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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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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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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벨라스케스 시대가 소멸한 이래, 에스파냐의 회화는 그것을 받아 새로운 발전을 하는가 했으나, 빛을 잃은 듯 침체되어 이미 18세기에는 이탈리아의 티에폴로에 이어 보헤미아의 멩스가 궁정의 제1화가가 되고, 멩스의 빛 잃은 작품의 영향으로 일층 무력해졌다. 더욱이 19세기에 들어서는 다비드의 고전주의가 전유럽을 석권함으로써 에스파냐도 당연히 이에 말려들 뻔했으나 에스파냐에는 꺼져가던 전통이 일거에 피어오르듯 침체와 외국의 영향을 박차고, 예기하지도 않았던 천재 고야를 출현시켰다.

고야 이전에는 그를 키워줄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고, 후에는 그의 후계자도 없었으나, 온 세계가 고루한 형식적인 고전주의로 들어가는 때에, 고야의 분방과 대담, 그리고 정열과 그 괴이함은, 멀리 현대에 선구하는 참신성을 개척하고 있다. 고야는 수도(首都)에서 성공하여 궁정의 제1화가로서 알려졌으며 한편으로는 모험가였다. 그는 화필로 민중의 속악(俗惡)을 파헤치면서도 민중 속에 밀착하고, 종교화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단자의 분방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사실(寫實)이 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제작에 있어서 일체의 환희나 충격과, 또는 저항까지를 그의 육체로 느끼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대담한 표현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고야는 정교한 기술을 가진 만큼, 어린이를 묘사함에 있어 그만큼 아름다운 순진성을 표현하는 화가도 드물다. 그러나 만기(晩期)에는 '귀머거리의 집'에 들어앉아서 각 방을 괴이한 구도로 채웠으며, 세피아와 흑색으로 그려진 정경은 생생한 힘으로부터 귀기(鬼氣)를 풍기며, 그 처절한 약동은 시대를 초월한 유니크한 힘을 보이고 있다.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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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에스파냐의 화가. 사라고사주에 가까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나이 어릴 때 마드리드에 나가서 미술학교를 거쳐 로마로 향했다.

그는 귀국하여, 곧 아라우 디 사원(寺院)에다 성모(聖母)의 생애를 11면의 벽화(1772∼1774)로 제작했다. 이어 마드리드에 나가서 멩스에게 발견되어서 왕립공장(王立工場)을 위해 고블랭 직물의 벽걸이의 밑그림을 맡아 민중의 생활을 제재(題材)로 하고 있다. 그것은 장식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로코코조(調)로 그리고, 생활의 밝은 제재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왕실이 소장한 벨라스케스 작품에 접한 일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야는 벨라스케스에 다음 가는 빛에 대한 명수로서, 그때부터는 차례로 새로운 감각을 빛낸 초상화를 그려 냈다. 그는 1799년에는 궁정의 제1화가가 되고, 그 해부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제작하여 절묘한 명암의 깊이를 창조하고 있다.

<나체의 마하> <옷을 입은 마하>의 영묘함도 유명하다. 국정(國政)은 불안하고, 1808년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했다. 그 때 민중의 학살이 감행되었는데 고야는 <5월 2일의 변(變)>과 <5월 3일의 처형>(1814)으로 그 처참함을 묘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형이 국왕이 되면서부터 고야는 마드리드의 서쪽 '귀머거리의 집'에 은거하였다.

고야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어 고생했으며, 그 집의 각방에는 '악마가 나의 자식을 잡아먹는다' 등 그 밖에 이상한 소재로 장식되어 있고, 그 묘사의 박력은 귀기(鬼氣)를 보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만년의 작품은 점점 흑색을 띠게 되며, 묘사는 일층 박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에스파냐 왕조가 부활했고, 고야는 요양을 이유로 프랑스로 떠나서 보르도에서 생애를 마쳤다. 고야는 공전의 판화의 명수로서, <로스 카프리초스>나 <전화(戰畵)> 등 연작으로 자유분방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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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작.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이 대작은 국왕의 일가를 그리는 커다란 영예를 안고 그려졌다. 화면에서 사람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엷은 안개와 같이 총체가 빛의 심연(深淵) 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근엄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면서도 고야는 훈장에서부터 의상까지 세부를 빛에 용해시켜, 다만 그 빛나는 자체만이 총체적으로, 색과 빛의 마술을 그려 내는 듯한 아름다움을 낳고 있다. 인상(人像)은 눈만을 인상적으로 빛나게 하고 있으며 가정과 국사(國事)에서 위세를 떨친 황후가 화면에서도 중심적 존재가 되고, 소년이 사랑스럽게 청순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을 의례(儀禮)의 날로서 정장(正裝)한 일가에 대한 화가의 관찰은 날카로움을 넘어 사람의 내면적 성격이나 그 약점까지 파헤치고 있다. 의지가 좌절된 국왕으로부터, 반대로 권력을 쥔 황후의 의지적인 강한 눈, 기울고 붕괴되어 가는 운명에 아무런 저항의 힘도 보이지 않는 왕족의 연약성이 모두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어, 그 묘사는 자칫 가혹하리만큼 날카롭다.

