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교육사상/서양 고대의 교육/그리스의 교육

그리스의 교육〔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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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敎育〔槪說〕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 개성의 존중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적인 교육은 그리스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육은 국민 개개인의 지적 훈련과 인격의 도야에 목표를 두었으며,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국민으로 하여금 그 이상을 향하여 진보·발전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또한 그리스인은 시민권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또 시민을 교육시키는 수단·방법으로써 학교를 사용한 최초의 국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양문명의 창시자로서의 그리스인의 천재적 성격은 교육의 본질에도 나타났으며, 시민의 지적인 해방과 정치적 자유정신은 시민계급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이러한 것들은 교육을 통하여 발달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교육을 가장 현저하게 발달시킨 곳은 아테네(Athenae)와 스파르타(Sparta)였다. 이 두 도시국가의 교육제도는 극히 대조적이고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들의 교육과 철학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들을 찾아볼 수 있기는 하나, 그 기본적 목적만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육목적은 강력하고 용감한 병사와 충성심이 강한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는 폴리스(polis)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페리클레스 시대(B. C. 5세기 중엽)를 경계로 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와 신 그리스 시대로 나누어지며, 신 그리스 시대의 제2기인 마케도니아의 승리(B. C. 4세기 말)를 계기로 그리스 문화는 국민문화에서 세계문화로 전환·발전하게 되었다.

호메로스 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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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ros 時代-敎育

고대 그리스 시대는 그 전기(前期)인 호메로스 시대와 유사시대(有史時代)로 나눌 수 있는데, 호메로스 시대는 전설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완전한 인간상으로서 예지인(叡智人)과 실천인(實踐人)이라는 2개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자는 오디세우스(Odysseus)에 의하여, 후자는 아킬레스(Achilles)에 의해서 잘 대표되고 있다. 호메로스의 시가 이 시대의 주된 교육내용이었으며, 교육을 위한 별개의 특별한 조직이나 방법은 없었다.

유사시대는 초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두 도시국가의 교육을 포함한다면, 그 시대는 교육의 사회적인 면에 중점을 둔 이른바 그리스 민족의 사회적 전통에 대한 교육이 행해진 시대였다.

신 그리스 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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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Greece 時代-敎育

이 시대는 다시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제1기는 종교 및 도덕상의 사상적 과도기였다. 즉, 이 시대는 그리스의 국민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과도기로서, 새로운 철학사상이 발달하고 새로운 교육실천이 형성된 시대이다. 이른바 소피스트(sophist)의 사상이 당시의 철학사상을 대표하고, 소피스트의 교육방법이 교육실천으로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배출된 것도 이 시기이다.

제2기는 세계주의 시대로서, 이 시대는 그리스 민족이 조국을 상실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생활이 세계주의적이 되고, 그리스인은 세계시민이 되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의 꽃을 피게 한 시대였다. 교육은 점차 그리스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서 국가주의·단체주의의 교육 대신 개인주의·이기주의적 교육이 되었다. 또 종래의 실천적·의지적 교육이 주지주의(主知主義) 교육으로 변했다.

그리스의 문화는 곧 그리스의 교육이상과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인들은 교육을 인격의 장식으로만 생각하고, 교육과 직업을 완전하게 분리했으며, 체육에 의하여 우미(優美)한 신체를 연마하고, 학술에 의하여 탁월한 지혜, 즉 판단·총명·식견 및 웅변술 등을 함양하여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한 공민(公民)을 육성하는 것을 그들의 교육이상으로 하였다.

아테네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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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ae-敎育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실지로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종래의 귀족 정치는 각 지역의 민중(demos)이 다스리는 데모크라시(demo­cracy)로 변하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그들의 교육적 견해에도 반영되어 이에 따라 아테네의 교육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을 그 초기로 하고, 그 이후를 후기 아테네의 교육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다.

아테네 초기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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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ae 初期-敎育

초기 아테네의 교육은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민족성과 인간생활을 배경으로하여 자유스럽게 발달하였고, 인간성을 개발하여 다방면에 능력을 가진 조화있는 인간의 형성을 그 이상으로 하였다. 아테네의 교육목적은 '지혜로운 사람(man of wisdom)'이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보다 더 강조되었고 아테네인은 심신과 영혼의 우아한 미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시민의 자격을 얻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적 교양이라고 믿었고, 교육은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시민의 자격을 얻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항상 도덕에 대한 전통적 이상을 보호하는 엄격한 공적 의견을 가지고, 국가의 종교적·사회적·정치적·군사적 행동에 참가하여 개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아테네의 교육은 개성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모든 국민이 개인적으로 풍부한 교양을 쌓고, 시민으로서 자기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말하자면 자유인을 위한 교육이었다.

