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플랑드르 미술

플랑드르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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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繁榮

14세기 초부터 대기근(大飢饉)과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농촌은 황폐하였으며, 십자군의 원정에 의하여 촉발된 국제적 및 국내적인 상업활동의 발전은 봉건제도를 근저에서부터 동요시켜 왔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유럽에서 제일 먼저 도시가 발달한 저지지방(네덜란드)에서는 먼저 플랑드르 지방에 이어서 브라반트 지방이 번영했다. 브뤼쥐간·브뤼셀 등지는 모직물공업을 기초로 하여, 이미 13세기 이후 대륙 내부의 인근은 물론이며 스칸디나비아·러시아·에스파냐·베네치아와 제노바를 거쳐 동양과도 연결하는 내륙과 바다의 교통요지로서, 그 지세의 이점을 이용하여 각지의 물자를 집산 교역함으로써 번창하고 있었다. 시정(市政)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봉건적 가문인 귀족과 부유한 상류계급의 시민이었으나, 13세기 말부터 수공업자 등 하층 시민에 의한 민주화 투쟁이 활발하게 되어 도시 귀족이 봉건적 지배와 결탁하는 것을 단절시켜 도시의 자유를 확대해 나갔다.

14세기와 15세기에 강화되어 간 것은, 도시의 발전에 촉진된 상공업의 확대로 인하여 형성된 통일적 시장이라고 하는 중앙집권화의 경제적 기반과, 사회 변혁의 요구를 내포하여 때맞추어 불을 뿜는 하층 시민과 농민의 투쟁을 통하여 지배계급이 통감하게 되는 강대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입각한 것이다. 프랑스 동부를 점유한 부르고뉴 공국(公國)은 필립 대담공의 시대에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 그녀 부친의 사망 후 플랑드르도 영유하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가로놓여진 지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하였다. 필립 선량공(善良公)은 수도를 디종으로부터 번영을 자랑하고 있던 플랑드르의 브뤼쥐로 옮겼다. 그는 상업활동의 안전과 봉건 제후들의 간섭을 배제할 것을 약속하면서 플랑드르의 각 자유도시의 경제적 독점권을 약화시켜 통일적지배에 성공하였다. 미증유의 번영을 맞이한 플랑드르의 부(富)를 배경으로, 필립 선량공의 궁정을 중심으로 예술적 크리마가 형성되어, 플랑드르의 땅에서 플랑드르의 사람에 의한 예술이 전개되어 간 것이다.

1467∼1477년에는 샤를 호담공이 통치하였고 1473년 멧헤렌에 수도를 정하였다. 1477년 마리 드 부르고뉴(1482 沒)는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저지지방(低地地方)은 합스부르그가(家)의 지배가 성립되었다. 필립 도트리시는 에스파냐의 계승자 판나 드 카스티유와 1496년에 결혼하였다.

15세기의 플랑드르는 번영과 안정 속에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반 에이크에서 비롯되는 예술적 전통이 형성되었다. 자유도시의 충만한 활력과 현실적인 재간과 사치스러운 미감각이 만들어 낸 예술은 시간적인 본성을 지닌 시민들에게 합당하였고 회화적인 감성이 모든 조형활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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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은 도시의 중심부에 집중하여 빈번하게 세워진 시장과 종루(鐘樓)와 시청사이다. 이들 시민적 공공건축에 있어서는 고딕적인 정신이 16세기까지 견지되었다. 교회당과 더불어 화염(火焰) 모티프로 장식되고 그것이 플랑드르 특유의 급경사의 지붕 및 박공 지붕과 결합하고 있다.