고야의 눈은 진실에 투철하다. 작품은 불가사의한 빛의 감돎과 명멸하는 색채로 인하여 미묘하고 섬세하면서, 인물은 그런 속에서 출현하여, 인간의 내부까지 들추어 내고 있다. 더욱이 묘사의 신선함으로 인하여 회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스스로가 같이 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갖도록 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작품이다.

영국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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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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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繪畵

18세기에 뛰어난 인물화를 제작하여 일거에 발전한 영국의 회화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점점 넓은 활동을 나타냈으며 다른 나라에 비하여 눈에 띄는 것은 풍경화의 발달이다. 그것은 물 건너 있는 프랑스가 고전주의를 치켜 들고 과장된 제작을 즐기고 있을 때, 영국은 신중한 자연의 관찰에서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 컨스터블과 터너를 탄생시켰다. 풍경화는 앞서 네덜란드에서도 제작되었으나, 그것은 회화의 방계적(傍系的)인 것이고 흥미의 중심은 인물화였다. 인물화에 못지않은 매력적인 세계로서 풍경화를 높이 등장시킨 것은 영국 회화의 활동이다.

영국은 조용한 성격을 가지면서 돌연 귀재(鬼才)를 탄생시켰는데, 19세기에는 블레이크가 신비와 괴이함으로 가득 찬 작품을 그려 냈다.

그 후반에 들어서서는, 라파엘로 이전의 표현으로 북귀할 것을 주장한 라파엘 전파(前派)가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의 한 가지 특색은 다른 나라에서는 중요시하지 않은 수채화의 발전이다. 수채화는, 영국에서는 18세기부터 발달하여, 가장 말기에는 가딘(1775∼1802)이 나왔으며, 19세기는 먼저 보닝턴(1801∼1828)이 젊어서부터 프랑스에 건너가 그곳에서 제작을 계속하였다. 그의 수채화의 생기와 밝은 채색은 프랑스 화가들을 놀라게 했으나 애석하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또한 코트만(1782∼1842)은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묘사는 간결하고 정채(精彩)가 풍부하여 터너와 견줄 만하다고 한다.

컨스터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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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onstable (1776∼1837)

영국의 풍경화가. 터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풍경화가이지만 이 두 사람처럼 대조적인 사람은 없다.

터너는 매우 빨리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나, 컨스터블은 회원이 되는 데에 많은 세월을 보냈다. 터너는 빛 속에 자연을 용해시키지만 컨스터블은 생각하는 것같이 자연을 그리고, 터너는 세부(細部)를 버리지만 컨스터블은 세부에서부터 묘사를 해 나간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자연에 대한 관찰은 깊고, 더불어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컨스터블은 사포크그주의 한 마을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기만성한 사람으로서, 개천이나 수풀이 많은 고향의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는 깊은 진실의 존재였다.

자연 가운데에서 진실을 보고, 그는 자기의 눈을 믿었다. 그것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유창한 묘사를 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성격에 다가가는 강인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는 1802년에 로열 아카데미에 입선한 이래 매년 발표를 계속하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한 것은 40세 때였으며, 아내를 결핵으로 잃은 이듬해인 1829년에 겨우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그 후는 건강도 좋지 않고 고독한 만년을 보냈다.

컨스터블은 풍경만을 그렸는데, 프랑스의 화가보다 먼저 외광(外光) 아래서 제작한 가장 이른 한 사람이며, 영국에서는 생전에는 인식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개념과는 반대로 비근한 눈앞의 정경에도 자연의 진실을 찾아내고 있으며, 후에 프랑스의 바르비종파(派)에도 깊은 계시를 부여했다.

건초를 싣는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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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草-馬車 컨스터블 작. 1821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이 작품은 런던에서 발표되었으나 아무런 반향도 얻지 못했고, 우연히 프랑스인이 사가지고 가서 1824년에 파리의 살롱에 출품했다. 그때 들라크루아는 대작 <키오스섬의 학살>을 출품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의 색채에 경탄하여 급히 자기 작품의 배경에 손을 대었다.

컨스터블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좋은 풍경을 찾지 않는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나 한개의 돌에서까지 고향의 자연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다. 매끄럽고 깨끗한 묘사를 많이 한 영국에서의 그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집요했다. 그러나 그는 꾸며진 매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기만(欺瞞)을 가미하지 않는 진실을 존중하고 있다.

이 화면에서는 밝은 한나절에, 얕은 물을 수레가 평화스럽게 건너고 있다. 왼편에는 전형적인 농가가 있고, 고요한 정경에, 개가 뛰어나와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다. 컨스터블은 과학자와 같은 관찰로 조석(朝夕)의 근소한 변이(變移)에서도 자연의 취향이 어느 정도로 변화하는지를 읽고 있다. 이 작품도 나무그늘의 습기나 근처의 물기에서, 흰벽이나 물의 일단(一端)을 밝히는 어둠을 통해 비치는 광선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부로 그 곳을 느끼게 하는 정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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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영국의 화가. 빛의 묘사에 획기적인 표현을 낳은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잠깐 사이에 아카데미 준회원으로부터 27세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염원이었다. 그런만큼 그의 중기(中期)에는 로랭의 영향이 보이나 후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한층 빛의 묘사로 들어간다.

