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17∼18세기의 북구·동구·러시아 미술
카톨릭교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17세기경 오스트리아나 독일과 같이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바르샤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종교건축과 세속건축, 더욱이 그 내부를 장식하는 프레스코화(畵)와 조각에서 이탈리아 양식이 현저하였다. 가령 바르샤바 근교에 있는 빌라노프 궁전(로티에 의하여 1681년에 시공하여 스파티오와 폰타나가 1725∼1733년에 완성함)은 이탈리아의 세속건축(世俗建築)의 영향이 농후하지만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공사 중에서 여러 가지로 변경한 건축을 통하여 민족적 특징도 나타나게 되어 동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궁전의 하나다. 외관상 정면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같이 중앙에 돌출부를 설치하지 않고 이것을 좌우로 배치하여 다양한 인상을 시도한 점이 독특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 시대의 건축은 이탈리아인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카라티는 프라하에 체르닝 궁전과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당을 세우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뛰어난 건축 작품은 거의 이탈리아인이 아닌 카레펜과 빈케분스와 같은 네덜란드인이 세운 것이었는데 그 신교도적인 간소한 형식에의 지향(志向)은 17세기 말엽부터 점차로 프랑스 바로크 건축의 호화스러운 양식을 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도 네덜란드를 통하여 들어온 영향을 볼 수 있으나 이곳에는 고유한 민족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여전히 뿌리깊어 17세기 후반이 되어 비로소 각추상 옥개(角錐狀屋蓋)와 구근상 원개(球根狀圓蓋)를 가지는 장식성이 농후한 양식에서 사엽상(四葉狀) 플랜 위에 사각형이나 팔각형의 층을 축소해 가면서 쌓아올리는 나르이시킨 양식으로 옮겨가서 러시아의 바로크화(化)가 이룩되게 된다. 두부로비치의 <마리아 공현(公現) 교회당>도 이 양식에 의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때까지 경시되어 왔던 조각도 교회 건축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네덜란드에 있어서는 스타니슬라브 아우구스타스 포니아트브스키의 대불(對佛) 정책에 발맞추어 프랑스 로코코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났지만 영국식 정원도 유행하였다. 또한 팔라디오 양식에 의한 라치엔키 궁전과 같은 고전주의의 작품도 눈에 띈다. 스칸디나비아는 이 세기 초엽의 20년간을 전쟁으로 기진맥진하였으나 그후 미술활동이 활발하게 되어 건축에서는 아마리엔볼타 및 프레드릭 교회당을 건립한 덴마크가 지도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여기에는 프랑스보다 독일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코펜하겐의 아카데미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발생지이기도 하였다. 유명한 <구스타프 3세 대관식>을 그린 카를 구스타프 피로(1711∼1793) 외에 니콜라이 아브라함 아빌토갈(1743∼1809) 및 위언스 위엘(1745∼1809)도 이곳 출신이다. 스웨덴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이 강하였고 고전주의자 울리크 발트뮐러(1751∼1811)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을 그렸다. 런던에서 레놀즈와 게인즈버러의 영향을 받았던 프레드릭 폰 브레다(1759∼1818)의 고상한 초상화도 뛰어났다. 이와 반대로 페타 헤르베르크(1746∼1816)는 농민 출신으로서 독특한 팬터지가 풍요로운 종교화를 만들었다. 불행한 사회정세가 계속되었던 노르웨이에는 뚜렷한 예술활동은 없었다. 러시아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강인한 유럽화(西歐化) 정책을 시도하였으며 그 동안에 이탈리아의 트레치니와 프랑스의 르 블롱을 초청하여 유럽화된 건축을 많이 세웠다. 18세기 중엽에 완성된 라스토렐리에 의한 <겨울의 궁전>은 바로크 양식과 러시아 고유한 양식의 훌륭한 융합을 보여 준 것으로서 특히 유명하다. 회화에 있어서도 많은 화가들이 1716년 이후 성상화(聖像畵)의 전통에서 벗어나 유럽의 화풍(畵風)을 배우기 위하여 이탈리아·프랑스·독일 등지로 유학하였다. 새로운 궁전의 수요에 응하여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고 이반니키티시(1688∼1741?)와 알렉세이 안트로프(1716∼1795)이외에 특히 D.G.레비키(1735∼1822)가 특출하다. 레비키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1758∼1802)는 부인상(婦人像)을 독특한 분위기로 그렸고 또한 신비주의적 정열을 다하여 많은 종교화를 만들었다. 풍경화에는 세미온 스체드린(1745∼1804)과 테오도르 알렉세예프(1753∼1824)가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