플랑드르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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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金箔)을 발라 다채색(多彩色)이 된 조각 제단은 브라반트 지방의 아틀리에에서 매우 독창적인 것이제작되었으며, 1480년 이후에는 대량으로 생산되어 프랑스·독일·스웨덴 등지에도 수출되었다. 설교단과 기도석 그리고 천개(天蓋) 등 교회의 수요품에도 플랑드르 목공사(木工師)의 장식적 감각이 발휘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디난이나 투르네를 중심으로 하여 공업적으로 행해지던 주조 기술은 이 세기에 있어서는 브뤼셀 공인(工人)의 손으로 예술성이 부여되게 되었다. 저지지방(低地地方) 북부에 있는 일반적인 경향으로서 장식조각과 조상(彫像) 그리고 묘비 등 기념비에 온전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플랑드르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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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金時代)

현실의 정확한 관찰에 입각하여, 실생활에 뿌리박은 재질감의 정확한 묘사는 화가가 참을성 많은 수업을 거쳐 자기 것으로 만든 세밀한 기능의 성과이다. 재질의 밀도와 솜씨의 교묘한 묘출(描出)을 가능하게 한 것은 15세기의 화가들에 의한 빛의 발견이다. 빛의 직접적인 체험에 입각한 재현적(再現的) 효과를 제단화(祭壇畵)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회화 속에 그리면서 차츰 현실에 눈을 떠, 지상적 공간과 인간 바로 그것에 대하여 시선을 쏟고 있다. 밝은 지상에서 그림 물감의 투명성을 존중하면서 정성스레 그리는 기법은 빛의 반영과 질감을 정확하게 그려 냈다. 그것은 15세기의 황금시대를 밑받침하는 것이며 플랑드르의 전통적인 회화적 체질이다. 이것은 아마유(亞麻油)와 수지(樹脂)를 도입한 유채화법에 의하여 처음으로 실현 가능한 마티에르이었으며, 반 에이크 형제가 발명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나올 만큼 플랑드르파(派)의 창설자와 깊이 맺어진 기법이다. 대체로 그들 이전에 벌써 이 기법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술적인 완성에 노력하여 오히려 예술적으로 더욱 진척시킨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반 에이크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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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Eyck Hubert(1366∼1426), Jan(1390∼1441)

형인 위베르의 존재에 관해서는 의론이 분분하여 상세한 점은 불명하지만, 아마도 강의 성 바본 대성당에 있는 <신비한 새끼 양> 제단화의 제작에 최초로 손을 댄 화가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동생인 얀은 마스트리히트 근처에서 태어나 1422∼1424년에 덴 하그의 홀란드공 아래에 있었다. 필립 선량공(善良公)의 궁정화가로서 1425년 리일에서 살면서, 사절(使節)로 아라곤과 리스본에 간 적도 있다. 1430년부터 브뤼쥐에 정착하였다. 형 위베르가 그리다가 남겨 둔 <신비한 새끼 양> 제단화를 1432년에 완성하였다. <아르놀피니 부처상> <재상 롤랑의 성모> <판 델 팔의 성모> 등, 깊고 투명한 색감과 세밀하고 극명한 묘출력(描出力)을 과시하고 있다.

로기에르 반 데르 와이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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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ier Van der Weyden(1400?∼1464)

투르네 태생으로 로베르트 캄핀에게 5년 동안 배운 후 1432년 투르네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게 되었으며, 1435년에는 브뤼셀의 공화가(公畵家)가 되었다. 1450년 이탈리아에 여행을 한 적도 있다. 주요 작품으로 <십자가(十字架) 강하(降下)> <성모자를 그리는 성 누가> 등이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보다 극적인 표현이 풍부한 인체를 그렸으며, 많은 제자를 통하여 플랑드르파에서 한 유형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와 깊은 친교를 가진 화가로서는 플레말로의 화가가 있고, 그의 작품들은 로기에르가 젊었을 적에 그린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의 모방자라 하기도 하며 또는 로기에르의 스승 캄핀과 동일시하는 여러 설이 있다. 디종의 <하강탄생(下降誕生)>이 대표작이며, 중세 말기의 고딕 양식을 지니고 있어서 낡은 타입과 15세기의 청신한 스타일을 잇는 위치에 있다.

디르크 바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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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k (Thierry) Bouts(1415?-1475)

하를렘에서 출생. 후에 브뤼셀로 옮겨 로기에르에게 배웠다. 1457년 이후 루벤에 정주하여 그는 그곳의 성 피에르 대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로기에르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하며, 시세에 맞추어 청신하고 정적인 세계를 그려냈다.

