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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건축
편집고전주의 건축
편집古典主義建築
19세기는 크게 근대화되어 현대를 향해 발전해간 시대인데, 처음에는 유럽적으로 고대 예찬과, 프랑스에 있어서의 나폴레옹의 로마제국에 대한 동경을 반영하여, 고대 그리스의 양식을 강하게 채택하고 있는 건축과, 프랑스에서는 로마시대의 양식에 따른 건축이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의 문화를 벗어나 공공적인 건물이 굉장한 발전을 보인 시대인데,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에투아르 광장에 있는 유명한 개선문이 샬그랭(1739∼1811)의 설계에 의한 것으로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30년이 걸렸으며, 뤼드와 그 밖의 작가의 제작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부조식(浮彫式) 조각을 장식하여 전형적인 로마 양식을 취하고 있다.
또 파리의 마들렌 사원(寺院)도 비뇽(1762∼1828)의 설계로 되어 있고 사원이면서도 그리스 신전의 양식을 가장 강하게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간결성을 담은 건축은 독일에서 번성을 보여, 조각 분야의 덴마크의 토르발센과 더불어 북방의 고전주의의 대표자로 일컬어진 건축의 싱켈(1781∼1841)을 배출하고 있다. 싱켈은 후일 낭만주의적인 경향도 보이나, 베를린의 국립극장은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고대의 간결함과 엄정함을 북방의 환경 가운데서 살리고 있다. 싱켈의 작품에는 또한 베를린의 구미술관(舊美術館)이 있으며, 클렌체(1784∼1864)도 강하게 고대 양식을 살려, 레겐스부르크의 발할라 전당(殿堂)은 고대의 신전을 연상케 하고, 그리고 그 외에 뮌헨의 조각관 등 여러 작품이 있다.
또 영국에서는 스머크(1780∼1867)의 설계에 의한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있고,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도 고전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낭만주의 건축
편집浪漫主義建築
19세기의 전반기는 나폴레옹 실각(失脚) 후 각국은 제각기 재흥(再興)을 목표로 한 활동을 보여 각국에 국가주의가 왕성하였다. 그 때는 이미 전유럽에 공통적인 경향으로서, 문학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고대 취향(古代趣向)에 대한 반동으로서 낭만주의가 출현하였는데, 건축에서는 각국의 민족적 모태인 중세기로 향한 회고(懷古)를 심화시켜서, 중세 고딕양식의 근대화된 채용(採用)이 행해지고 있다. 또 동시에 당시에는 중세의 사원과 건조물(建造物)의 수리가 성행되고 각국이 모두 고딕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독일에서는 건축가 싱켈이 이 방면에 있어서도 활약을 보이나, 뮌헨에 있어서 게르트너(1792∼1847)가 르네상스를 회고케 하는도서관을 건설했고, 프랑스에서는 설계활동은 적었으나 비올레르 뒤크(1814∼1879)가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을 비롯하여 각지의 건조물을 수축(修築)하였고, 그의 저서는 중세건축에 대한 인식을 크게 환기시켰다.
또 영국에서도 문사(文士)인 러스킨이 그의 저서인 <건축의 7등(燈)>과 <베니스의 돌>에서 중세건축의 아름다움을 기술하여 커다란 관심을 끌었으며, 고딕양식을 채택한 건축에서는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유명한데, 바리(1795∼1860)와 퓨진에 의해 설계되어, 중세 특유의 수직(垂直)의 선을 살려 하반(河畔)에 회화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절충주의 건축
편집折衷主義建築
19세기의 후반에 들어 두드러진 경향은 단지 한 가지의 역사적 양식을 채택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갖가지 양식을 결합시켜 시대와 환경이 요구하는 새로운 건축미를 창출하는 경향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양식과 바로크 시대의 번잡한 화려함 등이 서로 뒤섞여 나타나 있고,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도시의 흥륭(興隆)이 매우 현저하여 각지에 건축이 많이 세워졌는데, 그 중 젬퍼(1803∼1879)는 르네상스 양식을 연구하여, 드레스덴에는 그의 작품으로 오페라 극장이 있고, 빈에서는 수도건설의 계획에 참여하여 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프랑스의 몽마르트르에 희게 눈에 띄는 사크레 쿠르 사원(寺院)도 로마네스크 양식을 채택한 건물이며, 라브루스트(1801∼1875)는 파리의 생 쥐느비에브 도서관을 통해 세련된 정면(正面) 건축을 보여주었으며, 가르니에(1825∼1898)는 오페라 극장을 설계하여 파리의 중심지에 알맞은 화려성을 보여주어 유명하다.
