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17∼18세기의 프랑스 미술

프랑스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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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7세기 중기까지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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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전쟁을 끝낸 앙리 4세는 파리에 왕의 광장(지금의 보쥬 광장)과 센에 돌로 만든 다리 '퐁 뇌프'를 건설하여 수도의 거리를 정비하였다. 예수회의 새 성당도 17세기의 20년 전후에는 도입되고 살로몬 드 브로스(1571∼1626)에 의한 이탈리아식(式) 뤽상부르 궁전도 만들어지나, 르메르시에(1580?∼1654)의 소르본 대학 부속 예배당(1635∼1659)과 프랑수아 망사르(1598∼1666)의 발 드 그라스 성당(1645∼1665)에는 피사드나 돔에 로마의 전성기 바로크의 반영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

세속건축(世俗建築)에서는 고전적인 오더와 북방적(北方的)인 지붕의 조화를 창출한 망사르의 블루아 성(城) 오를레앙 익부(翼部,1635∼1638)와 메종 라피트(1642∼1650)가 프랑스 특색인 온화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코르베르의 전임자 푸케의 보 르 비콩트성(城)은 망사르보다도 지적으로 세련된 루이 르보(1612∼1670)가 설계한 것이다.

정원은 앙드레 르노트르(1613∼1700)의 작품으로 건축과 그것을 둘러싼 정원과의 결합에는 프랑스식 성의 대표적인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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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殿築造

전기와 같은 추세에 자극을 받은 루이 14세는 망사르와 르노트르, 그리고 화가인 샤를 르브룅 등에게 파리 교외에 베르사유 궁전의 일대(一大) 축조를 맡겼다. 그것은 유럽의 제일가는 프랑스의 국력과 제왕의 권력을 시위(示威)하여, 길이 500m가 넘는 궁전 앞에 넓은 분수·화단·운하·초목 등이 둘려 있고, 도처에 조상(彫像)과 꽃병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베르사유 궁전은 근세 궁전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17세기 후반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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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半-建築

르브룅의 장식으로 치장된 베르사유 궁전의 '아폴론의 갤러리' 등에서도 뚜렷한 것과 같이 17세기 후반에는 건축 디자인에 화려함이 가중(加重)되었다. 1678년 이후의 축조를 담당한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폐병원(廢兵院, 1646∼1708)의 부속 예배당, 로베르 드 코트와의 합작으로 된 베르사유 궁전의 부속 성당 등에서 그 세련된 예를 볼 수가 있었다. 전통적인 고전주의도 짙은 바로크적 장식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베르사유 안에 동일한 망사르의 그랑 트리아농, 특히 자크 앙지 가브리엘(1698∼1782)의 프티 트리아농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강조되어 고전주의적 경향이 현저하다.

18세기 주택 건축과 로코코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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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의 발달과 더불어 여성의 발언권도 강해진 프랑스에서는 살기 좋은 건축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이나 귀족·대상인의 저택으로서 서민주택은 원형을 따랐으며 아직 미개발인 채 남아 있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프랑수아 망사르의 오텔란 베르인데, 베르사유로 궁정을 옮긴 후로는 잠시 동안 단절되어 있어, 18세기 초두부터 실내장식에 새로운 맛을 보이게 된다. 섬세한 C자 곡선, S자 곡선이 이용되었다. 팔 루아얄, 오텔 드 투르즈 등이 있다. 대표적 장식가는 G.M.오프노르, 그리고 J.A.메소니에, 조각가 N.피노로서, 무늬는 좌우의 불균형을 원칙으로 하게 되어 있어, 그 잎 문양, 조개 문양이 벽면의 구획(區劃)을 장식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바로크와 같은 중량감이 없고, 경쾌하며 색도 밝다. 이것이 각국에 전해져, 특히 독일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1740년경에 절정에 달하였다. 제르맹 보프랑(1667∼1754) 작의 <오테르 드 스비즈(現 국립문서관)>는 그 예이다. 그러나 1760년대에는 신고전주의에 밀려 드디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시노아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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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oiserie