브뤼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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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에이크의 예술을 계승한 페트루스 크리스투스(Petrus Christus),와 라인지방 출신으로 후에 이곳에서 안주한 한스 멤링크(Hans Memling, 1435∼1494)를 배출하였다. 크리스투스는 저지지방(低地地方)의 북부(네덜란드) 출신으로 브뤼쥐에서 얀 반 에이크에게 배워 얀의 예술이 가진 신비성을 특별히 계승하였다.

멤링크는 브뤼쥐의 이피탈산장이나 유복한 시민과 외국 귀족을 고객으로 삼고서 신의 자애(慈愛)를 구하는 '사랑의 화가'로서 우미한 화풍이 유명하였다.

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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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스 반 바센호프(Joos van Wassenhove:후에 이탈리아의 우르비노로 옮겨 갔다)와 <폴티날의 제단화(祭壇畵)>를 제작한 위고 반 데르 구스(Hugo van der Goes, 1440?∼1482)는 모뉴멘털한 취향이 넘치는 형태를 애호하였다. 후자는 판 만데르에 의하면 브뤼쥐에서 태어났다고 전하지만, 아마도 간에서 출생하여 1467년에 간의 화가조합에 등록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1475∼1476년에는 그 길드의 이사직(理事職)에 있었다.

네덜란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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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렘에서 반 에이크와 같은 무렵의 화가인 오우바테르(Ouwater)와 그의 제자 헤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Geertgen tot Sint Jans) 등이 일으켰다. 이어서 스헬터헨보스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활약한 히에로니무스 보시(Hieronimus

Bosch)는 초현실주의 선구가 되는 <역세계(逆世界)>를 그려냈다. 1504년 필립 미남공(美男公)으로부터 <최후의 심판>의 주문을 받는 등 생전에도 명성이 높았다. 그 외에 <여물 차> <우자(愚者)의 배> <성 앙투안의 유혹> <쾌락원(快樂園)> <십자가를 지다> 등 봉건 지배의 틈바구니에 생긴 혼란과 종교 개혁의 불꽃 속에서 신의 질서와 인간적인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이미지를 전개하였다.

게라르드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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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렘에서 수업하고 15세기 말엽에 브뤼쥐로 가서 그곳 전통의 최후를 장식한 게라르드 다비드(Gerard David)는 풍경묘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음 세기를 예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세례> <밀크 수프를 먹이는 성모>가 그의 대표작이며, 그후 몬스 출신의 얀 프로포스트(Jan Provost)는 브뤼쥐에서 대두하는 안트워프파(派)의 영향을 받고 있다.

미니어처·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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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선량공(善良公)과 샤를 호담공이 애호한 미니어처는 1480∼1530년에 걸쳐 간과 브뤼쥐에서 성행하였다. 목판화도 옛날부터 행하여졌고, 이름까지는 소상하지 않지만 많은 동판 화가도 활약하여 16세기에 성행할 소지를 만들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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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공예의 전통은 존속하고 있었으며, 태피스트리 부분은 모직물 공업이 번창한 이곳의 특기이기도 하였다. 1390년 이후에 아라스에 대항해서 투르네가 대두, 1450년경에 그 세(勢)를 얻었으나, 이어서 1475년경부터 브뤼셀이 보다 세련된 기술을 채용하게 되어 회화적 표현의 경향을 강화시켜 갔다.

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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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지방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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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地地方-

16세기는 격동의 세기였다. 브뤼쥐의 항구는 토사(土砂)로 얕아져서 쇠퇴하게 되어, 안트워프가 대신하여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였다. 암스테르담도 발달하였다. 국내의 모직물공업이 쇠퇴하고 사회 계층 사이에 세력의 변동이 일어나고 그 변혁의 기운과 아울러 종교개혁의 파동이 중첩되었다.

간 출생의 샤를 도트리시는 에스파냐로 가서 카알 5세가 되고, 다음의 필립 2세는 엄격한 원격통치(遠隔統治)로 인하여 저지 지방 주민의 반감을 샀다. 카톨릭적인 스페인 왕권으로부터의 해방운동은 종교적 위기와 깊이 관련하여 프로테스탄트(新敎徒) 이탈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그에 대한 1567∼1573년 알바공(公)의 탄압 등. 1584∼1585년에 드디어 에스파냐 지배하에 머문 남방의 10대주(플랑드르)와 자치를 추구하는 북방의 7개주네덜란드 연방공화국=홀란드)와의 분열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동향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이기도 하였다.