기능시대의 건축
편집機能時代-建築
19세기 후반기는 모든 것이 현대로 향해 급변하는 시대이며, 건축은 미술의 다른 부문보다도 한층 현실사회의 활동에 연결되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이미 이 시대에는 궁전과 사원의 건축을 떠나 공중적(公衆的)인 건축이 크게 등장하는 시기로서, 기계의 발달은 건축의 방법을 변화시켜 건축은 종전보다도 훨씬 합리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그간에 재료의 변화도 현저하여 철(鐵)의 사용이 일반화되고, 유리의 성능도 새로워지고, 철근·콘크리트의 등장도 간편한 점에서 건축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았다.
영국에서는 1851년에 런던에서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가 개최되었는데, 그때 팍스톤(1801∼1865)이 설계한 수정궁(水晶宮)은 철과 유리로 된 건축으로, 석재와 벽돌로 되는 건조(建造)와 판이하여 전유럽의 건축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건축은 외관을 자랑하기보다는 용도를 중심으로 내부구조에 관심을 쏟아 프랑스에서는 라브루스트가 파리 국립도서관의 대열람실(大閱覽室)을 완성하고, 철의 지주(支柱)를 사용, 커다란 구체(球體)의 천장 형식을 취하여, 전례없이 공간을 크게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에펠(1832∼1923)은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철재(鐵材)로 된 에펠탑을 건설하여, 철재의 사용은 엄청난 사회적 요구를 해결하여 많은 나라들이 공장·정류장·시장·회장(會場)·백화점 기타 건축에서 일제히 큰 발전을 보았다.
또 한편 영국에서는 공예분야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운동으로, 과거의 양식을 물리치고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에 의하여 간결한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이런 개혁은 건축에도 크게 작용하여, 19세기 말기부터는 과거와 같은 번잡한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기능과 새로운 재료를 써서 참신한 건축을 지향하는 운동이 각국에서 잇따라 일어나 현대를 향해 진전되어 갔다.
19세기의 공예
편집19세기 전반기의 공예
편집19세기의 공예는 전반과 후반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19세기에는 시민계급이 점차로 사회적 세력으로 화하여 그 요구가 반영되어 가고 있으며, 다른 한편 기계에 의해 공예도 수공작(手工作)의 시대가 지나고 양산(量産)의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반기에 있어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고전 취향의 양식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계급이 일치해서 과거의 귀족이 누리던 화려한 생활을 그리워하여 먼저 보급되어 있던 양식을 그대로 그들의 생활 속에 보급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전반기에는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채택한 장식이 성행하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기호를 반영하여 한때는 모든 것이 로마제국풍의 장식을 존중하여, 그것을 앙피르 제국(帝國)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우아함보다도 간명함을 중시하여 일체의 일상 생활 용구에 파급되었다. 이런 유의 작품으로는 마르메종궁(宮)의 장식이 유명하다. 그 앙피르 양식은 각국에 널리 퍼져 영국과 북유럽에까지 미치고 있다. 또 프랑스에서는 혁명시대에 한때 쇠퇴되었던 도기공장(陶器工場)이 19세기 초부터 제작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공예의 보급
편집工藝-普及
19세기의 공예에서 현저한 활기를 보인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해외에서 비약(飛躍)을 보인 외에도 생산활동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며, 이미 이 세기 초두에는 그리스의 조각이 수집되고, 이집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공예는 이집트와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도입하여 왕성한 제작이 진행되었다.
또 독일에서도 전반기에는 건축가인 싱켈이 그리스 양식을 이상으로 하여, 이 작가도 실내의 장식에 새로운 활동을 보였다. 또한 이 시대는 시민계급이 산업을 배경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고, 시민은 다투어 실내를 장식하여 그로 인해 각국에서는 어느 시(市)도 가구업자나 공예상인(工藝商人)이 번성하였는데, 공예가 일상생활에 이처럼 보급된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시민의 취미는 안이하게 과거의 작품에 만족하여, 그 후의 공예에는 고딕적인 취향도 엿보였고, 바로크 양식을 취한 절충적인 작품도 생겨났으나 과거의 것을 좇는 데 그쳐 외면을 장식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내용상으로는 괄목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중기가 되면 영국에서는 모리스를 중심으로 공예의 혁신적인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모리스
편집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공예가로서 러스킨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수공작(手工作) 분야에서 훌륭한 작품을 제작한 중세기 미술의 찬미자였다.