장식 모티프의 한 요소로서 '시노아즈리(中國趣味)'가 있었다. 이것은 17세기 이래의 이국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 직물(織物)· 도기(陶器)·가구류(家具類)의 모티프로서, 또 로코코무늬 속에 삽입되어 국제적으로 대유행을 보았다. 18세기의 궁전과 오테르의 대부분은 시노아즈리 장식에 의해 만들어진 방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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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 바로크 장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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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裝飾畵

17세기 초두에는 후기 마니에리슴의 제2차 퐁텐블로파(派)가 활약하고 있었다. 이 파는 프랑스의 고전주의 경향을 육성한 점에서 간과될 수 없으나 새로운 회화는 1727년에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시몬 베(1590∼1649)에 의해 전하여졌다. 그는 루이 13세의 궁정화가로서 17세기 전반을 리드했다. 그 화풍은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는 명암을 대비케 하는 카라바조적인 것이었으나, 귀국 후에는 함축성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으면서도 밝고 화려한, 다시 말하면 비교적 온화한 바로크풍의 장식화를 그렸다. 제자에는 르브룅·미냐르·르사에르 등이 있었던 점에서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조르즈 드 라투르와 지방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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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方畵家- 지방에서는 카라바조적인 착실한 사실성(寫實性)을 기초로 하는 화가가 활약하고 있었다. 툴루즈의 투르니에, 부르고뉴의 칸탄, 랑그르의 타세르 등이 있다. 그러나 로렌의 조르즈 드 라투르(1593∼1652)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으나 이 시대의 프랑스 최대의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카라바조의 조명법(照明法)에서 암시받은 바가 있다고는 하나 그 빛은 종종 내면을 비추는 듯한 조용함이 충만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의 입체파 화가와 같이 단순화된 성격으로 구성된 인물이다. 그것은 가난한 로렌의 복장을 하고 있으나 당당한 명상자(暝想者)와 같은 중량감(重量感)을 가지고 있었다. 중기의 작품 <성녀(聖女) 이레나와 성(聖) 세바스티아누스>, 후기의 작품 <성탄(聖誕)> 등, 수는 많지 않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로렌지방에는 마니에리스트의 자크 베랑즈(1594∼1638)와

<전쟁의 비참(悲慘)> 등 다작의 판화가 자크 카로(1592∼1635)가 활약하고 있었다.

농민화의 르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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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民畵-

르랑에서 태어나 파리에 정주한 르낭 형제에 의해 풍속화가 발전되었다. 맏형 앙투안(1588∼1648)은 동생들의 좋은 지도자였으며, 둘째형 루이(1593년?∼1648)는 농민생활을 주제로 화면(畵面)을 구성해 수직선과 수평선을 존중하면서 가난한 농민에게서 인간적 존엄을 발견했다. 16∼17세기의 하층민의 풍속화 대부분은 등장 인물의 저열(低劣)한 면을 주로 묘사하여 감상자의 우월감을 만족시켜 주려는 데 저의가 있었다. 막내 아우인 마티외(1607∼1677)는 시민생활의 풍속뿐만 아니라, 신화화(神話畵) 등에도 손을 대었으나 네덜란드 풍속화에 근사한 것이었다.

샹페뉴와 르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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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성장하여 반다이크의 섬세한 화풍을 익힌 필리프 드 샹페뉴(1602∼1674)는 특히 초상화에 있어서 자연스러움과 더불어 내면적인 권위를 표현할 수가 있었으나 그외에는 포르 루아얄의 장세니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딸의 기적적인 치유(治癒)를 감사하여 그린 <봉헌화(奉獻畵)>는 그의 걸작이다.

우스타시 르사에르(1617∼1655)는 이탈리아에는 간 일이 없으나 라파엘로, 코레조의 화풍을 익혀 순결한 종교화 <성 브르노의 죽음> <성 말탄의 미사> 등을 그렸다.