터너는 1819년부터 약 10년마다, 세 번 이탈리아에 여행을 했는데, 물과 하늘, 거기에 빛나는 남국의 태양은 터너의 꿈이요 시였다. 터너는 풍경의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 그것은 균정(均整)이 잡힌 윤곽에서 정중하게 그린, 당시로서는 대담한 창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시 창작을 계속하여,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1843)에서는 배그림자까지 거칠게 불어대는 태풍 속으로 꺼지는 듯 눈보라의 심한 상태를 주제로 잡고, 과거의 회화에 전례없는 동적인 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號)>(1839) 등의 것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서 고독한 성격이었으며, 본집 외에 체르시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는 채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베네치아, 성 베네딕트에서 프지나를 전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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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 작. 184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터너에게 있어서 빛은 동경하는 바이요 도취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자연의 전부이기도 했다. 컨스터블은 작은 풀이나 흙까지도 꾸짖듯이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으며, 그에게 있어 자연은 빛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고동하고, 생명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 빛의 세계를, 그는 베네치아의 물과 하늘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되풀이하여 베네치아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작의 하나이다. 터너는 어떻게 하면 그 화면에 보다 많은 빛을 발산시킬 수 있을까 하고 비상한 궁리를 집중시켰다. 그때문에 연구해 낸 색채가 후에 인상파를 인도하는데, 이 화면에서도 대운하는 이윽고 바다에 이어졌으며, 대안(對岸)의 프지나까지 하늘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그 빛은 물에 한없는 금색의 파장(波長)을 일으키고 있다. 빛은 터너에게 있어서 정지된 차가운 아름다움은 아니다. 빛은 공간에 진동을 전달하는 광휘(光輝)인 것이다. 그 진동을 전달하면서 왼편의 콘도라는 떠오르는데, 오른쪽 기슭의 거리나 민중은 광층(光層)에 용해되어 있다. 작품은 실경(實景)을 그리면서도, 석양을 받고 있는 물의 광채에 녹아드는 형상의 아름다움은 몽환(夢幻)을 노래하는 한편의 시(詩)와 같다.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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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1757∼1827)

영국의 화가.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화가로서 시작(詩作)과 회화를 발표하고 있다. 블레이크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단지 자연에 대한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또 일반적으로 보는 무감동한 작품을 부정하여,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런던의 양말공장 직공의 아들로 교육도 거의 독학으로 이루었다. 14세 때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어 고찰(古刹)의 조각이나 중세의 사본(寫本)을 만들어, 그것이 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에 결혼했고, 회화에서는 유화를 꺼리고 수채화야말로 최고의 표현이라 생각하여 시화집(詩畵集)을 만들어 간행했으며, 각 페이지마다 그림을 넣어 판각(版刻)만의 독창적인 색채 인쇄까지 했다. 런던에서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화집에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0), <경험의 노래>(1794) 등 그 밖의 것이 있으며, 성서 속에 신비한 사색을 곁들인 <욥기(記)>(1825)가 유명하다.

블레이크는 만년에 다시 단테의 신곡에 100매의 삽화를 기도했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이 밖에 프레스코라고 자칭한, 실은 템페라의 회화가 있는데, 그러나 삽화를 다른 회화와 나란히 견줄 만큼 인식시킨 것은 블레이크이다. 그의 순정적(純情的)인 시작은 청순함을 나타내지만, 그밖의 시화(詩畵)에서는 괴이한 신비가 나타나고, 상식적인 기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선묘(線描)나 음영으로부터 생생하게 호소하는 설득력을 나타내어,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감각에 연결되고 있다.

라파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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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派

영국에서는 회화에서 아무런 운동도 나타나지 않으나, 라파엘 전파는 보기 드물게 당시의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 운동은 처음엔 밀레, 가브리엘 로제티, 홀먼 헌트(1827∼1920)의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연구하던 시대의 어느 날, 세 사람이 초기 이탈리아의 캄포 산트의 벽화의 복제(複製)를 보는 중에, 자기들이 지향하는 길에 대하여 통감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아카데믹한 작품이 라파엘로 이후의 제작 이외에는 회화를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라파엘로적인 완성된 표면적 미려(美麗)를 좇은 나머지,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제작태도를 비판하고, 반대로 라파엘로 이전을 목표로 하여 초기의 제작이 갖는 성실함이나 건전함으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그룹은, 화가라 하는 것은 순정(純正)한 사상을 가지며, 종래와 같이 관념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면밀하게 재연구할 것을 주장했다. 그 그룹에는 로제티의 동생 윌리엄 로제티(1829∼1919)나 조각가 우르너(1825∼1892) 등이 가담하고 있다.