모리스는 처음에 고딕적 건축을 설계하는 스트리트 문하에 있었으나, 건축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닫고 한때 로제티의 회화에 흥미를 느껴 회화에 손을 대었다가 다시 공예로 전향하였다. 그후 후일의 공예 근대화에 크나큰 각성을 환기시키게 되었다. 1851년 런던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려, 철재와 유리로 된 수정궁(水晶宮)은 건축계에 절대적 반향을 일으켰지만, 출품된 공예작품은 화려하나 그것은 통속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의 공예는 공을 많이 들이는 수공작(手工作)이 되어 특별한 깊이를 갖고 있었는데, 산업 진출에 의한 생산은 다량(多量)의 작품을 낳았으나, 그것은 안이한 취미를 좇는 데 불과하였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공예가 요구되어, 모리스는 실제 생활면에서 보다 창의성 있는 공예의 필요를 통감했다. 그 모리스를 중심으로 아트 앤드 크라프트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아트 앤드 크라프트 운동
편집-運動
아트(美術)와 크라프트(手工作)를 표방한 공예분야의 새로운 운동으로, 1857년에 모리스는 자기의 스튜디오를 만들었는데, 시판되는 가구를 보고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는 데 놀랐다. 아름다운 생활에는 그에 알맞은 가구가 요청되는데, 그를 위해서는 우선 모두 새로운 디자인이 요구되어, 모리스는 가구를 위시한 모든 것을 스스로 디자인하였다. 그리고 웹이 설계한 <빨간 집>에 대해서도 모리스는 내부의 디자인을 맡아 하였다. 1861년에 그는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商會)'를 설립하여 미(美)와 용도(用道)를 겸유하는 작품을 강조하고, 그 판매에도 나서 후에 모리스 상회가 되었다. 그 운동에는 건축가나 화가까지도 협력하였는데, 그 운동은 시판되는 장식과다(裝飾過多)의 통속성을 물리치고, 수공예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조형의 단순성을 존중하며, 공예의 본질을 다하여 간소하고 착실히, 참으로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공예의 창조를 강조하였다. 이는 사회에 있어서의 공예의 진정한 발전을 고려한 것으로 작품상으로 전례 없는 참신한 디자인을 보이고, 그 명쾌함은 과거의 양식에 의존하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다.
모리스의 운동 결과로서 영국 각지에는 공예학교가 탄생되고 그를 추대하며 '미술관 수공작 전시협회'가 등장하나, 이 시대는 뭐라 해도 기계화되는 시대로서 기계를 피해 수공작만을 주장한 것은 현세(現勢)를 역행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표현으로부터 과거와의 유대를 제거하고, 그 시대의 생활로부터 직접 착상하였던 것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건축분야에 강력하게 반영되고, 공예가 솔선(率先) 혁신을 표방함으로써 19세기 말기에는 힘차게 근대화로 향해 나아갔다.
공예의 근대화
편집-工藝-近代化
이 세기의 말기에는 기계문명이 완전히 보급되고, 실생활에도 기능적인 가구나 용품(用品)이 요구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미와 용도를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는 운동이 각국에서 잇달아 전개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양식상의 번잡을 피하여 단적(端的)·간결(簡潔)을 주안으로 하는 것으로, 이는 건축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 운동은 프랑스나 벨기에에서는 아르누보라 불리고, 독일에서는 유켄트시틸이라고 불리었다.
1893년에 벨기에의 호르타가 가옥설계를 한 것이 있는데, 유동적(流動的)인 선을 활용한 신선한 장식이 등장하였다.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반 데 벨데도 모리스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는 기계에 의한 생산과의 융합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현대생활을 대상(對象)으로 하는 참신한 제작을 발표하고 있다. 그 혁신적인 움직임은 독일에도 파급되어, 과거의 역사적인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꾀하는 '분리파(分離派)'의 운동이 출현하는데, 19세기의 최말기(最末期)는 바로 현대의 서막으로서 공예는 생활의 고동을 느끼게 하는 새로운 활동으로 돌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