인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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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主義(위마니슴)

중세적 교회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의 자유와 과학을 지향하는 인문주의가 퍼져 갔다. 에라스무스(1467∼1536)의 지도하에 루벤·암스테르담·안트워프 등 여러 도시에 인문주의자들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고대의 학문과 예술 및 이탈리아의 새로운 예술관을 북쪽에 있는 이 지방에 도입하는 데에 큰 힘을 기울였다.

플랑드르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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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建築

플랑드르에서는 구조 자체에 고딕 양식을 지속하면서 건축 장식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받아들였다. 1540년경 고딕 플랑브와이앵의 장식 과잉 경향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처음에 고딕과 프랑스 르네상스의 절충된 양식이 출현하였으나(리에쥐의 司敎 궁전 등), 1550년 이후 이탈리아 건축가의 건축론이 안트워프에서 출판되자 직접적으로 이탈리아와 연결되는 건축이 출현하였다. 안트워프에서 코르넬리스 플로리스(Cornelis Floris 또는 De Vriendt, 1514∼1575)가 시청사를 건립(1561∼1565)했다. 이탈리아적 요소와 재래의 플랑드르 요소(지붕 창과 박공이 있는 높은 지붕)의 흥미있는 융합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에서는 르네상스가 더욱 늦었다. 덴 하그시(市) 청사(1564)는 안트워프 청사의 영향이 있고, 라이덴시 청사는 이보다 더 늦어 1597년에 건립되었다. 헨드리크 데 케이세르(Hendrik de Keyser, 1567∼1621)는 암스테르담에 수많은 공공건물과 교회당을 세웠으며, 후자는 종교개혁의 요구에 응한 집중식 플랜을 채용하였다.

플랑드르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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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고딕 양식이 풍부한 장식성을 지닌채 오랫동안 존속하였으나, 이윽고 먼저 모티프가 다하여 형태 전체도 이탈리아화(化)하였다. 마르그리트 도트리시 통치하에 최초의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멧헤렌 궁정의 미감각을 반영하여 <브로우의 묘>가 제작되었다. 브뤼쥐에서는 이 도시 상인들이 의뢰한 미켈란젤로의 <마돈나>가 1506년에 이탈리아에서 도착하여 플랑드르 조각가 교본이 되었고, 이탈리아니슴은 메츠 출신인 잔 몬(J.Mone), 자크 뒤브루크(J.Dubroeucq)에 의해 진전되었다. 건축가 플로리스는 조각에도 활약하여 안트워프시 청사를 장식하여 마니에리슴을 대표한다. 판화에 있어서는 플로리스의 고대풍(古代風) 장식 스타일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제국(諸國)으로 퍼져 갔다.

네덜란드 조각도 늦기는 하였으나 거의 같은 과정을 밟았다. 폴로니아 출생의 빈치도르(Vincidor)는 부르고뉴풍과 이탈리아풍을 절충하였고, 위트레흐트에서는 플로리스의 양식에 가까운 우미한 양식이 콜레인 드 놀르(Colijn de Nole)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플랑드르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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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안트워프가 플랑드르파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차차로 이탈리아니슴이 침투했다. 쿠엔틴 마사이스(Quentin Metsys), 요스 판 클레브(Joos vam Cleve), 풍경화가 파티니르(J.Patinier)가 16세기의 가장 빠른 대표적 화가였다.

네덜란드파의 야콥 코르넬리츠 판 암스테르담(Jacob Cornelisz van Amsterdam), 루카스 판 라이덴(Lucas van Leyden, 1494∼1533) 등과 더불어 과도기에 있어서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처음 궁극적 환경에 파급된 인문주의적 예술은 멧헤렌과 브뤼셀에서 판오를레이(Van Orley 1488경∼1536), 마뷔스(Mabuse)라 통칭되는 고사르트(Gossart)와 네덜란드 사람인 모스타르트(Mostaert), 라파엘로의 제자인 코크시(Coxcie), 그리고 북에도 네덜란드의 낭만주의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스코렐(1495∼1562)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브뤼쥐 출신인 브론델(Blondeel)은 플랑드르 르네상스의 장식적 판타지를 회화화(繪畵化)했으며 퐁텐블로파(派)의 영향하에 있었던 얀 마치스(Jan Matsys) 등의 마니에리스트 계열에 들어간다. 로마는 마니에리슴을 만들어내어 하르렘·리에쥐·안트워프(프랑스 플로리스) 등지에 화가를 배출하였다. 16세기 후기 30년 간에는 플로리스의 우수한 제자들과, 하르렘과 위트레흐트의 화가들이 절충주의의 방향을 취하여 네덜란드 화가들이 국제적으로 활약하였다.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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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像畵