1850년 라파엘 전파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반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러스킨은 문필을 들어 원호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끝내 밀레는 차차 다른 경향을 취하고, 형 로제티는 꿈꾸는 듯한 시적인 묘사만을 하고 있다. 그 움직임은 운동으로서는 눈부신 운동이었으나, 제작으로서는 이탈리아 초기의 제작이 갖는, 표현의 깊이에 관한 문제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의로 성서나 중세에서 소재를 잡는 까닭에, 색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처음으로 그들이 배척한 당시의 일화풍(逸話風) 회화와 궤도를 같이하며, 자연으로의 충실한 복귀 또한 단지 전체의 세부에만 정성껏 그리는 데에 그치고 있다. 영국의 회화에는, 사물을 깊은 성격을 띠고 그리는 경향은 없었고 거꾸로 에피소드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결점이 있는데, 이 새로운 운동에도 그러한 점이 보여진 셈이다.

로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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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영국의 화가. 로제티의 작품은 단테를 취급한 소재가 되풀이하여 그려졌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이탈리아의 대시인 단테에게 한없는 동경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망명시인이며, 로제티는 어릴 때부터 단테의 시를 탐독하고 있었다. 처음은 그다지 연령의 차이가 없는 마도크스 브라운(1821∼1893)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데, 다음 홀먼 헌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친구가 되고, 계속해서 밀레와 결합되었다.

이 세 사람은 라파엘 전파운동을 일으켰다. 1850년 로제티는 시달과 결혼했다. 그의 부인은 겨우 2년 만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부인의 모습은 로제티의 작품에 언제나 여성의 이상상(理想像)으로서 애수적이고도 감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당하여 그의 시집을 관 속에 같이 묻었으나 친구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7년 후에 시집을 펴내어 간행했다. 로제티는 중세나 14∼15세기에 대한 동경을 그대로 이상화(理想化)하여, 그것을 역사화(歷史畵)로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나 문학에 등장하는 별개의 세계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로 그려지는 여인은 우수에 찬 듯 환상적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관능을 발산하여 아름답다.

단지 영국 회화의 공통성으로서, 인물을 깊은 힘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의 삽화(揷畵)에 가까운 인상을 부여하는데, 단정하고 아름다운 장식적인 구도와 색채는 후에 장식미술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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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영국의 화가. 11살 때 왕실 아카데미의 입학을 허락받아, 최연소의 기록을 남길 만큼 조숙한 재능을 보였다. 라파엘 전파로서 활동할 때의 그의 작품 <양친(兩親) 집의 그리스도>(1850)는 비속(卑俗)한 직공의 집을 그렸다고 해서 공격을 받았으나 그의 사회적인 성공은 빨랐으며 차차 라파엘 전파운동에서 멀어진다. 이상적인 제작보다 현실적인 관찰에 뛰어나 그의 기술은 유창하다. 작품에는 <오페리아>(1852) 등이 있으며, 초상화도 훌륭하였다.

홀먼 헌트는, 라파엘 전파의 자연에 대한 충실을 맹세한 신조를 끝까지 지킨 화가로서, 묘사하는 데는 놀랄 정도로 세부 묘사를 정성껏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전체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점이 있으나, <세상의 빛>(1854)은 등불을 들고 호호 방문(戶戶訪問)하는 그리스도를 그려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화가는 또 팔레스티나에 여행하여 환경을 상세히 조사하고, 옛날의 사실을 재현하듯 성서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번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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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Burne­Johns (1833∼1898)

영국의 화가. 1857년에 로제티는 옥스퍼드에서 벽화 제작을 했는데, 주위에 혁신적인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후에 공예에 개혁을 이룩한 모리스와, 화가인 번 존스가 그들이다. 이 화가는 처음에는 신학에 뜻을 두었었는데, 이상에 대한 동경과 명상이 항상 작품에 나타나 있다.

작품은 중세의 기사도를 즐겨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로제티와 같은 도취감은 결여되었다고 하지만 장식적인 묘사는 정밀하여 비전을 보여주는 문학적 매력을 창조해 내고 있다. 또 이 밖에 스테인드글라스나 벽걸이에도 훌륭한 제작을 보여, 모리스의 공예운동을 든든하게 돕고 있다.

이 밖에 워츠(1817∼1904)의 작품이 있다. 워츠는 조각도 한 화가로서, 회화에서도 기술의 연구가 깊고, 우의적(愚意的)인 제재를 가장 즐겨 그렸다. 그 외에도 초상화에 뛰어나, <테니슨의 상(像)> 외에 많은 초상을 남기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는 요절했지만, 탐미와 비상한 감각으로써 삽화에 참신한 지각을 편 비어즐리(1872∼1898)는 번 존스의 영향을 받았다. <살로메>의 삽화는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흑백만으로 표현했는데, 흑백의 면은 분명히 드러나도록 대조하고, 묘선은 날카로운, 근대적인 감각으로 일종의 요기(妖氣)를 발산시키고 있다.