아테네 교육의 실제적인 면을 보면, 출생에서 7세까지의 유아기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8세에서 16세까지는 사설음악학교와 공공체조학교에 다니면서 음악학교에서는 일기·쓰기·셈하기과 시·현악기·거문고·피리 등을 배우고, 체육학교에서는 체조와 운동경기의 훈련을 받았다. 이상의 두 학교에 갈 때에는 소년들은 언제나 노예인 교복(敎僕:paidagogos)을 따라다녔다. 16세에서 18세까지는 공립체육학교(gymnasium)에서 운동경기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여기서 동료나 선배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면서 시민생활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18세에 이르러 시민으로서의 준비가 구비되었음이 입증되면 시민부(市民簿)에 등록하고, 국가에 충성한다는 서약을 한 다음, 그 후 2년간은 군무(軍務)에 봉사한다. 20세가 되면 완전한 시민권을 얻고 자유로운 시민생활로 들어간다. 아테네의 여자교육은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테네의 여자들은 다만 가정에서 가사·재봉 등의 가정생활에 필요한 것을 습득하였고, 지적 교육은 오히려 여자의 정숙과 덕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결과 아테네의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자를 사회적인 면에서나 또는 지적인 면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 후기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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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enae 後期-數學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 및 문화적 중심지가 되고, 이에 따라 교육의 특색은 점차 민주주의적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발생함에 따라 교육도 개인주의를 중요시하고, 전통적인 국가적 훈련주의는 개인적 교양교육으로 변하게 되었다.

한편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복리보다 더욱 중요시되고, 정치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증대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 때문에 웅변술의 필요성이 아테네 청년들에게 요구되고,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웅변술과 수사학 및 그 밖의 지식을 교수하던 소피스트들은 감각론을 주장하고 보편타당한 진리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다. 이들은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현세(現世)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필요한 지식이나 웅변술을 교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개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국가주의에 반대했다. 그들은 물질적 보수나 일정한 봉급을 받고 교육을 직업화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아테네 청년들의 흥미를 정치쪽으로 돌리게 하고, 정치가로 출세·성공하려면 수사학과 웅변술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시대 청년들의 교육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들은 자칭 지자(智者)라고 하여 철학자로 행세하며, 가두에 나가 보수를 받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체조학교나 음악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은 세력을 잃게 되고, 아테네의 교육은 점차 개인주의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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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rta-敎育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사이에서 큰 세력을 가졌던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그 중에서도 스파르타는 군주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그 교육제도의 특색도 대체로 군국주의식 교육이었다. 스파르타의 교육목적은 극기(克己)와 엄한 기율(紀律)의 생활을 통하여 호전적(好戰的) 시민을 훈련하는 데 있었다. 즉 각종 신체적 훈련을 통하여 강건하고 민첩한 육체로 단련시키는 한편, 군사훈련을 통하여 용감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스파르타의 교육목적이었다.

이것은 스파르타의 생활이 군사적 기초 위에서 조직되어 있으므로 교육목적도 시민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원래 호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목적도 군국주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강한 힘·용기·복종력·인내력을 기르면서, 또한 조국에 대한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이와 같은 교육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아는 출생과 더불어 신체검사를 해서 허약아는 산속에 버려 죽게 하였으며, 합격 판정을 받은 아이만 7세까지 가정에서 길렀다. 8세가 되면 부모에게서 떠나 18세까지 국가가 마련한 공동교육소에 수용되어 엄격한 육체적 단련과 애국교육을 받게 했다. 18세부터 20세까지는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고, 이어서 30세까지는 군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또한 스파르타의 교육내용은 지적인 면보다 신체적인 훈련을 중시하였다. 즉 신체의 성장과 발달을 위한 군대식 훈련을 받으며 전투방법과 기술을 배웠다. 씨름·창던지기·말타기·수영 및 뛰어넘기와 활쏘기 등이 그들의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 음악도 이에 맞추어 군대음악과 노래, 군대식 춤을 곁들었다. 지적인 면에 있어서는 호메로스의 시, 리쿠르구스(Lycurgus)의 법률을 암기시키는 정도의 간단한 것이었으며, 독(讀)·서(書)·산(算)은 극히 초보적인 것을 가르쳤다.

