 이러한 사실은 찾아볼 수가 있는데, 더 나아가 6권의 사려(思慮) 규정에 있어서 더욱더 명백하다. 프로네시스(思慮)는 지성적 덕이지만 누스(理性)나 소피아(知慧)와도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온갖 선과 악에 관하여 이(理)를 수반한 진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론적인 학문이나 제작 기술과도 달라서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관계되는 사려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다. 말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의 사려도 정치적 사려이다. 사려를 실천적으로 포착한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적인 입장과 커다란 공적이 있다.

7권 후반과 10권 전반에 쾌고(快苦)와 선악 내지는 덕과의 관계가 언급되는데, 전자는 아소스기의 것이며, 다시금 발전한 후자에서는 쾌(快)를 에네르게이아(現實態)로서 포착하여 젊은이의 상냥함에 비유된다. 인간의 쾌라 함은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다운 적극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

8권·9권의 필리아(友愛)론도 행복인 덕론(德論)을 보충하는 중요한 것이다. 필리아는 서로가 알려져서 마음에 지니는 호의(好意)이다. 완전한 필리아는 덕이란 점에서 동류(同類) 사이에 성립되지만 드물다. 자기의 이성을 사랑하는 자애(自愛)를 중심으로 이기(利己)와 이타(利他)가 문제로 되어 있다.

10권 후반에는 궁극적인 행복을 이성의 활동에서 구하여 그것이 자족적(自足的)이고 한가해서 인간에게 가능한 한도의 무피로적(無疲勞的) 기타 조건을 모두 갖추어 신적(神的)으로 되면서도 이 순수 관조(觀照)로서도 이것을 함께하는 자가 있다면 더욱 좋다고 하는 부언을 잊지 않는다. 결국 덕과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자족적인 순수 관조마저도 인간의 경우에는 친애에 의하여 보완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덧붙여 말하면 10권 종장에서 청소년을 덕으로 바르게 인도함에는 법률이 필요한 것과 법률과 국제(國制)의 수집이나 검토가 인간에 관한 철학을 완전하게 한다고 역설한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련을 알려준다.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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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學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두기(學頭期)에 강의한 초고. 전8권, 다만 2권·3권·7권·8권(未完)은 아카데미아 시절의 것이라 한다.

1권은 서론으로서 폴리스(국가)의 정의(定義)와 구성에 대하여 논했으며, 국가의 고찰에는 분석적·발생적 방법이 쓰였다. 국가의 최소 부분인 가정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자연적으로 구성되는, 즉 생산을 위한 한 쌍의 남녀와 주인과 노예의 상호보전적인 결합으로 성립된다. 이어 하나 이상의 가정에서 마을이 되고, 하나 이상의 마을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자족적인 공동체가 성립한다. 이것이 국가(폴리스)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궁극적 목적인 국가는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국가적(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전체는 부분보다 우선하는 것이 필연적(必然的)이므로 국가는 가족이나 개인보다 우선한다고 강조된다. 공동할 수 없는 것이나 공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그것은 새나 짐승이 아니면 신이라고 한다.

3장 이하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거론된다. 지배와 피지배는 자연적·필연적이어서 유용하다는 확신 아래 노예지배를 도덕적으로도 정당화하려고 한다. 결국 노예란 살아 있는 도구이며 가축 정도밖에 유용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 자유인은 전쟁과 평화의 일을 가져서 국민생활에 유용하다고 한다. 다시 주인과 노예의 바른 구별은 덕(德)·부덕(不德)에 의한다고도 한다. 또한 부녀자에게는 남자와 다른 덕을 인정하고 있다.

2권은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의 이론이나 현실의 최선이라고 하는 국가제도(스파르타, 크레타 등)를 비판한다. 3권에서는 국민과 국가와 국가제도의 관계를 논한다. 사려(思慮)의 덕을 가진 훌륭한 지배자 아래서만이 훌륭한 인간과 선량한 국민이 일치한다고 한다. 4권에서는 정치학은 현실의 것을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현실의 여러 국제와 그 변종(變種)을 서술한다. 참주제(僭主制)는 최악의 것이고 과두제(寡頭制)는 그 다음, 민주제는 중용을 취한 것이라 하여 "빈부 중간의 안정된 사람들이 인구로 보아 다수인 국가에서 정치하는 자가 중간에 위치하여 생활하기에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라 하여 결국 중간적 국제가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4권의 다음에는 민주제와 과두제의 조직 방식을 논한 6권이 나온다. 그리하여 5권에서 국제의 변혁을 평론한다. 이익이나 명예 때문에 '균등'이란 잘못된 이해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내란부터 시작된다. 끝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있는 변혁에 관한 주기성(周期性)이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7·8권에서는 최선의 국제가 고찰되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플라토니스트로서의 색채가 짙다.

각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행복은 같은 것이며 최선의 생활은 철학자의 사유(思惟) 활동이라고 하는 점이 주목된다. 지배자의 교육에 대해서 이지(理智)를 목표로 한 인간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 먼저 출산, 유아 교육, 음악 중심인 소년의 덕육(德育)을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미완으로 그치고 있다.