미국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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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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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繪畵

식민지로서 개척된 미국은 독립전쟁 이래 건국과 함께 거대한 국운(國運)으로 약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국내는 아직 팽대(膨大)한 개척사업으로 세월을 보내던 시대였으며, 회화의 감상에는 오래 쌓아올린 풍토가 이룩되지 못하여, 작품에는 볼 만한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회화에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먼저 웨스트(1738∼1820)가 나타났다. 그는 영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귀국하지 않았으나, 런던을 찾아와서 연구하는 미국의 젊은 화가를 지도하여, 본국의 회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영국의 회화의 영향이 크며, 스튜어트(1755∼1828)도 런던에 건너가 심한 괴로움을 받았으나 후에 웨스트의 따뜻한 원호를 받았다. 그는 초상화로 알려졌고, <워싱턴의 초상>이 유명하다.

이어 런던에서 웨스트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운 피어(1741∼1827)도 많은 명사의 초상화를 그렸고, <워싱턴의 상(像)>을 남겼다.

화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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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Whistler (1834∼1903)

미국의 화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 일컬으며, 젊었을 때는 군대를 동경했으나, 자유를 갈망한 성격은 회화를 시작, 1855년에 파리에 나타났다. 파리에서는 글레이르의 문하생이 되어 드가를 알고, 마네의 이론을 경청했다. 살롱에 작품을 출품했으나 낙선되었고, 1863년에 <흰옷 입은 소녀>를 출품, 또다시 낙선, 유명한 낙선 화가 전람회에 그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파리에 대한 혐오로 그는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주했다.

작품에는 <화가의 모상(母像)>(1872)이 알려진 외에, <알렉산더 양(孃)>(1874) 등 훌륭한 초상화를 남기고 있다. 화이슬러는, 당시의 영국 작품이 주제를 특별히 문제삼고, 또 세부의 묘사에 구애됨을 반대하여 그는 전체의 분위기를 중요시하여 그렸다. 1877년부터 <야경(夜景)>의 연작을 발표했고, 러스킨의 문필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그는 그것을 소송(訴訟)하여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그의 작품을 회색과 녹색의 해조(諧調)라든가, 회색과 흑색의 배색 등 갖가지의 첨색으로 그리고 있으며, 극도로 해조를 존중하여 침체된 색조에 용해되고, 색채의 충동을

피하여 그 작품에 조용한 친근감을 주고 있다.

호머, 라이더, 카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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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눈부신 개척으로 일거에 거대한 국세(國勢)를 갖추었다. 회화의 활동도 서서히 진전되어, 호머(1836∼1910)는 미국의 자연을 그리는 데 몰두하고, 해양 화가로서 위치를 든든히 하는 외에, 수채화도 좋은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라이더(1847∼1917)는 현실적인 자연보다도 자연 속에 환상을 가미하여 <청백색 말을 탄 사신> 등, 풍경에 괴상한 묘사를 보이고 있다. 또 인상파 중에는 카사트(1845∼1926)가 교육을 위해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생활한 화가인데, 까다로운 드가와도 친구였으며, 모자(母子)의 가정을 묘사하여, 여성다운 세련미로 신선한 매력을 펼치고 있다.

독일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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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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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古典主義

독일에서는 18세기에 빈켈만의 획기적인 고전 미술사(1746)가 간행되어, 폼페이의 발굴에 의한 새로운 지식과 어울려 고대에 대한 동경이 성하고, 문학도 크게 그것을 뒷받침하여, 독일의 회화는 이미 프랑스보다 앞질러 18세기 말기에는 카르스텐스(1754∼1798)가 고전주의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카르스텐스는 만년에 로마에 영주하고 있었는데, 그를 둘러싸고 로마에는 독일의 화가들이 모여들어 19세기 초에는 고전주의가 압도적인 세력을 보이고 있었다. 카르스텐스는 종래의 회화 기법을 아낌없이 버리고, 색채의 매력을 추방하고 형상의 정확성을 강조하여, 소위 고귀한 윤곽을 존중했다. 그가 이상으로 하여 배운 것은 그리스의 고대 조각이었으며, 고대 조각의 형상에 심취하여 그것을 가지고 신화나 문학적인 내용을 그리곤 했다. 예술에 필요한 것은 역시 자연의 관찰이며, 그것으로부터 떠나 고대 양식의 모방을 제일로 함으로써 여기에도 단조성(單調性)을 낳고 있었다.

독일의 고전주의에는 프랑스의 자유스럽고 박력있는 개척은 보이지 않으나, 이 경향에는 카르스텐스의 이론을 받든 제넬리(1798∼1868)가 후계자로서 알려지는 이외에 코호(1768∼1829)가 알려져 있다.