또 파리에는 세바스티안 브르동과 클로드 비뇽과 같이 다양한 화풍을 가진 화가들이 있었다.

고전주의의 완성-푸생과 로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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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主義-完成

기묘하게도 가장 프랑스적인 정신이 회화로 표현되어 후세에까지 프랑스 전통으로서 과시되는 예술로 육성된 것은 프랑스가 아니고 이탈리아·로마에 있어서였다. 그것은 푸생(1594∼1665)과 클로드 즐레, 로랭(1602∼1682)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푸생이 배운 것은 동시대(同時代)의 모든 경향뿐만 아니라 라파엘로 등의 고전적 회화와 베네치아파(派)에서 특히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전기(前期)의 <아르카디아의 목자(牧者)> <플로라의 개선(凱旋)> 등에서는 세련된 화면구성과 베네치아파의 색채에 의해 이미 개성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1640년부터 1642년에 걸쳐 초빙되어 파리로 돌아와 있었으나 궁정의 권모술수에 염증을 느껴 재차 로마로 돌아온 후에는 조용한 자연풍경과 고대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포키온의 매장(埋葬)> <포리페므> <사계(四季)>(1660∼1664) 등으로 나타냈다.

로랭은 교양을 갖춘 푸생에 비하면 보다 더 직관적이어서 명목은 신화나 역사화를 그렸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풍경화라고 하여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라티움 지방의 빛의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아, 거기에 단계성(段階性=graduation)을 부여함으로써 공간의 원근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인상주의의 선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다만 고전주의적 풍경화는 자연 중에서 아름다운 부분을 배합시켜, 거기에 사전적(史傳的) 요소를 가미한, 소위 이상적(관념적) 풍경화로서, 인상주의 풍경화는 아니었다.

르브룅과 아카데미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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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르브룅(1619∼1690)은 로마 유학으로 라파엘로와 볼로냐파 및 푸생과 고대미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1646년에 귀국하여, 콜베르와 루이 14세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회화조각의 왕립 아카데미'(1648년 마자랭에 의해 설치되어 1663년 콜베르에 의해 재편성되었다)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화가로서도 그 형상(形象)과 구성의 교묘함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베르사유 궁전 축조의 총감독으로서 고블랭직(織)·가구·조각 등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장식화(裝飾畵)를 그렸다.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교본(敎本)으로서 고대 조각 르네상스 고전기(古典期)의 거장(巨匠) 푸생, 볼로냐파 등의 예술을 가르치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나타내는 몸짓과 표정도 배우게 하였으나 작가의 감정의 자유보다도 이러한 교본에 복종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건전하지 못한 의미에서의 아카데미즘이 성립되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색채보다도 엄정(嚴正)한 소묘를 중시하며, 동세(動勢)를 억제하고 질서나 권위를 나타내는 피라미드형 구도와 좌우대칭의 역사화·종교화를 그리게 하였으며, 우수한 청년에게는 로마 분실(分室)에 유학시켰다. 이와 같은 교육의 기본형은 금세기에 이르도록 계속되어, 이 시대에도 로랭 드 라이르나 브르동과 같은 자유로운 성격의 화가를 압박하고 또한 후세에도 많은 독창적인 화가와 대립을 이루게 되었다.

푸생파와 루벤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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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생을 중시하는 이지적(理知的)인 푸생파와 색채를 존중하는 감각적 루벤스파는 문학의 신구논쟁과 병행하여 논쟁을 낳았으나, 르브룅 사후(死後) 색채파의 미냐르가 수석(首席) 왕실화가가 됨에 따라 결말이 났다.