16세기에 이 장르에 속하는 전문 화가가 출현하였다. 경비대의 집단 초상(도우렌스토켄)을 창시한 코르넬리스 케텔(Cornelis Ketel)과 명성을 내외에 떨친 위트레흐트의 안토니스 모르(Antonis Mor=Antonis Moro, 1519∼1576)가 있다. 17세기에 이 영역은 점점 더 수요가 높아져 독특한 전개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주의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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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實主義-傳統

플랑드르의 현실주의적 계보 속에 페테르 브뤼겔(Peter Brugghel)이 나타났다. 안트워프에서 수업하고 이탈리아로 여행(1552)하며 거기서 크로비오를 가끔 방문하였다. 지리학자 오르텔리우스와 프란탄 인쇄소장 등 인문주의자들과 교우하며 안트워프에서 활약하다가 1563년에 브뤼셀에 옮겨왔다. <아이들의 유희(遊戱)> <바벨탑> <눈 속의 사냥꾼> <수확(收穫)> <축혼(祝婚)의 연회(宴會)> <백성들의 춤> <맹인(盲人)들> 등 모두가 농민의 생활에 뿌리 박은 대지의 시(詩) 를 그려낸 것이다. '지옥의 브뤼겔'이라 일컬어지던 아들인 페테르와 손자인 페테르 3세는 노(老)브뤼겔의 작품을 모방하였다.

안트워프파(派)에 많은 풍속화가가 배출되어, 북방의 하르렘과 암스테르담에서도 다음 세기에 전개되는 풍속화의 성행에 실마리가 되었다. 풍속화는 대체로 플랑드르적인 장르로, 신화나 종교적 주제의 배경에 독립하여 순수하게 추구하게 되었다.

플랑드르의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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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版畵

16세기는 판화의 세기였다. 네덜란드의 뷔랭 조각의 명수(名手)인 루카스 판 라이덴은 뒤러의 영향 아래 섬세한 판화를 제작하였다. 플랑드르에서는 페테르 브뤼겔의 작품을 편집한 J. 코크와 같이 코르넬리스 메치스(C.Metsys)와 펠레르트(D.Vellert)가 동판화(銅版畵)를 제작하였으며, 브뤼겔의 그림을 가지고 판화를 만든 사람은 이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다. 안트워프에 있는 프란탄 인쇄소에 전속되어 삽화(揷畵)를 하였던 판화가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판화는 플로리스의 의장(意匠) 등을 유럽에 유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 마니에리스트의 양식이 퍼진 것도 판화를 통한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하르렘 판화가인 헨드리크 골치우스(Hendrik Goltzius)가 뛰어났고 다른 판화가와 마찬가지로 풍경화의 판화도 제작하였다.

플랑드르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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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

투르네의 태피스트리는 1550년경까지 명성이 높았으나 그 후에는 브뤼셀 직물이 다른 곳의 그것을 눌러 번창하게 되었다. 1516년경을 경계로 하여 전통적 기법(예를 들면 <엘켄발트 이야기>)이 변화를 보게 되었다(라파엘로의 데상인 <사도행전>). 판 오를레이와 페테르 코크, 판알스트 등이 이탈리아적인 구도의 명쾌함과 플랑드르적인 정확한 묘출을 결합하여 우수한 장식적 감성을 보여 주었다(판 오를레이의 <막시밀리안의 수렵> 등). 1550년 이후에는 플랑드르의 타피스리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에서도 활약하였다. 메달·귀금속·공예·도자기·가구류의 분야에도 그들의 의장(意匠)에 이탈리아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오는 메티에의 높은 수준에 입각하여 표현하고 있었다.