낭만주의와 나자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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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主義-派

하나의 주의가 너무 치우치면 그 반동이 일어나는데, 독일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모방을 지향한 고전주의의 단조로움에 대하여 색채의 기쁨을 주장하는 한편, 거꾸로 고딕 시대의 종교와 예술의 아름다운 융화를 추상(追想)하는 낭만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1810년 이래, 로마에는 오베르베크를 중심으로 하여 코르넬리우스(1783∼1867)라든가 샤도 등이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은 성(聖) 시드로의 폐사(廢寺)에 거처를 삼고 승원(僧院)처럼 엄격한 생활을 하며, 한편에서는 조토에서 페루지노에 이르는, 라파엘로 이전의 제작에 강한 동경을 나타냈다.

그것은 영국의 라파엘 전파(前派)에 앞지른 것이지만, 그들은 고대를 모방하는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종교적인 소재에 정열을 높이고, 색채에 의한 감정의 표현을 존중했다. 이 사람들의 당시의 생활이 수도하는 승려와 같았기 때문에 나자레파(派)라고 불리고 있다.

오베르베크(1789∼1869)는 15세기의 이탈리아 양식에 영향 받은 좁은 화풍을 취하고 있는데, 섬세한 감정을 보여 종생토록 로마에 살면서 종교화를 그렸다.

그 밖의 나자레파 화가들은 후에 독일에서 활동을 계속했는데, 코르넬리우스는 명성이 높았고, 사고적인 내용을 갖는 종교화가 많다. 그는 뮌헨이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제작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뮌헨파(派)라고 불렀다.

또 뒤셀도르프에서는 샤도(1789∼1862)가 교육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곳은 미술의 중심지였다. 샤도는 서정적인 경향을 가지고 종교화나 이야기를 그렸으며, 그의 문하에서는 레텔(1816∼1859)을 배출시켰다.

그 일파를 뒤셀도르프파(派)라고 부르는데, 낭만적 경향의 회화로는 이 밖에 시빈트(1844∼1871)가 나타나서 독창적인 제작을 보여 독일의 옛 전통이나 동화에 매력있는 묘사를 낳았다.

후반기의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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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半期-寫實主義

19세기는 개인의 자각이 점점 성해지는 시대이며, 민중의 생활이 예술이 갖는 것만큼 높이 존중되는 시대였다. 사실 눈앞에는 산 생활이 전개되고, 그 공감은 신선한 것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는 독일에도 영향되어 풍경화의 발전을 보였고, 사실주의도 침투되어 19세기 후반기에는 독일에도 강한 사실주의의 제작이 나타났다. 그 사실(寫實) 경향에서는 멘첼(1815∼1905)이 강하게 빛나고 있다.

멘첼은 불구의 몸으로 집에서 인쇄업을 한 때문에 일찍부터 석판화에 익숙하고, 25세 때에 <프리드리히 대왕사(大王史)>에 삽화를 그려 일찍 미술계에 알려졌다. 그 후 유화에서는 제재도 넓게 풍속 생활도 다루었는데, 그 관찰은 예리하여 사실의 표현은 뛰어났고, 특히 역사화가 유명하다. 역사화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둘러싼 제작이나, 대표작인 <빌헬름 1세의 대관식>(1865)과 그 밖의 것이 있고, 군상(群像)의 배치나 다루는 데 있어 독보적 명성을 올리고 있다.

또한 빛의 묘사에도 창의성을 보였으며, 노동을 다룬 작품으로 <단조 공장(鍛造工場)>(1875)이 있고, 19세기 후반에 커다란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사실적인 작품을 그린 사람으로 라이블(1844∼1900)이 있다. 그는 농민이나 서민생활을 묘사했는데

관찰은 정확하고 또한 묘사는 공감을 모아 간소하며, 생활을 부각시키는 강한 사실성을 보이고 있다.

분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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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離派

프랑스에 있어서 인상파의 제작은 빛의 매력을 결정하여 후의 색채 관념에 획기적인 변화를 재촉했는데, 그 영향은 독일에도 나타나서 분리파라고 불리는 새로운 움직임이 탄생하고 있었다.

인상파의 개혁은 종래의 관념에 충격을 준만큼, 그것은 독일에서도 많은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1893년에는 뮌헨에서 일단(一團)의 화가가 모여 아카데믹한 경향에서 분리하여, 표현에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들은 특별한 이론을 내세우지 않지만 빛의 새로운 발견이나 색채의 신선미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어 근대적인 성격을 개척, 분리파의 새로운 제작에서는 리베르만(1847∼1935)이 두각을 나타냈다.

리베르만은 1899년에 베를린에서 일어난 분리파의 움직임에서 그 중심인물이 되어 있다. 그는 파리를 방문하여 인상파와도 접촉했으나, 빛의 묘사를 신선하게 하여 자기의 화풍을 개척하였다. 다만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영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개성이 약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관찰력이 날카로운 화가이며, 즐겨 생산이나 노동의 생활을 제재로 잡고, 작품은 지성을 보여 더구나 일순(一瞬)의 움직임을 잘 포착하는 교묘한 묘사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인상파는 시종 감각에서 제작을 진행시키지만 독일은 오히려 이성적(理性的)인 제작이며, 분리파에서는 또한 코린트(1858∼1925)가 알려져 있다.