이로부터 1715년경까지 프랑스 회화는 18세기로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18세기 미술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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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장중한 베르사유의 예술은 루이 14세가 이전과 같이 현실 생활을 향락할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사교 생활의 중심으로서 재차 파리에 집중된다. 즉 파리의 세련된 생활 가운데 우아하고 경쾌한 로코코 예술이 육성된다. 이 쾌적하고 사랑스러운 예술 양식은 계몽사상(啓蒙思想)과 더불어 전 유럽의 궁정문화(宮廷文化)를 프랑스화하였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의 계몽 군주 요세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女王), 네덜란드·스웨덴·에스파냐 등 모든 나라의 궁정에 프랑스 예술가가 초청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파리가 기왕의 로마와 같이 유럽 미술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18 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제3계급으로서의 시민의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그 기호(嗜好)나 주장이 미술에도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견실한 생활윤리로서의 사실주의, 현실비판으로서의 도덕주의가 출현하여, 한편에서는 강한 정열의 표현이 낭만주의를 예고하면서 마지막 4세기에는 시민혁명의 추세가 고조되어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색채와 감정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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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彩-感情-表情

데생 중시의 푸생파(派)를 누른 색채파는 루벤스나 반다이크 등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 풍부하고 섬세한 색채를 쓰며, 또 그 기원을 베네치아파에서 구했다.

이와 같은 색채와 감각으로 지향하는 풍조는 말하자면 국제적인 경향이기도 하였다. 섭정(攝政) 시대의 주목할 화가로는 앙투안 코와페르(1661∼1722)로 그의 정열적인 색채와 활달한 필치는 <데모크리트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종교화는 점차 쇠퇴하여, 그 내용이 빈약한 것이 되어가나, 그 중에서 장세니스트인 쥬브네가 뛰어난 작품이다.

로코코 예술의 형성-바토와 그 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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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形成-流派바토는 플랑드르에서 갓 편입된 바란센에서 태어나, 젊어서 파리로 나가 이탈리아 희극과 귀족적 환락을 결부시켜 풍요한 색채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페트 갈랑트(fetes galantes:雅宴)>라고 불리어지는 주제인데, 상류사회의 남녀가 숲과 정원에서 향연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풍속화라고 볼 수도있으나, 귀족들의 덧없는 몽상(夢想)을 우아하고 요염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거기에 덧없는 애수의 정이 서려 있다. 대표작은 <큐테라섬에의 출범(出帆)>(1717, 루브르 미술관)이며, 만년의 작품 <제르생의 간판(看板)>과 <지르>에서는 빛의 전동(顫動)에 휩싸인 형체가 주제를 떠난 순수시각의 세계에 일층 접근되고 있다.

루이 15세의 치하(治下) 전반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이런 유(類)의 회화로서, 파테르·랑크레 등이 이를 계승하였다.

프랑수아 부셰(1703∼1770)는 요염하고 단아한 로코코의 장식화가로서 가장 철저한 화가였다. 평이한 색채와 경쾌한 화풍이 로코코풍의 실내에 잘 맞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가 부셰적인 것을 계승하나, 전원화(田園畵)·신화화(神話畵)·역사화·풍속화·초상 등에서도 그 역량을 보여, 공상력의 분방성(奔放性)과 격한 필치 가운데 섬세함도 아울러 지녔다. 낭만주의의 선행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시민생활의 화가들-샤르댕과 그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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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生活-畵家-부셰의 예술은 향락적인 살롱(salon) 생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세기(世紀)의 중엽에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百科全書)>가 출간되어, 계몽사상은 더 한층 보다 넓고 깊게 침투되었다. 발전도상에 있던 시민계급은 그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었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은 그 제일인자였다. 그의 풍속화는 르낭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물화는 데포르트, 동물화는 우드리 등을 발전시켜 높은 예술적 표현에 달하고 있었다. 샤르댕은 왕실어용(王室御用)의 목공사(木工師)의 집안에 태어나 고전학(古典學)의 교양을 갖지 못한 대신에, 손쉬운 실내풍속이나 정물 묘사로 만족하였다. 조심성있는 생활감정과 단순화되어서 고전주의 회화의 건축적 구성법이 구사된 화면, 정교하고 섬세한 질감, 풍부한 색채감, 특히 긴밀한 색가(色價)에 있어서 페르메르를 연상케 한다.