교육방법은 교수라기보다 일종의 훈련이었다. 무자비한 체벌에는 군대식 훈련방법과 전투방법을 사용하였다. 체벌의 목적은 심한 고통을 참는 습관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교육방법은 극히 엄격하고 강제성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체벌이 무자비하게 과해졌으므로 극히 엄격한 교육방식이었다.

앞서 말한 교육목적은 비단 남자교육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여자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교육도 7세까지는 주로 가정에서 담당하였으나, 그 후에는 일정한 수에 따라 몇 개의 반으로 조직되어 국가의 감독 밑에 유희와 신체적 단련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스파르타 여자교육의 특색은 ① 건강한 신체로써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하는 것, ② 정절(貞節)을 지키는 것, ③ 남자와 같이 나라를 사랑하고 의무를 지키며 법률을 준수하는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이 스파르타의 여성교육은 강한 무사(武士)의 어머니로서 혹은 아내로서 애국심에 불타는 여성으로 양성시키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상과 같이 스파르타의 교육은 군사적인 목적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비군사 내지 일반 문화적인 발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상공업의 성장도 보잘것이 없었고 문학·조각·건축·연극·철학 등의 인문적인 면에 있어서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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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敎育思想

소크라테스는 "지식은 덕이고 덕은 지식"이라고 하여 지식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학행일치(學行一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지식과 덕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지식은 사고력이나 경험의 분석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지식은 사고력의 발전을 목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가치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덕은 지식에서 유래하며, 지식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신념을 검토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세계를 애지(愛知)의 세계로 개선하여 진리를 보급시키는 것을 일생의 교육목표로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즉,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하나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통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는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의 과정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진리는 명백한 개념에 의하여 파악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문답법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2단계에 의하는 것으로서 먼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져서 무의식적인 무지에서 의식적인 무지로까지 이끌어내고, 이어서 질문을 계속하여 의식적인 무지에서 합리적인 진리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를 흔히 '대화법' '조산술(助産術)' '귀납법(歸納法)' 또는 '변증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독단론(獨斷論)을 배격한 채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지식과 덕의 긴밀한 관계를 주창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의 교육사상 전체에서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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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敎育思想

플라톤은 개인의 교육을 국가의 조직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부시키고, 이 관점에서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였다. 그는 훌륭한 시민의 양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모든 교육의 근저로 심신의 건전한 상호작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지혜·절제·용기·정의의 4가지 기본도덕을 지닌 '선미(善美)한 인간'의 조화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육의 목적을 개인적 완성에 한정짓지 않고, 나아가서 가치·지혜·봉사·정치적 재능을 그의 교육철학에 도입하여 이를 그의 사상의 4가지 지주로 삼아 '훌륭한 시민'의 배양을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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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le-敎育思想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생활의 영위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그는 개인이 타인과 접촉할 때 이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교육체계를 요망했다. 인간의 최고기능은 사고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는 데 있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통한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보고, 이 행복은 중용(中庸)이란 덕과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중용의 덕을 가진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원(成員)으로 교육할 수 있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교육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직업적(생산적) 교육이 아니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토록 하는 교육인데, 이를 위한 교육으로 읽기·쓰기·셈하기·음악·체육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은 문화인의 교양을 쌓는 것이며, 음악은 한가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체육은 건전한 신체를 갖게 하여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더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육의 조직이나 내용은 아동의 성장형태에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아에게는 동물놀이·신체적 활동·이야기 등으로 교육시키며, 14세 이전의 아동들에게는 도덕적·신체적 교육을 중시하여 체육·음악·독서·쓰기 등을 가르치되 이론이나 법칙의 교설(敎說)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한 안정된 습관을 확립케 하기 위해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21세가 될 때까지의 청년들은 수학·문학·천문·음악·문법·시·수사학·윤리학·정치학 등 지적인 학습을 시켜야 하며, 21세 이상의 대상자들에게 과학과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방법은 자연발달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었다. 처음의 불합리한 신체적 교육에서 점차로 합리적인 정신적 교육을 지향하며, 정신교육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욕망에서 합리적인 이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체적 교육에서 습관으로 향상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이성의 교육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진정한 교육방법이라고 했다. 즉 체육(體育)·훈육(訓育)·교수(敎授)의 3분야로 나누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