뵈클린과 신이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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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理想主義

독일의 회화는 사실주의에 의하여 새로운 사실의 발전을 낳고, 인상파의 소개로써 분리파의 운동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독일 특유의 사색적·명상적인 성격은, 거기에 새로운 사실적 묘사력으로 그리면서도, 민족의 전통과 그 밖의 동경을 나타내어, 현실을 떠나 문학적인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새로운 움직임을 낳고 있다. 그것을 신이상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뵈클린(1827∼1901)이 참신한 매력이 있다.

뵈클린은 스위스 태생이지만 독일에서 배우고 독일에서 제작을 하고 만년은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그의 <자화상>(1872)에서는, 배후의 사신(死神)의 연주에 별안간 화필을 멈추는 자기의 초상을 그렸는데, 게르만 민족적인 명상은 강하게 구상을 색칠하고, 작품에는 마신(魔神)이나 인어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 또 자연스러운 정경을 그리는 데도, 그것이 환상의 세계에 용해되어 들어가는 것도 이 작가이다. 화면에는 미(美)와 이상한 것이 융화되고, 현실과 몽환이 용해되어, 더욱이 밀도 있는 색채와 정밀한 묘사에서 신비스러운 매력을 낳고 있다.

작품에는 <파도의 희롱>(1883), <죽음의 섬>(1880) 등이 있으며 후년에 초현실주의에 앞장서서 몽환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이 밖의 화가로는 생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레스(1837∼1887)가 북방적인 낭만주의를 띠고 중후한 매력을 풍겼으며, 포이에르바하(1829∼1880)가 고전을 동경하여 단정한 작품을 그려 내고 있다.

네덜란드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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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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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는 19세기 후반이 되어 이스라엘스(Jozef Israels, 1824∼1911)가 나와 늠름한 활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스는 유대 출신으로 파리에서 배웠다. 처음은 역사화에 몰두했으나, 네덜란드에 돌아가서는 신변에서 어부를 보고, 가난한 생활 속에 인생의 진실한 드라마가 있음에 흥미를 가져, 그 후의 작품은 색조를 가라앉혀서 즐겨 이야기조의 성격을 취했는데, 견실한 묘사로서, 극적으로 어민과 그 밖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인상파를 앞질렀다고 하는 화가는 풍경화를 그린 용킨트이다.

용킨트(Johan Jonkind, 1819∼1891)는 헤이그에서 배우고 다시 파리로 나갔는데, 그 후로 때때로 고국에 돌아가는 외에는 프랑스에서 생애를 보냈다. 보헤미안인 그의 생활은 술에 탐닉했기 때문에 유화에는 결실을 본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으나 수채화와 데생은 아름답다.

용킨트는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감각에서 물빛이나 대기의 아름다움 등, 순간에도 변화하는 자연의 표정을 재빨리 느껴 유동적인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데생은 몸으로 빛을 감각하여, 빛의 작용으로 정경이 생기는 모습을 그리며, 수채화의 화필도 가볍다. 감각적인 제작에서 네덜란드 근대 회화의 선구자이면서 본국에서는 생전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는 인상파에 앞선 대기(大氣)의 아름다움을 그려내어 인상파에 감명을 주고 있다.

벨기에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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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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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프랑스에 인접되어 있으며, 19세기 최말기에 일반적인 벨기에 회화와 관계 없는 이례적인 화가 앙소르를 탄생시키고 있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는 벨기에의 오스탕드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로부터 영국인의 혈통을 받았다. 그 생애는 브뤼셀에 나가서 미술학교에 들어간 일 외에는 오스탕드에서만 살았다. 환상적인 성격 탓으로 고국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의 모든 회화 운동에 관계없이 단독으로 제작을 했다.

빛에 대한 관심이 깊어 처음에는 인상파 마네와 그 밖의 화가들에게 마음이 끌려 사실적인 작품을 그렸으나, 1885년경부터 돌연 공상을 제멋대로 하여, 기이한 장면이나 정경에 작품을 비약시키고 있다. <해안의 카니발>(1887)은 공상과 정열을 가득 풍기며, 이듬해의 대작 <브뤼셀에 들어오는 그리스도>에서는 얼굴을 나란히 한 군상이 모두 가면을 썼는데, 가면은 욕망이나 탐심을 그로테스크하게 표시하여 혼란된 구도는 통속성을 띠면서 생생한 매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상하게도 가면에 애착을 가지는데, 인간은 허위의 가면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가면은 정물에까지 나타내어 테이블을 감시하지만, 그것은 가면이라기보다 생물인 것이다.

또 <흉계(凶計)>(1890)의 가면 군상에서도 악마적인 웃음이 엿보이고, 색채는 조화의 상식을 파괴하여 대담하게 현대의 야수파(野獸派) 이전에 의도한 것과 같은 색채를 보이고 있다. 다만 작품은 1888년부터 1892년에 걸쳐 가장 큰 매력을 보이나 그 후는 눈에 보이게 내려갔다. 앙소르는 이 밖에 판화(版畵)에도 괴이한 작품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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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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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적인 작품과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각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데, 말기에 이르러 이색적인 세간티니를 탄생시키고 있다.