장 밥티스트 그루즈(1725∼1805)는 교훈(敎訓)이 담긴 서민생활을 묘사하였다. 그것은 방탕한 로코코 사회의 대립적 산물인만큼 피상적 성격은 면할 수 없으나 디드로의 미술관(美術觀)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한편 그 표현에 있어서의 감상성(感傷性)에는 낭만주의의 대두를 엿볼 수 있고 역사화에서는 다비드를 예고해 주었다.

초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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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像畵家

18세기 전반에는, 궁정화가인 리고와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1656∼1746)가 있고, 특히 후자는 플랑드르의 난색계(暖色系)의 색조에 있어서 뛰어났다.

16세기∼17세기의 공적 초상화(公的肖像畵)는 모델의 확실한 신분·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통례로, 의례적(儀禮的)이고 부자연스러움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는 모델의 순간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다루기 쉬운 파스텔이 안성맞춤이었다. 모리스 캥탱 드 라투르(1704∼1788)는 그 제일인자로, 페르노가 그 다음가는 파스텔 초상화가였다. 나티에는 모델을 신화적인 우의인물(寓意人物)로 묘사함으로써 호평을 받았으며, 그 밖에도 경쾌하고 재치있는 필치의 수많은 초상화가가 있었다. 여류화가 비제 르브랑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풍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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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景畵家

신고전주의 시대의 선구로서, 고대유적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피라네시의 영화(映畵)에 의해 보급되었으나, 프랑스의 풍경화가도 고대 유적을 그렸다. 조제프 베르네(1714∼1789)와 유베르 로베르(1733∼1808) 등이 이에 속하는데, 미묘한 빛의 계조(階調)가 고대 동경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루이 가브리엘 모로(1739∼1805)는 보다 솔직하게 프랑스의 풍토를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프랑스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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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의 프랑스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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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제르맹 피용과 장 구종의 마니에리슴, 즉 고전주의적 경향이 강한 조각의 전통을 반영하여, 마침내 17세기 후반에 프랑수아 지라르동(1628∼1715)이 베르사유의 정원에 있어서 르브룅의 감독하에서 전아(典雅)한 작풍이 표현·전개한다. 여기에는 고대 로마라고 하기보다 고대 그리스로 회귀하려는 의도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고도 보인다.

앙투안 코와즈보(1640∼1720)는 베르니니의 영향을 받아 한층 동적인 작풍을 보였으나, 고전주의의 테두리를 뛰어 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 남프랑스와 제노바에서 활약하였던 피에르 뷰제(1622∼1694)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서 <크로토나의 밀로>에서는 바로크적인 격렬한 감정의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18세기의 프랑스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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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18세기의 조각은 전시대(前時代)부터 바로크적 경향이 강하였다. 전반(前半)의 쿠스투나 르모완 등이 그러하였고, 후반에는 장 밥티스트 피가르가 바로크의 동적 면과 고전주의의 정적 면을 결부시켜 <아르크르 백작의 묘비(墓碑)>를 만들었다.

러시아에 갔던 파르코네는 소조각(小彫刻)에 능하고, 장 앙투안 우동은 세련된 자세로 퐁텐블로파(派)를 상기시키나 사실적인 초상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프랑스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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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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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프랑스는 공예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였다. 그것은 역대의 재상과 왕에 의해 적극적으로 보호·육성되어서 1667년의 왕립 고블랭직(織) 공장의 개설(開設)은 그 좋은 한 예이다. 앙드레 브르의 가구는 호화로운 장식에 의해서 유명한데 왕의 비호(庇護)를 받아 제작된 것이었다. 18세기에는 공예품의 공장 생산이 점점 발전되어 철직(綴織)·금속세공·도기(陶器) 등의 발달을 보았다. 그러나 목공 가구는 수다한 종류가 만들어져 로코코의 실내를 장식해 주었다. 샤를 크레센, 고드로, 오반, 리즈네르, 자코브 등은 왕실을 위해 수공(手工)이 많이 든 가구를 제작하고, 이는 또한 각국에서 모방하는 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