요컨대 <정치학> 전체는 권(卷)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아 이상론과 현실 기술(記述)이 짜여 이루어지면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인 덕과 중용론(中庸論)으로 일관되어 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소수자의 신적인 관상(觀想) 생활을 국가 존립의 최선의 목적으로 하고 정점으로 삼은 국가론이, 동시에 노예의 자연필연성과 유용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페리파토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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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es 學派(Peripatos 學派)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도들과 산책하면서(페리파테인) 강의하고 논의한 페리파토스(산책길)에서 유래되어 페리파토스 학파(소요학파)라고도 불린다.

이국인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 있는 동안의 학교(리케이온)는 일반 공개의 김나시온(體育所)을 차용한 것이었으나 2대째 학두 테오프라스토스에 이르러 파레론의 데모토리오스의 원조로 비로소 부지(敷地)나 시설, 성전을 갖춘 학원이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칼키스로 떠난(전 323) 뒤에 학교의 지휘를 이어받아 또 한 사람의 수제자인 로도스의 유디머스와 공동으로 직무와 연구에 임했다. 먼저 스승의 강의와 기타 편집과 간행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키는 데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학문적 방법 중 하나인 학설사적(學說史的) 연구를 진전시켜 각각 전문분야에서 전기(傳記)나 사상을 정리하였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자연학 특히 감각론의 역사를, 유디머스는 기하학·산수·천문학 등의 역사를, 탈라스의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음악사를, 디카이아르코스는 그리스인의 생활사를 썼다. 특히 마지막 두 사람의 학설에는 피타고라스파 학설(영혼의 조화설 등)이 들어 있다.

3대째의 학두인 람프사코스의 스트라톤( ? - 전 270/268)은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지며 그 하강(下降)운동만이 유일한 자연운동이라 하였다. 즉 스승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떠나 에피쿠로스파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원자론(原子論)과 달라서 세계의 내부에만 무한과 공허(空虛)를 허락하였고 스승의 질적 역동설(質的力動說)에 따라 시간과 운동의 연속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혼을 육체 전체로 퍼지는 프네우마라고 하여 지적 활동도 그 운동이며 사상은 감각적 인상이 약한 반향(反響)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는 순수한 감각주의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키프로스의 크레아르코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젊었을 때 주장한 것과 같이 영혼의 유리(遊離)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두 경향이 있다는 것은 도그머티즘(독단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 파(派)의 특색임과 동시에 다른 학파처럼 영속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4대째 학두인 라이콘(전 270-전 226) 및 후계자들은 실천철학적(實踐哲學的) 관심이 주가 되었다. 6대째 학두 크리트라오스는 최고선(最高善)을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한 영혼과 육체와 운동 등 세 개의 선(善)을 총체라고 한다든지, 7대째 학두인 티로스의 디오도로스는 덕에 무고(無苦)를 더한다든지 하여 스토아 학파와 유사해진다. 또한 로도스의 하이어로니머스는 쾌(快)의 결여(缺如)로서의 아포노이아(無苦)를 최고선이라 하여 에피쿠로스 학파와 흡사하게 되면서도 부동의 쾌(快)를 아파티아(無苦)라고 한 에피쿠로스와도 다르다.

그런데 테오프라스토스가 유언으로 스케프시스의 네레우스에 맡겨 지하실에 비장된 그 문고는 그 후 애서가(愛書家) 아페리콘이 아테네로 가져 오게 되었고, 다시 스라가 로마로 반입하여(전 86) 곳곳의 사설 문고에 수장되었다. 이런 경로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원고는 문법가 티라니온의 복사를 기초로 10대째 학두인 안드로니코스에 의하여 로마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유포되고 있던 여러 저작(대화편 등)에 이들 학문적인 저작을 대립시켰다. 먼저 오르가논을 만들어 철학적인 예비 학문으로 삼음과 동시에 다른 저작도 체계적인 견지에서 배열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도 아직껏 근본적인 개혁이 어려운 아리스토텔레스 전전(全典)(코르브스)인 것이다.

이 전전을 기초로 하여 그 후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석과 연구는 진행되었다. 페리파토스파의 최후이며 최대 주석가는 3세기 후반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이다. 그는 <형이상학> <분석론 전서(前書)> <감각에 대하여> <기상학(氣象學)>, 기타 주석을 썼다. 그는 아테네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누스론(論) ―― 우리들의 지성은 결부되어 있어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지적 대상을 알 때에 신 스스로가 우리들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 ―― 은 에스파냐의 아베로에스 해석의 본이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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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phrastos (전 370?-전 288?)그리스의 철학자.

레스보스섬의 에레소스 출신. 그곳의 아르키포스에게 배웠고 이어서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활동했다. 스승이 칼키스로 물러갔을 때(전 323) 학교를 인계받았다. 또 한 사람의 수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독소스와 공동으로 저작물 간행이나 학설의 보충 및 발전에 노력하였다.

먼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학설사(<감각론> 등)를 정리하였고, 논리학 영역에서는 삼단논법에 제1형식의 간접양식을 도입한다든지 명제나 결론의 양상(蓋然·可能·必然)과 가정적(假定的) 또는 이접적(離接的)인 복합명제(命題)를 연구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형이상학에서도 문제의 정리를 하고 있다. 자연학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설에 반대하여 우주의 영원성을 변호하였다. 윤리학에서는 행복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으나 외적 생활 상황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스승의 생물 연구를 식물 연구로 확대하여 분류법을 구사함으로써 식물학을 확립시킨 일이다. 더욱이 스승의 윤리학서에서도 볼 수 있는 성격 분류를 진전시켜서 <성격론>을 저작하였다. 라 브뤼예르의 <성격론>은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