세간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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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Segantini (1858∼1899)

이탈리아 화가. 세간티니는 아르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따라서 전전한 후 간신히 밀라노의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세간티니는 그 생애를 일관하여 알프스를 작품화하는 데 집중했다. 알프스 산악의 대기는 가슴을 깨끗이 씻어 주는 듯 맑고 깨끗하며, 빛은 한없이 투명하다. 그는 양치는 사람이나 그들의 생활을, 밀레가 농민을 그리듯이 축복으로써 그리고, 다시 산악의 영기(靈氣)로부터 종교적인 경건을 얻어, 작품을 한층 더 영적인 기도로써 그리고 있다.

가족과 함께 주거를 고지로 옮기고, 생활은 사회의 동향과 관계 없이, 산지를 황홀하게 비추어 주는 광선이나 색채를 조석으로 관찰하고, 주위의 맑고 깨끗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하여 극히 선명한 색채를 쓰고 있다. 따라서 암색(暗色)은 모두 추방하고 인상파처럼 색채의 분할을 하는데, 그는 작은 묘선(描線)을 묶듯이 화면에 배치, 무수한 가느다란 선에서부터 색채를 반짝이듯이 빛나게 하고 있다.

작품에서는 초기에 <아베마리아>의 연작이, 고원을 배경으로 그 생활을 종교처럼 묘사한 외에, 고지의 맑은 분위기를 색채로 전달하는 작품들도 있으며, 최후에는 3부작 <자연·삶·죽음>을 그려 크게 자연을 묘사하고 있다. 해발 2천7백m 고지의 조그만 집에서, 최후작인 <죽음>이란 풍경화를 제작 중 급작스럽게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스위스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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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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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언어를 보아도 각각 인접 국가의 언어로 나누어지는 나라로, 그 관계는 회화에도 나타나 19세기 중엽까지는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으나 후반기가 되면 호들러가 특색 있는 작품을 그려 낸다.

호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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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Hodler (1853∼1918)

스위스의 화가. 베른 태생이며, 고아가 되어 고생했으나, 제네바에 나가 회화에 대한 눈을 떴다. 작품 <학생>(1875)을 내어 스타트를 했는데, 자화상에 학생이란 제목을 붙일 정도로, 회화에서 항상 무엇인가 관념적인 것을 나타내려는 경향은 그 후에까지 일관되어 있다. 그만큼 단순하게 대상물을 능숙하게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의 생각을 정확히, 강하게 표명할 것을 요구하여 구도를 중요시하고, 구도에는 같은 방향의 선이나 모양에서 기계적일 정도로 딱딱한 통일을 구하고 있다.

또 인물도 간소하게 그려서 부드러움을 버리고, 정확한 윤곽부터 착실하고 의지적으로 나타내는데 동시에 또한 색채에도 극히 명확성을 존중하고 있다. 호들러는 독일적 체질의 화가로서, 정감이나 섬세와는 인연이 멀고 또 개념적이어서 조야(粗野)하면서도 남성적이다. 1891년에는 파리에서 <밤>을 발표하여 알려지고, 악몽을 나타내는 흑의(黑衣)의 상(像)이나 잠자는 남녀를 병렬하는 외에 장식적인 기법에서 1901년에는 <낮>을 그렸으며, 1908년부터는 독일에 초청되어 <예나 학도의 출발>을 그렸다. 생전에는 명성을 떨쳤으나 죽은 다음의 명성은 희미해졌고, 작품은 깊이가 결여되었다고는 하지만 열과 힘으로 충만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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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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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전후에 유례가 없는 이질적인 뭉크를 탄생시켰다.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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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의 화가. 로이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빈민가에 사는 의사였다. 그 빈민가의 절실한 생활은 그의 마음에 새겨졌으며, 어릴 때에 어머니를 결핵으로 사별하고, 이어 누이동생까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인하여, 죽음과 병의 환각은 그의 성벽으로까지 되었다.

작품도 <실내의 죽음>에서는 임종의 긴장을, <병을 앓는 딸>에서는 죽음에 접근하는 어미니와 딸 등 어두운 소재가 적지 않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도, 인간의 심리나 죽음의 접근을 회화로 표시하는 것이어서, 뭉크는 북유럽적인 신비성이나 환상적인 사고에서 상징적인 묘사를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간명하게 나타내느냐 하는 것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는 파리에도 나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색채를 강하게 바꾸어 그리고 있다. 또 1892년에는 베를린 미술협회에 초청되어 대량의 작품을 출품했으나 그 이질적인 표현으로 공격을 받고, 다시 개인전을 개최한다. 작품에는 <생의 춤>(1899∼1900) 등이 있다. 뭉크는 공포나 사랑이나 우수를 고독한 표현으로 쌓아 모아, 극히 암시적인 색채와 생략을 다한 그 묘사법과 그의 간명한 구도로 인하여 후에 나타나는 표현파의 선구자로서 간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